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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생존 기록
기록 생활
  • 환경과조경 2024년 7월

1 나의 기록 생활과 기록 루틴 대부분은 과업 일정, 업무 내용, 아이디어, 개인 생활 등 조경 작업과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대로 말하면 기록하지 않으면 작업과 생활 유지가 어려울 만큼 건망과 망각이 심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필수 행동이 기록인 것이다. 즉, 기록은 나의 생존 또는 존재 그 자체다.

 

인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시와 소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 우주의 원리를 밝히는 수학 공식과 같은 기록이 아니라 오래전 인류가 살기 위해했던 사냥, 채집, 은폐·엄폐, 이동, 수면 등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생존 그 자체로서 기록 루틴은 단순하다. 생각나는 그 즉시, 일정이 잡힌 바로 그때 그곳, 협의한 내용 그대로,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내용이 틀림이 없이 공유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기록한다. 하지만 운전, 보고, 회의, 미팅, 협의, 현장, 통화 등 즉시 기록할 수 없을 때는 따로 시간을 내 기억을 더듬으며 정리한다. 그만큼 정확할 수 없으므로 운전, 미팅 중의 통화 내용은 상대방에게 메신저나 메일로 정리해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다소 미안하더라도 부탁하는 편이다. 잘못 기억하거나 약속을 못 지키는 것보다는 낫다.

 

업무와 관련된 기록 루틴은 생존 기록과 다르게 복합적이다. 업무와 관련된 메일과 카카오톡 대화, 보고 자료, 설계 도면, 공사 내역서, 디자인 노트 등을 꼼꼼히 되새기면서 일정과 업무 내용을 정리해야 틀리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 있다. 업무 내용 크로스 체크를 위해 통화나 대화 등이 필요할 수 있으므로 사무실 가운데 회의용 테이블에서 수기로 번호를 매겨가며 기록한다. 하지만 이 루틴도 늘 지키기 쉽지 않다. 회사 운영과 개인 영달을 위해 다양한 성격의 일을 하다 보니 루틴이라는 안정 상태를 유지하는 행위가 사치일 만큼 바쁜 시기와 시점이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과 관련된 기록은 미루고 미루다 늘 막바지에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름대로 늘 새롭고, 이전의 나와는 달라야 하고, 주어진 대상지는 어렵고, 기간은 늘 촉박하다. 그래서 최대한 최신 정보를 습득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결정을 하다 보니 늘 막판에 가서야 개념에 맞는 디자인을 정하고 형태를 잡는다. 미리 잡고 나서도 막바지에 바뀌는 경우가 있다 보니 디자인 결정을 함부로 미리하지 않도록 루틴을 만든 것이다.

 

답변의 끝에서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기록과 루틴이란 단어가 불편하고, 흔쾌히 원고 청탁에 응했지만 몇 주 동안 글쓰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를 답을 하면서 찾게 됐다. 나에게 기록이란 생존과 관련된 것이기에 다루기 어려웠던 것이다. 루틴이란 안정된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기 위한 행동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늘 불안정한 상태와 관계를 이겨내야 하는 나에게는 아주 어려운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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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들어 쓰는 디자인 노트

 

 

기록물을 아카이브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한 건 아니지만 기록을 하다 보니 아카이빙된 것들이 생겨났다. 그러다 기록물의 가치를 알게 됐다. 별거 아니더라도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서 설명되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기록물 종류는 직접 만들어 쓰는 디자인 노트, 모든 일정이 담긴 종이 캘린더, 빠질 수 없는 인스타그램, 디자인 작업의 출발이자 끝인 옐로 페이퍼, 늘 지니고 있는 스마트폰의 메모장, 총 다섯 카테고리다.

 

첫 번째, 직접 만들어 쓰는 디자인 노트다. 회사 이름을 붙여 ‘라디오 노트’라고 부른다. 조경 생활 초기부터 수년간 사서 쓰던 다양한 노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만들어 쓰게 됐다. 원하는 노트 조건은 간단했는데, 선이 없고, 크기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두께가 두꺼운 듯 안 두꺼워야 했다. 간단한 조건 같지만 이를 충족하는 노트가 어디에도 없었기에 회사 근처 제본 집에서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쓴다. 노란 빛 나는 미색 A4 용지 100장 정도를 레자크 재질의 표지로 열 제본하면 두께 1cm 정도가 되는데, 이를 B5 크기로 재단해달라고 한다. 이 노트는 각종 업무 와 업무 순서, 상세 스케치, 보고 내용 등 조경 업무 전반을 다 기록하는 아카이빙 자료다.

 

두 번째, 업무·개인 일정을 담은 종이 캘린더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캘린더와 일정 관련 애플리케이션은 쓰지 않는다. 손과 펜으로 종이에 직접 적어야 그나마 그 상황이 이미지로 남아 기억되는 편이다. 애플리케이션에 쓰면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정을 종이 캘린더에 적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옮겨가지 않은 유일한 기록이다. 덕분에 바쁜 삶이 시각적으로 그대로 인식돼 바쁜 삶이 말뿐 아니라 실제임을 주변에 쉽게 증명할 수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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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펜으로 종이에 직접 적어야 그 상황이 이미지로 남아 기억되는 편이라 종이 캘린더에 모든 일정을 적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옮겨가지 않은 유일한 기록이다.

 

 

환경과조경 435(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김지환은 영남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씨토포스와 스튜디오 엘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조경작업장 라디오의 대표다. 스스로를 작업반장, 설계공이라 칭하듯, 설계와 시공 사이의중재자(신호등)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해 그 관계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사회적 대기업을 만들어 도시 내 모든 디자인을 손대고 싶어 하는 야망과 유명 건축가와 조경가의 작업을 보며 절망과 환호를 즐기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믿는다. 때론 못다 한 말을 해시태그로 덧붙이기도 한다. #라디오에이스 #정원작가 #은근히낯가려요 #조경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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