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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느린 걸음의 풍경
  • 환경과조경 2024년 7월

아버지의 골방 서재는 일종의 분더카머(wunderkammer)였다. 그 방에는 집안 조상의 내력이 적힌 족보를 읽는 게 취미였던 아버지가 신줏단지 모시듯이 보관했던 족보부터 역사, 풍수지리학, 자서전 등 아버지의 취향이 담긴 헌책이 장르와 연도별로 구분돼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매해 쓰셨던 일기 노트들도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었는데, 아버지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적으셨다. 방학 숙제였던 일기와 독후감을 벼락치기로 쓰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모습은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방대한 책을 관리하는 성실한 사서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분더카머의 장인이었지만, 나는 중도 포기의 달인이었다. 절세 무공을 가진 고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실력에 미치지 못해 좌절하는 무협지 주인공들처럼 나도 분더카머를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무언가를 수집하고, 기록하며 나만의 취향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했지만 늘 실패했다. 해마다 문구 편집숍에서 새로 나온 노트와 필기구를 사며 필사 노트를 만들고, 일기도 꾸준하게 적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에 큰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초야에 묻힌 유배지의 선비처럼 모두들 쓰이지 못한 채 서랍 속에 고이 보관됐다. 읽는 책보다 읽지 않는 책이 너무 많아서 가스 검침하듯이 주기적으로 중고 서점에 책을 팔기 바빴다.

 

그래서 성실한 수집가의 기록에 괜히 한 번 더 눈길이 갔다. 잡문집 『무라카미 T』(2021)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티셔츠 수집 무용담이다. 자신의 이름과 동명인 시에서 주최하는 마라톤에서 받은 티셔츠, 하루키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팬이 디자인한 티셔츠 등 티셔츠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내며 자신의 티셔츠 취향을 소개한다. 이러한 티셔츠 수집은 하루키에게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마우이 섬에서 1달러 주고 산 토니 타키타니(Tony Takitani)라는 영문이 적힌 티셔츠에서 모티브를 얻어 동명의 단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

 

하루키처럼 이야기를 국수 가락 뽑듯이 솜씨 좋게 술술 풀어낼 수 있는 대단한 문학적 재능이나 통찰, 아름다움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특별한 미감은 없지만 소소하더라도 나의 일상과 삶에 조금이나 영감을 제공할 수 있는 수집은 없을지 궁리하다가 공간 일기를 써보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이러한 다짐을 하게 된 건 『건축가의 공간 일기』(2024) 덕분이다.

 

이 책은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공간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가 30여 년간 공간을 둘러보며 일기처럼 남긴 글과 그림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펜을 바지런히 움직이며 손으로 그날의 감정을 기록하고 공간을 더 정확하게 묘사하고 그리기 위해서 유심히 관찰하는 행위를 꾸준히 해왔다. 또한 유명한 공간보다 제철 음식을 사러 가는 망원시장 등 자신의 일상과 생활에 스며들어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활 속 공간이 주는 위로와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 들려주며 생활 속에서 좋은 공간을 발견하고, 일기로 남기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좋은 공간에 나를 두고, 공간이 건네는 목소리를 들으면 우리의 삶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 어쩌면 좋은 공간을 찾아가는 것도 수단에 불과할지 모른다. 인생 공간을 발견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바쁜 시대에 무언가를 경험하며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결국 공간 일기란 삶이라는 사건을 이해하는 배경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르겠다. 오롯이 그 사건 자체로만 바라보면 오해나 왜곡이 있을 수 있지만, 사건을 둘러싼 배경을 이해하고 바라보면 그 사건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이해하려면 어쩌면 잠시 시간을 내 삶을 둘러싼 배경에 대해서 찬찬히 바라볼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의 생활 반경 속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과 공간을 소소하게 기록하고 싶다. 먼 훗날 이 기록들이 모여 하나의 분더카머가 될 수 있다면 그 방 앞에 ‘느린 걸음의 풍경’ 이라는 명패를 가지런히 놓고 싶다. 중도 포기 달인의 소박한 소망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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