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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지금 우리의 관심 영역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 환경과조경 2024년 7월

또 정원 생각을 하게 된 건 한 영화 때문이었다. 스포일러를 좋아하지 않아, 미리 어떤 정보도 눈과 귀에 들이지 않으려 한 탓이다. 물론 영화 소개글 한가운데 정원이라는 단어가 떡하니 있기는 했다.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 과연 악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가?” (각주 1)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조나단 글 래이저, 2024).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거다. 제목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존’을 영역(지역, 구역, 지대 등)으로 바꾼다면, ‘인터레스트’에 대응하는 단어로는 무엇을 고를 것인가. 우선 제목이 지칭하는 땅의 정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격리한 땅이다. 수용소 주변 지역의 농지를 폴란드 지주에게서 몰수하고 그 빈 땅에 수용소의 포로들을 노역시켜 이득을 취득했다. 따라서 인터레스트를 나치 독일이 취한 금전적 ‘이익’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러닝 타임 내내 귓가를 울리는 굉음, 하늘로 솟는 연기, 늦은 밤에도 폭력적으로 이글거리는 시뻘건 불길을 없는 것처럼 여기며 관심 밖에 두(려)는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인터레스트 위로 ‘관심’이라는 단어가 겹쳐진다.

 

회스는 실존 인물로, 4년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소장으로 일했다. 그의 가족은 수용소 인근 사택에서 삶을 꾸렸는데, 이 사택은 수용소와 담 하나를 두고 맞붙어 있었다. 영화는 수용소 내부의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상하게 한다. 이는 헤트비히가 그 지옥의 땅 옆에서 낙원 같은 삶을 일구어 나가는 모습과 병치되며, 악이 얼마나 평범하고 그래서 더 끔찍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헤트비히는 이 사택에서 유토피아 같은 정원을 가꾼다. 고요에 빠질 수 있는 온실, 아이들은 물론 인근 이웃을 초청해 파티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수영장, 고즈넉한 분위기의 퍼걸러와 의자가 있다. 파스텔 톤과 원색의 식물이 넘실거리는 잔디를 배경으로 자란다. 그는 친정 엄마에게 이 정원을 완성하기까지의 여정을 무용담처럼 풀어놓으며, 담벼락 너머가 보이지 않도록 넝쿨 식물을 기르겠다고 말한다. 결국 이 정원은 자신의 관심 영역에서 수용소의 존재 자체를 밀어내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회스 역시 자연을 일종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수용소의 미관이 훼손되니 라일락 관목을 과도하게 꺾지 말라는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그의 얼굴이 지극히 차분해서 끔찍했다.

 

하지만 정원은 결코 모든 참극을 가리지 못한다. 치솟는 연기와 불길을 틈 없이 가리고, 비명 소리를 완벽히 차단할 담과 넝쿨이 있을 리 없다. 강에서 자녀와 함께 물놀이를 즐기던 회스는 위쪽에서 잿빛 물이 내려오는 걸 발견하고는 기함한다. 강은 수영장 속 물과 달리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보트에 아이를 태우고 돌아오는 회스의 표정은 드물게 초조하다. 비가 내려 분 강물이 거세게 그 보트를 떠밀며 묻는 것 같았다. “지금 우리의 관심 영역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각주 2)

 

정원은 생활 영역에 자연을 들이려는 시도에서 출발한 공간이다. 자연을 닮았지만 아주 개인적인 공간이며, 대부분 외부로부터의 시선이나 간섭을 차단하고 아늑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드는 데 집중 한다. 지난 2월, 김동훈과의 인터뷰(각주 3) 녹취록에서 삭제된 내용 중 하나는 ‘정원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정원은 사적 녹지로 다루어지기에 경관법은 있지만 정원법이 따로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아파트로 점점 빼곡해지는 도시가 내세우는 정원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꾸 궁금해진다. 단순히 정원이 많은 도시를 말하는 것일까. 많은 시민이 개인 소유의 땅 중 일부를 정원으로 만들도록 독려하는 도시, 혹은 공공이 조성한 정원이 많은 도시를 추구하는 것일까. 만약 공공이 조성한 정원을 공공 정원이라 명명하려 한다면, 그 관리의 주체는 누가되어야 하며 공원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각주 4)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싶어 덧붙이자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정원의 의미와 가치를 들여다보는 영화는 아니다.


**각주 정리

1. 존 오브 인터레스트 시놉시스

2. 김혜리, “[김혜리의 두 영화 이야기] 관심영역”, 위버스매거진 2023년 7월 11일.

3. 김모아, “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정원을 탐구하는 천착의 깊이 김동훈”, 『환경과조경』 2024년 2월호.

4. 이미 박희성 교수가 연재를 통해 공공의 정원을 다룬 적이 있다. “근대 초기, 공원은 파크와 퍼블릭 가든의 구분없이 모두를 아우르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되면서 퍼블릭 가든은 파크와 혼성되고 사라져버렸다.” 박희성, “모던스케이프: 공공의 정원”, 『환경과조경』 202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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