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호 에디토리얼 원고를 서둘러 쓰고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딱 한 달 뒤 암스테르담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표만 예약한 채 떠난 긴 여행. 두 가지 큰 원칙만 정하고 모든 걸 열어뒀다. 첫 번째 원칙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기. 어느 도시를 다음 행선지로 할지, 내일은 무엇을 할지 미리 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 원칙은 모든 종류의 활자로부터 멀어지기. 여행 중반부에 신문 칼럼 마감이 겹쳐 어쩔 수 없이 노트북을 켰지만, 적어도 책을 한 페이지도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다.
지인의 거처가 있는 베를린에서 예정에 없던 ‘보름 살기’를 하고 다음 도시로 택한 곳은 코펜하겐. 11년 만에 코펜하겐을 다시 방문한 건 『환경과조경』 지면에 담았던 여러 근작을 내 눈과 발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잡지에 해외 신작을 실을 때면 그 작품의 수준이 높고 메시지가 강하더라도 마음이 무겁고 뭔가 개운하지 않다. 책으로 연애를 배운 느낌이랄까. 여행은 작품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채 지면에 편집하는 부담감 혹은 아쉬움을 뒤늦게나마 덜어낼 기회다.
코펜하겐에 도착하자마자 찾아간 곳은 지난해 완공된 ‘오페라 공원’(Cobe 설계). 지난 4월호(432호) 표지에 올렸던 작품이다. 코펜하겐 내항의 탈산업 부지에 만든 이 공원은 왕립 오페라 극장의 정원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도시 중심부에서 낭만적인 자연 경관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뜨거운 햇살 아래 바닷바람 맞으며 공원 구석구석을 걸었다. 교정용 편집본에 빨간색 플러스펜으로 ‘엑설런트 프로젝트’라고 썼던 메모,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다.
오페라 공원에 가기 위해 탄 여객선은 수상 버스 역할을 하는 대중교통 수단이다. 다시 배에 올라 운하 곳곳을 다닐 수 있었는데, 어디서 본 듯 익숙한 다리 옆을 지날 때 내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2016년 2월호(334호) 특집 ‘다리, 연결 그 이상’에 실은 ‘시르켈브로엔(Cirkelbroen)’이었다. 영어로 바꾸면 서클 브리지. 원판 다섯 개를 이어붙인 형태의 이 다리는 아모레퍼시픽 사옥 외부 공간의 설치 조형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작품이다. 코펜하겐의 작지만 강한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시르켈브로엔은 잡지 지면이 담아내지 못하는 기능미와 도시적 매력을 뿜어내며 보행자와 자전거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배는 곧 ‘시켈슬랑엔(Cykelslangen)’(Dissing+Weitling 설계) 밑을 지났다. 2015년 4월호(324호) 특집 ‘자전거 타고 싶은 도시’와 함께 엮어 실었던 자전거 전용 공중 다리다. 출퇴근시 자전거 이용률을 50%로 높이는 계획의 핵심 프로젝트로 만든 이 다리는 도심과 항구를 도보와 자전거로 연결해준다. 잡지 지면에 넣었던 인상적인 사진들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자전거 탄 풍경’이 뱀 모양 오렌지색 다리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코펜하겐의 자전거는 이미 교통수단 그 이상이다. 『사이클 시크』(북노마드, 2014)의 저자 마카엘 콜빌레-안데르센이 말하듯, 코펜하겐에서는 “치마를 입고 힐을 신고 자전거로 도심을 유유히 누비는 여자, 더블 재킷에 로퍼를 신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남자”가 도시의 평범한 풍경이다.
가보지 않고 실은 프로젝트 격파하기(?)는 다음 도시들에서도 계속되었고, 2021년 2월호(394호)에 담았던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판뵈닝언 수장고(Depot Boijmans Van Beuningen)’(MVRDV 설계)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이 미술관은 전시장과 수장고 기능을 통합한 파격으로 유명하지만, 대형 거울 화분 형태의 외벽 하나로 온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며 도시의 일상에 즐거움을 선물하고 있었다. 나 같은 여행객뿐 아니라 동네 사람, 미술관 관람객 모두 이곳을 지날 때면 사진을 찍지 않을 도리가 없다. 거울에 비친 도시와 그 속의 자기 발견하기 놀이, 재미있지 않을 수 없다.
편집주간이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운 사이, 편집부 식구들은 격동의 5월을 보냈다. 본지가 주관하는 ‘2024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뚝섬한강공원에서 열렸다. 박람회 수상작들을 이번 호 지면에 옮긴다. 6월호의 또 다른 주인공은 도시공원 리노베이션의 새 장을 연 ‘오목공원’이다. “공원은 편하게 앉아 오래 머무르며 품위 있게 쉴 수 있는 도시의 라운지”(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라는 설계자의 생각이 어떻게 공간으로 구현되었는지 직접 방문해 눈과 발로 경험해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