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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뇌헤타] 적응과 진화, 경계와 대화의 조경
  • 환경과조경 2023년 03월

설계와 시공의 디지털화

스뇌헤타의 조경 프로젝트 중 처음 주목한 작품은 맥스 IV 연구소의 랜드폼(landform)이었다. 원형 건축물을 구심점 삼아 펼쳐지는 물결 패턴의 지형을 보면서, 자연물의 프랙탈(fractal) 패턴이 모티브일 것 같기도 하고 얼핏 보면 마야 린(Maya Lin)의 웨이브 필즈(Wave Fields)가 연상되기도 한다고 생각하며 그 지형의 탄생 배경을 나름대로 유추해보려 했다.

 

맥스 IV 연구소 랜드폼의 설계 콘셉트와 시공 방식은 매우 놀라웠다. 인근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진동이 연구소의 초대형 원심 분리기 실험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진동을 흡수할 수 있는 파장의 형태를 조경 설계에 적용했다. 기발함을 넘어서 경외감이 느껴졌다. 건축물 자체도 원심 분리기의 형태와 기능을 그대로 반영한 도넛 형태다. 기능적 건축과 기능적 조경의 완벽한 합체다. 맥스 IV 연구소의 지형은 단순히 시각적 강렬함을 넘어서 건축물의 환경 적응력을 극대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조경을 통한 공간의 진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설계와 시공의 디지털화다. 프로젝트의 핵심 지형은 컴퓨테이셔널 설계를 통해 진동을 최소화하고 절성토 균형을 최적화하는 디지털 트윈을 활용해 설계됐다. 3D 모델의 좌표를 GPS로 제어되는 불도저 장비에 입력해, 마치 CNC 밀링(milling)(회전축에 고정한 칼날로 공작물을 절삭하는 기계)으로 모델을 깎아내고 3D 프린팅으로 쌓는 것처럼 거대한 지형의 물결을 소조했다. 내가 알고 있는 작품 중 알고리즘 설계를 지형에 적용한 가장 성공적 사례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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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스펙티벤베그의 전망대 ©Albrecht Voss Werbefotograf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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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엘비코센의 디딤돌 ©Ivar Kvaal

 

 

경계와 대화의 직관적 구현

환경조각 작품 같은 페르스펙티벤베그 전망로와 트라엘비코센 경관로. 이 두 프로젝트는 스뇌헤타의 설계 철학인 ‘경계’와 ‘대화’를 직관적으로 구현한다. 페르스펙티벤베그의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할 수 있는 유려한 곡선의 전망대는 매우 인위적인 구조물인데도 자연과 이상하리만큼 어우러진다. 마치 오래전부터 있었던 바위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쉬어가듯 등산객은 주변 경관에 부합하는 위장 색을 띤 코르텐 스틸, 콘크리트 벽, 목재 데크로 만든 쉼터에서 자연을 감상하며 물아일체의 시간을 보낸다. 트라엘비코센의 디딤돌은 자연과 자아를 연결하는 길이다. 물 위를 걷는 사람은 믿음을 갖고 발을 내딛으며, 보이는 경계와 보이지 않는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자연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사회적 지속가능성, 스뇌헤타 인터뷰

주로 미국에서 조경 실무를 했던 내게 오슬로에 본사를 두고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스뇌헤타의 작품 세계는 신비로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스뇌헤타의 조경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조경가인 제자가 스뇌헤타 인스브루크 스튜디오에서 일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번 호 특집을 기회로 스뇌헤타 조경 팀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유미(이하 미) 조경가 중에는 스뇌헤타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많고 주요 건축 작품 정도만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 특집을 통해 스뇌헤타의 조경 프로젝트가 한국에 소개되어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설계 철학에서 건축물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목적인 ‘백그라운드 조경’이 아니라 인간이 점유한 건축물과 주변 경관을 연결하는 조경의 역할을 강조한 부분에 크게 공감했어요. 스뇌헤타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설계를 진행해왔는지, 설계 과정에서 조경 팀의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스뇌헤타 조경 팀(이하 타) 보통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조경에 처음부터 비중을 두고 조경가가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그런데 스뇌헤타는 확실히 조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어요. 이번 호에 실린 설계 철학처럼, 자연과 건축물의 문지방을 허무는 것이 조경의 역할이라고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경가가 핵심 멤버로 처음부터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하죠. 초기 콘셉트를 정하는 부분에서부터 시작해 건축의 볼륨 스터디에도 조경가가 참여해 프로젝트의 전체방향을 정하게 되는 경우도 많죠. 다수의 건축물을 포함하는 마스터플랜의 경우, 조경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져요. 건물을 어떤 식으로 대상지에 배치할 것인지 등 마스터플랜의 구조를 짜는 일을 조경이 주도합니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같은 스뇌헤타의 건축 작품은 그 자체가 랜드마크적이고 상징적인 느낌입니다. 그에 반해, 트라엘비코센이나 페르스펙티벤베그의 랜드마크 요소는 대자연이고 조경은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이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게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그런데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건축에 비해 조경의 색이 잘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스뇌헤타 내에서 건축과 조경의 설계 철학이 조금 다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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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오페라하우스 ©Jens Passoth

 

 건축과 조경을 아우르는 스뇌헤타의 설계 철학은 특정한 물리적 형태나 스타일보다는 적응력이 높은 공간을 추구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조경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때는 설계적인 특징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수 있죠. 이번 특집에 수록한 설계 철학을 쓰면서도 가장 고민한 부분이었어요. 스뇌헤타의 주요 건축 프로젝트는 오페라하우스, 콘서트홀, 도서관 같은 문화 공간이다 보니 그 특징상 랜드마크 성향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같은 건축물은 도시 아이콘의 성격이 강한데, 조경의 경우에는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펼치기보다 설계 콘셉트가 전체 문맥과 내러티브에 녹아 있는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리적 공간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경험을 주인공으로 삼으니까요.

 

공간이 아닌 경험이 주인공이라는 말이 적확한 표현이겠네요. 맥스 IV 연구소에서 지형 설계가 단순히 시각적 강렬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건축물의 환경 적응력을 극대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 연구실 이름이 ‘이볼빙 랜드스케이프 랩(Evolving Landscape Lab)’인데, 환경에 적응하면서 계속 진화하는 조경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담았거든요. 스뇌헤타의 조경은 건축물이 대상지와 만날 때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엮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타 ‘적응adaptation’이라는 키워드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작품에서 이 적응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주변 경관에 같이 녹아들어가는 시각적 적응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영향을 최소화하는 환경적 적응으로 해석하기도 하죠. 친환경 콘셉트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그린워싱(전혀 친환경적이지 않지만 마치 친환경적인 것처럼 가장하는 위장환경주의)이 되지 않도록, 블루–그린 인프라스트럭처와 물 관리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게 될지 꼼꼼히 살피고 제대로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요. 건축에 최대한 친환경적인 재료를 사용하려고 하는 건 당연하고요. 요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회적 지속가능성(social sustainability)’이에요. 설계한 물리적 공간이 어떻게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갖게 될지 팀원들과 항상 묻고 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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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사우스게이트 마스터플랜 ©ZOA3D


공간의 사회적 지속가능성은 한국에서도 점점 부각되고 있는 개념이에요. 포용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접근하기도 하고요. 이런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강조한 프로젝트 사례가 있을까요?

 

 이번 특집에는 완공 프로젝트 위주로 소개하느라 포함하지 못했는데,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사우스게이트 마스터플랜의 경우, 학생 주거시설을 어떤 식으로 배치할지, 조경이 단지를 구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게 할지 결정할 때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거듭 확인했어요. 

 

설계 핵심은 매립으로 만들어진 옛 공업 지역을 기존 워터프런트를 기준으로 절개해 블루–그린 인프라스트럭처를 중심으로 한 수변 공원을 조성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수로를 뚫어서 완전히 섬처럼 잘라내려고 했는데, 이미 여러 인프라스트럭처가 지나고 있어서 실현하지는 못했죠. 

 

렌더링을 보면 반대편 강 건너 공원 전체가 물을 정화하기 위한 생태 도랑(bio swale)이에요. 원래 하수 처리 시설에서 물을 끌어와 공원을 통해 정화해 강으로 흘려보내려 했는데,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이 여의치 않아 강물을 들여와 정화해 다시 내보내는 방향으로 수정했어요. 결국 조경에서의 설계 접근이 마스터플랜의 가장 핵심이자 근간이 되었죠.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부다페스트의 워터프런트가 전부 도로에 막혀 있어 수변으로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에요.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실제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워터프런트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계획대로 완공된다면 부다페스트에서 수변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워터프런트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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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사우스게이트 마스터플랜의 워터프런트 ©ZOA3D

 

 

마지막으로 해외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기 원하는 학생과 젊은 조경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았다면요?

 

 조경가는 건축가, 엔지니어와 항상 협업해야 하니까 동등한 위치에서 일하려면 조경 지식은 물론이고 건축이나 토목 등 관련 분야에 대한 기본 지식을 알아야 대화가 되는데, 이에 부합하는 인력을 찾기가 힘들어요. 소프트웨어 스킬만 봐도 전문적인 3D 툴을 다룰 수 있는 조경 인력이 많지 않아요. 마스터플랜에서 건물을 배치하면서 설계하는 조경과 작은 광장을 만드는 조경은 굉장히 다르잖아요. 규모가 다른 스케일을 오갈 줄 알아야 하는데 포트폴리오를 보면 한 가지 스케일의 프로젝트에만 특화된 사람이 많아요. 여러 규모의 프로젝트에서 2D와 3D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고, 건축과 토목 등 관련 분야의 기본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함께 토론하며 설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조경가를 원하는 사무소가 얼마든지 해외에 많이 있어요.

 

2D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은 국가를 불문하고 조경가에게 주어진 공통적인 숙제인 것 같네요. 앞으로도 좋은 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하고 종종 소개해주세요. 먼 곳에서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습니다.


이유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디자인대학원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하그리브스 어소시에이츠, 마사 프라이(Martha Fry), 켄 스미스(Ken Smith) 등의 조경설계사무실에서 10년간 실무 경력을 쌓았다. 2010년부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현 환경설계학과)에 부임해 조경 설계를 가르치며 이볼빙 랜드스케이프 랩(Evolving Landscape Lab)을 운영 중이다. 확장 현실과 BIM, 컴퓨테이셔널 설계 등 다양한 디지털 도구를 수업에 접목하고, 2020년에는 디지털 트윈을 활용하는 조경 시공과 스마트 건설기술 솔루션을 개발하는 에스엘즈를 공동 창업해 대표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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