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될 일이지만 이를 대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특히 장례 문화는 종교와 사상, 신분, 환경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성되기 때문에 문명권마다 특징적인 고유의 장례 형식이 있다.
씨족사회의 전통을 가진 한국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산을 두고 후손들이 정성껏 가계 묘를 관리하는 게 오랜 관습이었다. 비공식적으로 음택 풍수의 이치를 따져 길吉한 묫자리를 찾아 몰래 매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반면 비천한 신분이나 무연고자처럼 개인 묘지를 가지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혹여 질병이나 자살 등 불경한 이유로 사망했다면 사정은 더 나빴다. 시신은 집장지集葬地라고 부르는 매장처에서 표식도 제대로 없이 처리됐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북망산北邙山이라고도 불렀다. 집장지는 지금으로 치면 공동묘지 같은 시설이다.
서울은 예로부터 인구가 많은 탓에 도성 주변에 집장지가 여럿 있었다.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곳은 한양 도성 동남쪽의 광희문 밖 집장지다. 광희문의 별칭이 ‘시구문屍柩門(시체가 나가는 문)’이었을 정도니, 이곳 분위기는 문물 교류, 송별 연회 등 활기 넘치고 번잡했던 사대문 주변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도성 밖 집장지와 산자락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묫자리가 문제로 떠오른 건 식민지기에 이르러서다. 서울시만 하더라도 1910년대에 이미 도성 주변에 19개소의 집장지가 있었다고 조사된 바 있다. 이들 외에도 이 산 저 산에 산소가 많이 있었을 터인데, 근대 도시로 전환하는 데 있어 마구 없애기도 뭣한 애매한 장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국유 임야를 개인이 사유화해 묫자리로 쓰고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도 문제였다. 국가 토지를 관리하는 총독부, 경성부와 가족묘를 지키려는 이들의 대립은 첨예해졌고, 결국 전통적인 한반도의 장례 문화는 여러 면에서 위기를 맞게 된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 취체 규칙’을 공포하고 주요 도시부터 묘지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묘지 정리의 명분은 위생과 미관이었다. 다만 조선인의 오랜 관습을 건드릴 때 발생할 수 있는 격렬한 저항과 분쟁을 고려하여 천천히 진행했다. 1914년 경성부에서는 경성부 일대의 19개소 집장지를 미아리, 신당리, 아현리, 이태원리, 신사리(응암동), 수철리(금호동) 여섯 곳으로 정리하고 공동묘지라는 이름으로 공식 운영하기 시작한다. 기존 집장지 등에 있던 묘지는 이장이나 화장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고, 새로 운영하게 된 공동묘지에서는 화장과 매장의 원칙을 정하여 묘지 구획, 묘지 사용료 등의 규칙을 갖추었다.
* 환경과조경 419호(2023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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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공동묘지 이장공사 착수”, 「동아일보」 1936년 4월 9일.
“무연분묘삼만기 망우리로 이장”, 「조선일보」 1936년 10월 10일.
망우역사문화공원 manguripark.or.kr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