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동네 담벼락에서 심심치 않게 재개발 예정지임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문을 발견하곤 했다. 종종 그 위에 붉은 스프레이로 재개발을 반대하는 글귀가 적혔다. 갈등은 아주 오래 지속되었고, 내가 대학에 입학할 즈음이 되어서야 주택 철거가 슬그머니 진행되기 시작했다. 특별할 것 없는 곳이지만, 내 유년 시절이 담긴 공간이 모두 스러진다는 말에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골목길을 헤맸던 기억이 난다. 부지런하지 못해 추억이 깃든 동네의 모습을 전부 담는 데 실패하고 아쉬워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서울에는 재개발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 생각보다 많다. 1월 13일에 개최된 ‘뮈에인, 내 마음속의 오목렌즈’는 그렇게 사라져버린 공간과 그 속의 삶을 조명하는 전시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서울의 재개발 예정지를 담은 196점의 사진을 선보였다.
신성하게 하다
그리스어로 ‘신성하게 하다’를 의미하는 뮈에인(myein)은 전시의 핵심을 담은 단어다. 신성화하려는 대상은 부동산 투기, 도시 재개발에 밀려 ‘누추한 환경’이나 ‘저소득층의 주거’로 잘못 계층화되고 기억 속에서 삭제되기까지 한 삶의 터전이다. 물리적 공간을 넘어 공동체적 이웃을 담았던 장소의 가치를 발굴하고 드러냄으로써 잃어버린 공간을 다시 신성하게 만들고자 했다. 뒤에 붙은 오목렌즈는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포함하는, 더 넓은 전망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근시안을 교정하기 위해, 우리 마음속 오목렌즈의 배율을 더 높게 하자고 제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전시 소개문 중).
기억 풍경
김정일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그는 한 기사를 접한다. “1982년 어느 날 신문 지면에, 지금으로 말하면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40여 개의 개발 지구가 발표됐다. 투기의 시작이며 빈부의 격차가 벌어진 시발점이다. 이 신문 쪽지를 가지고 한군데씩 지워가며 촬영을 다녔다. ‘사실성’, ‘기록성.’ 사진을 시작할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소리다. 진실, 기록, 재현, 소외……. 늘 내 머리에 있던 단어들이다.”
서울에 막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던 과도기적 풍경은 그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훗날 김정일은 이 작업에 ‘기억 풍경’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제목처럼 사진 속 모습은 이제는 기억에만 남아 있는 풍경처럼 아득하고 그리운 느낌을 자아낸다. 그중 1981년 12월부터 1982년 2월 겨울날을 포착한 공간과 인물 53점을 전시했는데, 모래가 가득 쌓인 공터를 놀이터 인양 누비는 아이들,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판잣집 앞 에 놓인 용도 불명의 고무대야, TV 수신 안테나를 이어 만든 빨래줄 등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꾸려갔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 환경과조경 419호(2023년 3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