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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두가마를 기억하며
  • 환경과조경 2023년 03월

내게는 오랜 동반자 ‘두가마’가 있다. 얼핏 이름만 들으면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축구 선수 같아 보이지만, 사실 전혀 상관없다. 사물을 의인화해서 부른다는 것이 조금 민망한 일이지만, 두가마는 나의 필름 카메라인 오토보이의 이름이다. 이 카메라에 이름을 붙인 건 나름의 사연이 있다.

 

전쟁을 겪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보처럼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 형제가 태어날 무렵, 여행과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우리 형제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어서 사셨다고 했다. 당시 쌀 두 가마니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그 카메라가 우연히 내게 쥐어졌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됐고, 두가마란 거칠고 투박한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필름 카메라의 이름을 그렇게 정해버렸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꽃이 된다고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나.

 

아버지의 고장 난 카메라를 구태여 고쳐 쓴 것은 일종의 작은 도피였다. 당시 졸업을 앞두고 자기소개서를 수십 번 고쳐가며 회사에 원서를 넣었는데, 힙합 오디션의 래퍼들처럼 합격 목걸이를 척척 받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그래서 내가 가진 것 중에 유일하게 고쳐서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필름 카메라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물론 제한된 컷 수 때문에 셔터를 신중하게 눌러야만 하고, 인화한 사진을 보는 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래도 정말 맘에 드는 장면을 찾아가는 재미, 할당된 컷 수를 다 채웠을 때 필름이 감기며 돌아가는 소리, 상상 이상으로 잘 나온 사진을 받았을 때의 쾌감이 참 좋았다. 수전 손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필름 카메라는 당시 내게 세상의 모든 걸 잊고 떠나게 할 수 있는 우주선과 같았다.

 

서툰 솜씨로 사진을 찍다 보니, 사진작가들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잡지 『지큐』에서 소개된 사진가 한영수의 작품을 보고 속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1세대 광고 사진가였던 그는 6·25전쟁 이후의 도심을 흑백 사진으로 담았다. 전쟁이 남긴 폐허의 상흔 속에서도 활기차게 뛰어노는 거리의 아이들, 젊고 당당한 신여성, 중절모의 멋쟁이 신사까지 다양한 피사체를 세련된 방식으로 다루며 거리의 희망을 환기했다. 절망의 폐허가 짓누르는 고통 가운데 옥상의 민들레꽃처럼 버티고 있는 희망을 사진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동시대의 거장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깔끔한 구도는 덤으로 좋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의 작품을 소개했던 장우철(당시 지큐 에디터, 현재는 사진작가)의 사진 전시에서 한영수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른 감흥을 느꼈다. 스텝을 밟는 유도선수의 발을 찍은 사진은 고요한 호수와 같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은 폭발적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강렬했다. 이에 대해서 황인찬 시인은 “식물은 꿈틀거리는 것처럼 찍어놓고, 인간은 한없이 정물에 가깝게 담는다”라고 표현했다. 이후 어느 행사에서 우연히 만난 장우철에게 어떻게 작품을 찍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사진은 피사체에 가하는 폭력일 수 있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하고, 자연스러운 그림이 나올 때까지 충분히 기다리며, 결과는 비명처럼 폭발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라고 답했다.

 

두가마를 고쳐서 쓸 때만 해도 이처럼 사진을 찍거나 보는 게 낙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필름 사진 찍기를 취미로 이렇게 오래 할 줄 정말 몰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름 카메라의 매력과 걸출한 두 명의 사진가를 알려준 두가마를 얼마 전 불의의 사건으로 잃어버렸다. 그는 쌀 두 가마의 값어치를 톡톡히 한 후 이름을 따라서 코트디부아르(?)로 돌아갔는지, 좋은 곳으로 소천했는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사라진 그를 떠나보내며 이렇게 긴 글을 써봤다. 앞으로 사진을 더 열심히 찍어 그에게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한다. 그래서 새로운 카메라를 물색 중이고, 이미 카메라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구방심救放心이다. 이름에 담긴 뜻처럼 흩어진 마음을 모아서 희망찬 마음으로 봄에는 출사를 나가려고 한다. 잃어버린 두가마와 함께했던 추억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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