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사람들은 다 노래가 되기 위해 살아요
  • 환경과조경 2023년 03월

지구는 둥글고 태양 주변을 천천히 공전하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니까. 특정 시간에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은 둥그렇게 한정된다. 내가 이쪽 동그라미에서 한낮을 살고 있을 때 반대편의 세계는 빛 없는 어둠에 빠진다는 거다. 과학 시간에 배웠기에 믿고는 있지만 사실 이 시차의 존재를 체감할 때는 많지 않다. 지구 건너편에서 월드컵, 올림픽 같은 세계적 축제가 열리기도 하지만 잠이 더 중요한 내 겐 별 의미가 없다. 가끔 친구의 닦달에 못 이겨 어둑한 새벽에 눈부시게 환한 경기장에서 진행되는 축구를 보기도 했는데, 카메라가 푸른 하늘과 작렬하는 뙤약볕을 비춰줘도 좀처럼 실감이 안 났다.

 

스크린 속 세상은 꼭 영화나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나와는 동떨어진, 더 과장해 말하면 다른 차원의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같았다. 그런데도 가끔 나와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해외에 있는 사람과 교류하며 메일을 주고받을 때다. 메일 도착 시간에 업무 중이라고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숫자(보통 해뜰 기미도 없는 새벽이다)가 찍혀 있는데 첫인사가 “퇴근 후 즐거운 저녁 보내길 바란다”이거나, 나는 무더위에 시달리고 있는데 저쪽은 눈이 쌓여 출근에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한다든가. 수많은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 둥근 구체를 하나의 지구라 여겨도 되나 궁금해지고, 대지의 표면을 따라 흐르는 시간의 축을 상상하면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스뇌헤타 특집을 진행하면서는 나보다 여덟 시간 뒤를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퇴근할 무렵이면 그들이 막 사무실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특집 기획을 논의하고 확인하는 메일이 이어달리기의 배턴처럼 오갔다. 그 시차가 처음에는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는데, 퇴근길 휴대폰에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뜨면 다른 시간대에서 함께 일하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나는 건 스뇌헤타 인스부르크 스튜디오의 이슬과 함께한 줌 회의다. 이슬은 이번 특집 기획을 더 풍성하고 재미있게 꾸릴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오슬로 스튜디오와의 원활한 소통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줌 회의 또한 그의 제안이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일은 글로 대화하는 것과 너무 달랐다. 통신의 문제였겠지만, 조금씩 끊어지는 영상과 싱크가 살짝 어긋난 오디오는 오스트리아와 한국의 거리를 가늠하게 했다. 당시 이슬은 마이크가 달린 헤드폰을 쓰고 커다란 목재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그 장면이 뭐라고 이슬이라는 이름이 구체적인 배경과 사연을 가진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난 후 문득 궁금해져 인스부르크 스튜디오의 주소를 검색해 주변 사진을 찾아봤는데, 어느새 붉은 벽돌 건물이 가득한 길을 거닐며 일상을 보내는 인스부르크 스튜디오 직원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엇이 궁금해지는 순간, 호기심을 갖게 되는 장면은 참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구나. 스뇌헤타의 프로필과 설계 철학 지면에 사무실 풍경과 연례행사로 산을 오르는 직원들의 모습을 실은 게 뿌듯해졌다.

 

이번 호를 매만지는 내내 두 사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강 한가운데 섬을 향해 물 위를 고요히 걷는 사람의 뒷모습(트라엘비코센 경관로)과 산에서 마치 나뭇가지가 자라듯 뻗어 나온 전망대(페르스펙티벤베그 전망로). 강과 산, 전혀 다른 대상지를 다루고 있지만 두 작품은 닮았다. 지형을 조작하거나 나무를 가득 심거나 거대한 시설을 배치하는 대신, 그 자체로 완벽한 주변의 경관을 둘러볼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작은 장치들을 삽입했다. “문화와 물성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희석하는 도구이며, 현재에 과거를 녹이고 존재하는 것에 존재하게 될 것을 녹아들게”(22쪽) 하 는 조경의 힘이 절절히 느껴진다. 허연 시인이 말했다. “사람은 다 노래가 되기 위해서 살아요.”1 그는 그래서 그 노래를 받아 적기 위해 애쓰며 시를 쓴다. 조경이 해낼 수 있는 것 중 가장 멋진 일이 노래가 되지 못한 경관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 아닐까. 앞의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한 이유는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건축에 비해 조경의 색이 잘 안 보이는 것 같기도”(102쪽) 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돋보이기보다 다른 것을 더 드러내기 위해 한걸음 물러난 것은 눈에 띄지 않기 마련이고, 우리는 너무 쉽게 그 존재들을 잊는다.

 

각주 1. 유희경, “사람들은 다 노래가 되기 위해 살아요 그 노래를 받아 적고 싶었어요”, 『쿨투라』 2021년 2월호, p.23.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