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스 게임을 해보자. 지금 우울하다면, ‘집에서 쉬며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vs ‘밖에 나가 사람들과 함께(혼자 나가도 된다) 우울함 탈피하기.’ 나는 무조건 후자다. 우울할 때 집에만 있으면 끝없이 기분이 가라앉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있거나 바깥 공기를 마시며 침울한 감정에서 빠져 나오려 한다. 우울한 날뿐 아니라 쉬는 날도 종종 밖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나가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다 보니 점차 이동 반경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까지 뻗어나갔다.
입시의 굴레에서 벗어나 갓 스무 살 되던 해에 갔던 대만은 여행의 매력을 알게 해주었다. 패키지 상품처럼 여행사가 짜놓은 경로를 쫓아다니는 여행이 아닌 순수 직접 모든 걸 예약하며 알아보고 간 여행이라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인천공항의 새벽 공기, 긴장한 눈빛으로 대만 공항을 나서던 기분, 혹여 예약이 잘못되었을까 조마조마하며 체크인하던 호텔 로비, 예류Yeliou 지질공원행 버스에서 본 풍경. 사소한 것도 다 기억난다. 처음 주도한 여행이 대성공을 거둬 그 뒤로도 일정을 직접 짜는 자유 여행을 선호하게 됐다.
여행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변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몇 날 며칠 밤새우며 과제를 반복하던 대학 생활에 잠시나마 쉼을 주고자 휴학을 했을 때다.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친구들과 동유럽 여행을 갔다. 한 나라를 한 명씩 맡아 그 나라의 가이드가 되어 숙소부터 일정까지 알아서 진행하기로 했다. 나는 오스트리아 담당이었는데, 대표적인 관광지, 인스타그램 감성을 자극할 포토 스폿, 꼭 먹어봐야 하는 맛집 위주로 계획을 짰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가봐야 할 곳을 조사하던 중, 유명한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의 배경 장소를 알게 됐다. 영화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마리아가 트랩 소령의 자식들의 가 정교사가 되면서 전개된다. 경직된 가정 환경으로 인해 무뚝뚝하고 표정이 없던 아이들에게 마리아는 음악을 가르치며 생기를 선물해준다.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자주 보았던 터라 ‘도레미 송’이 곧장 떠올랐다. 도레미 송은 마리아와 아이들을 끈끈하게 엮어주는 도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영화를 대표하는 곡이다. 정원 가운데 있는 분수대 뒤에서 아이들이 한 명씩 나오며 퍼걸러 주위를 뛰어다니고, 입구에 위치한 계단 위로 마리아와 아이들이 함께 올라와 정원을 등지고 도레미 송을 부르는 장면. 바로 그 장소가 미라벨 궁전 앞에 펼쳐진 미라벨 정원(Mirabell Garten)이다. 미라벨 정원과 더불어 마리아와 트랩이 함께 춤을 추며 사랑을 키워 나간 정자가 있는 헬브룬 궁(Schloss Hellbrunn)도 빼놓지 않고 들렀다.
잘츠부르크 다음 도시는 빈이었는데, 이 도시에서도 미라벨 정원, 헬브룬 궁 같은 곳을 발견했다. ‘비포 선라이즈’(1996)는 빈을 낭만적인 도시로 그린 대표적 영화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셀린과 제시, 목적지는 달랐지만 서로를 향한 이끌림에 함께 빈에 내려 하루를 보내며 사랑에 빠진다. 셀린이 제시에 대한 호감을 친구에게 전화하듯 고백하던 카페 슈페를(Sperl), 함께 지낸 하루가 꿈만 같다고 이야기하던 테라스가 있는 알베르티나(Albertina) 박물관도 필수 방문 코스에 넣었다. 이곳들에서 영화 장면의 구도처럼 사진을 찍고 싶었기에 다른 그림 찾기 하듯 꼼꼼히 대조하며 공간을 둘러봤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이 인스타그램용으로 찍은 사진들보다 왠지 더 정감이 간다. 이제는 반대로 영화 제목을 보면 여행지에서의 일들이 떠오른다.
어딜 가게 되면 먼저 그곳의 숨은 정보를 찾아본다. 여행 도중에 새로운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도 매력이지만, 사전에 지식을 쌓고 가는 여행도 꽤나 흥미롭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 말했다. 긴 인생을 산건 아니지만 짧고 굵직한 여행 경력을 가진 내 방식대로 고쳐 써본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알아두면 쓸데 있는 지식을 쌓고 떠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