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미국 지성사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조경가이자 작가, 사회 비평가, 공공 행정가로서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국 답사기, 남부 노예 제도 취재기, 공원과 도시에 관한 에세이, 서간문 등 그가 남긴 글은 실로 분량이 엄청나다. 전기만 해도 10종이 넘고, 그를 다룬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도 여러 편이다. 옴스테드가 남긴 물적 유산만큼 그가 지성사에 남긴 유산은 찬란하다. 옴스테드의 글과 그에게 영향을 미친 당대 사상가들을 살펴보면서 옴스테드 공원관의 형성 배경과 특징을 살펴본다.
옴스테드가 처음 접한 공원은 조지프 팩스턴(Joseph Paxton)이 설계한 버컨헤드 공원(Birkenhead Park)이었다. 옴스테드가 1850년 뉴욕에서 출발해 리버풀에 도착한 후 처음 찾은 버컨헤드는 당시 리버풀 인근의 신도시였다. 배낭을 메고 동네 빵집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버컨헤드 공원을 꼭 가보라는 권유로 찾게 되었다. 이 우연한 만남으로 옴스테드와 공원의 인연이 시작됐다. 옴스테드에게 공원은 미국 사회가 꿈꾸는 평등과 민주주의의 공간이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사유하는 암체어(armchair) 지식인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센트럴파크 감독관 직책을 맡고, 공모전 당선 후에는 설계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답사를 통해 쌓은 경험과 독학으로 축적한 지식을 결합해 자신의 공원관을 형성했다. 이후 미국 여러 도시의 공원을 계획하면서 공원에 대한 옴스테드의 생각이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공원에 관한 옴스테드의 글
옴스테드의 대표적인 글에서 공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1852년 출간한 『어느 미국 농부의 영국 여행기(Walks and Talks of an American Farmer in England)』에서 그는 버컨헤드 공원을 ‘민중의 정원(People’s Garden)’이라 지칭한다. 옴스테드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에 감동한다. 그러한 풍경은 미국 도시에서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에서는 가난한 농부도 여왕처럼 공원을 즐긴다고 표현한다. 무엇보다 시민의 세금으로 조성한 이 공원이 시민이 소유하는 공간이었던 점을 높이 평가했다. 빵집 주인도 자기 동네 공원에 자긍심을 가진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공원: 백과사전적 관점(Parks: An Encyclopedic View)”(1861)이라는 글은 유럽 도시공원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다룬다. 당시는 센트럴파크 설계 공모 당선 후 실시설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사례 연구 기록물을 살펴보면 옴스테드가 유럽 공원의 역사와 여건을 잘 숙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설계가가 궁금해할 주제인 공원의 상대적 크기와 면적당 수용 인원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옴스테드가 공원에 대한 연구를 심도있게 수행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870년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사회과학협회 총회에서 발표한 글 “공공 공원과 도시의 확장(Public Parks and the Enlargement of Towns)”에서 옴스테드는 공원에 관한 생각을 보다 선명하게 밝힌다. 도시가 급속하게 확장할 때 맑은 공기, 밝은 햇빛, 푸르름을 제공하는 자연 공간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광활함은 공원의 기본 조건이라고 말한다. 밀집된 도시와 차단된 곳에서 시민들이 산책하면서 고요함과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먼 미래를 보고 도시의 확장을 고려해 장기적 관점에서 공원 계획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원의 역할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문화인이 되기 위한 시민 교육의 장이고, 둘째 심신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활력 공간이며, 셋째 시민에게 자긍심을 주며 도시를 매력적으로 하는 공유 자산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공원론이다.
옴스테드는 1886년 글 “마음 상태의 건강한 변화(A Healthy Change in the Tone of the Human Heart)”에서 존 러스킨(John Ruskin)을 인용하면서 문명화된 사람은 질서, 정교함, 깔끔함 같은 특성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품격 있는 도시는 섬세한 톤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교회, 도서관, 갤러리, 온실, 정원, 기념물, 공원 등 공공 공간의 수준이 도시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도시의 이러한 아름다움은 보편적 시민의 예술 감각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왜 옴스테드가 좋은 공원을 만들고자 했는지, 왜 공원을 통해 시민 교육을 하고자 했는지 이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옴스테드 공원관의 형성 배경
몇 편의 글을 통해 살펴본 공원에 대한 옴스테드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공원은 도시를 매력적으로 만들고, 시민들에게 도시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곳이다. 둘째, 계층 갈등을 비롯한 사회 문제 해결의 장이다. 셋째, 시민 교육의 공간이다. 넷째,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장소다. 이러한 공원관 형성에는 동시대 사상가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영국의 낭만주의 사상가인 존 러스킨과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1849)에서 “건축은 사용 목적이 무엇이든 그 모습이 인간 정신의 건강, 힘, 그리고 즐거움에 기여하도록 하는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칼라일은 『의상철학(Sartor Resartus)』(1836)에서 “육체, 자연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영혼, 신 등 보이지 않은 것으로 상징하는 의상”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옴스테드는 공원과 같은 공공 건축이 도시의 정신을 상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옴스테드가 캘버트 복스(Calvert Vaux), 제이컵 레이 몰드(Jacob Wrey Mould)와 함께 작업한 센트럴파크의 베데스다(Bethesda) 테라스에는 러스킨의 영향이 선명히 드러나 있다. 장인들의 섬세한 솜씨로 제작된 테라스 장식물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낮과 밤의 서사가 세련되게 표현됐다.
옴스테드는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와 같은 당시 초월주의자들의 자연관에도 영향을 받았다. 초월주의자들에게 도시는 악이고 자연은 지고의 존재로 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도시에 공원을 만드는 것은 인간 회복의 한 방편이었다. 에머슨은 『자연(Nature)』(1836)에서 “자연은 몸과 마음에 치료 효과를 주어 심신을 정상으로 회복시킨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에머슨의 영향을 받은 소로는 야생 자연인 월든에서 한동안 생활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월든(Walden, Life in the Woods)』(1854)을 저술했다. 그는 월든 호수에서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옴스테드에게 공원은 자연과 교감하면서 신의 내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장이 된다.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저작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1835)에 주목해야 한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가가진 선진성을 높이 평가했지만 문화적 소양의 부재를 지적했다.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드 토크빌의 생각은 옴스테드에게 영향을 미쳤고, 공원이라는 유럽의 민주적 공간과 제도를 미국 사회가 빨리 수용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에게 공원을 조성하는 일은 계층 갈등이라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문화적 소양을 습득하고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장으로서 공원은 유용한 도구였다. 옴스테드는 이를 잘 수용했다.
스위스 철학자 요한 게오르크 치머만(Johann Georg Zimmermann)의 『고독(Solitude)』(1791)은 당대에 잘 알려진 저작이었다. 그는 『고독』에서 풍경은 우울증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으며, 건강한 고독은 자기 회복을 위해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경향이라고도 말했다. 옴스테드도 어릴적부터 자연 풍경이 주는 치유 효과를 체감하고 있었다. 옴스테드 연구자들은 치머만의 사상이 옴스테드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본다.
공원에서 우리는 자연 경치의 명상을 통해 서로 경쟁하지 않고 위협받지 않는 상태를 경험한다. 치머만은 건강한 상태의 고독을 자기 시간에 대한 몰입과 지나친 은둔으로 사회생활에서 격리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라 했다. 당시 새로 등장한 공원은 치머만이 말하는 건강한 고독을 경험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옴스테드 공원관의 의미와 한계
옴스테드 공원관이 갖는 의미와 시사점은 무엇인가. 옴스테드식 공원은 이후 수없이 복제되고 확대 및 재생산됐다. 어쩌면 아직도 전 세계의 공원은 옴스테드의 우산 아래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옴스테드의 공원관과 실천 행위는 이후 전문가들의 공원 계획, 설계와 큰 차이를 보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옴스테드는 당대의 사상을 자신의 공원 만들기라는 실천 행위를 통해 구현했다. 도시의 자연인 공원은 쓰임새 있는 물리적 공간일 뿐 아니라 그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과 바람 직한 미래상이 담긴 공간이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도 옴스테드의 공원은 그 가치와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탄탄한 철학이 있는 공원, 확고한 비전이 담긴 공원이기에 생명력이 길다. 이러한 점은 옴스테드의 개인적 역량에서 기인한 것이기 하다. 그는 인문적 소양을 갖추었고 사회적 발언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공원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높여 주었다. 물론 그와 함께 일한 캘버트 복스와 제이컵 레이 몰드의 디자인 역량이 옴스테드의 추상적 차원의 이상을 뛰어난 디테일 디자인으로 구체화시키는 데 힘이 되기도 했다.
옴스테드 공원관의 한계는 무엇인가. J. B. 잭슨(J. B. Jackson)은 “과거의 공원과 미래의 공원(The Past and Future Park)”(1994)이라는 글에서 옴스테드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조경가이자 도시설계가로서 그의 작품은 통상적으로 숭배되지만, 그의 사회 철학에 나타나는 엘리트주의, 반도시적 논조, 자연환경에 대한 강조 등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의 공원 개념은 사회 계층의 단편화, 고독한 경험과 가족적 경험의 지향, 개인과 환경의 수동적 관계를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적절한 비판이다. 센트럴파크는 초기에 산책 등 수동적 레크리에이션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계층을 외면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실제로 여러 계층의 화학적 결합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원을 계속 리모델링하면서 여러 계층이 공원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후 많은 비평가는 옴스테드의 공원이 도시에 담을 쌓았다고 비판하면서 도시와 소통하는 공원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견 타당한 의견이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변화하는 도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영원불변하는 만병통치의 해법을 주문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옴스테드의 공원은 지금도 여전히 잘 이용된다. 잭슨이 지적하는 계층별 이용 분리, 공원 경험 방식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사회학적인 문제다.
오늘날에도 공원을 이용하는 방식은 ‘따로 또 같이’다. 즉 개인적 방식과 때로는 집합적 방식이 혼용된다. 군중 속에서 개인의 자유가 방해받지 않는 상태를 더 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뉴노멀의 공원 이용법’일 것이다. 공원은 시간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하는 하나의 가능태다. 옴스테드는 공원의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를 제시한 것이며, 이후 다른 형식과 내용의 공원을 창출하는 것은 후대 공원 설계가의 역할일 것이다.
* 환경과조경 408호(2022년 4월호) 수록본 일부
조경진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장, 한국조경학회장, IFLA 2022 조직위원장, 정원도시포럼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