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에 관심(만) 많은 D는 종종 자신의 사업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날의 주제는 텃밭이 딸린 자급자족 식당. “매장에서 직접 기른 채소를 수확해서 그 자리에서 신선한 요리를 만들어주는 거지.” 큰 흥미를 못 느낀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농사가 쉽
냐?”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얼마 전, 직접 키운 채소로 음료와 디저트를 만든다는 카페가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D와 함께 압구정을 찾았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카페의 이름은 ‘식물성 도산’. 여기에서의 ‘성’은 별성星, “지구와 화성 사이에 위치한 신선함의 별”이라는 뜻이란다. 식물로 이루어진 싱그러운 행성이라니. 일단 콘셉트는 합격이다.
간판은 없다시피 하고 외관은 메탈 소재로 마감돼서 멀리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큰 창을 통해 보이는 실내 수직 농장이 눈길을 끌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신기한듯 한 번씩 쳐다봤다. 종종 지하철 역사에서 보던 (보라색 조명이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수직 농장과는 달랐다. 하얀 프레임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채소들이 백색광 아래서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알고 보니 한 스마트팜 스타트업에서 운영하는 카페였다. 즉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쇼룸이었던 것.
디자이너가 누군지 몰라도 일단 ‘콘셉트에 진심인 편’인 건 분명해 보였다. 곳곳에 식물성이라는 콘셉트가 녹아들어 있었다. 우선 제조 음료 대부분은 식물성植物性이다. 나는 두유가 들어간 식물성블랙(라테)을, D는 매장에서 직접 기른 바질로 만든 바질파인소르베를 주문했다. 주문을 하니 카운터에서 보딩(boarding) 쿠폰을 주었다. 지구에서 식물성으로 가는 우주선 탑승권처럼 디자인된 작은 종이였다. 유치하게 뭐 이런 걸……. 대수롭지 않게 받았지만 속으론 엄청 좋았다(참고로 난 콘셉트에 약하다). 카운터 옆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물속에 뿌리가 잠긴 여러 개의 화분이 마치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처럼 레일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카페를 가로지르는 긴 테이블 위쪽의 절반가량은 화산석으로 빼곡하게 채워 행성의 거친 표면을 표현했다(지독한 콘셉트 같으니라고!).
음료를 기다리며 ‘풀멍’(풀을 멍하게 보는 것)하다 시선을 돌리니 매장에서 수확한 야채 상품과 수경 재배 키트가 보였다. 로메인 등의 엽채류가 신선해 보이도록 뿌리를 자르지 않은 채 포장했고, 작은 박스형의 수경 재배 키트는 모듈식이어서 개당 가격이 생각보다 저렴했다.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쓸만해 보이고, 흙은 최소한만 필요해서 키우는 데 품이 덜 들 것 같았다. 포장된 채소와 수경 재배 키트를 한참 눈으로 만지작거렸다. 급기야 제품을 검색해보기에 이르렀는데, (지금의 지갑 사정으로는 불가능 하지만) 3단 프레임을 사면 매달 5kg의 채소를 얻을수 있다는 말에 소비심이 흔들렸다. 정교하게 설계된 공간이 내 안의 잠자는 도시 농부를 깨우고 있었다.
공간, 경험, 브랜딩 이 삼박자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드는 차, 주문한 음료가 나왔음을 알리는 진동벨이 울렸다. 여담이지만 커피보단 아이스크림이 맛있었다(야금야금 뺏어 먹다 결국 스푼을 하나 더 받아왔다). 한 입 먹을 때마다 파인애플 섞인 시원한 바질 향이 기분 좋게 밀려들었다. 바질을 보면서 먹어서 그랬나. “저 키트 하나 사볼까? 아니면 스마트팜 관련주는 어때?” D에게 물으니 시큰둥한 답이 돌아왔다. 라면 물 올리기도 귀찮아하는 네가 퍽이나 잘 하겠다며. 그리고 차기 식품 산업의 미래는 배양육에 있다나? 그러거나 말거나. 초록빛 행성이던진 미끼를 물어버린 나는 통통하게 물오른 바질 잎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상상에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