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앞에서 대표님을 만났을 때 자동으로 굽는 나의 허리와, 집에 온 아빠를 향해 누워서 손을 흔드는 나를 한데 떠올리다 생각했다. 한 사람 안에는 다양한 자아가 있기 마련이라고.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페르소나가 만들어진다면 그중 하나는 ‘쓰는 자아’가 아닐까. 글을 쓰다 스스로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내게 쓰는 자아는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격이다. 한 쪽짜리 글을 쓰는 데도 온종일을 징징댈 정도로 엄살이 심하고, 시도때도 없이 진지해져서 부담스럽다. 하지만 직업이 이렇다 보니 종종 꺼내 살살 달랠 수밖에. 물론 도움을 받기도 한다. 때때로 애매한 생각을 또렷하게 갈무리해주고, 쓰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나의 어떤 면면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면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주르륵 늘어놓은 글자들을 눈으로 짚다보면, 글 너머 누군가의 내밀한 생각과 복잡한 사정을 알게 되니까. 수면 위로 잠시 떠올랐다 사라질 뻔한 생각을 박제한 게 글이라고 한다면 읽는 행위가 꽤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거창한 이유로 남의 글 읽기를 좋아하고 필요하다고 여긴다. 특히 ‘내 것이 아닌’ 이야기, 나로선 쓸 수 없는 글 앞에서는 기꺼이 독자가 되곤 한다.
조경을 콘텐츠로써 다루기 때문일까. 조경 잡지를 만들고 있지만 가끔 (어쩌면 자주) ‘진짜’ 조경에서는 멀찍이 떨어진 기분이 든다. 문학 편집자와 소설가 사이의 간극 정도, 어쩌면 더 클지도. 어쨌든 이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의지 반, 호기심 반으로 종종 ‘월간테라’에 기웃거린다. 스튜디오 테라 홈페이지1에 달마다 업로드되는 에세이로, 조경설계 연구실을 거쳐 실무에 뛰어든 이들의 단상을 엿볼 수 있다. 조경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사람, 살짝 빗겨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 멀찍이 떨어져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 등 필자 유형은 다양하다. 자발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약간의 강제성이 있어서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필자에게 “월간테라를 쓰세요”라는 하달이 떨어진다고), 대부분의 필자는 글 도입부터 쓰는 일의 부담감을 호소한다. 뭐, 사정은 딱하다만(?) 보는 사람은 유익하다. 쓰이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상황, 문장이기에 더 흥미롭게 와닿는 표현을 읽는 재미가 있다. 여러 가지의 설계 프로그램을 수족처럼 다뤄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농담이라던지, 학교에서 배운 조경과 실무 사이의 서늘한 간극처럼.
“(포토샵은) 윈도우에 그림판을 탑재한 빌 게이츠를 멋쩍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조경 작업에서 생산되는 스틸컷의 마침표를 찍어준다. 경쟁 프로그램이 없으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꿈을 마지막으로 보여준다. 다만 한 번 이 판에 빠지면,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없어진다. 팽이를 돌려도 알 수가 없다. 시간은 쫓아오고 마감은 남지 않았다면 집착하지 말고, 포토샵을 켜라. … (루미온은) 너무나 직관적이고, 쉽다. 마스터가 되기까지 24시간이면 충분하다. 결과물을 뽑아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타 프로그램 대비 압도적이다. 가히 효율성의 끝판왕이다. 다만 결과물이 지구 반대편 우루과이 사람과 같을 뿐….”(최진호, “도구”)
“설계의 이론적 의미는 대상지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파악하여 실용적이면서 미적인 공간을 형태화하는 과정이지만, 실무를 겪으며 느낀 설계는 여러 가지 제약 조건 속에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 타 분야의 계산 실수로 갑자기 반으로 줄어든 예산에 맞춰 수많은 고민의 결과물들을 들어내야 하기도 하고, 공사 입찰 직전 하달된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디자인을 근본부터 흔들어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생태면적률 40% 이상’과 같은 무심히 정해졌을 지침의 수치만으로 허탈감을 맛보기도 한다.”(이세희, “2020년을 마감하며”)
사실 모두가 안다. 글 같은 건 안 읽어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라는 걸. 글쓰기는 좀체 쉬워지지 않고, 대가 없는 공력이 너무 많이 든다. 소설가 한강도 이런 말을 했더랬지. “저에게 지금도 숙제는 그거에요.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이 뭔지? 그러므로도 아니고, 그리고도 아니고. 글을 쓰기 어렵게 만드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런데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2 비슷한 물음을 곱씹게 된다. 쓰는 일에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 어떤 동력이 되어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답은 결국 각자의 쓰는 자아들만이 어렴풋하게 알겠지.
**각주 정리
1. www.studiosterra.com
2. 안선정, “소설가 한강, ‘글을 쓴다는 것’의 원동력, 결국 글을 읽는 것”, 「독서신문」 2016년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