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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21년 5월

정보
출간일
이매거진 가격 9,000
잡지 가격 10,000

기사리스트

[에디토리얼] 편집자로 산다는 것
책을 편집하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복합적인 작업이다. 특히 『환경과조경』 같은 디자인 전문 월간지의 편집은 기획, 조사, 취재, 인터뷰, 작품 섭외, 필자 섭외, 교정과 교열, 사진 촬영, 편집 디자인, 마케팅이 한 번에 뒤섞여 돌아가는 도전적인 작업이다. 편집자가 멀티플레이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매달 일정한 날짜에 잡지를 내야 하므로 편집자는 항상 시간과 싸운다. 필자가 원고 마감을 지키지 않더라도, 약속한 날까지 사진이 도착하지 않더라도, 데드라인 전날 편집장이 원고 교체를 결정하더라도 무조건 정해진 날 편집을 마무리해야 한다. 편집 일을 하며 무척 당혹스러운 건 한 달을 먼저 산다는 점이다. 12월에 다음 해 1월호를 만들면 막상 새해 첫날이 와도 감흥이 없다. 칼바람 부는 2월에 새봄맞이 3월호에 집중하다 보면 계절을 착각하기 십상이다. 겨울에 봄옷 입고 가을에 겨울옷 입는 편집자가 적지 않다. 무더위가 한창인 늦여름에 낭만적인 가을 풍경 이야기를 쓰다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조경 저널리즘의 최전선을 질주하고 있는 김모아, 윤정훈 편집자의 한 달을 잠깐 들여다보자.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빼서 늘 집중해야 하는 건 기획 업무다. 기획의 스펙트럼은 참 넓다. 1년간 어떤 흐름으로 무슨 주제와 콘텐츠를 구성할지 계획하는 장기 기획,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주제를 발굴하고 엮는 특집 기획, 콘텐츠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긴 호흡의 연재 기획. 물론 면밀한 조사와 성실한 취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머리를 쥐어짜며 작성한 기획서가 곧바로 채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기획서에 대한 편집주간과 편집장의 반응은 기껏해야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아니면 ‘더 발전시켜 봅시다’다. 작품과 필자를 섭외하고 원고 일정을 관리하는 일 앞에는 늘 난맥이 놓인다. 오히려 해외 작품 섭외에는 ‘루틴’이 있어서 공력이 적게 든다. 설계사무소 홈페이지, 뉴스레터, 웹진, 소셜미디어에서 신중히 고른 후보작 리스트를 두고 편집회의를 한다. 후보작을 좁힌 뒤 이메일로 섭외를 시작하는데, 대개 해외사에는 홍보 담당 부서나 직원이 있어서 바로 반응이 온다. 도면, 사진, 설명을 한 묶음으로 정리한 ‘프레스 키트’가 금방 도착한다. 정작 막막한 건 국내 작품의 발굴과 섭외다. 실을 만한 근작을 수소문하기 위해 갖가지 레이더를 총동원한다. 의외로 섭외 성공률이 낮다. 섭외되더라도 진행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 정리된 도면과 출판 가능한 사진이 없는 경우, 정제된 형식의 작품 설명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집과 연재 원고에 맞는 필자를 찾고 섭외하는 일에는 다양한 조사와 공부가 필요하다. 필자와 소통하며 원고를 맡기고 받는 일은 잡지 편집의 중요한 과정이다. 필자는 원고 마감일을 어기기 일쑤다. 요즘은 편집자의 애를 태우는 ‘잠수형’ 필자가 거의 없지만, 연이은 독촉 연락에 이제 곧 보낸다는 말만 반복하는 ‘철가방형’ 필자가 여전히 드물지 않다. 최악의 상황이 언제든 일어난다. 도착한 원고가 편집자의 기획 의도와 완전히 다르거나, 필자와 편집자의 소통 과정에서 서로 조율한 방향과 크게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써달라고 요청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많은 시간이 들고 손이 가는 편집 과정은 교정과 교열, 그리고 편집 디자인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와 취재 기자의 기사가 도착하면 우선 모니터로 일독하며 오탈자를 바로잡고 잡지사의 띄어쓰기 원칙, 외래어 표기법 규칙에 맞게 원고를 수정한다.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머리를 맞대고 수정 원고와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구성하는 편집 디자인이 시작된다. 출력한 초벌 편집본을 놓고 1교가 진행된다. 디자이너의 수정을 거쳐 재출력한 버전으로 편집자를 바꿔가며 2교와 3교를 진행한다. 교정과 교열은 오탈자 정도만 고치는 작업이 아니다. 문법과 어법에 맞지 않는 단어나 문장을 잡아내고, 정확하지 않은 사실이나 표현을 적확하고 자연스러우며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걸러내고 다듬는 일이다. 글이 더 잘 읽히게, 지면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재구성하는 일이다. 4교에서 책임자의 ‘OK’가 떨어지면 인쇄 이전의 과정이 끝나고, 다음 달의 역동적인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여러 멀티플레이어 편집자들이 1982년 7월부터 2021년 5월까지 『환경과조경』 397권을 만들며 어제와 오늘의 한국 조경을 기록하고 내일의 조경 문화를 설계해 왔다. 이번 호 특집 ‘편집자들’에 그들을 초대했다. 『환경과조경』을 거쳐간 김정은, 백정희, 손석범, 양다빈, 조수연, 조한결 편집자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환경과조경』은 어떤 잡지였으며, 조경이란 무슨 의미였나요?”
[풍경 감각] 스트로브잣나무와 개
사철나무, 서양측백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이 나무들은 그 자체보다무언가를 가리고 막는 쓰임으로 익숙하다. 이 식물들을 보면 떠오르는개 한 마리가 있다. 본가 아파트 단지에는 샛길이 있다. 쪽문으로 드나드는 발걸음이만든 짧은 지름길인데, 적절히 나무를 심어둔 단지 내 보행로와 달리식재 밀도가 낮아 길에서 1층 세대의 집 안이 보였다. 베란다에 그개가 늘 있었다. 검고 큰 덩치에 순한 인상, 리트리버 종류가 아니었나싶다. 어머니는 주인과 산책하는 걸 가끔 보았다고 했지만 나와마주칠 때는 늘 그곳에 조용히 누워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 개가 보던 창밖은 어땠을까? 특별한 풍경은 아니었다.그래도 그 집 앞에는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하얀 봄맞이꽃이며 개망초같은 풀꽃, 누군가 심어둔 노란색 낮달맞이꽃, 소국 같은 화초들이계절마다 피고 졌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맺힌 붉은 산수유열매에는 직박구리와 참새가 날아들었고, 스트로브잣나무 숲에서는까치가 울었다. 사람들은 그 풍경을 가로지르며 여름이면 진창을찰박거리고 겨울이면 쌓인 눈을 뽀드득 밟는 소리를 냈다. 언제부턴가 그 개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여쭤보니 이사를간 것 같다고 하신다. 그 집 앞은 여전한데. 검은 개는 지금 어떤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아날로그 시대의 끝자락
남들 하는 건 다 해보라는 부모님 말에 따라 (이러란 뜻은 아니었겠지만) 반년 정도 재수생 생활을 했다. 일명 ‘반수생’, 고작 6개월밖에 안 되는 시간이 어찌나 지루하고 길었는지 수험생 신분을 다시 한 번 벗어던질 때의 해방감과 그해에 일어난 일들을 유독 선명하게 기억한다. 오답 노트 복기에 열을 올리던 2008년 하반기, 미국 대선이 치러졌다. 한창 조경에 관심을 두던 때라 버락 오바마가 기후변화와 관련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게 생각난다. 이듬해 벚꽃이 필 무렵에는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신종플루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열이 나나 싶더니 사흘을 꼬박 앓아누웠다. 무엇보다 휴대 전자기기가 무서운 속도로 변해갔다. 전자사전은 구식이 된 지 오래, PMP가 진화하나 싶더니 가볍고 성능이 좋은 노트북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의 필수품이었던 MP3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터치폰에 좀 익숙해졌나 싶을 즈음 아이폰이 국내에 등장했다. 카메라, 음악 플레이어, 게임기, 웹 서핑은 물론 애플리케이션만 깔면 휴대폰에 수많은 기능을 더할 수 있다니! 손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신입생 때만 해도 책 읽는 일은 조금 유별나거나 고루한 취미로 여겨졌다. 당시의 나 역시 책보다는 바깥이 흥미로웠다. 도서관보다는 영화관이나 전시관에 자주 들락거렸다. 활자가 얌전하게 배열된 종이는 무한 확장이 가능한 액정과 스크린 속 세상보다 좁아 보였다. 이곳저곳 쏘다니기 바빴던 내가 『환경과조경』을 펼치게 된 건, 순전히 설계 수업 때문이었다. 텅 빈 도면에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아이디어는 없고, 참고 자료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노트북은 없었고 핸드폰 액정은 너무 작았고 2층 컴퓨터실과 1층 설계실을 오가기에는 버려지는 시간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내 시야에 한쪽 서가에 주르륵 꽂혀 있는 잡지들이 들어왔다. 검색을 대신해 원하는 키워드를 책등에서 찾아 쏙쏙 뽑아들었다. 에디터의 손길이 닿은 종이 묶음은 무수한 자료의 망망대해를 헤맬 필요 없이 양질의 콘텐츠를 쥐여 주었다. 그때 책상 위에 『환경과조경』을 펼쳐 놓은 모습을 다시 회상하니 큐레이션이 잘 된 전시장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때부터 종이 매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현대 조경을 대표하는 작품은? 다시 읽을 잡지는 통권 201호부터 250호, 2005년 1월부터 2009년 2월호까지다. 내가 2009년 봄 조경학과에 입학했으니, 신입생이 되어 접한 조경의 바로 직전 소식들이 담겨 있는 셈이다. 2005년을 여는 첫 달은 『환경과조경』이 통권 300호를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인 201호가 발간된때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10년, 20년 혹은 100호, 200호와 같은 인위적인 눈금은 우리의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우리에게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계기를 마련”해준다(오휘영, “월간 『환경과조경』 통권 200호 발간에 즈음하여”, 2004월 12월호). 『환경과조경』도 이뜻깊은 숫자를 기념해 표지를 비롯해 전반적인 편집 디자인을 정비하고, 새로운 필진을 발굴하고조경 담론과 조경 비평을 활성화하자는 목표를 되새겼다. 더불어 올린 특집 ‘열 개의 공간, 다섯 가지 시선’은 무려 118쪽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한 굵직한 기획이었다. 당시는 국내에 현대적 의미의 ‘조경’이 들어온 지 30여 년을 지나던 때였는데, 이쯤해서 그간 축적된 조경 작품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편집부 내부에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2014년 11월, 조경설계 실무자를 비롯해 담당 교수, 비평가 200여 명을 대상으로 조경 작품에 관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낼 수 있는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는 152명, 참여율도 높은 편이었다. 이 결과를 토대로 201호에 열 개의 조경 공간을 새롭게 소개하고, 개별 공간에 대한 비평과 설문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경향과 특징, 문제점을 다룬 다섯 편의 글을 수록했다. 편집부가 던진 질문은 다섯 개였다. 나름대로 다채로운 결과가 도출될 수 있도록 고민했을 텐데, 아쉽게도 순위권에 오른 작품의 스펙트럼은 그리 넓지 못하다. 순서만 조금씩 달라질 뿐 계속해서 엇비슷한 이름이 등장한다. 그 질문과 결과를 옮겨 적는다.(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편집자들
조경의 테두리 안에서 의미 있고 흥미로운 콘텐츠를 찾는 편집자의 발걸음은 늘 사람과 공간 사이를 떠돈다. 특집을 기획하고, 취재를 다녀오고, 필자를 독촉하고, 늦은 밤까지 기사를 편집하고, 교정지와 눈싸움을 하다보면 어느새 달이 바뀌어 있다. 한 달 혹은 그보다 오랜 시간을 쏟아 만든 잡지 한 권에는 독자를 위해 세심히 선별한 다양한 이야기가 실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주 사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잡지를 기획하고 구성하는 편집자의 취향과 사유가 은근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만든 사람만 아는 크고 작은 의미가 종이 묶음 사이사이 숨겨져 있다. 『환경과조경』을 거쳐 간 편집자를 초대하는 기획은 오래전부터 편집회의에 오르내린 소재다. 마땅한 특집 아이디어가 없을 때, 잡지가 기념할 만한 숫자를 관통할 때마다 소환했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서랍 속에 봉인하기를 거듭했다. 올 8월 발간될 통권 400호를 기념해, 천천히 오랜 시간 살을 붙여 완성한 이 기획을 지면에 올린다.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섯 명의 OB 에디터를 초청했다. 『환경과조경』에 실린 작품과 특집, 연재, 독특한 꼭지를 편집자의 시점으로 다시 살피며 당시 조경 분야의 이슈와 경향, 잡지의 변천사는 물론 편집자들의 일상과 고민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원고를 청탁하며 던졌던 질문을 독자 여러분에게도 건네고 싶다. “당신에게 『환경과조경』은 어떤 잡지였으며, 조경이란 무슨 의미였나요?” 진행 김모아, 윤정훈 디자인 팽선민
[편집자들] 그때는 맞고 지금은 다르다
주제의 변주 얼마 전 지금 몸담은 『SPACE』의 1980년대 기사들을 찬찬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30~40년의 시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주장들은 ―예를 들어 설계공모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좌담의 내용은― 지금 기사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도 했다.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반복되는 이슈에서는, 다루는 방향이나 동반되는 키워드에 따라 그사이 우리 사회와 분야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처럼 동일한 하루(이슈)를 반복하지만, 조금씩 다른 선택과 행동으로 다른 결과로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번 기회에 2014년 1월호부터 2018년 5월호까지 『환경과조경』에서 내가 참여했던 특집들을떠올려보자니, 마지막 특집 ‘따로 또 같이, 느슨한 연대를 실천하다’(2018년 5월호)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특집 기획서는 “다른 방식의 모임이 생겨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분야를 넘나들며 연대하지만 개인은 존중하는 소위 ‘젊은’ 조경가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소개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지금 보니 2016년 5월호의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은 이 특집을 예비하기 위한 기획이 된 셈이다.) 이런 종류의 기획은 분야의 떠오르는 주자들을 소개하고 경향을 읽어내려는 전문지의 고전적 아이템이다. 그리고 그때 갈무리한 새로운 세대의 특성은 비단 젊은 조경가와 그들이 만드는 조직만의 것은 아니었다. 건축 전문지인 『SPACE』의 특집 ‘1980년대생 건축가 그룹이 나타나다’(2018년 11월호), 그리고 ‘모여서, 건축을, 말하다: 이 시대의 건축 플랫폼’(2020년 11월호)을 진행하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건축인들 역시 느슨하게 연대하며 업역을 다양화하려는 경향을 보며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 자전거 출근기 2.0 좀 더 개인적인 관심사와 연관된 특집이라면, ‘자전거 타고 싶은 도시’(2015년 4월호)를 꼽고 싶다. 이 기획은 자동차 위주의 교통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 해외의 자전거 인프라 소개, 레저에서 일상으로 확산되는 자전거 문화 조명 등 자전거와 연관된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기 위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지면에 대한 사사로운 애정은 아이템의 최초 제안자였던 조한결 기자의 “서울 자전거 출근기”에서 비롯한다. 그때 조 기자는 홍대 인근의 집에서 방배동의 회사까지 대략 13km의 거리를 자전거로 출근하는 체험기를 썼는데, 그의 필력을 믿고 리얼리티와 재미를 위해 체험을 부추겼던 기억이 생생하다.(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김정은은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다. 『건축인(POAR)』, 『SPACE(공간)』, 『건축리포트 와이드(WIDE AR)』, 『환경과조경』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SPACE』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건축과 도시,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금 여기’의 건축 문화를 기록하고, 전문가와대중 사이의 접점을 모색하며 저널리즘의 지평을 넓히는데 관심이있다.
[편집자들] 기록, 매체의 힘
봄을 알리는 꽃망울이 터지던 어느 날, 편집부 재직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특집을 회상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여전히 남들보다 이른 한 달을 살고 있는 편집자의 목소리는 한동안 놓았던 글쓰기에 대한 부담보다 반가움으로 다가왔고, 선뜻 수락한 책임은 원고에 대한 불안과 마감 임박에 배가된 부담감이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다. 이 불안은 다음 호가 출간될 때까지 내 주변을 배회하겠지. 잊고 있었던 편집부에서의 기억들. 통권 300호(2013년 4월호)를 만들며 500호도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졌던 것도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영원히 글쟁이일 줄 알았던 나는 그 사이 다양한 시공간을 지나 조경 식재 전문 면허를 취득하고 뿌리는 같지만 결이 다른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펜을 놓고 삽을 들었지만 내게 『환경과조경』은 열정 가득한 나의 청춘이고, 아련하고 애틋한 고향이다. 대학 시절 학생기자 제도인 통신원을 시작으로 편집부 기자, 편집장, 임원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환경과조경』을 통해 생성된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성장하여 지금의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완의 특집 주제, 용산공원 재직 기간 참여한 잡지를 꼽아보니 통권 146호(2000년 6월호)부터 326호(2015년 6월호)까지 총 181권이다. 15년, 강산이 한 번 반은 바뀌었을 시간이니 기억에 남는 특집은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매호 콘텐츠의 중심이 될 특집을 기획하면서 시사와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며 회의를 했고,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필자를 발굴하고 원고를 청탁하며 남들보다 앞선 시간을 살았다. 인문학적 감성이 담긴 신선한 구성이라 회자되었던 ‘열 개의 공간, 다섯 가지 시선’(2005년 1월호), 의외로 뜨거운 감자가 되어 매체의 역할에 한층 신중해진 계기가 된 ‘모방과 창조, 그 경계에서’(2006년 10월호)가 기억에 남는다. 선유도공원, 월드컵공원, 서울시청 앞 광장, 서울숲, 청계천, 북서울꿈의숲 등 대형 프로젝트를 다룬 특집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집 주제로 가장 많이 거론되고, 기고나 논의의 반복 빈도도 제일 높았으며, 최근까지도 놓을 수 없는 주제인 용산공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백정희는 조경을 전공한 자칭 조경 중독자다. 비전힐스CC, 인천국제공항 등의 조경 현장에서 일하다 2000년 환경과조경에 입사해2015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예건에서 디자인연구소장 및 본부장으로 재직했으며, 2020년 조경공사업 면허를 내고 가든스토리를 설립했다. 조경건설업을 기초로 한 가든 인포테인먼트 전문 회사를꿈꾸고 있다.
[편집자들] 응답하라 2006~2013
"저 잠깐만요. 지금 원고 써달라고 전화한 거 맞죠?” 『환경과조경』이 곧 400호를 맞는다며 전화를 건 기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감이 왔다. 낯선 이와 통화하는 어색함을 과장된 어조와 다소 들뜬 억양으로 무마하고, (이왕이면 한 번에 성공하면 좋을) ‘부탁’이란 걸 할 때의 부담과 초조를 적당한 넉살로 이겨내야 하는 순간! 익숙한 느낌에 원고 청탁 전화라는 걸 금세 눈치채고 말았다. 특집 제목과 기획 의도를 듣고 나니 의아했다. 그 내용과 형식이 요즘 『환경과조경』이 보여주고 있는 기조와 사뭇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 정해놓고 하는 청탁이라는 걸 잘 알기에 일단 원고를 쓰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더 부담이 되었다. 특히 내가 근무했던 2000년대 초반은 조경 분야는 물론 『환경과조경』 자체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던 시기인지라 이 변화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점점 고민이 되었다. 자칫 ‘라떼는 말이야’하는 고루한 회고로 흘러갈 수도 있기에 글의 형식을 정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원고 청탁서의 내용을 기반으로 스스로를 인터뷰하는 글이다. 400호를 기념하기 위한 특집이니 혼자서라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북 치고 장구 치는 잔치를 벌여보고자 한다. 이번 특집의 의도는 예전 『환경과조경』 편집자의 시선으로 당시의 지면을 다시 살펴보는 데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기사를 꼽는다면? 재직 시절 나는 자칭 수상작 전문 기자였다. 글을 쓰기보다 설계공모 당선작의 패널이나 보고서를 보는 일이 더 잦았고, 이를 잡지에 싣기 위해 워드프로세서보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마디로 취재 기자보다는 편집 기자에 가까웠는데, 그렇다고 취재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작품 중에서 꼽아본다면 ‘광화문광장’이 떠오른다. 지리적 맥락이 워낙 중요하기도 하고, 특집(‘광화문광장과 세종로’, 2008년 2월호)을 통해 아이디어 공모(광화문광장 조성사업 아이디어 현상공모)부터 최종 설계안(광화문광장 조성사업 당선작)까지 편집해 소개했으며 이후 완공작을 직접 취재해(‘광화문광장’, 2009년 9월호) 개인적으로 의미가 크다. 작품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뤄보고자 개최한 집담회(‘광화문광장 집담회’, 2009년 9월호)는 당시 편집부 나름의 새로운 시도였다. (후략)
[편집자들]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수화기 너머로 윤정훈 기자가 원고 청탁의 운도 떼기 전에 이번 원고는 무조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환경과조경에 다닐 때부터 OB 에디터 특집은 남기준 편집장이 종종 비장의 카드로 만지작거리던 회심의 한 방이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매달 특집 이슈를 발굴해내느라 지쳐 있던 편집부 풍경에도 화색이 돌았다. 환경과조경을 거쳐간 전설(?) 같은 에디터 중에 누구를 섭외할지 웃음꽃을 피우며 한창 이야기 하다가도, 언젠가 맞이할 400호 특집을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기획을 접곤 했다. 메마른 편집 회의의 분위기를 생각만으로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던 특집에 섭외되다니 반갑고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기대와 초조가 반쯤 뒤섞인 마음으로 메일함을 열던 에디터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 시절 나를 가장 설레게 한 연재 두 꼭지를 꼽았다.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고정희 박사의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2014년 1월호~2016년 12월호)는 국어국문학를 전공해 조경에 무지했던 나를 조경 전문 잡지 에디터로서 성장하게 해준 연재다.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는 특히 대학생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필자의 재치 있는 입담과 해박한 지식을 따라가다 보면, 나같이 조경에 입문하는 사람도 조경이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게 됐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있었다. 고정희 박사는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만드는 탁월한 구성력을 갖춘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100장면의 제목과 주제를 미리 기획하고 연재를 시작했는데, 얼마나 치밀하게 이야기를 구성했는지 장장 3년에 걸쳐 연재하는 동안 처음 기획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조한결은 기술과 예술 사이에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이 만들어질 수있다고 믿는다. 서강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환경과조경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새로운 배움을 찾아 서강대학교 대학원아트&테크놀로지학과에 진학하며 뮤지엄 테크놀로지를 연구했다.현재는 양평군립미술관에서 교육·전시기획 학예사로 일하며 미디어아트 웹진 ‘앨리스온’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자들] 여전히 괜찮은 기억들
오래된 설렘 “20대 초반에 내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방송인 곽정은이 『코스모폴리탄』 기자 시절을 두고 한 말이다. 기자 일이란 한 개인의 능력과 관심사, 의견을 드러내며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식의 하나라는 것. 그로부터 두 달. 운명처럼 원고 청탁 전화가 왔다. 쿵. 6년 전 내 손길이 닿은 첫 번째 잡지를 손에 들었을 때의 설렘이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 했다. “뭘 쓰면 되죠?” 시작과 끝 시작과 끝에 대한 기억은 그 무엇보다 선명하다. 긴장되는 면접처럼 특별한 기억은 오래 남기마련이니까. 환경과조경에서의 시작은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 설계공모였다(2014년 8월호). 허리케인 샌디로 인한 피해를 더는 반복하지 말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첫 출근을 했을 때 이미 페이지 구성을 마친 상황이었다. 공모 내용을 파악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내색은 안했지만 공모에 참여한 비아르케 잉엘스(Bjarke Ingels)의 팬이었기에 이미 익숙한 내용이었다. 비아르케 잉엘스 그룹BIG의 설계안(‘BIG U’)을 담당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어쨌거나 회사 적응이 조금이나마 수월했다. 운이 좋았다. 리질리언스(resilience)(회복탄력성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어의 의미를 한정 짓는 느낌이다)가 화두에 오를 때면 잡지를 기획하는 이들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는 듯했다. 회의 테이블 한가운데 자리한 리질리언스의 변주된 모습만큼 앞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콘텐츠라는 확신에서였을까. 꾸준히 잡지를 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2016년 여름(전진형, ‘리질리언스 읽기’, 338호~343호)과 2018년 여름(‘리질리언트 바이 디자인’, 363호), 2014년부터 2년에 한 번씩 리질리언스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했다. 『환경과조경』 에디터들은 확실히 어쩌다 검색된 완공작을 편하게 싣는 것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밖에서는 감사하다. 그런데 과연 잡지 밖 세상도 같은 얼굴로 상기되어 있을까. 안타깝게도 실무에서 회복탄력성이나 리질리언스가 언급되는 장면에 대한 기억이 없다. 점수를 높이기 위한 ‘친환경’을 붙인 유사 아이템 정도가 최선이었다. 니얼 커크우드(Niall Kirkwood)교수가 한 인터뷰가 떠오르곤했다. “…회복탄력성 등에 대한 전문가가 생겨났을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하버드 GSD의 설계 교육을 묻다”, 2015년 8월호) 그의 말처럼 “실무의 98%”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 같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양다빈은 2014년 여름부터 2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환경과조경과 함께했다. 기술사사무소 렛(LET)에서 조경 설계의 기본을 배웠고,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땅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자 했다. 현재는 엘피스케이프(LPSCAPE)의 팀장으로 조경 디자인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 주요 프로젝트로는 강동구청 청사 조경이 있다.
에르푸르트 부가 2021, 될 박사의 실험
지난 4월 23일 독일 튀링겐 주의 수도 에르푸르트(Erfurt)시에서 2021 연방정원박람회(BUGA)가 막을 열었다. 코로나의 악조건 속에서도 무사히 준비를 마쳤으나 개막을 목전에 두고 4월은 두어 차례 눈을 뿌리는 잔인함을 보였다. 그러나 체리나무는 눈보라 속에서도 곱게 꽃을 피워 주었다. 에르푸르트 부가Erfurt BUGA 2021 지리적으로 볼 때 에르푸르트 시는 독일의 거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동서남북으로 여러 길이 교차하여 중세에 이미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도시 한복판, 언덕 위에 우뚝 선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성당과 교회가 그때의 영화를 증언하고 있다. 에르푸르트의 풍경은 역사만큼 깊다. 중간 산맥의 능선이 멀리 바라보이고 남서쪽에선 튀링겐 숲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맑은 게라 강이 동쪽에서 도시를 감싸고 돌다가 북으로 사라지는데, 이 강이 부려놓은 비옥한 땅에 중세부터 꽃을 키워 꽃의 도시라 불렸다. 19세기 후반에는 유럽 최초의 정원박람회가 바로 이 도시에서 열렸다. 1961년부터 ‘사회주의 국제정원박람회’가 꼬박꼬박 개최되었던 도시다. 꽃의 도시, 정원의 도시 에르푸르트. 그러다가 통일이 되고 나서 어쩐 일인지 30년 동안 잠잠했었다. 늘 같은 장소에서 정원박람회가 열렸는데 이를 ‘에가 공원(Ega Park)’이라 고쳐 부르고 조용히 지내는 듯했다. 그러다 하필 코로나의 시대에 성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에르푸르트 부가’는 두 곳에 나눠서 열린다. 전통의 에가 공원에서 전형적인 정원박람회 프로그램이 전개된다면 새로 조성된 ‘페테르스베르크 요새공원(Zitadelle Petersberg)’에서는 튀링겐 주의 유구한 정원사를 고대까지 되짚어간다. 바로 이 요새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한국의 LH정원이 조성된다. 도시 북쪽 게라 강변에는 50헥타르의 자연공원도 완성되었다. 원래 부가 제3의 장소가 될 예정이었으나 그러자면 울타리를 치고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북구에 사는 지역민 7만 명을 위한 휴양 공간이 되어야 할 곳에 4.5km에 걸쳐 울타리를 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려 그대로 개장했다. 그 대신 시야를 돌려 튀링겐 주 전체를 바라보았다. 독일의 루아르 지방이라 일컬어지는 튀링겐 주에는 오래된 성이 25여 개가 넘게 남아 있다. 이들을 모두 새로 단장해 부가에 수렴시켰다. 이로써 2021년의 부가는 에르푸르트만의 축제가 아니라 튀링겐 주 전체의 축제가 되었다. 에르푸르트 시 녹지국장 사샤 될 박사Dr. Sascha Doll는 “한국에서 온다면 대환영이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볼 것이 너무 많다. 3~4일 관람 프로그램을 짜서 안내하겠다”고 약속했다. 에르푸르트 부가 홍보실에서 내보내는 자료가 차고 넘치지만, 바쁜 녹지국장에게 굳이 인터뷰를 청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조사하며 떠오른 물음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걸 풀기 위해서는 시에서 내보내는 공식 자료보다 깊은 정보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왜 통일되고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부가를 개최하는지 궁금했는데 사샤 될 국장은 시원하게 답변해 주었다. 우선 동과 서의 이념 차이를 극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에르푸르트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정원박람회야말로 진정한 정원 축제고 서쪽의 정원박람회는 상업성을 내세우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편견이 꽤 오래 갔다고 했다. 사샤 될 박사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녹지국장들이 대체로 고리탑탑한데 그는 다이내믹한 신세대에 속한다. 부가 준비가 이미 괘도에 오른 2018년 뒤늦게 합류했다. 달리는 기차에 덥석 뛰어올라 기관차를 몰아야 하는 입장은 어떤 것일까? LH정원 조성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고 좋은 자리도 잡아 주어 호감이 갔다. 사실 우리 쪽에서 제안했을 때는 이미 모든 계획이 마무리된 것은 물론이고 공사가 한창이었기에 오히려 의외였다. 사샤 될 국장은 튀링겐 사람이다. 부친이 식물 재배원을 운영했기에 어려서부터 정원 일이 몸에 뱄고 자연스럽게 조경학과에 진학했다. 드레스덴 대학 우르스 발저(Urs Walser)교수 밑에서 석사를 하고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다가 카셀대학의 슈테판 쾨르너(Stefan Korner)교수의 연구실로 옮겨 박사 학위를 땄다. 그리고 다시 실무 경력을 쌓다가 에르푸르트 시 녹지국장직이 공석이 된 것을 계기로 고향으로 돌아가 그 자리에 앉았다. 드레스덴의 우르스 발저 교수는 소위 말하는 ‘뉴저먼스타일(New German Style)’의 원조다. 카셀 대학의 슈테판 쾨르너 교수는 환경 생태와 조경을 접목한 세대의 대표주자로 그의 거시적 안목은 학계에 정평이 나 있다. 이렇게 출중한 두 스승 밑에서 공부한 사샤 될 박사는 과연 에르푸르트의 녹색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중도 승차해서 이끌어가고 있는 ‘부가호’가 적지 않게 삐거덕거린다는 소문이 들려와 그 진위도 묻고 싶었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자들] 어디든 찾아갑니다, 조경계 동서남북
원고를 청탁받고 조금 망설이기도 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메일을 읽었다. 청탁문 중간의“당신에게 『환경과조경』은 어떤 잡지였으며, 조경이란 무슨 의미였나요?”라는 질문을 본 순간, 잡지사를 다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머릿속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당시를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딱 맞는, 철없는 시절의 풋내기 기자. 미숙했던 나를 되돌아보는 일이 이렇게 겸연쩍은 일일 줄이야. 그렇다. 20년 전쯤의 나는 『환경과조경』의 편집자로서 잡지를 기획하고, 전문가에게 원고를 청탁해 어떻게든 받아내고, 취재를 해 끙끙대며 글을 쓰고 또 교정을 보면서 매달 반복되는 일상을 살았다. 결국 이 글은 환경과조경에 근무했던 시절에 대한 짧은 회고록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 손에 들린 2021년의 『환경과조경』을 보면, 내가 만들었던 그 잡지가 맞는지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영문 제호, 판형, 두께, 서체, 사진 크기, 해외 작품의 수, 집중하는 분야 등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사진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드론이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멋진 사진을 잡지 양면에 가득 차게 넣는 과감한 디자인을 보기 쉽지 않았다. 작품 취재라도 나가려면 사진 기자와 함께 슬라이드용 필름을 몇 통씩 챙겨서, 노출을 확인하고 필름은 얼마나 남았는지 중간중간 점검하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찍어온 사진은 현상을 해 두툼한 라이트 박스에 놓고 확대경으로 일일이 들여다본 다음, 그중에서 잘 나온 것을 골라 을지로에 있는 출력소로 보냈다. 그러면 출력소에서 사진을 스캔해 편집이 가능한 JPEG 파일로 전환해 주었다. 시간도 많이 들었고 사진의 질과 가능했던 편집 디자인의 범주가 지금과는 비교 불가다. 가끔은 구도가 적당하고 원하는 만큼 선명한 사진이 없어 난감하기도 했고, 스캔을 받다가 필름이 손상되어 필름을 제공해준 필자에게 한소리 듣는 경우도 있었다. 어쩌면 실제보다 조금은 과장되거나 포장되어 있을지도 모를, 지금은 옛날이야기로만 느껴지는 기억들이 생생하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조수연은 조경을 전공하고 환경과조경에 입사해 『환경과조경』, 『조경시공』 등의 잡지를 만들었다. 특허 동향 조사, 기술 이전, 모듈 화분 제작, 정원 만들기 등 다양한 경험을 하고, 지금은 휴론네트워크에서 드론 사진과 라이다 3D 맵핑을 이용한 생활(사회) 문제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상도역 롯데캐슬 파크엘
대상지는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하며 부지 주변은 대부분 저밀 주거 단지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이 지역은 상여꾼들이 집단으로 거주해 상투굴이라 불렸으며 상도동의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 사당이고개, 노들고개, 살피재, 능고개 등의 지명이 말해주듯 무척 비탈진 지형이 특징인데, 대상지의 단차는 남북으로 28m에 달했다. 이로 인해 단지 내 형성된 네 개의 단은 입체적 구조를 형성하지만 보행의 연결성을 떨어뜨리고 많은 옹벽을 노출시켰다. 자연스러운 동선 체계를 유도하는 동시에 곳곳에 생긴 옹벽을 고려하는 입체적 조경 계획이 요구됐다. 서쪽 주 출입구에서 시작해 북서쪽 단지 외곽 공원까지 이어지는 폭 6m의 공공 보행 통로는 단지의 중심 보행축이자 선형의 커뮤니티 공간이다. 이 보행 통로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 정원, 네 개의 어린이 놀이터, 세 개의 운동 공간 등의 독립된 오픈스페이스를 마련했다. 이 계획의 우수성을 인정 받아 2019년 건설산업대상 단지조경 부문 대상, 2020년 주거문화종합대상과 미래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 가지 풍경이 만드는 다양성과 깊이 단지 전체를 아우르는 디자인 콘셉트는 리조트 스케이프다. 목가적인, 힐링, 특별한, 여유로운 등의 단어를 설계 어휘로 삼아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한 경관을 경험하는 외부 공간을 조성하고자 했다. 도심 속 휴양지를 모티브로 세 가지 풍경을 제안했다. 풍성한 숲과 구릉이 만드는 언덕, 고급스러운 호텔, 감성과 문화를 담는 세련된 도시다. 이 풍경들이 단지 주변의 다양한 맥락에 유기적으로 대응하고, 공간별 기능과 특성이 드러나게끔 설계를 진행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차별화된 리조트풍의 경관을 제시하여 외부 공간에 다양성과 깊이를 더하고자 했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조경 설계 기술사사무소 아텍플러스 시행 태려건설산업, 상도역지역주택조합 시공 롯데건설 조경 시공 이엔피조경 시설물 스페이스톡, 아르디온, 청우펀스테이션 위치 서울시 동작구 양녕로 220 규모 950 세대 면적 대지 면적: 39,627m2 조경 면적: 14,569m2 완공 2021. 2.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잭과 콩나무 부산판
잭과 콩나무 원고 청탁을 받고 난 후,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동안 수행한 프로젝트가 담긴 폴더들을 하염없이 클릭하며 여닫기를 반복하며 지쳐갈 즈음, 2018년 여름 SRT에 몸을 싣고 매주 부산을 오가며 진행한 하나은행 부산 IPC가 떠올랐다. 하나은행이 부산 서면에 PB 센터를 새로 열면서 기존 건물의 내외부와 조경 공간을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였다. 지명 설계공모를 통해 선정된 안을 토대로 조경, 건물 입면, 벽화, 음향 설계 및 감리를 수행했다. 하나은행 부산 IPC는 초기 브랜딩 단계부터 동화 ‘잭과 콩나무’를 기본 콘셉트로 계획되었다. 잭과 콩나무는 시대 혹은 나라별로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주인공이 콩나무를 타고 하늘 높은 곳에 있는 거인의 집에 올라 보물을 훔친 뒤, 거인의 추격을 뿌리치고 인간 세계로 다시 내려와 콩나무를 벤다는 큰 맥락은 동일하다. 이러한 이야기를 조경의 방식으로 구현해야 했다. 거대한 콩나무 한 그루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콩나무라는 핵심 개념에 따라 방문객이 잭이 되어 콩나무를 타고 거인의 집을 향해 떠나는 모험을 형상화했다. 지하 2층과 지상 1층 사이 계단실은 콩나무의 뿌리, 1층은 콩나무의 얼굴, 12층부터 15층까지의 램프 구간은 하늘을 향해 뻗은 콩나무 줄기, 15층은 거인의 마당, 16층은 거인의 집으로 개념화했다. 콩나무의 뿌리: 지하 구간이 콩나무의 뿌리에 해당됐기 때문에 지하 2층에서 지상 1층에 이르는 계단실에 콩나무의 뿌리가 흙 속을 무작위로 뻗어나가는 형상의 벽화를 제안했다. 발주처는 큰 맥락에서의 디자인 개념에는 동의했으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화적이고 예쁜 이미지를 원했다. 결국 몇 번의 디자인 회의를 거쳐 동화 속 줄거리를 담은 도안이 들어가게 되었다. 콩나무의 얼굴: 1층 외부 공지는 영업점 출입구가 있는 곳이자 서면역 주변의 많은 유동인구가 지나기 때문에 콘셉트를 강력하게 드러내야 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상층부 건축 설계의 가장 큰 형태적 언어인 ‘땡땡이’ 패턴에 주목했다. 상하의를 비슷한 패턴의 옷으로 코디하듯 건물 상부의 패턴에서 착안한 패턴을 1층 건물 입면과 바닥 포장에 적용했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원종호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에서 설계의 기본을 익혔으며, 현대건설에 근무하며 해외 현장에서 시공 경험을 쌓았다. 현재는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JWL)에서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규모의 공간을만들어가고 있다. 조경가가 문화인으로 인정받는 날까지 끊임없이생각하고, 공부하고, 실험해 볼 생각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람들] 길거리가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도록
대만의 사회적 기업 ‘인생백미(人生百味)’의 공동설립자 우옌더(巫彥德)를 만났다. 인생백미는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2015년 설립한 단체로 도시의 노숙인이나 노점상이 사회와 다시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데 목적을 둔다. 인생백미는 노점상이 판매할 음식을 개발해주는 사업으로 출발했다. 이 기업의 영어 이름이 ‘Do You a Flavor(맛을 보여드립니다)’인 이유다. 도시에서 소외되는 계층, 모두를 위한 공공 공간에서조차 쫓겨나는 노숙인과의 작업에서 인생백미가 추구하는 바는 ‘구제’가 아닌 사회와의 ‘연결’이다. 디자인, 문학, 일자리 창출 등 다양한 분야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그들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주려 한다. 소외 계층의 인권을 생각하는 단체답게 생겨난 계기나 과정에서도, 노숙인과 만나는 모든 작업에서도 평등과 공동의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 인생백미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고, 얼마 동안 일했나? 공동창립자 세 명 중 한 사람이다. 현재 인생백미의 전임 직원이 11명인데, 그중에서 조직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이 일을 시작한 지는 6년이 조금 넘었다. 단체가 만들어진 과정이 궁금하다. 디자인, 심리학, 중국어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데, 누군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인가? 예전에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친구 몇 명과 함께 3.18 학생운동1에 참여했는데, 시위 참여자를 위해 마련된 간식 테이블에서 먹을 것을 받으려다가 쫓겨나는 노숙인들을 보게 되었다. 운동의 공간에서조차 그들을 거부한 것이다. 흔히 노숙인은 노동하지 않고 게으르게 산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러한지, 그래서 그들이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날 시위 현장에 함께한 친구들과 마음이 통해 퇴근 후 노숙인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막상 거리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만나보니 대부분 전단지 돌리기와 같은 일용직 노동을 하고 있지만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연히 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인생백미를 설립하게 되었다. 특별히 더 나서서 단체의 설립을 주도한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것은 토론을 통해 합의로 결정됐다. 우리는 모든 의사 결정을 함께하고, 합의되지 않은 건 하지 않는 수평적인 단체다. 사회의 소외된 계층, 그중에서도 가난을 주제로 하는 단체로서 인생백미에게 ‘연결’은 어떤 의미인가? 연결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가족, 친구, 스승과 제자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일 수도 있고, 사업상의 동료, 직장 동료, 상사와 부하 같은 경제적 관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관계’라는 것이다. ‘연결의 단절’은 노숙인들이 모든 ‘관계’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잃은 노숙인들은 아무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우리는 모든 연결이 끊어진 이들에게 소통의 창구를 제공하여 다시 사회와 연결된 한 구성원으로 자립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노숙인들을 향한 마음이 특별한 것 같다. 그들을 거리 친구, 형 또는 오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론적인 질문일 수 있지만, 노숙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이 왜 중요한가? 노숙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노숙인에 대한 사회의 태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회가 노숙인을 위험하고 게으르고 더럽다고 여겼다. 그래서 노숙인을 체포하거나 모욕하거나 쫓아내는 일이 많았다. 사회가 노숙인들을 낙인찍고 차별했다. 하지만 노숙인들이 어떤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상처의 고통 때문에 쉽게 화내고 공격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연결을 잃은 절망감 때문에 자포자기해서 알코올 등에 쉽게 중독되고 ‘씻기’라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아서 자연히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을 돕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는 아주 중요하다. 노숙인들의 부정적인 행동의 원인을 이해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그들에게 상처를 입힐 것인지 아니면 도울 것인지, 그들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할지를 결정짓는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조성빈은 유년 시절을 미국과 한국의 다양한 도시에서 보냈고,공간과 도시에 매료되어 한국과 노르웨이에서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다.늘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와 깊이는 부족해도 본질에 관심이 많고,관계에서든 공간에서든 진정성을 추구한다.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조경작업소 울에서 놀이터와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고 있다. 김연금은 서울 옥수동에서 태어나 살고 있고, 2009년부터 옥수동 옆 약수동에서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다.『텍스트로 만나는 조경』,『커뮤니티디자인을 하다』,『소통으로 장소만들기』,『우연한 풍경은 없다』등 다양한 집필 작업을 해왔다. 2020년에는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인 이규목 교수를 비롯해 여덟 명의 조경가의 글을 엮어『이어 쓰는 조경학개론』을 펴냈다.
[북 스케이프]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정원을 보여주는 법』
책을 읽는 방법은 많고 많지만, 묘사된 바로 그 장소에서 그 책을 읽는 ‘현장 독서’는 단연코 최고다.1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현장에서 읽으며 묘사된 분위기를 공감각적으로 느끼고 나면 그 책은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된다. 정원 답사 길에 현장 독서를 하면서 그 시절 사람들의 뜻을 좇아 보려 했는데 아직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읽을거리가 마땅찮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내 능력이 못 미치거나 하는 등의 이유다. 교토에서는 무소 소세키(夢窓 疎石)의 『몽중문답(夢中問答)』을 읽고 사이호지(西芳寺)를 거닐었지만 과문한 탓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호가유금원기(扈駕遊禁苑記)’를 스마트폰에 담아 창덕궁에 갔는데, 해설사를 따라 정해진 코스를 조금 빠르다 싶게 다녀야 하니 강세황이 감탄했던 후원의 풍취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베르사유에서도 현장 독서를 시도해보았다. 워낙 당대의 기록이 많아 읽을거리를 고르는 것부터 큰일이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과 정원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절대 왕정 체제를 강화하려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성의 2층 중심에 위치한 왕의 침실에서 시작해 무한을 향해 뻗어 나가는 중심축과 태양빛처럼 방사선으로 뻗은 알레(allee)는 강력한 왕권을 시각화하고, 정원 곳곳에는 태양왕을 암시하는 도상이 가득하다. 이 복잡하고 방대한 권력의 극장을 이해하는 일은 당시에도 어려웠는지 여러 인물들이 정원을 거니는 법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전제 군주의 행보는 일거수일투족 모두 주시의 대상이 되고, 그(녀) 또한 이를 통치 수단에 활용했다. 그들에게는 정원 산책이라는 여가 활동도 중요한 정치적 활동이었다. 언제 누구와 어느 정원에 가는지가 중요하다. 이 활동의 무대가 되는 정원, 특히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 정형식 정원의 축을 통한 ‘정치적 풍경’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이러한 공간 통제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베르사유 정원 산책 경로를 소개하는 안내서를 직접 집필했다. 『Maniere de montrer le jardin de Versailles(베르사유 정원을 보여주는 법)』은 제목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몇장짜리 문서에 가깝다.2 하지만 조원가나 정원을 방문한 이의 기록이 아니라 정원의 주인인 왕이 작성한 정원 안내서로는 (아직까지) 유일무이하고,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이나 수정을 거듭할 정도로 루이 14세가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후략) *각주 정리 1. 앤 패디먼, 정영목 역, 『서재 결혼시키기』, 지호, 2001. 2. 후대 사람들이 편집하고 삽화를 덧붙여 만든 책(Manière de montrer les jardins de Versailles par Louis XIV, Art Lys eds, Collectif, 2013) 등은 베르사유 궁의 기념품점이나 프랑스 내 대형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팝니다, 숲
1kg에 960만원. 100g에 1,024만원. 500cc에 324만원. 성수동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어느 가게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의 가격이다. 가격대만 보면 보석이라도 박힌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지만 이곳은 사람이 만든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 진열대에 놓인 제품은 명품 가방, 시계, 귀금속 따위가 아닌 어디에나 있는 것들. 잘게 바스러진 돌, 콩알만한 잡초가 난 축축한 흙, 메마른 나무 껍질과 같은 숲의 잔해다. 숲을 셈하다 숲의 값어치를 현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짧은 질문에서 출발한 ‘숲, 가게’는 독특한 역발상이 돋보이는 전시다. 이 가게는 철저히 시장의 셈법을 따라 자연물에 가격을 매겼다. 원리는 간단하다.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새로 덧붙여진 가치, 즉 부가 가치를 판매 가격에 포함하는 것. 숲을 이루는 부산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부터 생태계에서의 역할, 심지어 사람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감성을 전달하는 점까지 부가 가치로 매겨 가격을 산정했다. 모든 상품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기본 가격이 1원으로 같지만, 여러 항목이 곱해져 최종 가격이 적게는 수백만원, 많게는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상식 밖의 가격에 의문을 갖는 손님들을 위해 전시장에는 친절하게 제품 안내서를 구비해 놓았다. 팸플릿에 적힌 상품별 부가 가치 내역을 읽다 보면 막연하게만 알던 숲의 가치가 차차 이해된다. (후략) * 환경과조경 397호(2021년 5월호) 수록본 일부
[기웃거리는 편집자] 월간테라
회사 앞에서 대표님을 만났을 때 자동으로 굽는 나의 허리와, 집에 온 아빠를 향해 누워서 손을 흔드는 나를 한데 떠올리다 생각했다. 한 사람 안에는 다양한 자아가 있기 마련이라고.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페르소나가 만들어진다면 그중 하나는 ‘쓰는 자아’가 아닐까. 글을 쓰다 스스로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내게 쓰는 자아는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격이다. 한 쪽짜리 글을 쓰는 데도 온종일을 징징댈 정도로 엄살이 심하고, 시도때도 없이 진지해져서 부담스럽다. 하지만 직업이 이렇다 보니 종종 꺼내 살살 달랠 수밖에. 물론 도움을 받기도 한다. 때때로 애매한 생각을 또렷하게 갈무리해주고, 쓰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나의 어떤 면면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면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주르륵 늘어놓은 글자들을 눈으로 짚다보면, 글 너머 누군가의 내밀한 생각과 복잡한 사정을 알게 되니까. 수면 위로 잠시 떠올랐다 사라질 뻔한 생각을 박제한 게 글이라고 한다면 읽는 행위가 꽤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거창한 이유로 남의 글 읽기를 좋아하고 필요하다고 여긴다. 특히 ‘내 것이 아닌’ 이야기, 나로선 쓸 수 없는 글 앞에서는 기꺼이 독자가 되곤 한다. 조경을 콘텐츠로써 다루기 때문일까. 조경 잡지를 만들고 있지만 가끔 (어쩌면 자주) ‘진짜’ 조경에서는 멀찍이 떨어진 기분이 든다. 문학 편집자와 소설가 사이의 간극 정도, 어쩌면 더 클지도. 어쨌든 이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의지 반, 호기심 반으로 종종 ‘월간테라’에 기웃거린다. 스튜디오 테라 홈페이지1에 달마다 업로드되는 에세이로, 조경설계 연구실을 거쳐 실무에 뛰어든 이들의 단상을 엿볼 수 있다. 조경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사람, 살짝 빗겨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 멀찍이 떨어져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 등 필자 유형은 다양하다. 자발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약간의 강제성이 있어서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필자에게 “월간테라를 쓰세요”라는 하달이 떨어진다고), 대부분의 필자는 글 도입부터 쓰는 일의 부담감을 호소한다. 뭐, 사정은 딱하다만(?) 보는 사람은 유익하다. 쓰이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상황, 문장이기에 더 흥미롭게 와닿는 표현을 읽는 재미가 있다. 여러 가지의 설계 프로그램을 수족처럼 다뤄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농담이라던지, 학교에서 배운 조경과 실무 사이의 서늘한 간극처럼. “(포토샵은) 윈도우에 그림판을 탑재한 빌 게이츠를 멋쩍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조경 작업에서 생산되는 스틸컷의 마침표를 찍어준다. 경쟁 프로그램이 없으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꿈을 마지막으로 보여준다. 다만 한 번 이 판에 빠지면,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없어진다. 팽이를 돌려도 알 수가 없다. 시간은 쫓아오고 마감은 남지 않았다면 집착하지 말고, 포토샵을 켜라. … (루미온은) 너무나 직관적이고, 쉽다. 마스터가 되기까지 24시간이면 충분하다. 결과물을 뽑아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타 프로그램 대비 압도적이다. 가히 효율성의 끝판왕이다. 다만 결과물이 지구 반대편 우루과이 사람과 같을 뿐….”(최진호, “도구”) “설계의 이론적 의미는 대상지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파악하여 실용적이면서 미적인 공간을 형태화하는 과정이지만, 실무를 겪으며 느낀 설계는 여러 가지 제약 조건 속에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 타 분야의 계산 실수로 갑자기 반으로 줄어든 예산에 맞춰 수많은 고민의 결과물들을 들어내야 하기도 하고, 공사 입찰 직전 하달된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디자인을 근본부터 흔들어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생태면적률 40% 이상’과 같은 무심히 정해졌을 지침의 수치만으로 허탈감을 맛보기도 한다.”(이세희, “2020년을 마감하며”) 사실 모두가 안다. 글 같은 건 안 읽어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라는 걸. 글쓰기는 좀체 쉬워지지 않고, 대가 없는 공력이 너무 많이 든다. 소설가 한강도 이런 말을 했더랬지. “저에게 지금도 숙제는 그거에요.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이 뭔지? 그러므로도 아니고, 그리고도 아니고. 글을 쓰기 어렵게 만드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런데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2 비슷한 물음을 곱씹게 된다. 쓰는 일에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 어떤 동력이 되어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답은 결국 각자의 쓰는 자아들만이 어렴풋하게 알겠지. **각주 정리 1.www.studiosterra.com 2.안선정, “소설가 한강, ‘글을 쓴다는 것’의 원동력, 결국글을 읽는 것”, 「독서신문」 2016년 12월 25일.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제대로 말 걸고 싶으니까
종이책을 만드는 편집자지만 요즘은 작업 영역이 지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달이 시작될 무렵 잘 마름질된 잡지가 손에 쥐어지면 또 다른 소소한 편집이 시작된다. 도구는 포토샵과 학창 시절 익힌 얄팍한 디자인 기술. 서투른 솜씨로 인스타그램을 채울 콘텐츠를 다듬기 시작한다. “디자인 전문 월간지의 편집”이 “기획, 조사, 취재, 인터뷰, 작품 섭외, 필자 섭외, 교정과 교열, 사진 촬영, 편집 디자인, 마케팅이 한 번에 뒤섞여 돌아가는 도전적인 작업”(이번 호 ‘에디토리얼’)이라면, 잡지의 내용을 각종 SNS에 올릴 콘텐츠로 매만지는 일은 마케팅 정도로 분류될 것이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공간을 채우는 일인데 생각만큼 쉽지 않다. 책 편집과는 한참 다르고, 얕보고 뛰어들었다가 한나절을 몽땅 빼앗긴 적도 있다. 인터넷 속 세상은 한계를 알 수 없는 넓은 세계라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기 위해 내가 쓸 수 있는 공간은 턱없이 작게 느껴진다. 짧은 시간에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니, 되도록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사진을 골라 올린다. 이 과정에서 ‘매력적’이라는 형용사를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한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인증샷’을 남기고 싶은 사진이 좋을지, 조경 전공자의 구미를 당길만한 독특한 디테일을 담는 것이 좋을지. “요즘 시대가 자연을 소비하기만 하잖아요. 특히 인스타그램 같은 이미지 매체를 통해 자연이 그냥 사진 찍기 좋은 배경 이미지로만 소비되죠.”(배정한, “조경가 김아연 인터뷰: 생태학적 상상력과 풍경의 디자인”, 2019년 5월호) 지금처럼 봄바람이 불던 날 나눈 대화에서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던 김아연 교수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머뭇거리다가 프로젝트를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경 사진을 대표 이미지로 설정한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진은 화살표를 누르면 넘겨볼 수 있도록 함께 올린다. 아주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도록. 글귀가 주인공이 되어야 할 때도 있는데, 확장된 선택지 앞에서 더 긴 고뇌에 빠진다. 짧지만 강렬한 보물 같은 문장은 기왕이면 독자들이 스스로 찾게 하고픈 욕심이 생기고, 길고 유려한 문장을 꼽았다가 너무 구구절절한 것 같아 망설인다. 2020년 리뉴얼과 함께 사라진 꼭지 ‘이달의 텍스트’를 꾸릴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가까스로 사용할 구절을 정한 후에도 디자인이라는 한 가지 고비가 더 남아 있다. 메시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보기에 예쁘지 않으면 다른 콘텐츠에 쓸려나가기 일쑤다. 갖은 노력 끝에 정돈된 피드를 보고 있으면, 『잡스 1. 에디터』의 인터뷰 한 구절이 떠오른다. 누구든지 플랫폼에 글과 이미지를 올려 전파할 수 있는 “누구나 에디터가 될 수 시대”.1 ‘○○○님이 회원님의 게시물을 좋아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알림이 울리기 시작하면, 독자와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즐겁다가도 조금 씁쓸해진다. 싸이월드 시대에는 ‘퍼가요~♡’라도 남았는데, 좋아요 버튼은 너무 많은 것을 생략해버린다. 고백하자면 한때 인스타그램의 댓글창에서 여러 의견이 오가는 모습을 꿈꾼 적이 있다. 플랫폼의 속성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 헛된 기대였다. 정신을 차리고 요새는 잡지 콘텐츠를 재가공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정문정 작가의 말처럼 “냉면은 놋그릇에 담고 설렁탕은 뚝배기에 담아야 먹음직”2스러운 법이니까. 『잡스 1. 에디터』의 에세이 꼭지를 통해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2018)을 펴낸 정문정이 본래 잡지를 만들던 에디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잡지 에디터에서 브랜드 저널리즘의 에디터로, 유튜브와 페이스북용 콘텐츠를 만드는 디지털 콘텐츠의 총괄 에디터로,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일을 하며 겪은 일화들이 나를 자꾸만 불안감에 빠트렸다. 포기하지 않고 읽어가다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에디터로서 내가 익힌 기술 중에는 세계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토대로 타인을 설득하는 최적의 방식과 시기를 찾아내는 일도 있었다. 제대로 말 걸고 싶으니까. 에디터는 백 번 듣고 한 번 말한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 넘치는 세상에서 꿋꿋하게.”3 잡지가 다른 인쇄 매체와 구분되는 지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날짜에 반드시 찾아간다는 약속일 테다. 보통 정기 구독이 끝나는 시점은 연말, 아직 일곱 번이나 대화의 기회가 남아 있다. **각주 정리 1. 『잡스 1. 에디터』, 레퍼런스 바이 비, 2019, p.28. 잡스는 매호 하나의 브랜드를 다루는 잡지 『매거진 B』가 새롭게 선보이는 단행본 시리즈다. 브랜드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직업인과 나눈 대화를 인터뷰집 형식으로 전달한다. 2. 같은 책, 정문정, “에디터는 백 번 듣고 한 번 말한다”, p.176. 3. 같은 책, 정문정, “에디터는 백 번 듣고 한 번 말한다”, p.179.
[PRODUCT] 나무에 둘러싸인 아늑한 쉼터 ‘우드세움’
남양주시 청솔공원 수변에 독특한 형태의 원목 구조물이 들어섰다. ‘우드세움Woodseum’은 친환경 건축 자재 전문 기업 케이디우드테크가 출시한 휴게 시설물로, 움막의 형태에서 착안한 원통형 디자인이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지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드세움의 가장 큰 특징은 목재 시설물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유지 관리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목재 시설물은 일반적으로 매년 오일 스테인으로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케이디우드테크의 목재는 친환경 성분의 오르가노우드 규화제가 도포되어 보존 성능이 최대 40년에 달한다. 인체에 무해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한다는 장점도 있다. 특수 처리된 목재는 햇빛과 빗물이 닿아도 부패하지 않고 더 단단해지며, 점차 회색빛으로 변하면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콘크리트 혹은 플라스틱 같은 인공 자재보다 열섬 현상의 영향을 적게 받고 나아가 이산화탄소 흡수에도 기여한다. 구조물 바닥에 모래를 깔아 아이들을 위한 모래 놀이 아지트로 만들거나, 내부에 의자를 비치해 그늘 쉼터로도 쓸 수 있다. 강가 혹은 습지에서는 조류 관찰대로도 사용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