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하나를 들춰 본다. 학부 때 일이다. 조경 관련 수입 서적을 방문 판매 하는 분들이 있었다. 아마도 기억날 것이다. 여러 학교와 사무실을 다니면서 책을 팔았기 때문에, 나름 조경계의 유명인사로 통했다. 학부생 형편에 화려하고 무겁고 비싼 책들을 살 여력이 없었기에, 나는 그분들의 단골이 되지는 못했다. 어느 날 처음 보는 좀 젊은 분이 왔는데, 비싼 수입 서적이 아니라 『환경과조경』 합본을 팔고 있었다. 대략 열 권 정도 되는 잡지를 모아 하나의 소장본으로 묶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딱히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창간호부터 묶은 것이라 책값의 일부를 외상으로 남기고 덜컥 사고 말았다. 다음에 오시면 나머지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뒤로 만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입대 휴학을 하고 또 복학을 하는 사이에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도 그 두꺼운 책을 꼭 챙겨 다녔는데, 책값을 다 치르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다. 언젠가부터 책장에서도 사라져버린 책. 내가 『환경과조경』을 처음 접한 기억이다.
김모아 기자로부터 오는 전화나 메일에는 조금 긴장을 하게 된다. 원고 청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환경과조경』에 꽤 많은 글을 썼는데도 원고를 청탁받으면 늘 부담이 된다. 400호 기념 기획에 대해 들었다. 내가 맡은 부분(51호~100호)의 시기를 따져보니, 거의 30년 전이다. 1992년 6월호부터 1996년 8월호까지, 4년이 조금 넘는 시간. 옛 추억들이 떠올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학 연구소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설계사무실로 옮겨 실무 초년병 시절을 보낸 시기다. 원고 청탁서와 함께 전달된 목차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오래된 프로젝트들이 보였고 반가운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소식이 감감한 선배들의 흔적들도 보였다. 청춘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중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음에도 지나간 청춘의 시간은 너무도 가깝다. 우리 회사가 참여한 프로젝트가 소개되니 반갑기도 하고, 지금은 조경계의 중추 역할을 하는 동료 선후배들의 호기 넘치는 패기를 지면에서 마주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잡지가 발행된 시기(1992년~1996년)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리우환경회의의 결과로 지 구 환경에 대한 이슈가 어느 때보다 활발했고, 정부 조직에서도 환경처가 환경부로 승격되는 변화 가 있었다. 1995년에 실시된 지방 선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가 열렸다. 1989년에 전격 시행된 해외여행자유화 조치로 많은 사람이 손쉽게 해외여행을 하기 시작했던 반면, 새로운 무역 기구의 출현으로 시장 개방이라는 압력을 견뎌야 했던 시기다.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컴퓨터 기술로 인해 설계 환경이 비약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인터넷이라는 낯선 세계를 접하게 된 것도 이때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잡지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환경과조경』은 조경 분야의 유일한 잡지 매체로서, 전문 분야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특집, 특별기획, 기획시리즈, 긴급진단, 긴급제안, 특별기고와 같은 다분히 전투적인 제목의 카테고리를 만들었고, 그 속에서 생성된 수많은 글은 당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선배 세대의 생생한 기록이 되었다.
‘환경’과 조경이라고?
계간지로 출발한 『조경』이 『환경 그리고 조경』으로 제호를 바꾼 때가 통권 9호(1985년 여름호)다. 어떠한 연유에서 ‘환경’을 삽입하게 되었는지 짐작만 할 뿐,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다. 2014년 1월 309호로 새 출발을 하면서도 『환경과조경』의 제호는 유지됐다. 조경 분야에서 환경의 이슈를 다루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환경처가 환경부로 승격되던 1990년대 중반은 꽤 진한 러브콜이 오고 갔던 시기로 보인다. 장관 인터뷰 기사와 여러 환경 관련 이슈들이 특집이나 특별 기획의 형태로 자주 등장한다.
71호(1994년 3월호)와 72호에서 ‘지구환경오염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와 전망’이라는 특집을 연속으로 기획했고, 연이어 73호에서는 ‘환경보전적 21세기 농촌상’을 다뤘다. 81호(1995년 1월호)에는 신년 특별기획으로 ‘친환경적 도시관리’, ‘산림생태자원보전’, ‘녹색서울과 남산’이라는 정책적 주제를 다룬 글들이 실렸다. 86호(1995년 6월호)에서는 ‘환경영향평가의 재조명’이라는 특집으로 무려 7명의 필자가 등판해서 환경영향평가제도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63호(1993년 7월호)에서는 긴급진단이라는 구성으로 ‘지금 우리는 지구환경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절박한 이슈가 등장하는데, 막상 내용을 살펴보니 조경사업법 제정, 조경공사 표준품셈 합리화 방안, 수목단가의 합리적 산정 등 업계 현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주제에서 벗어난 좀 뜬금없는 구성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통권 100호(1996년 8월호)에서 다룬 특집 ‘하천환경 복구 진단’은 12명의 필자가 총출동하여 하천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룬 역대급 기획이었다. … (중략)
* 환경과조경 394호(2021년 2월호) 수록본 일부
박승진은 『환경과조경』 5호가 발행될 때 대학에 입학해 조경을 공부했다. 47호가 나올 때 학교 연구소에서 생애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69호와 함께 설계사무실에 들어가서 실무를 익혔다. 그리고 13년을 다녔다. 227호가 발행되던 날, 작은 설계 스튜디오를 열었다. 며칠 전, 393호가 배달되었고 여전히 작업실에서 설계 도면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