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장마 기간의 밤이다. 여기 안성은 해가 떨어지면 아직은 제법 선선하다. 창문을 열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축사 냄새와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하게 기분 좋은 자연 내음, 거기에 내 옷의 섬유 유연제 향이 뒤섞여 후각을 적신다. 귀를 기울이면 근처 아파트 예정지의 늪지에서 개구리가 비지엠BGM을 깔고 산책하는 사람들의 속삭임이 이따금 간섭하며, 가까운 소형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피아노와 전자음이 뒤섞인 고요한 음악이 들린다. 여름밤의 ASMR. 보이는 것은 스마트폰 메모 앱의 한글 자모뿐이건만 다른 감각기들이 나를 이 여름밤의 낭만으로 휘감는다.
시각이 사라지니 다른 감각이 깨어난다.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이하 원료식물원)과 브릭웰 정원에 관한 원고를 청탁받고 답사도 다녀왔으나 마감을 앞둔 지금까지도 착상이 떠오르지 않다가 문득, 그곳의 지금, 그러니까 밤 풍경이 궁금해졌다.
식물원이라는 로망
원료식물원의 밤엔 인기척이 없을 것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인적이 드물 테니까. 그런데도 그곳의 밤이 궁금해지는 건 식물원이 내게는 실재보다는 낭만, 말하자면 로망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여름밤에 요정이 나타나 마술을 부려 동식물과 곤충 그리고 물과 흙, 돌에게도 목소리를 주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지는 않을까.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은 화장품 원료로 쓰이는 식물을 그러모아 유럽의 식물원 콘셉트로 디자인한 공간이다. 원료식물원은 2012년 오산 아모레 뷰티 파크(이하 뷰티 파크)의 조경을 디자인할 때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뷰티 파크 정면의 도로와 맞닿은 부지에 마련되었던 원료식물원에 경사면을 평지로 만들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뒤 작년에 다시 디자인했다. 듣도 보도 못한 피부 건강에 좋은 식물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이자 인플루언서를 초대해 브랜드를 홍보하는 쇼룸의 역할도 한다. 거기에 화장품 원료의 실험, 연구, 대중 교육 기능도 담당하니 지적인 호기심까지 충족시키는 종합 정원 세트인 셈이다. 공원도 그렇지만식물원이라는 콘셉트는 서양, 특히 유럽에서 발명되어 20세기 전후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유명한 창경원 식물원은 한반도에서 보기 힘든 진귀한 식물의 전시장이었고 우리는 이국적인 식물 취미(taste)에 열광했다.
감각하는 자연
식물원에는 자연의 생명이 충만하게 살아 숨 쉬고 우리는 그 기운을 감각기로 받아들인다. 예술가는 자연의 감각을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사랑을 설명하는 데 활용하곤 한다. 루카 구아 다니노 감독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2017)에서 주인공 소년은 이탈리아의 북부 시골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면서 첫사랑을 만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간다. 여기서 시골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낭만으로 적셔진 찬란한 한때, 내가 온전히 살아있었던 그 순간을 비유하는 데 동원된다. 전작 ‘아이 엠러브(I Am Love)’(2009)의 주인공인 상류층 부인은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 도시 외곽의 자연을 만끽하며 사랑하는 이와 정사를 나눈다. 육체는 자연과 뒤엉킨다. 우리의 땀과 자연의 내음이 혼재된 이미지. 야생 초화류의 향기와 거기에 도취한 벌의 몸짓과 노래와 함께. 사랑의 편에서 보면 사랑이 자연처럼 싱그럽고 때론 야생적(wild)이라는 의미지만, 자연의 편에서 보면 자연이 우리의 사랑같이 낭만이면서 추억이고 에로틱한 심상마저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풀과 꽃, 흙 향기가 코안을 두드리는 야릇한 청량감, 그런 살아있는 자연의 기운을 감각하며 우리가 살아있(었)음을 느낀다.
움직임-감정의 정원 예술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독일의 정원 이론가 히르시펠트(C.C.L. Hirschfeld)는 정원을 움직임(motion)을 통해 감정(emotion)을 불러일으키는 다감각적 예술 장르라고 설명했다.1 여기서 움직임은 자연의 여러 생명의 생동, 그러니까 나뭇가지와 잎의 흔들림, 그것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잔잔한 물의 파장과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자연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생동을 우리가 움직이면서 온몸으로 감각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감동시키는 감정이라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앞의 두 영화에서 사랑을 자연과 동일시하는 건 움직임과 감정이라는 경험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원료식물원은 히르시펠트가 설명한 정원 예술의 정수를 보여 준다. 원료식물원은 뷰티 파크가 공들여 만든 투어 프로그램의 일부다. 큰 틀에서 보면 원료식물원은 아모레퍼시픽의 창업부터 현재까지의 기업 문화를 스토리텔링 전시로 구현한 스토리가든과 아모레퍼시픽과 관련한 과거와 현재의 모든 기록을 그러모아 구축한 박물관인 아카이브 사이에 위치한다. 아쉽게도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다른 곳은 방문할 수 없었지만, 원료식물원은 아모레퍼시픽이 꼼꼼하게 기획한 투어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면서 경험하는 정원이다. 먼저 기업 문화를 이해하고 식물원을 거닐며 화장품 원료로 사용되는 식물들을 실제로 만난 뒤 아모레퍼시픽의 사료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마무리하는 여정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88호(2020년 8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1. 이명준·배정한, “18~19세기 정원 예술에서 현대적 시각성의 등장과 반영: 픽처레스크 미학과 험프리 렙턴의 시각 매체를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43(2), 2015, p.32.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지난봄 안성으로 이사와 한경대학교 친구들과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꼰대는 되지 말자 노력하면서. 코로나19 확산으로 봄학기 내내 ‘집콕’했고 여름 방학에는 ‘홈캉스’를 즐길 예정이다. 간만의 답사 기회를 얻은 데 감사하며, 그런 마음을 답사 일기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