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이니까 다시 돌아왔죠
멀리 북한 땅까지 한눈에 보이는 소이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철원평야는 과거 철원 시가지가 있던 곳이자 사방이 탁 트인 넓은 평원이다. 한국전쟁 때 피난 갔다 고향 땅이 그리워 다시 돌아왔다는 1928년생 임희순 할아버지는 더 이상 번성했던 구철원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없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송두리째 사라진 고향은 이제 기억에만 존재해 이따금 꺼내 볼 뿐이다.
철원에서만 15대를 이어온 임 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임 할아버지는 “철원은 대대로 땅이 비옥하고 좋아 쌀농사가 잘되서 어릴 적 가난하고 없이 살아도 흰 쌀밥만큼은 배부르게 먹었다”고 회상한다. 피난 가서 처음 보리밥을 접해 기름진 고향 땅이 더욱 그리웠다는 그는 친척이자 이웃이던 동네 사람들과 마당에 모여 쌀로 온갖 음식을 만들어 먹던 기억을 풀어놓는다. 마당의 모습, 가족 구성원, 멀리 보이던 석양과 초가집에 대해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이야기하며 마치 그날 그때로 되돌아간 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철원역에 있는 쌀 저장 창고에 쌀 포대를 실어 나르던 일본군 트럭을 뒤따라 쫓던 기억부터, 학창 시절 철원역에서 금강산전기철도 타고 금강산으로 소풍을 갔던 추억, 해질녘 한달음에 뛰어올라 바라보던 숨 막히게 아름다운 철원평야와 시가지 풍경이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에 선하다. 모두 사라진 지 오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절대로 잊히지 않는 애틋하고 번성했던 고향의 일상 풍경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상의 장소, 철원평야
일상이란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의미한다. 개인과 역사, 사회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상호 관계성을 탐구하는 일상사 연구의 거장 알프 뤼트케는 역사 속 이름 없는 대다수 사람의 삶은 고난 속에서 일궈낸 생존의 역사이며 ‘역사 속의 일상들(historische altage)’이라 했다. 또한 역사학자 세르토(M. de Certeau)는 역사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흔적을 마을과 같은 일상의 장소에서 찾는다고 했다. 일상에 대한 탐구는 단순하거나 단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개인이 영향 받고 관계 맺는 생활 속 모든 대상과의 유기적 상호 관계를 세밀히 관찰해야 한다.
임 할아버지의 경험과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고향의 마당, 골목, 평야, 석양의 모습은 유년 시절 일상의 장소에 관한 기억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가 담긴 이야기 속 철원역, 일본군, 쌀 저장 창고와 철원평야는 묵직한 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은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가 하나둘 모여 고향 땅의 흔적을 찾아주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의 지층을 드러내는 중요 단서가 된다.
일상의 장소란 우리 주변의 평범한 환경이자,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대물림 속에서 사람들과 관계 맺고 교류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환경을 말한다. 개인이 애착을 갖는 일상의 장소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수집하고 이를 역사·문화적 맥락에 놓는 일은 평범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비무장지대DMZ 접경 지역인 철원은 정치적, 지리적 특성이 마을 주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대표적 장소다. 남북이 번갈아 통치했던 수복 지구라는 특성과 1953년 정전협정 같은 사건은 철원의 역사·문화적 환경 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굴곡진 역사의 철원평야를 터전으로 삼은 주민들의 일상이 녹아든 사라진 장소, 그곳에 얽힌 평범한 이웃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 처절한 일상은 자유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88호(2020년 8월호) 수록본 일부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 10년간 생활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 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주거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 한국인의 생활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수료했다. SOM 뉴욕 지사, HLW 한국 지사, GS건설, 한옥문화원,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 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 한국인의 참다운 생활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 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 ‘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