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름에는 그 사람을 향한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누군가의 이름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고 더 알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다. 내 이름만큼 익숙한 가족의 이름도 몇 번 곱씹다보면 금방 새삼스러워진다. 엄마가 동네 아줌마와 통화하면서 열정적으로 다른 아줌마 흉을 볼 때, 할머니가 시골에서 보내준 쑥개떡을 먹을 때, 나는 종종 호칭을 생략한 순수한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다보면 서울 사는 최지연 씨의 스펙터클한 동네 인간 관계를 파헤치고 충남 사는 김보물 씨의 떡 짓는 소소한 하루를 엿보고 싶어졌다. 엄마와 할머니가 아닌 지연 씨와 보물 씨를 떠올리면 머릿속에서 단편적으로 인식됐던 두 사람이 입체적으로 그려지곤 했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은 많은 이름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각 장의 제목은 송수정, 이기윤, 권혜정, 조양선, 김성진, 최애선, 임대열, 장유라, 이환의, 유채원, 브리타 훈겐 등으로, 평범한 이름을 가진 50명의 이야기가 약 400쪽의 지면에 촘촘하게 전개된다. 소설의 주요 배경은 온갖 사연이 우글대는 종합병원. 병원을 찾은 환자부터 시작해 의사, 간호사, 보안 요원, 또 다른 환자의 가족, 그 환자의 가족의 가족, 그 가족의 가족의 친구의 사연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14쪽부터 18쪽까지는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이기윤의 하루이고, 24쪽부터 27쪽까지는 데이트 폭력에 희생된 승희라는 여자의 엄마 조양선의 이야기이며, 152쪽부터 157쪽까지는 승희와 종종 말을 섞었던 친구 권나은이 나오고, 77쪽부터 84쪽까지는 이기윤 몸에 있던 타투를 그린 타투이스트 한승조가 등장한다. 애잔한, 섬뜩한, 발랄한, 훈훈한, 처량한, 찌질한, 통쾌한 등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 편을 읽고 나면 우여곡절 많은 하루를 보낸 것 같고, 다음 편엔 누가 나올까 기대하게 된다. 익숙한 이름이 다른 이야기에서 불쑥 나타나면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갑다.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 틈에서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소소한 쾌감은 덤이다.
하나의 서사는 보통 한두 명의 주인공을 구심점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곁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주변인들의 사연은 통편집되거나 많은 생략이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조연이고 엑스트라다. 분명한 이름과 생생한 에피소드를 입은 인물들은 복잡한 관계망에 놓여 다른 사람과 이쪽저쪽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납작하지 않고 두툼하게 묘사되며, 작가는 소소한 이야기들로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어낸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낮고 넓은 테이블에,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쏟아두고 오래오래 맞추고 싶습니다. … 그렇게 맞추다보면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하늘색 조각들만 끝에 남을 때가 잦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거나, 물체의 명확한 윤곽선이 모이거나, 강렬한 색이 있는 조각은 제자리를 찾기 쉬운데 희미한 하늘색 조각들은 어렵습니다. 그런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2
마지막 장에서는 책 속 모든 인물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작가가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각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독자 손에 쥐여 준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납득하며 책을 덮고 목차의 이름들을 찬찬히 복기했다. 다시 떠올린 이름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름에 관해 덧붙이자면, 다음 달 『환경과조경』에도 많은 이름이 등장할 예정이다. 7월호 특집으로 ‘2019 대한민국 조경설계사무소 리포트’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무소를 하나하나 자세히 다루진 못하겠지만 각 사무소의 이름들,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한데 모아 더 많은 이에게 불리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그러다 보면 이름 속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도 누군가의 마음에 심기지 않을까.
각주 정리
1. 정세랑, 『피프티 피플』, 창비, 2016.
2. 같은 책, p.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