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환기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로부터 영감을 받아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의 추상화를 그렸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김광섭의 시에서처럼 밤하늘의 수많은 별이 연상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의 점으로 빠져들게 된다. 김환기는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캔버스에 점을 찍었다고 한다. 점 하나하나마 다 특별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면, 하나의 점을 찍는 데도 수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림 1은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 당선작인 ‘깊은 표면(Deep Surface)’에서 제안한 광장의 포장 이미지다. 오토캐드에 900×900mm의 정사각형 모듈을 만들고, 그 위에 폴리선(polyline)으로 5~7개의 점을 찍어 다각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폴리선 편집 명령edit polyline을 통해 다각형의 폴리선을 스플라인(spline)으로 전환 했다. 이 스플라인 위의 점들을 임의로 옮겨가며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원형들을 재생산했다. 이후 원형 패턴들을 900×900mm 모듈 안 적당한 위치에 배치했다. 몇 번의 복사 명령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지만, 광장의 전체 면적, 즉 3만6천여 개의 그리드 안에 원형의 패턴을 겹쳐지지 않도록 적절한 위치에 놓는 데는 (실제 조성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꼬박 이틀이 걸렸다.
이 작업은 도면 위에 트레이싱지를 깔고 그림을 그리는 아날로그적 작업 방식과 유사하다. 그래픽 알고리즘 편집기인 그래스호퍼 3Dgrasshopper 3D와 패턴 알고리즘 파일(온라인상에서는 수많은 패턴 알고리즘이 무료로 공유된다)을 활용하면 손쉽게 다양한 패턴을 실험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저 방식을 택했을까?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변화 속에서 디자인을 배웠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상상할 때는 항상 펜을 들었다. 머릿속 상상이 손끝의 감각을 통해 지면으로 옮겨지면, 그 그림을 통해 다시 사유하게 되고, 또다시 손은 무언가를 그려낸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사유는 확장되고 디자인은 더욱 구체화된다. 그런데 디지털 프로그램의 정확성과 신속함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생략시킨다. 그래서 디지털 프로그램으로는 디자인을 상상하고 확장하기보다 단순히 결과물을 작성하는 작업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디지털 시대의 산물을 온전히 체득하지 못한 내게 이 방식은 사유와 이미지, 혹은 상상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줄여준다.
여기 또 다른 이미지들(그림 2~6)이 있다. 브이레이V-ray를 통해 얻어지는 렌더ID(Render ID)파일들로, 렌더링 작업의 부산물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중략)...
* 환경과조경 373호(2019년 5월호) 수록본 일부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진양교 교수의 ‘채우기와 비우기’ 설계 이론과 제임스 코너의 실천적 어바니즘을 기반으로 한 간단명료한 디자인에 영감을 받았다. 15년여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 설계와 페이퍼 아키텍처를 추구하며, 독자적인 설계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깊이(invisible depth), 생성적 경계(generative boundary),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unflattening landscape)를 탐구하고 있다. 최근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서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 팀의 당선을 이끌었으며, 개인 자격으로 서울형 저이용 도시공간 혁신 아이디어 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