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인 최승자는 그의 시 ‘삼십 세’에서 서른의 불안함을 그렇게 표현했다. 서른,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접어드는 생물학적인 나이를 뜻함과 동시에 이립而立, 즉 뜻을 세우고 홀로서기에 들어가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이다. 동시에 서른은 가장 아픈 시기이기도 하다. 서른은 안정과 타협을 깨달아가는 기성세대로 들어가면서 아픔을 겪는 통과의례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아파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서른을 위한 적절한 위로와 가이드가 필요하며, 최근 출판계에서 ‘서른’이란 키워드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조경계에 몸담고 있는 서른도 불안한 존재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학이라는 제도권교육과 직장이라는 사회생활의 시기 양쪽을 이제 막 비슷한 비율로 경험한 세대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학창시절에는 ‘조경의 호황’을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으며 졸업과 동시에 ‘조경의 위기’를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위기라는 어휘가 분야마다 유행처럼 쓰이고 있지만 적어도 서른의 조경가에게 조경의 위기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조경은 건설경기 한파와 함께 인접분야로부터 위협을 받는 무력한 존재이자 졸업생들의 취업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처럼 비춰진다.
그렇기에 서른의 조경가들은 지금의 조경에 관심이 많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이다. 하지만 눈앞의 당면한 과제만이 이들의 관심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 건설경기가 풀린다면 언젠가 다시 시장경기가 회복되고, 일이 생기고 취업의 문은 열릴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2배 이상 남은 서른에게 관심 있는 것은 ‘앞으로의 조경’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다시금 조경에 질문을 던져본다.
조경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가? 조경은 의학처럼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분야는 아니다. 또한 이번 4.11 총선처럼 앞으로의 대한민국 4년을 울고 웃게 할 영향력이 있거나 영화와 드라마처럼 대중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지도 않다. 그저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다. 분명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서의 상징적인 공원이 되었든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와 내 집 앞의 화단을 가꾸는 행위와 같은 일상의 조경이 되었든 그것은 삶에 의미를 더해준다. 만약 삶을 풍성하게 하는 행위 자체를 쓸모없다 하지 않는 한 조경이 중요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조경의 가치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조경가, 서른의 눈에 보이는 조경은 약하다. 조경이 건축, 미술, 도시계획, 토목과 같은 다른 분야에 비해 규모가 협소하고 학문적 뿌리가 깊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조경작품의 저작권이 인정받지 못하고 공원이 다른 분야의 대상이 되는 것 때문만도 아니다. 이보다는 지역사회 속에서 조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환경 생태학적 가치가 되었든, 공공성 및 사유성 그리고 잊혀져가고 있는 마을숲, 골목길이나 외부공간에서의 기억 그리고 정원에 대한 욕구, 공간의 미학적인 측면이 되었든 더 많은 조경의 이야기가 우리 입으로 던져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서른이 바라는 소신 있는 조경의 모습이다.
오스트리아 여류작가인 마리 폰 에브너-에센바흐Marie von Ebner-Eschenbach는 “여성이 처음으로 글 읽기를 배웠을 때 마침내 여성 문제가 생겨났다.”라고 언급했다. 인식과 함께 문제점이 조명되고 동시에 문제점이 조명되면 실천하게 된다. 비록 앞서 던진 질문들이 밥을 먹여주고 당장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학창시절 조경과 함께 즐거워하고 아파했던 서른의 조경가에게는 앞으로도 조경에 발을 담고 나아가야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 동시대가 함께 조경의 가치를 공유하여 나갈 때 비로소 우리만의 해법이 꽃 피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