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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의 식물이야기 18
  • 환경과조경 2012년 1월

사람과 같이한 식물의 긴 역사 11

“식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아주 오래 된 과거 속에 묻어두고 왔다. 그 이야기를 들으려면 우선 식물이 걸어 온 길을 되짚어 가야 한다. 그 끝은 아마도 신화의 시대일 것이다. 신화의 시대에 사람들은 식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었다.”

연꽃 - 심청이 물에 빠져야 하는 이유

“꽃을 든 부처”
유학시절, 첫 해의 설계 수업 시간이었다. 설계한 것을 벽에 걸어놓고 각자 설명하는 순서가 되었다. 내 순서가 되어 준비한대로 더듬거리며 설명을 했는데 교수님께서 뜻밖의 질문을 하셨다. 거기 저 나무가 왜 거기 서 있고, 저기 저 돌이 왜 저 자리에 있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하셨다. 막막했다. 그리고 약간 화가 났다. 나무가 거기서 있는 이유까지 말해야 하나. 지금이야 어린 학생들도 논술이다 뭐다 해서 논리가 정연하지만 우리 세대만 해도 ‘말없음표’가 미덕이었었다. 게다가 아직 독일어도 서투른 터여서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진땀만 한 바가지 흘렸던 것 같다. 종일 그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돌이 서 있는데도 이유를 알아야 하나. 서쪽과 동쪽의 사고 차이가 거대한 절벽처럼 다가왔다. 저녁 때 기숙사로 돌아 와 밤새도록 설명서를 썼다. 키워드가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 염화미소染化微笑였다.

“어느 날 영취산에서 석가모니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부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꽃비가 내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 기이한 일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모임은 어느새 술렁임으로 소란스러웠다. 그때 석가모니는 바닥에 떨어져 쌓인 연꽃 하나를 사람들에게 들어 보인다. 다들 이 기이한 일과 스승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가섭이라는 제자만은 미소를 지어 석가모니에게 답하였다.” 이것이 염화미소 혹은 염화시중의 미소다. 물론 내가 염화미소의 뜻을 이해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양의 직관적 사고 체계와 서양의 변증법적 사고 체계의 차이점을 설명하려다보니 위의 사례가 떠올랐던 거였다. 저는 고국에서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아 이런 식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방법 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니 그 점을 감안하시고 앞으로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라는 요지의 설명문이었다.
다음 주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내게 염화미소로 답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물론 꽃을 들어보이시지는 않았지만 내게 미소를 보내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무 말씀도 없이. 나중에 교수님과 어느 정도 친해진 후에 들은 얘긴데 교수님께서도 내 설명문을 읽으신 후 자료도 찾아보시고 생각을 많이 하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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