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oksugung
造營_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으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갔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대부분의 궁이 모두 불타버려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게 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리었다. 선조가 죽은 후 광해군이 이 행궁의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고, 1611년 행궁을 궁궐로 높이며,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를 붙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이 모두 중건된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다시 옮겨갔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1584~1632)를 한 때 이곳에 유폐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 역시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 후 270여 년 동안 경운궁은 궁궐로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왕실에서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영조가 선조의 환도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이곳에 찾아와 배례를 행한 일 정도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시 왕궁으로 부각된 것은 고종 때이며, 재위 말년에 약 10여 년 동안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였다. 고종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듬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면서(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관 옆에 있던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를 전후하여 궁 안에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고, 그제야 덕수궁은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을 갖추게 되었다.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등이 이때 세워졌으며, 정관헌靜觀軒, 돈덕전 등 서양식 건물도 일부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 궁에 큰 불이 나, 전각이 대부분 타버렸으며,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에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등을 중건하고, 중화문 등을 세웠다. 1906년에는 정전인 중화전을 완성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했는데, 이 문은 그때부터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의 정문으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