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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 농사로 가꾸는 도시, 풍경 텃밭
도시농업의 대중예술화를 위한 조경義生於衆(의생어중)많은 사람들의 의견 속에서 올바름도 생긴다도시농업을 주제로 몇 가지 활동을 하면서 돌아보게 된 우리집 주변의 텃밭은 이미 일상의 손쉬운 일거리로서 자리잡고 있는 우리 도시농사의 현황을 보여준다.1) 출퇴근의 반복적인 일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그간 알지 못했던 도시의 풍부한 일상들이 주변에 가득한데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살짝 충격적인 경험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일상의 충격은 비단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독자들도 지금이라도 살고 있는 집 주변을 잠시만 둘러보면 너무도 쉽게 작은 생산 공간과 생산 경관을 확인할 수 있고 자연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반복적인 일상의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있었지만 알지 못하던 것들일 뿐이다. 지금 여기 우리가 도시농업을 조경미학 또는 정원예술이라는 큰 틀에서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집 주변 작은 텃밭처럼 일상적 또는 대중적 위상에서 먼저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삶이란 ‘내’ 생활 주변 작은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시농업 말하기의 풍경우리 도시농업은 몇 가지 문화적 풍경을 만들면서 요란한데, 그 요란스러움은 ‘도시’라는 현대적 문제 공간으로 수렴한다.
1) 복고의 유행수년 전, 사적인 자리에서 건축이라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번안할 경우 무엇이 좋겠냐는 질문을 건축평론가에게 던진 적이 있다. 그는 ‘으뜸짓기’라 대답하며 몇 가지 역사적, 미학적 입장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본다면 차운기의 작품들과 같이 건축 역사적 계보를 찾기 힘든 대상은 의미가 약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축물을 역사적 의미 찾기에 어려움이 있다하여 그들만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또 짓기라는 실천적 행위가 으뜸이라는 평가 기준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지도 의문으로 남았다.여기서 드는 생각은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꼭 어떤 가치 평가를 역사적으로 먼저 해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순수 예술과 과학적 진리를 지향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중요할 수 있으나, 모두와 함께를, 일상을 지향하는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일종의 경계를 두고 그 외의 것에는 의미두지 않으려는 입장으로 보여 불편한 맘이 여전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루어지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 점을 그도 강조한 것이고, 그러할 때 어떤 행위가 보다 아름답게 다가오고 다가가게 됨을 강조한 것이리라.
새로움은 대체로 학문적 겸허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창조적 소수의 파격적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필자는 큰 틀에서 복고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복고는 과거와 역사의 권위에 매달리지 않는다. 자연을 즐기려는 삶의 태도가 본능의 차원으로까지 되돌아간 것이 요즘의 우리 도시 농사 모습이 아닐까 싶고 그것은 자연에 대한 본능적 복고 취향의 발로가 아닌가 한다.우리 도시농업은 으뜸, 즉 배경에 놓여 있는 역사와 위상에서 존재 가치를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학문의 일이 아니라 먼저 일상의 일로서, 자연을 갈구하는 본능의 일로서 복고의 위치임을 확인해야 한다. 만들어진 것의 측면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무시했거나 알지 못하던 것이라는 입장에서, 도시농업을 둘러싼 거대 담론들은 잠시 내려놓고 일상의 미학이라는 미시적 시각으로 현황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복고는 그렇게 시작되어 유행이 되기 때문이다.
2) 작품의 유행대학 시절 동아리에서는 동일한 주제로 논쟁이 길어진 경우가 많았다. 습작을 두고 이것이 작품이네 아니네 한참을 싸우다가 해결되지 않으면 술자리로 옮겨가 도전과 응전을 계속하며 술에 먼저 장렬하게 산화하기도 했었다. 무엇이 작품인가에 대한 질문은 그 당시 첨예한 논쟁을 불러왔는데, 시절이 지나고 그런 논쟁을 했었던 생각을 하면 참으로 머쓱해지곤 한다. 그것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누구나 작품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텍스트의 변화, 작가의 죽음이라는 시대적 전환과 배경이 담겨있다.이 시대에 생각할 점은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작품이냐는 해묵은 질문보다는 모두가 작품이 되게 만든 배경적 전환을 살피는데 있다. 지자체나 평생교육원 등에서 운영하는 도예 교실, 노래 교실, 댄스 교실 그리고 각종 문화 교실 등 대중의 취향과 활동 영역에 맞는 아름다운 삶의 실천 행위들은 우리 삶의 주인공으로 우리 자신을 부각시켜주고 그렇게 부각된 우리의 결과물들은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데, 그것이 작품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작가의 차원이 아닌 대중적 접근의 작품들도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삶에 예술이 가까워졌음은 부정할 수 없고 그것은 결국 우리 삶이 아름다워지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따라서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작은 활동들은 아름다움을 실천하는 중요한 작품 활동으로 되살아나고 그것은 꼭 인류적, 학문적 근거를 배경으로 둔 무겁고 큰 것이 아니어도 됨을 강조해 준다. 모든 것이 나름의 작품인데 어떤 것이 으뜸이고 어떤 것이 평범하다 기준 두어 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도시농업에는 이러한 작품의 성격 변화, 나아가 작품 활동의 위상 변화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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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 도시농업에 관련된 인문학적 이해
『환경과 조경』은 창사 29주년을 맞이하여 “조경, 도시농업을 말하다”라는 특집을 꾸리면서, 조경과 도시농업 사이의 쟁점이 무엇인지를 검토하여 조경 분야의 도시농업에 대한 건강한 논의를 활성화하고, 또한 조경 분야뿐만 아니라 도시농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의 의견을 통해 도시농업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열일곱 편의 글을 실을 계획이다. 그런 중에 일종의 총론으로 표제와 같은 글을 청해왔다. 그러면서 도시농업(또는 도시농사)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밝힘과 동시에 지금 우리가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 달라고 그 세부 내용의 윤곽도 보내왔다.문제의 의미심장함이 이해되면서도 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요청에 선뜻 나서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학에서도 환경미학이라는 분야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데다가, 최근에『미학자가 본 인문도시』(지식산업사)라는 글모음을 펴낸 것이 빌미가 된 듯도 하여 요청을 피해가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우선 조경을 예술의 일환으로 보고, 이에 따라 도시농업과 이념적으로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을 살핀 다음, 이어서 양자의 통합이 예술과 기술의 재통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끝으로 그러한 재통합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아도르느의 자연사 개념에 비추어 반성적으로 점검해 보고자 한다. 길지 않은 글 속에 이와 같은 내용들이 제대로 담길지 자신이 서진 않지만, 함께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 윤곽이나마 적어 본다. 칸트는 자신의 『판단력 비판』(1790)에서 조원술(造園術)을 “자연 산물의 미적 배치”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이는 풀, 꽃, 관목(灌木), 수목(樹木), 하천, 구릉, 계곡과 같은 다양성을 가지고 대지를 장식하되 자연과는 다르게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는 온갖 꽃들이 피어있는 화단을 넓은 의미에서 회화에 넣고자 했는데, 이 때 회화는 당시에 널리 퍼진 대로 “아름다운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마음에 다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독특한 쾌를 생산하는 활동”이라는 예술 정의의 기본 성격을 공유한다. 이에 반해 농업(또는 농사)은 자연이 운행하는 순리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자연을 가꿈으로써 인간 생활에 이익을 가져오는 활동일 수밖에 없다. 근대 미학의 특징은 한, 둘 정도 예외가 없지 않으나, 이처럼 미 곧 쾌를 목표로 하는 관조 활동과 실용적 이익을 추구하는 생산 활동을 서로 조화될 수 없을 정도로 갈라놓은 데 있다. 그로 인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 마치 예술의 최고 경지인 양 호도하는 경향마저 낳게 되는가 하면, 그에 대한 반발로 예술을 현실적 이익의 관점에서만 보아 급기야는 선동, 선전을 정당화하는 궤변이 출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예술 공예 운동을 주도한 윌리엄 모리스의 제자이기도 한 도시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그의 『예술과 기술』에서 양자의 재통합을 위기에 처한 현대 문명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으로 강조하기에 이르렀다.조경과 도시농업에 대해서도 유사한 처방이 가능할 수 있다. 사실상 문화를 뜻하는 로마적 표기 kultura는 각종 유럽 언어에서 어원으로 통용되고 있는데, 그 근본이 농사임을 상기해봄직하다. 더구나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현대 생활에서 양자의 재통합을 시도하는 일은 실로 중차대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한 모델이 과연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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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 도시농업에 관련된 인문학적 이해
『환경과 조경』은 창사 29주년을 맞이하여 “조경, 도시농업을 말하다”라는 특집을 꾸리면서, 조경과 도시농업 사이의 쟁점이 무엇인지를 검토하여 조경 분야의 도시농업에 대한 건강한 논의를 활성화하고, 또한 조경 분야뿐만 아니라 도시농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의 의견을 통해 도시농업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열일곱 편의 글을 실을 계획이다. 그런 중에 일종의 총론으로 표제와 같은 글을 청해왔다. 그러면서 도시농업(또는 도시농사)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밝힘과 동시에 지금 우리가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 달라고 그 세부 내용의 윤곽도 보내왔다.문제의 의미심장함이 이해되면서도 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요청에 선뜻 나서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학에서도 환경미학이라는 분야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데다가, 최근에『미학자가 본 인문도시』(지식산업사)라는 글모음을 펴낸 것이 빌미가 된 듯도 하여 요청을 피해가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우선 조경을 예술의 일환으로 보고, 이에 따라 도시농업과 이념적으로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을 살핀 다음, 이어서 양자의 통합이 예술과 기술의 재통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끝으로 그러한 재통합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아도르느의 자연사 개념에 비추어 반성적으로 점검해 보고자 한다. 길지 않은 글 속에 이와 같은 내용들이 제대로 담길지 자신이 서진 않지만, 함께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 윤곽이나마 적어 본다. 칸트는 자신의 『판단력 비판』(1790)에서 조원술(造園術)을 “자연 산물의 미적 배치”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이는 풀, 꽃, 관목(灌木), 수목(樹木), 하천, 구릉, 계곡과 같은 다양성을 가지고 대지를 장식하되 자연과는 다르게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는 온갖 꽃들이 피어있는 화단을 넓은 의미에서 회화에 넣고자 했는데, 이 때 회화는 당시에 널리 퍼진 대로 “아름다운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마음에 다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독특한 쾌를 생산하는 활동”이라는 예술 정의의 기본 성격을 공유한다. 이에 반해 농업(또는 농사)은 자연이 운행하는 순리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자연을 가꿈으로써 인간 생활에 이익을 가져오는 활동일 수밖에 없다. 근대 미학의 특징은 한, 둘 정도 예외가 없지 않으나, 이처럼 미 곧 쾌를 목표로 하는 관조 활동과 실용적 이익을 추구하는 생산 활동을 서로 조화될 수 없을 정도로 갈라놓은 데 있다. 그로 인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 마치 예술의 최고 경지인 양 호도하는 경향마저 낳게 되는가 하면, 그에 대한 반발로 예술을 현실적 이익의 관점에서만 보아 급기야는 선동, 선전을 정당화하는 궤변이 출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예술 공예 운동을 주도한 윌리엄 모리스의 제자이기도 한 도시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그의 『예술과 기술』에서 양자의 재통합을 위기에 처한 현대 문명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으로 강조하기에 이르렀다.조경과 도시농업에 대해서도 유사한 처방이 가능할 수 있다. 사실상 문화를 뜻하는 로마적 표기 kultura는 각종 유럽 언어에서 어원으로 통용되고 있는데, 그 근본이 농사임을 상기해봄직하다. 더구나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현대 생활에서 양자의 재통합을 시도하는 일은 실로 중차대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한 모델이 과연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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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조건 Conditions For Survival』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노융희 교수가 제안하는‘태양에너지사회’를 제창하는『생존의 조건 Conditions For Survival』환경 문제로 몸살을 앓기 시작한 지구는 앞으로 어떻게 미래 사회를 열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노융희 명예교수는『생명의 조건-생명력 넘치는 태양에너지사회로-Condition For Survival-Toward “Solar Energy-Based Society”Full of VibrantLife-』을 제안하고 있다. 친지구환경적인 사회 구성을 제창하고 있는 이 책은 현재 노 교수가 많은 통계 자료와 사진, 도면과 함께 국문 번역본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번역본이 출판될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노융희 명예교수는 본지를 통해『생명의 조건-생명력 넘치는 태양에너지사회로-』영문번역판 소개를 전해왔다. _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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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면 동천로 대중교통전용지구 설계현상공모
순환, 뫼비우스의 길(주)두인디앤씨 +(주)선일이엔씨(교통) +동아대학교 +(주)아고라(그래픽)설계참여자차욱진 대표이사, 김봉준, 박수정, 김성기, 양선희, 권민정, 이윤지(이상 (주)두인디앤씨)주동환 대표이사, 이상수, 여운태, 박재훈, 안상하, 강경래, 정민규, 이명표(이상 (주)선일이엔씨), 양건석 교수, 박문숙 연구원(이상 동아대학교), 김석훈 대표이사((주)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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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iF Product Design Award
그린 바이크 스테이션2011 iF Product Design Award 수상
그린 에너지 자전거 보관소는 단지 내 입주민들의 공용 자전거 보관소이다. 공용 자전거는 입주자 카드RFID card만 있으면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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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정부청사 2-1구역 건립공사
조달청은 지난 5월 9일 행정안전부의 요청에 따라 조달청이 기획부터 시공 및 사후 관리까지 일괄처리 하는 세종시 정부청사 2-1구역 건립공사의 실시 설계 적격자로 “Welcome CITY”를 제안한 GS건설(주) 컨소시엄이 선정되었다고 밝혔다. 이에 GS건설(주) 컨소시엄에 조경 부문 파트너로 참여한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가 제안한 조경 계획 “웰컴 투 행복청사”를 중점 소개한다.
웰컴 투 행복청사 _ 행복을 담은 4가지 청사이야기GS건설+(주)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주)그리드 E&C
설계참여자 _ GS건설(주)(조영철 부장)+(주)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이민우, 안세헌 대표, 김지현 이사, 김영식, 채권병, 김성호, 이근행, 정명규, 박선영, 김재영, 오현석, 장민, 김지영)+(주)그리드 E&C(임청규 소장, 김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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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경봉사회
나누는 기쁨, 나누는 삶, 봉사활동 하던 날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등, 5월은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달인 것 같다. 너무도 화창했던 지난 5월 5일, 작업복 차림의 조경인들이 성북구 북정마을에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 자리엔 대학에서 조경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부터 업체와 회사에 몸담고 있는 조경인들이 있었고, 1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하버드 디자인스쿨(GSD) 커크우드(Niall G. Kirkwood) 교수도 눈에 띄였다. 고추 모종을 잔뜩 싣고 있는 차가 마을회관 앞에 도착하자, 집결 시간인 오후 2시가 되기 훨씬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던 한 여대생이 까르르 달려와 묻는다. “지금 시작하면 안되나요? 봉사활동 빨리 하고 싶어요.” 그렇게 시작된 한국조경봉사회 2011년 첫 번째 활동의 소소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볼까 한다.
한국조경봉사회는 언제 창립되었나요?한국조경봉사회(Korea Free Landscaping Service for the Poor: KOFLASPO)는 조경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통감한 각계의 조경인 50여 명이 소외 계층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9년 1월 17일 창립되었다. 마침 그날은 우겨 심우경 교수님의 회갑일이기도 했고, 들어온 회갑 축의금의 상당 부분을 조경봉사회의 창립기금으로 쾌척하기도 하셨다. 한국조경봉사회는 창립 이후 성북구 북정마을을 지속적으로 찾아 일곱 차례에 걸쳐 봉사활동을 실시해 왔다. 보통 메타세쿼이아를 비롯한 가로수 식재와 공동 경작지나 주민들의 주거지 앞 텃밭에 고추 모종을 식재하는 일을 했지만, 2009년에는 지역 주민의 요청으로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공터의 낭떠러지 앞에 휠스탑을 설치했고, 마을회관에 어르신들이 앉아 쉬는 낡은 평상 자리에 비를 피할 수 있는 쉘터를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성북구 북정마을과의 인연은?한국조경봉사회가 창립된 직후 처음에는 봉사 대상지를 선정하는데 애를 먹었다. 봉사의 취지에 적합한 장소가 분명 많이 있을 테지만 막상 활동을 시작하려니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전국적인 규모로 봉사활동을 하는 한국봉사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자원봉사 실천마당에서 조경분야를 맡아 참가하게 되었다. 그 장소가 바로 북정마을이었다.2009년 4월 22일의 행사는 끝났지만, 심우경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은 이곳이 바로 한국조경봉사회에서 찾던 적소임을 동감하게 되었고 주민들과 지속적인 교류와 활동을 약속하게 되었다. 이후로 일 년에 두세 번씩 북정마을에 모여 지역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묻고, 조경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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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Deoksugung造營_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으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갔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대부분의 궁이 모두 불타버려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게 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리었다. 선조가 죽은 후 광해군이 이 행궁의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고, 1611년 행궁을 궁궐로 높이며,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를 붙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이 모두 중건된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다시 옮겨갔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1584~1632)를 한 때 이곳에 유폐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 역시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 후 270여 년 동안 경운궁은 궁궐로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왕실에서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영조가 선조의 환도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이곳에 찾아와 배례를 행한 일 정도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시 왕궁으로 부각된 것은 고종 때이며, 재위 말년에 약 10여 년 동안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였다. 고종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듬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면서(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관 옆에 있던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를 전후하여 궁 안에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고, 그제야 덕수궁은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을 갖추게 되었다.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등이 이때 세워졌으며, 정관헌靜觀軒, 돈덕전 등 서양식 건물도 일부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 궁에 큰 불이 나, 전각이 대부분 타버렸으며,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에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등을 중건하고, 중화문 등을 세웠다. 1906년에는 정전인 중화전을 완성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했는데, 이 문은 그때부터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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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따라 밟아본 삼국지 유적과 경관(15)
유비가 한을 품고 병사한 장강삼협 봉절 백제성동오의 육손은 유비의 촉군을 효정 이릉 땅에서 크게 무찔렀다. 유비는 백제성으로 몸을 피하고, 무슨 면목으로 성도로 돌아가겠냐며 백제성에 머물기로 하고 거처를 영안궁이라 했다.유비는 병들어 앓고 있는데 점점 심해질 뿐 낫지 않았다. 더욱이 관우와 장비 두 아우를 잊지 못해 통곡하다가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 승상 제갈량을 급히 오라고 해서 유명을 남기려 한다. 마침 마량의 동생 마속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말이 앞서니 크게 쓸 인재가 아니라고 한다.공명의 손을 잡으며 “그대의 재주가 조비보다 열 배는 나으니 반드시 천하를 안정시키고 대사를 이룰 것이오. 태자를 도울만하면 돕되, 그만한 그릇이 못되거든 그대 스스로 성도의 주인이 되시오.”라고 말한다. 공명은 유비의 간곡한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땀이 흐르고 손발이 떨려왔다. 그대로 땅에 엎드려 고하며 머리를 땅에 짓찧으니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선주는 유영 유리 아들 형제에게 공명에게 절을 올리게 하면서 승상 대하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라고 분부한다.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니(223) 그의 나이 63세였다.황석영『삼국지』8권에서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