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생각 없이 매일 스치는 풍경, 그 앞에 문득 서보자. 그리고 말을 건네 보자. 오늘 하루 어땠냐고? 좀 생뚱맞은 질문도 던져보자. 당신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냐고? 갑작스런 질문에 처음엔 서로 좀 어색하겠지만, 곧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연한 풍경은 없으니까.
우리의 조경이라는, 공공미술이라는 작업이 삶의 풍경에 관계하는 일이라면, 그 삶이 그려내는 풍경을 공대하고 그것들이 품은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의 작업 또한 풍성해지지 않을까? 이 연재를 시작하는 짧은 이유이다.
전쟁이 끝나고 많은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향하던 시절, 가파른 돌산이라 농사도 지을 수 없어 과수원이 있거나 대장장이나 살았다던 옥수동에, 여우도 울었다던 옥수동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먼저 하천가를 따라 집이 지어졌다. 하천가의 바위에 기대어 판자, 천막, 돌, 흙 같이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들로 벽이 세워졌고 검은 루핑으로 지붕도 얹혀졌다. 방과 부엌을 나누는 것은 사치였고 그냥 방 하나가 집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이를 “하꼬방”이라 부른다. 하꼬(箱)는 상자, 궤짝 등을 가리키는 일본어인데, ‘방(房)’이라는 단어가 붙어 하꼬방이 된 것이다. 집도 아닌 방이 궤짝같이 작고 허술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낮 동안 행정의 단속으로 사라졌던 하꼬방은 밤이면 다시 지어졌다. 하천가가 모두 점령되면 그 뒤로 한 켜, 또 한 켜. 어느새 옥수동의 온 산은 하꼬방으로 가득 찼다. 급한 경사는 계단으로 극복했고, 그도 안 되면 돌아서 길을 냈다
“46년 됐어,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서울로 왔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하꼬방 4개만 있었어. 저기 4층 집 있지 거기 하나 있고 저 위에 집 하나 있고 거기엔 우물도 있었지. 그리고 여기에 두 집 있었지. 처음엔 논도 있었지 근데 맨 산이었지, 여우도 울고 나무도 많고 나무가 꽉 찼었지. 처음에는 하꼬방이었다가, 한 칸, 한 칸 지었지, 벽돌 얻어서, 흙담으로 돌로. 처음에는 지프차 천막으로 집 지었다가. 그 땐 한 달 벌어서 방 한 칸 만들고 한 달 벌어서 방 한 칸 만들고 그랬지. 내가 이사 오고 한 3, 4년 되니까 하꼬방이 꽉 차기 시작했지. 길도 없었어. 경치? 경치도 없고, 공기도 안 좋아. 미군이 버리는 기름 갖다 태우고, 석탄 태우고, 연탄도 돈 있는 사람들이나 하고, 여기 공기가 얼마나 안 좋았는데, 시커매서.” - 옥수쌀집 할머니, 개인면담, 2000년 5월 26일
이곳에 찾아든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하늘이라도 가릴 수 있는 잠자리가 필요했을뿐, 길이나 상·하수도 같은 인간다운 생활을 가능케 하는 기반시설은 사치였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하천은 오염되기 시작했고 구분되지 않은 집과 길은 그 자체가 불편이었다. 정부의 손길은 멀었기에, 이들은 스스로 길을 내고 공동 우물과 공동 화장실도 지어 자신들의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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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 사람들이 겪어낸 시간은 처연하기까지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명랑하다. 나무가 비바람과 경쟁하면서 자신의 몸에 새긴 둥그런 파동이, 어르신들 이마의 주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또 그렇게 시간을 온전히 드러내는 리듬은 건강하다. 거짓이 없다. 단추 하나로 몇 수십 미터를 단숨에 오르내리지는 않는다. 한 단 한 단 높이의 변화를 시간 속에서 근육으로 느끼고 견뎌야 한다. 배려심 또한 옥수동 계단이 갖는 미덕일 터이다. 한 방향으로 향하나, 중간에 집이 나타나면 살짝 방향을 틀어주고 불편하지 않도록 단의 폭도 넓혀준다. 보기엔 불편해보이지만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의 몸에 맞춰진 만큼 걸음걸이에 적당한 크기를 지녔다. 또 이들은 얼마나 개성이 뚜렷한지 모르겠다. 지하철역의, 대로에 놓인 육교의 그 일률적이고 재미없는 계단과는 격이 다르다. 시간에 따라 편의에 따라, 상황에 따라 모양을 갖추었기에 그 폭도 높이도 모두 달라 별다른 기교 없이도 지루하지 않다. 부창부수라고 이곳 사람들은 이 개성을 잘도 활용한다. 좀 넓어지는 곳에는 화분을 내어놓기도 하고 오르다 힘들면 잠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기도 하고 계단에 맞추어 집을 잘도 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