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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식물 ; 꽃, 영원한 사랑의 테마 : 꽃과 나무에 깃든 신화와 전설
  • 환경과조경 2008년 5월

꽃은 민속이요 문화
꽃을 인간 생활로 보면 가장 화려한 청춘기요, 꽃의 절정기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향기로운 때이다. 꽃은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등불이어서 아무리 무딘 감정을 가진 사람도 금방 시인으로 만드는 마술 같은 존재다. 입학과 졸업식 같이 즐거운 때는 밝은 빛깔의 꽃을 전하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는 흰색 국화를 전해 고인을 추모한다. 꽃은 부활이다. 효녀 심청도 연꽃을 타고 인당수에서 되살아났다. 내세관을 믿었던 옛 사람들은 꽃이 피고 지는 자연현상을 통해 죽음까지도 초월할 수 있었다.

꽃의 대명사가 된 장미
역사 속에서는 특별한 의미로 기술돼 있는 꽃들이 많다. 동양에서는 모란을 꽃의 왕 화중지왕(花中之王)이라 했다거나 장미를 ‘요염한 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 장미야말로 ‘꽃의 여왕’ 대접을 받는다.
장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색이 다양하고 모양도 여러 가지이며 게다가 향기까지 좋으니 이 보다 좋은 꽃이 어디 있겠는가. 장미는 장미과 장미속에 속하는 낙엽관목 또는 덩굴식물이다. 장미와 근연종 식물에는 월계화, 사계화, 해당화, 인가목, 생열귀나무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어떤 종은 꽃봉오리가 매우 크고 또 어떤 종은 향기가 아주 좋다. 그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종은 색깔이 아주 화려하다. 그래서 장미 육종가들은 이들 꽃의 장점을 모두 합한 새로운 꽃을 만들어냈다. 그 꽃은 탐스러운 꽃봉오리와 짙은 향기를 갖고 있으며 항상 꽃이 피고 매우 아름답다. 그 꽃이 바로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꽃이다.

아프로디테를 위해 피어난 장미
아프로디테는 장미를 좋아했다. 그래서 정원의 곳곳에 장미를 심고 가꾸었다. 어느 날 아프로디테의 아들 큐피드가 정원의 장미 밭에서 놀고 있을 때 장미꽃이 하도 고와 코를 가까이 대고 향기를 맡으려 했다. 그 때 꽃 속에 숨어 있던 벌 한 마리가 큐피드의 콧등을 쏘았다.
“앗! 따거!”
큐피드는 너무나 아파 어머니 아프로디테에게 달려갔다. 아프로디테는 벌들을 모두 잡아 침을 뺏다. 어린 큐피드가 장미를 쉽게 만질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벌들에게서 뽑은 침을 줄기에 하나씩 붙였다. 그 때부터 장미 줄기에 가시가 돋아나게 되었다.
아프로디테에게는 미남 애인이 있었다. 사냥꾼인 아도니스는 씩씩하고 용감한 젊은이였다. 아도니스가 멧돼지 사냥에 나갔다가 멧돼지에게 받쳐 죽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프로디테는 너무 다급하게 달려갔으므로 자신이 심어 놓은 장미 가시를 스스로 밟아 버리고 말았다. 발바닥을 찔린 아프로디테는 피를 흘리며 흰 장미꽃 밭을 뛰어갔으므로 흰 장미가 붉은 핏빛으로 물들고 말았다. 그 때부터 장미는 붉은 색과 흰색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아프로디테의 남편인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는 아내가 장미만 좋아하고 젊은 사냥꾼 아도니스와 놀아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가 가꾼 장미를 뜨겁게 달군 대장간의 불구덩이 속에 던졌다. 이것을 알고 뛰어온 아프로디테는 타다 남은 장미 다발을 끄집어내어 물에 담가 놓았다. 이 장미가 다시 살아나 꽃이 피었는데 그 때부터는 황금색 꽃으로 바뀌어 피어났다.

갈대밭에 묻어둔 왕의 비밀
힘이 있는 자는 약자를 함부로 대해도 되고 힘으로 빼앗아도 된다는 묵인 아래 신화는 시작된다. 꽃에 얽힌 신화를 듣고 자란 유럽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무지함에서 깨우치게 한다는 구실로 대륙을 침략하여 잠재적으로 기독교를 포교하려고 한다. 기독교의 포교 방식이 공격적인 포교를 지향하는 것도 서양의 가치관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성지를 이교도로부터 탈환하겠다는 구실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미개한 이교도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진출하고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으로 식민지를 넓혀 갔다.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전설과 신화를 굳게 믿었던 유럽인들은 아직도 약소국가를 함부로 생각하고 경제적 대국임을 내세워 자본주의적 침략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유럽의 신화가 언제나 폭력 앞에서 굴복으로 일관하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이든 예외는 있게 마련이다. 미다스왕의 갈대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품고 있다. 미다스왕은 유난히 큰 귀를 갖고 있어서 늘 모자를 눌러 쓰고 다녔다. 그러나 왕도 이발을 할 때가 되면 큰 귀를 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미다스왕은 전속 이발사에게 왕의 신체적 비밀을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이발사는 혼자 고민하다가 강가의 갈대밭으로 나가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는 구덩이 속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미다스왕의 귀는 당나귀 귀야! 미다스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구.”
이렇게 말한 뒤 재빨리 구덩이를 메웠다. 그러나 비밀은 그렇게 굳게 지켜지는 법이 아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갈대밭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갈대밭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속삭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절대 권력자에 저항하는 약자의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교감들이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오늘의 유럽을 만들고 또한 민주주의를 꽃 피웠는지 모른다. 유럽인들은 영웅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큰 능력을 가진 절대자를 내세워 그 속에서 무리를 지어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만들어 나가기를 좋아한다.

며느리의 서러운 애환이 깃든 꽃
동양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는 꽃이 한 많은 삶을 누리다 떠난 외로운 영혼들로 표현되는 게 보통이다. 언제나 가신 자의 횡포로 사랑하는 님을 빼앗기고 눈물짓다 숨을 거두는 여인들로 새겨진다. 꽃이 대부분 여인들로 표현되는데 비해 남성은 나무에 비유하여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운명에 대해 저항하며 헤쳐 나가기보다 그 운명에 순응하는 쪽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국화에 얽힌 전설이다.
옛날 중국에 항경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예언자가 말하기를 9월 9일 중구절에는 집을 비우고 들놀이라도 갔다 오기를 권했다. 그래서 항경은 가족들을 이끌고 들놀이를 즐긴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가축이 모두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 후부터 중구절이면 가족들과 함께 들놀이를 하는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시 음미해 보면 언제나 약자는 변명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외부의 힘에 굴복하는 쪽으로 지쳐지고 있다. 서양에서 사뭇 침략적이며 공격적이고 미지를 향해 개척하려는 의지를 보이는데 비해 동양은 그렇지 못하다. 순종적이고 사건을 내면에서 스스로 해결하려 하고 끝내 굴복 당하고 마는 슬픈 이야기로 전개된다. 동양과 서양이 꽃을 두고 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르다.

의상대사와 관음송(觀音松)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나무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에 솔가지를 달고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죽어서 소나무 관에 누워 영면한다. 그만큼 소나무가 우리 정서 깊숙이 자라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낙산사에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기도를 할 때였다. 원효대사도 관음보살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낙산사로 가던 중이었다.
어느 마을의 우물가를 지나게 되었다. 우물 옆 개울에서는 한 여인이 생리대를 빨고 있었다. 목이 마른 대사는 그 여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했다. 여인은 아무 말도 없이 샘물을 퍼 주는 대신 피가 섞인 더러운 물을 퍼 주는 것이었다. 원효대사는 그 물을 마실 수 없어 버렸다.
“원 고약한 인심도 다 있군.”
그리고 스스로 샘물을 떠서 목을 축였다. 실로 상쾌한 물맛이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늙은 소나무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휴제호화상, 휴제호화상 (休醍?和尙. 休醍?和尙)”
고운 목소리로 울더니 날아가 버렸다. 이상하게 여겨 소나무 곁으로 가까이 갔더니 그 곳에서는 여인의 고운 신발 한 짝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원효대사는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갈 길이 바빴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낙산사에 이르렀다. 관세음 보살상을 찾았으나 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관음상 연화 좌대 앞에는 소나무 밑에서 본 것과 같은 신발 한 짝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대사는 비로소 깨달았다. 더러운 물을 퍼 주던 그 여인이 바로 관음보살이었다는 것을. 대사는 다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토굴 속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풍랑이 일어 다시는 들어갈 수 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관음보살이 현신한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렀다.
하필이면 소나무였을까. 예로부터 소나무는 불변의 상징처럼 돼 있다. 사철 푸른 잎을 하고 모진 풍상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 것에서 진리의 참 모습으로 비유되곤 했다.
원효대사와 관련된 이 설화 속에서도 소나무는 진리의 불변을 설파하기 위함인지 모른다. 한 마리의 파랑새로 변신한 관음보살이야말로 언제 어디든 일반 대중과 불자들의 마음에 복음을 던져 줄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이리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법의 진리를 소나무로, 언제 어디든, 누구의 마음속에도 관음보살의 가피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제각기 민족의 성정을 간직한 꽃과 나무
나무에서도 서양과 동양에서 보고 생각하는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노거수에 얽힌 전설이 많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마을마다 동신목이라 하여 신앙적 대상으로까지 나무를 받들어 모신다. 대게 그 마을의 인물과 함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글·그림 _ 오병훈 Oh, Byoung Hoon(한국식물연구회 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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