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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식물 ; 정원속의 이끼
  • 환경과조경 2008년 5월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이끼가 정원을 구성하는 주요 식물로서 등장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정원이 단순히 식물을 모아놓은 덩어리가 아니라 의미 맥락(meaning context) 속에서 구성되어짐을 감안할 때 우리의 정원 속에 이끼가 주요대상으로 등장하지 않았음은 다른 식물에 비해 볼품이 없어 관상 가치가 낮기 때문일 수도 있고, 습하고 그늘진 곳이라면 으레 생육하는 흔한 식물이었기 때문이거나, 백보를 양보하여 관상 가치를 가진 이끼가 있었어도 인위적으로 재배하기가 쉽지 않았음에서도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예로부터 그늘지고 습한 곳은 선호되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이곳에 거주하는 생물들 역시 비호감(非好感)의 대상이기 십상이었고 경우에 따라 제거의 대상되기도 하였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 조상들과 현재의 우리들에게 이끼란 식물은 낯선 식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반면 이웃 일본 정원에서 이끼는 중요한 식물 소재로 아주 오래전부터, 의도적으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오래된 궁이나 절, 숲에 가면 이끼가 지피식물로서 정원의 중요한 요소로서 목적을 가지고 사용되어 왔다. 일본의 정원에서 이끼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이끼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이끼를 보면서 ‘생명체의 근원’, ‘장수’, ‘변함없음’, ‘강인한 생명력’ 등의 의미를 유추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다. 일본의 절이나 고궁에서 보는 이끼 정원은 이 곳 승려들이, 관리인들이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이곳에 날아들어 온 각종 식물 종자들을 종교적 의식을 행하듯 동트는 새벽녘에 하나하나 뽑는 수고를 통해 유지된다. 무엇이든 의미 있는 것을 신성시 하는 일본사람들이 이끼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음은 물론이다.

이끼는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관속식물이 토양을 기반으로 뿌리를 내리고 이와 통도조직을 이용하여 수분과 양분을 이동시킴으로서 생명을 영위한다. 그러나 이끼는 토양층이 없는 콘크리트, 돌과 같은 무기물 표면에 붙어 생명을 영위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지구라는 환경에 던져진 생명체가 살기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모시켜 온 진화의 역사를 보면 정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4억 5천만 년 전 육지에 처음 출현한 이끼가 생육한 토양은 무기물만 있는 환경이었다. 이끼가 뿌리라는 기관을 발달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었다. 이용가능한 양분이 없는 토양에 발을 담그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끼는 부착기능만 갖는 가근(假根)만 발달시켰다. 뿌리가 없으면 신진대사에 필요한 수분과 양분을 어떻게 취했을까? 뿌리가 없으니 직접 몸을 통해 대기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는 방편밖에 남은 게 없다. 그래서 몸으로 대기 중의 수분과 양분이 쉽게 직접 침투되도록 관속식물과 달리 표피에 큐티클(cuticle)층이 없다. 그러나 대기에서 취하는 수분과 양분이 일정하거나 충분하지 않기에 개체는 될 수 있는 한 작게, 또 서로 뭉치도록 함으로써(콜로니 형태 colony) 개체사이의 빈 공간에 수분을 최대로 저장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수분이 건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삼을 포장할 때 이끼로 감싸주는 이유는 이끼의 조직이 거대한 물 저장고처럼 생겨 수분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끼를 주목하는가?
우리에게 낯선 이끼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고 관상가치가 낮음, 축축하고 어둠의 공간에 서식하는 식물, 재배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우리네 정원에서 다만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끼는 없었을 수가 없다. 전술하였듯 이끼는 다른 식물이 살 수 없는 곳에, 고등 식물이 적응하기엔 가혹한 환경에서 생존해 온 식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끼를 정원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다. 정원의 소재로서 뿐 만 아니라 환경재(environmental medium)로 사용코자 하는 시도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점점 늘고 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생활하고 있는 도시는 콘크리트, 철, 유리 등 무기물 덩어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효율’과 ‘속도’로 우리를 몰아붙이는 도시를 보면서 아득한 옛날, 이끼가 출현한 그 시기를 떠올리는 것은 비약일까? 이럴수록 뒤 돌아 보자고, 느리게 가자고 외칠 수 있는 것 또한 우리가 가진 특권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끼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네 삶의 환경이 점점 생명체가 살기에 녹록치 않음을 예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머니의 품 같은 넉넉함을 잃어버린 우리네 삶에서 이끼를 통해 이를 보상받으려는 무의식의 발로는 아닌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쩌든 보잘 것 없지만 이끼에서 유추되는 의미들을 되새김하면서 정원 한구석에 이끼로 정원을 만들어 관찰하는 것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편은 아닐런지….


글 _ 김용규 Kim, Yong Kyu (일송환경복원(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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