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해미읍성
  • 환경과조경 2009년 4월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위치한 면적 194,083㎡, 둘레 2,000m의 조선시대 석성으로, 1418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옮겨온 이후, 효종 3년(1652)에 청주로 옮겨가기까지 230여 년간 충청지역의 주요 군사거점을 이루면서, 현재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동ㆍ서문, 동헌, 객사, 내아 등에서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63년 1월 23일, 사적 116호로 지정되었다.

造營 _ 해미읍성은 원래 토성이었는데, 1407년 해미현이 설치되고 1418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영까지 옮겨 오게 되자 석성으로 고쳐쌓게 되었다. 원래 충청도에는 공주와 덕산 두 곳에 병영이 있었는데, 해안방어를 위해 덕산의 병영을 가까운 해미로 옮겨왔으며, 남아있는 읍성 가운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1579년 10월 이순신 장군이 병영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 동안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효종 때에 북벌책을 내세우면서 전국의 병영이 강화되자 충청도에도 호서병영이 다섯 곳으로 늘어났는데, 그 가운데 선임병영인 호서좌영을 해미읍성에 두었다. 그래서 해미읍성에는 동헌과 객사 중심인 다른 읍성들과 달리 병영이 설치되었으며, 현감이 영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1847년에 현감 겸 영장이던 박인환이 성곽을 크게 개축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곽이 이때 고쳐 쌓은 것이다. 해미읍성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에 천주교인을 박해한 현장이기 때문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도 이곳과 가까운 당진 출신이었으며, 병인박해(1866) 때에도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가까운 합덕 성당의 신라공소로 피신왔다가 붙잡혔다. 이 일대에서 붙잡혔던 천주교인들은 모두 호서좌영이 있던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심문을 받다가 처형되었으므로, 해미읍성은 천주교의 순교 성지이기도 하다. 이후 해미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으며, 1974년에 동·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客舍)와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官衙)를 둘러쌌던 돌담의 유구가 발견되어 현재 발굴, 복원 중이다.

立地 _ 읍성은 가야산 자락이 끝나는 해발 130m의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위치하며, 동남쪽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고 남쪽으로는 해미천이 흐르고 있다. 또한 읍성 북동쪽으로는 보존녹지지역이, 나머지 지역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으며, 남서쪽은 상업지역과 준주거지역이 위치하고 있어 경관을 저해하는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주변환경으로는 덕산도립공원, 개심사, 여숫골(순교 성지), 서산마애삼존불, 원사지, 해미향교, 천수만철새도래지 등이 있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