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공원
공원이 부활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던 공원에 새로운 조명이 집중되고 있다. 공원 문화가 일천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한 세기 앞서서 공원이라는 공간 장치를 발명했던 서구에서도 공원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
공원의 역사는 길지 않다. 본격적인 공원 문화의 서막을 열었던 뉴욕의 센트럴파크(Central Park)가 이제 150살 남짓한 정도다. 전 세계 공원의 유니폼 같은 전형으로 자리 잡은 이 공원은 19세기 대도시의 사회 문제와 환경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해열제이자 진통제였다. 병든 도시로부터 벗어나 평온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녹색의 섬, 곧 피난처 공원(park as refuge)이 센트럴파크의 이념적 지향이었다. 이 공원이 겉옷으로 선택한 것은 녹색 낭만이 그림처럼 가득한 영국 풍경화식 정원(landscape garden)의 픽춰레스크(picturesque) 스타일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도시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은 이 공원의 출발점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도시라는 사실이다. 공원은 도시를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도시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20세기라는 이름의 열차를 타고 센트럴파크표 공원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도시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지난 세기의 중반을 넘어서며 적지 않은 공원들이 도시의 애물단지로 전락해갔다. 공원은 도시의 개발 압력에 늘 시달렸다. 조금만 관리가 소홀해지면 범죄의 온상이 되었고 마약의 천국이 되었으며 홈리스의 안식처가 되었다. 도시에서 큰 면적만 차지하고 있지 누구도 가기를 꺼려하는 모순의 장소가 되어갔다. 공원이 퇴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 역시 도시의 변화 때문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도시라는 조건과 그 속의 문화는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숨 가쁘게 바뀌어갔는데 비해, 공원은 여전히 19세기적 낭만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가 가져온 속도와 이동 개념의 변화, 관광 산업의 눈부신 발전, 공원 같은 교외 전원 지역의 주택 개발, 공원보다 훨씬 재미있는 복합 쇼핑몰의 유행은 공원의 필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했다. 도시로 인해 생겨났던 공원이 도시 때문에 쇠락해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계속 공원을 도시와 떼어놓고 생각했다. 그래도 공원은 녹색의 섬이어야 한다고, 그래야 공원이라고.
20세기 후반을 넘어서며 상황이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다시 공원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공원이 최고의 정치적·경제적 상품으로 부상하고 있는 서울의 경우가 최근의 상황 변화를 쉽게 입증해 준다. 이를 친환경적 삶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현상 정도로만 평가한다면 지나친 단견이다. 한 사이클을 지나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모한 대도시에 대수술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수술에 공원이라는 장치를 다시 투입하고자 하는 전략을 세계의 여러 대도시들이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메트로폴리스에 접속하고 있는 공원은 고립된 피난처가 아니다. 도시를 흐르는 혈관 같은, 도시와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도시의 변신과 진화를 이끄는 도시의 주연이다. 재개발지, 공장 이적지(post-industrial site), 쓰레기매립지(landfill), 군부대 이전지 등 예전의 도시에서는 볼 수 없던 유형의 부지와 공원이 관계를 맺고 있다. 굳이 공장지대로부터 도시 재생의 공원으로 탈바꿈한 뒤스부르그-노드 파크(Duisburg-Nord Landscape Park), 광활한 쓰레기더미에서 공원으로 변신하고 있는 프레쉬킬스 파크(Fresh Kills Park), 그리고 군사기지 공원화의 선례인 포츠담 시민공원(Volks Park Potsdam)이나 다운스뷰 파크(Downsview Park)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숭고미를 뽐내는 공원이 된 물 공장 선유도를, 하늘이 가까운 감각적인 공원이 된 쓰레기 산 난지도를, 곧 미래의 넉넉한 공원이 될 부산 하얄리아 미군 기지를 목격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동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공원은 더 이상 초록의 물감으로 포장된 낭만의 섬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또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은 공원의 부활 역시 도시의 변화 때문이라는 점이다. 공원의 부활은 도시의 변화에 대한 공원의 대응이다. 공원의 진화를 통해 도시를 재생시키고자 하는 실험이다.
공원, 다양한 가치들의 불안한 동거
누구나 공원을 사랑하는 시대다. 근처에 공원이 있으면 집값이 오르고, 아파트 분양 광고도 “공원 같은 아파트”를 내세운다. 시민들은 기꺼이 시간을 내서 공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공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기부에도 참여한다. 공원을 기반으로 하는 시민단체도 적지 않다. 공원과 가장 극적인 함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아마 정치가들일 것이다. 선거 공약의 꽃은 공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우리 시대의 풍경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공원은 어깨가 무겁다. 우리는 공원이라는 단순한 장치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게 작동되기를 기대한다. 공원은 아침형 인간의 하루를 여는 조깅 코스이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등교시킨 주부가 원 마일 웨어(1-mile wear)를 걸치고 모처럼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산책의 장소다. 모니터 앞에서 오전을 시달린 직장인이 햇볕을 쬐며 점심을 즐길 수 있는 간이식당이다. 물론 평범한 주말의 휴식을 공원의 역할에서 빼놓을 수 없다. 공원은 또한 유치원 병아리들의 소풍으로 가득하다. 설레는 야외 웨딩 촬영의 무대로 변신하기도 한다. 자연 관찰은 물론 꽤 전문적인 수준의 환경교육도 공원에서 진행된다. 공원은 직장의 단합대회나 체육대회도 환영해야 한다. 때로는 미술전시도, 음악공연도 열린다. 공원이 홈리스의 안식처이자 갈 곳 없는 노인의 의자이자 가난한 연인의 밀실이라는 점 또한 너무 진부하겠지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공원은 정말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다. 현대 도시의 여러 공간 중 공원만큼 유연하게 복합적인 기능을 담고 있는 곳이 있을까.
공원 앞에는 여러 층위의 단어들이 공원의 성격을 형용하거나 규정하기 위해 동원된다. 공원이라는 두 자만으로는 공원에 투여되는 다양한 가치들을 모두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공원, 생태공원, 문화공원, 예술공원, 조각공원, 복합공원, 전통공원은 물론이고, 공원이 들어선 땅의 출신 성분에 따라 매립지 공원, 공장 이적지 공원, 폐선부지 공원, 군기지 공원 등으로 나뉘기도 한다.
이처럼 공원에는 다양한 이념과 가치가 매우 불안한 상태로 동거하고 있다. 그 이유로 여러 가지 측면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공원은 태생적으로 공공성을 지향해 왔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공원은 자본주의 사회의 본격적 성립기에 생겨난 가장 비자본주의적 공간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공간 이용에 적절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활동들이 공원이라는 이질적이면서도 유연한 공간으로 유입되어 왔다. 그래서 공원은 위태로운 동거의 장소다. 좋은 공원은 이러한 동거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낸 공원일 것이다.
소문만 무성할 뿐인 용산공원에 정치가의 말을 통해, 전문가의 생각을 통해, 시민단체의 행동을 통해 수없이 많은 가치들이 강요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공원의 숙명이다. 용산공원은 벌써부터 어깨가 너무 무겁다.
배정한 Pae, Jeong Hann
단국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