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안의 조경
조경은 ‘자연경관을 만드는 것’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도시의 건설은 자연의 훼손을 야기했고,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조경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경의 역사는 바로 도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 속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은 자연을 지키고 즐기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조경의 역사는 보여준다.
그러므로 조경의 역사는 멀리 고대 도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심지어 ‘하늘정원’까지도 고대 도시에 만들어졌다. 기원전 500년 무렵, 신(新)바빌로니아의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인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빌론의 성벽(城壁) 위에 ‘하늘정원’을 건설했다. ‘고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이 정원은 엄청난 노력의 산물이었다. 성벽 위에 많은 양의 흙을 가져다가 쌓고 여기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 물을 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이 지역은 고대에도 메마른 곳이었다. 물탱크와 물펌프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이 정원을 ‘지극한 사랑의 결정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보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것 같다.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의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던 것처럼 이 정원을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조경은 도시 건설의 필수적 요소가 된다. 물론 고대에도 중세에도 조경은 이루어졌다. 예컨대 조선의 서울에서도 조경은 이루어졌다. 가장 좋은 예는 서울의 좌청룡이었던 낙산에 나무를 심어 숲을 가꿨던 것이다. 서울의 동쪽 경계를 지키는 산이었으나 그 세가 약했기 때문에 나무를 심어 인위적으로 그 세를 키우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풍수적 조경’이었다. 또 다른 예로는 청계천 둑 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두 줄로 길게 늘어선 버드나무들이 살랑대는 모습이 일품이었다고 전하거니와, 이것은 둑을 지키기 위한 ‘토목적 조경’이었으며, 또한 도시의 풍치를 높이기 위한 ‘문화적 조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예에도 불구하고 조경이 도시 건설의 필수적 요소로 자리잡는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근대 도시는 대대적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건설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조경의 필요성이 크게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 도시는 무서운 도시였다. 런던의 근대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근대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시나브로 죽어갔다.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이 비참한 역사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조경은 그저 보기 좋게 ‘인공적 자연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무서운 근대 도시를 즐겁고 쾌적한 도시로 만들기 위한 필수적 실천으로 확립되었다. 이것은 근대 도시에서 조경이 ‘생태문화정치’의 핵심으로 떠올랐다는 것을 뜻한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런던의 하이드파크, 파리의 뤽상부르공원 등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조경은 시민을 위한 도시, 자연이 살아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 실천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조경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치의 대응은 여전히 수단적 차원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정치인들은 조경을 농락하고 조경 전문가들은 거기에 뇌동해서 도시를 계속 망가트리고 있지는 않은가?
사라진 청계천
청계천복원사업은 한국의 조경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 일제 때부터 시작되어 박정희에 의해 완공된 청계천고가도로를 뜯어내어 서울 도심의 면모를 일신했다는 점에서 청계천복원사업은 확실히 한국의 조경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볼 만하다. 특히 도심 수변공간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웠다는 점에서 청계천복원사업은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원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청계천이란 무엇인가? 이 점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조경은 ‘인공적 자연을 꾸미는 행위’라는 저열한 수단적 차원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청계천은 이른바 ‘600년 역사도시 서울’을 대표하는 자연유적이자 토목유적이다. 인왕산과 북악산 줄기의 계곡이 청계천의 발원지이다. 중랑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이 자연하천을 커다란 ‘하수구’로 삼아서 서울이라는 도시가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계천만으로 서울의 빗물과 하수를 모두 배수할 수는 없었다. 큰비만 오면 청계천은 넘쳐흘렀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계천의 범람은 더욱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즉위 36년인 1760년 3월에 대대적으로 준설하고 둑을 정비했다. 바로 이 때 둑 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 아름다운 경관을 정조 때의 실학자인 유득공은 다음과 같은 한시로 노래하기도 했다(임종국, 「한국사회풍속야사」, 서문당, 1980, 69쪽).
두 줄기 푸른 버들 가이 없는데 (兩行綠柳舊無邊)
저물어 돌아가니 아득만하다 (日暮人歸只暗然)
청계천복원사업은 이런 역사와 자연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너무나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때문에 청계천복원사업은 전형적인 ‘개발주의 조경’이 되고 말았다.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시민위원들이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명박 시장과 양윤재 당시 청계천복원추진단장은 올바른 복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복원’을 내걸고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청계천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새롭게 ‘명박천’이 들어섰다. 그 특징은 세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홍 성 태 Hong Seong Tae
상지대 교수,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