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마다 누더기처럼 난잡亂雜하게 붙어 있는 광고물. 그런 걸 보면서 살아야 하는 시민들은 우리네 생활 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는 듯해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 심각한 정서 불안증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잡하고 저질적인 생활환경이 우리 후세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삭막하기만 한 우리네 도시 환경 속에서도 근래 두 개의 ‘아름다운 사건’이 눈에 띄어 필자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중 하나는 서울 충무로 신세계 본점에서 볼 수 있다. 신세계 본점이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가면서 커다란 보호벽을 설치하였는데, 그 외벽에 ‘겨울비Golconde’라는 대형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겨울비’는 벨기에 태생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1898~1967년)가 1953년에 제작한 유화로 원본의 크기는 80.7x100.6센티미터이다. 겨울철 스산스럽게 내리는 비처럼 멜론 모양의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하늘에서 수없이 내려오고 있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보도 자료에 의하면 신세계는 가로 150미터, 세로 20미터 크기의 알루미늄 판에 이 작품을 프린트하여 보호 외벽에 부착하였다고 한다. 신세계 측이 1년간 작품을 사용하는 데 지불하는 저작권료는 약 1억 원이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지 않은 사용료이지만 그 앞을 지나는 수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도시 미관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시도가 아닌가 싶다.
다른 하나는 몇 년 전부터 광화문 네거리 교보생명빌딩에 등장했다. 아름다운 시구詩句가 담긴 대형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난잡한 도시 환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독하게 피어난 작은 야생화野生花 같다.
. 이 시구에 어울리는 멋진 필체로 쓴 대형 패널(20x8미터)이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려 있는 것을 필자는 승용차를 타고 가다 처음 봤다. 당시 그 시구가 하도 정감스럽게 느껴져 종이에 얼른 메모하기도 했다. 그 뒤론 교보빌딩 앞을 지날 때마다 항상 아름다운 시구를 다시 보고 속으로 읊어보게 된다. 같은 시구가 실린 현판을 강남 교보빌딩에서도 볼 수 있는데, 모르긴 해도 지방 도시에 있는 교보생명빌딩에도 그러하리라 생각하니 그저 고마운 생각이 들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시구를 읽으며 마음 한 자락에 꿈을 간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보생명보험이란 기업이 사회에서 얻은 이윤의 일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일 것이다. 퍽 좋은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실로 한 차원 높은 기업 이미지 관리라는 생각이 든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아름다운 구절 밑에는 이라는 회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다. 처음엔 저렇게 아름다운 글을 만들어내는 직원을 두고, 그러한 글을 기업 홍보물로 내놓기로 결정한 회사 최고경영진에게 조용히 감사와 경의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어느 좌석에서 교보빌딩에 등장하는 그 아름다운 글귀들이 국내 유명 기성 시인의 시에서 발췌한 거라는 걸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소개된 시구는 마종기馬鍾基 시인의 것이라고 한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필자처럼 문학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는 어느 시구가 어느 시인의 것인지를 알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현판에 쓰인 시구 끝에 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니, 마땅히 홍보팀에 감성 있는 직원이 있으려니 여길 만하다.
그런데 원작자原作者를 밝혀야 할 그 자리에 이라고 썼다면 이는 분명 표절剽竊 행위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는 지적재산권을 경시하는 우리 사회의 걱정스러운 풍토를 반증하는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교보생명보험 같은 국내 굴지의 기업이 그런 잘못된 풍토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듯해 매우 실망스럽고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신세계 본점 보호 외벽에 장식된 대형 그림에는 작가 이름, 작품명 그리고 제작년도가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보생명보험은 국내 기업 중에서 특유한 기업 문화를 통해 깨끗한 이미지를 가꾸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국내 굴지의 대형 서점을 운영하는 기업으로도 널리 알려져 그 높은 문화성이 자연스레 부각되어 왔다고 본다. 그러기에 더욱이 아름다운 시구 밑에 시인의 이름이 명기되었다면 더 돋보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이 성 낙 ·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사)현대미술관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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