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는 2004년 청계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세운상가 4개 지구의 재개발을 시행키로 하여 지명국제현상을 실시하였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근대적 개발논리에 의해 급격히 만들어진 거대도시에 대한 반성으로 원래 그 장소에 있던 물길을 복원한다는, 도시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매우 뜻 깊은 실천적 선언으로 인식되었다. 많은 건축가들과 도시계획가를 포함한 건축관련 전문가들이 청계천 복원의 졸속한 계획과 무리한 시행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평가를 내리며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은 기능과 편리함을 위주로 개발된 ‘빠름’의 근대 도시에 장소성을 인지할 수 있는 자연과 역사를 회복시킴으로 도시에 ‘느림’의 미학을 덧입혀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첫걸음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다.
그런데 청계천 복원과 병행되는 주변의 사업의 방향은 매우 엉뚱한 곳으로 치닫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위에 명기된 세운상가 주변의 재개발이다.
세운상가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근대의 논리로 무장된 거대규모의 건물을 도시의 기존 축에 가로질러 놓음으로써 도시전체의 맥락을 깨뜨려버린 대표적 실패사례이다.
강북의 가장 실패한 도시계획적 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종묘를 마주한 세운 상가는 근대건축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낭패의 상징이다. 가장 중요한 행정적 결정은 개발독재시대와 조금도 다름없이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이 장소에 대한 재개발 여부에 대한 검토와 대안 제시는 불과 2년 전 하바드대학원생들의 2학기 프로젝트로 주어졌었다. 그 이후 몇몇 교수들이 참여하여 설계지침을 만들고 어리숙한 시행사가 사업성검토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 뒤 갑자기 국제지명현상설계가 실시되었다. 설계지침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교수들마저 걱정하는 전형적인 고밀도 재개발의 방식이라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울시의 4대문 안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로 중저밀도의 개발을 지향하기 위해 상업지역의 용적율을 600%이하로 낮추고 자동차의 유입도 점차적으로 줄여나가는 식의 개발방향을 세워 놓은 곳이다. 오랜 시간의 논의와 협의를 거쳐 결정된 이와 같은 사항들을 무시하며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완전히 망각한 채 이곳에 30년전 실패했던 무모한 근대적 실험을 21세기 초에 외국 건축가들의 손을 빌어 다시 시도하려 하고 있다. 서울시는 세운상가의 실패의 원인을 이 설계를 담당했던 국내건축가의 탓으로 돌리려는 듯 하다. 프랑스에서 그랜드프로젝트를 통해 자국의 건축가들을 세계적 건축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고도의 문화적 정책을 논하지 않더라도 정도 600년의 중심지인 사대문안, 그리고 그 역사의 중심인 종묘 주변에 대한 건축적 논의의 장에 한국의 건축가를 소외시키는 서울시의 건축정책은 도대체 어디에 기인하는지 묻고 싶다. 정치적 논리를 위해 도시를 희생시키며 화려한 껍데기를 위해 수많은 내재적 가치들을 짓밟는 전시행정의 극치 - 새로운 세기에 서울의 중심부에 구시대적 발상과 기도에 의한 또 다른 방식의 세운상가를 만들려는 시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재고되어야 한다.
무리한 고밀도 재개발의 진행은 결국 화를 불러일으키고 담당부시장을 구속시키는 상황까지 야기하게 되었다. 더불어 설계비 문제까지 발생해서 다행스럽게도 밀어붙이기 식의 개발은 일단 제어되었다. 내부적인 갈등으로 인해 고밀도 재개발의 방식에 제동이 걸렸지만 아직 어느 한곳에서도 청계천주변의 고밀도 개발방식에 대해 조직적인 반대를 하지 못한다. 청계천복원의 디자인상 미추의 논의를 떠나서 수복형 개발의 담론이 자리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청계천복원을 팔아서 이루어지는 서울 중심의 무성격한 고밀도 재개발과 사대주의적 접근방식을 통한 해결책 제시는 차단되어야 한다. 이것을 막아내지 못할 때 고층건물의 그림자에 가리운 청계천은 정치적 야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희극적인 제스쳐로 또다시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이 필 훈 Lee, Pil Hoon
(주)태두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