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공원 - 도시의 초대
00. prelude
평화의 공원에 대한 원고청탁은 내게 시기적으로 아이러니다. 원고 청탁 의뢰를 받은 이 순간에도 우리 마을에서는 불법도로 개통을 둘러싸고 주민과 시행사간의 몸싸움, 그로 인한 부상 및 구속이 끊이질 않고 있다. 반년에 걸쳐 온 시위를 일으킨 모든 정치적, 행정적 원인은 뒤로 하더라도, 계획가의 선 긋기가 우리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깊은 숙고와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라는 쉬운 말과 이의 획득을 위한 쉽지 않은 공간적 실천을 놓고, ‘평화의 공원’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무척이나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01. 틀
평화의 공원은 지난 20년간 서울시민에게 오염의 상징으로 남아있던 거대한 쓰레기매립지의 치유에 우선적 의의를 둔다. 평화의 공원은 비단 땅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의해 손상된 인간의 마음까지도 치유하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환경시대를 맞이하여 환경친화적 주제를 표현한 공원 조성’이라는 목표 아래, 이미 땅 속에 오염된 얼굴을 묻기 시작한 쓰레기매립지를 바라본 설계가의 입장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쓰레기매립지를 다룬 기존의 몇몇 사례들이 선보인 실험적 접근들을 알고 있다. 토양의 조건과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약 40에이커에 달하는 공원 안에 야생잡초 외에는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없다는 하그리브스(Hargreaves)의 빅스비파크(Byxbee Park),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공간의 변화에 대처하는 경관의 동사적 진화에 염두를 두었다는 <프레쉬 킬스 공원화 설계경기(Fresh Kills : Landfill to Landscape Design Competition)>의 우승작인 제임스 코너James Corner의 <라이프스케이프Lifescape>, “프로그램의 창조적 해석과 쓰레기매립지 및 약 60만 세제곱미터의 진흙 침전물을 재활용하며 처리한 뛰어난 형태 창조”라는 심사평을 얻으며 채택된 하그리브스 어소시에이츠(Hargreaves Associates)의 테호 · 트랑카오 파크 프로젝트(De Parque do Tejo e Trancao). 이러한 사례는 평화의 공원에 인접한 두 개의 쓰레기 산을 조명해보는 틀로 활용함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그 두 개의 쓰레기 산보다는 얇은 매립 층을 갖는 평화의 공원 역시 이들 사례가 취한 부지의 해석과 접근의 시각으로 재조명해봄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얼핏, 잘 다듬어진 플랜의 스킨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당황스럽기 조차한 앞서 든 사례들의 실험적 흔적 대신- 평화의 공원은 자주 보아온 쉬크한 클리쉐(cliche)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곤혹감에 빠져든다. 스치는 물음 : ‘혹시 나 스스로가 형태 위주의 표피적 사고에서 표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앞선 사례들의 스킨을 억지로 벗겨내어 평화의 공원에 덧씌우려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평화의 공원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것을 해체해 볼수록 막연히 드는 곤혹감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반문이 일 수 있겠으나, 어쩌면 그러한 곤혹감은 플랜에 의해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 익숙함에서 오는 평화에의 유도. 지금부터 평화의 공원을 들여다보기 위한 필링(peeling) 작업을 시작한다.
02. peeling #1 : 공존과 공생 - 깨어진 원의 완전한 평화
평화의 공원에 들어서면, 경기장 내부에서 느껴지는 긴장 -이는 승부를 전제로 하는 경기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겠는데- 과는 달리 우리 곁을 스치는 시간의 속도는 경기장 앞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의 수면처럼 느려지고 느슨해진다. 난지호수의 깨어진 원은 ‘바로 그것’ 이외의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를 불허할 만큼 완전해 보인다. 그것은 주경기장의 상대자(counterpart)로서 경기장에서 뻗어 나온 인공데크의 강한 축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깨어진 원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물의 물성은 이 인공의 거대한 혀를 마치 스폰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난지호수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천년의 문 축과 월드컵 주경기장 축의 어긋남을 조화롭게 연결’한다는 공원 초기 계획과제 중의 하나를 최적으로 풀어낸 결과라고 보여진다. 거인의 치맛자락같이 길게 늘어진 호수변은 세심한 설계를 통해 인간과 물의 접수성(接水性)을 높이고 있고, 호수 주변의 다단식 지형 변화는 거대한 스케일의 땅덩어리에서 미약하나마 호수를 중심으로 한 영역성 부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하였는데, 그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자석에 붙은 쇳가루처럼 친절히 배려된 호수변에 걸터앉아 눈앞에 시원스레 펼쳐진 호수를 감상하거나, 호수변의 프롬나드를 따라 걷거나 달린다. 평화의 공원이라는 이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평화의 공원의 근저를 이루는 ‘상호 공존과 공생’ 이라는 계획개념을, 일명 평화의 호수로도 불리는 난지호수가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생각이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다. 상호 공존과 공생을 통해 이분법적 사고(dichotomy)를 극복하기 보다는, 인간의 땅인 여기(here)와 자연의 땅인 저기(there가 이 거대한 호수에 의해 양분된 채 접수성을 높인 호수변에만 우리의 발걸음을 묶어두는 건 아닌지? 난지호수 전체를 거미줄처럼 얽힌 다리(bridge)로 뒤덮을 수는 없겠지만, 현재 유리되어 있는 듯 한 저편의 자연에 보다 자유로이 가 닿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넓은 땅을 빙 돌아야 겨우 저기(there)에 도달하는 수고로움 없이, 보다 짧은 걸음으로도 ‘여기와 저기’가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상호 관계 맺기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짐이 갖는 불완전성은 주변의 끊임없는 변화를 수용하기에 충분히 유연하다. 호수 너머에 있는 자연은 호수변에 앉아 보기만 하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2년에 걸쳐 시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희망의 숲 유지, 인접 고속화도로에 대한 적극적 대응 등 풀어야 할 과제를 풀면서, 단순한 풍경화적 자연으로 고립되고만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의 아무런 간섭 없이 새가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아담과 이브만의 에덴동산이 아니라, 인간의 참여를 수용함으로써 난지호수를 관조적 볼거리로서의 정태적 경관이 아닌 인간과 상호 교류하는 동태적 경관이 되게 하고 있다. 한강 복류수를 받아 호수 바닥을 적시고 난지천의 회복까지 노리는 난지호수는 그것의 생태적 역할뿐만 아니라, 경기장에서 바로 가 닿기 힘든 한강을 경기장 쪽으로 깊숙이 끌어들임으로써, 공원과 도시를 상호 긴밀히 연계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공원이 갖는 공간적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최 영 주 Choi, Young Ju
디스퀘어 부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