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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토조경전시회 “첫걸음”
    -순수미술전시회 개최, 조경가의 예술적 감성 일으키길- 조경은 예술일까? 혹은 조경가는 예술가일까? 조경을 예술로 인정하기보다 조경가를 예술가로 인정하기가 더 힘든 이유는 뭘까? 조경가들은 미술, 조각, 음악, 문학 등의 예술적 소양을 과연 얼마나 갖추고 있는가. 솔토조경(주)의 하성한 소장은 “당신이 좋아하는 건축가는 누구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술술 이름을 대며 이유를 말하는 건축전공 학생들에 비해,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조경가는 누구냐”고 질문을 하면 쉽게 당황하고마는 조경전공 학생들을 보고, 너무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단다. 만약에 “좋아하는 미술가는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대신한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아마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건축을 배우는 사람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너무 당연하다. 그것은 “건축”이라는 학문의 특성이라고 봐도 좋다. 그럼 우리 조경분야의 미술에 대한 관심은 어떤가. 학문적 특성에 비해 너무 관심이 적은 건 아닐까. 작가정신을 배울 틈도 없이 캐드와 포토샵에 매몰되어 있는 오늘의 대학 현실을 학생들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냉정하다. 조경설계사무실 면접에서 “캐드는 잘하지? 포토샵은 어때?”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좋아하는 미술가가 누구인지 좋아하는 조경가가 누구인지”를 물어봐 줘야 한다는 것이 하성한 소장의 진단이다. 솔토조경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솔토조경(주)는 지난 IMF때 구조조정으로 인해 정림건축의 조경부가 떨어져 나오면서, 새롭게 시작한 조경설계사무소이다. 규모를 키우고 싶다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심은 없고, 외국의 사례처럼 아틀리에 규모로 운영하고 싶어서 작은 규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경영 철학으로 해오고 있단다. 이 회사에는 두 가지의 아주 특별한 장점이 숨어 있다. 그동안 밖으로 알리는 것을 꺼리다가 지난해 12월 23, 24일 양일간 사무실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남몰래 선생님을 초빙해 지난 1년 6개월 동안 전직원이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아온 것이다. 또 한가지는 일주일에 두 번 캐나다 선생님에게 회화 중심의 영어수업을 받고 있는 것. 전시회는 미술 선생님의 제안으로 열게 되었으며,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다른 조경설계사무실에서는 바쁜 업무로 인해 시도하기가 매우 힘든 일이다. 전시회 소식을 늦게 들어, 나중에서야 사무실을 찾아보았는데, 지난 수업 동안 만들어진 갖가지 재료의 창작물들이 벽, 책상, 복도 등 회사 곳곳에 놓여 있어, 매우 특별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사무실에 대화가 너무 없었다. 사원들에게 새로운 충전기회도 되고, 회사 분위기를 새롭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조경분야의 발전을 위해 회사내부에서부터 뭔가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조경분야가 인접 분야에 비해 많이 허술한 점이 있는데, 제도적인 방법이 없다면, 분야의 미래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회사들이 직접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당장 회사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적어도 회사 분위기를 바꾸고, 개인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그 사람만의 작품세계가 있다 ‘이상건축’에서 직원들의 순수 미술전시회를 가지는 것을 보며, ‘그래도 건축은 조경보다 여유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러워 한 적이 있단다. 실제 건축설계사무소들은 사진이나, 미술 등의 작품전시회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그 실력들도 대단하다. 그런데 솔토조경의 작품들도 매우 수준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이렇게 잘 그려요?” 솔토조경을 찾아와 일주일에 한번씩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김보라 선생은 예전에 이상건축에서도 미술 수업을 진행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은 항상 칭찬을 하신다. 작품마다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인식을 주어 모든 작품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을 주었다. 처음엔 ‘이게 모야’라며 서로 농담을 건네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을 칭찬할 줄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람만의 작품세계를 잘 끌어 주시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미술끼(?)가 있다고 하는데, 이 수업을 통해 얻은 것 중에 하나는 자기자신에 대한 놀라움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잘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하면 되더라.” 누구나 직접 해보면 생각외의 작품들이 나온다는 대답이다. ‘그래도 이렇게 잘 그릴 수 있을까.’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찍어놓은 사진들이 한 장씩 빔에 쏘아졌다. 실제 전시회에서는 재즈음악도 흘렀다는데, 아마 조경설계사무실 중에 가장 뜻있는 2004년 송년회를 보낸 곳이었으리라 작은 비용으로 예술가가 되는 길 “비용은 얼마나 드세요?” 살짝 귀띔을 해준 액수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리 많지 않은 액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미술 수업이나 영어 수업을 통해 회사가 직원에게 자기개발의 기회를 주는 것은, 그에 대한 의지를 갖추고 있고, 규모 10명 이하의 작은 조경설계사무소라면 어디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분위기 해친다는 말이 들릴까봐” 남들에게 알리길 꺼려했다지만, 좋은 일은 적극 권장해 나가자고 설득했다. ‘조경가가 예술가로 가는 작은 실천’이라는 부제를 부치고 싶을 만큼 매력있는 활동들을 만나고 왔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활동으로 다른 설계사무실의 모범이 되길 기대한다. 점점 늘어가는 영어 실력과 자신의 미술 세계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설계사무소, 참 매력있는 회사가 아닌가.
  • 양재천 - 시작 그리고 이의 극복
    시작, 그리고 이의 극복 양재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양재천은 강남구에서 자랑하듯 자연형 하천 복원 사업으로 죽은 하천을 되살린 장소이다. 양재천이 전형적인 하천 정비의 산물인 직강화된 하천, 콘크리트 블록의 대칭적인 호안 단면, 밋밋한 경사의 하도, 둔치의 잔디밭, 주차장, 가끔 가다 보이는 운동시설 등의 획일적인 하천 경관을 자연이 우세한 장소로 바뀌도록 함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시민에게 하천을 산책하고 싶은 장소로, 조깅하는 장소로, 여러 가지 식물과 동물을 관찰 할 수 있는 학습의 장소로 탈바꿈시켰고 토목분야가 독점하던 하천에 조경가가 전문가로 참여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강남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시민들이, 매스미디어가 앞다투어 칭송하고 전문가들도 자연형 하천 복원사업의 전형(典型)으로 여기는 양재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물음은 새삼스럽다. 그 만큼 양재천을 다른 각도로 보려는 시각은 부담스러우나 양재천 자연형 하천 복원사업이 우리 시대의 ‘시작’이었고 이제 그 시작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과제로서 던져져 있기에 눈에 보이는 현상뒤에 놓여진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드러내는 일이 극복의 출발이 아닐까 한다. 복원(restoration)인가?양재천 사업을 논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고 ‘복원’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양재천에 행해진 일련의 사업들을 ‘복원(restoration)’이라는 용어로 정의할 수 있을까? 복원이라하면 무엇보다도 훼손이전의 복원 대상이 분명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분명해야 하나 시작 당시 양재천에 복원 대상을 미리 설정하고 일련의 사업이 진행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보다는 치수 기능 위주로 조성된 기존 하천에 훼손되지 않은 하천에서 관찰 가능한 식생 저수 호안, 하도내의 여울과 소, 하도 선형의 만곡화 등 자연 요소를 추출, 도입하였다는 진술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양재천은 기존 하천을 자연형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최초의 사례로 실험적인 성격을 강함은 당연하다. 무기 재료 위주의 호안 및 고수 부지 조성 관행에서 탈피하여 자연 소재로 무기 재료가 가진 견고함을 확보하고 동시에 식생의 도입이 가능한 지에 대한 검증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런 시행 착오의 검증 과정을 거친 여러 가지 호안 공법은 이제 대표적인 자연형 호안 공법의 모범으로 인식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엄격한 의미의 복원이라는 목표 설정이 기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만큼 양재천에는 하천을 자연형으로 변모시키는 노력과 더불어 ‘주민 이용’이라는 또 다른 가치가 동시에 추구되었다. 때로 과도하게 도입된 친수 시설(親水施設)들은 엄격한 의미의 복원이란 용어의 사용을 어색하게 만드는 또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생태의 두가지 측면규범으로서의 생태(生態)이 시대에 지향해야 할 여러 중요한 가치의 하나로 ‘생태’를 내세우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생태라는 용어는 이미 우리시대에 생물학적 의미를 벗어나 사회 규범으로, 철학으로, 윤리로 그 의미의 외연을 넓힌 상태이다. 갖가지 논리로 무장한 ‘생태’는 강력한 외연의 확대 덕에 조경에서 만능의 용어로 사용된다. 어디 조경 뿐이랴, 건축, 토목 분야에서도 생태라는 용어를 빼고 건설사업을 진행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공감을 획득한 ‘생태’를 논리 전개의 근간으로 삼는데 앞장서야 할 조경 분야에서 ‘생태’라는 용어의 적정 시비가 있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생태지상주의’, ‘생태 상업주의’, ‘인간과 자연의 이원화’ 등 생태 만능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조경에서 ‘생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음을 보여 준다. 생태라는 용어가 가지게 된 규범성은 현재 우리 환경의 건강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이의 미래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에서 기인된 패러다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생태 지상주의’, ‘인간과 자연의 또다른 이원화’라는 비판에는 생태라는 용어에 내포된 규범성으로 인해 인간(디자이너)의 상상력과 이용이 제한되어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주장한다. 이의 근거로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토대로 하는 생태학은 과학적 분석 방법에 의존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상호 참여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되는 모순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즉, 일방적인 자연 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김 용 규 Kim, Yong Kyu 일송환경복원(주) 대표(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올림픽공원 - 기념 경관의 탄생, 성장, 상흔
    올림픽공원 - 기념경관의 탄생, 성장, 상흔 하나의 신화, 몽촌토성의 도시경관늦은 가을 오후, 평화의 문 주변 광장에는 인라이너들이 무심히 유영하고 있었다. 눈을 돌려 안쪽을 향하면 적막한 광장 뒤로는 물위로 떠오르는 신비한 곡선의 실루엣이 있다. 몽촌토성, 신비한 고대의 우주적 경관이다. 이곳, 평화의 문과 88마당을 잇는 주순환동선에는 만추의 산보객들과 코끼리열차가 조는 듯 지나고 있다. 노란 옷의 유치원생들은 열을 지어 행진을 하고 있는 위로, 조깅하는 젊은이들은 몽촌토성의 능선 위를 경쾌하게 뛰어 오르내린다.강남의 도심부에 조성된 60만평에 달하는 이 거대한 공원은 1988년의 서울올림픽 유치 덕분에 얻어낼 수 있었던 서울을 대표하는 대공원 중의 하나다. 이에 앞서서도 이미 1960, 1970년대에 어린이대공원, 과천대공원 등의 대공원들이 조성된 바 있으나, 근대적 조경기법의 체계적 적용에 의해 탄생된 최초의 초대형 도시공원이었다는 점에 이 사업의 의의가 있다. 이 공원의 설계는 몇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올림픽유치가 확정된 이후 1983년에 경기장단지를 포함하는 올림픽공원 전체의 현상설계가 시행되었다. 공원과 경기장시설물들을 포함하는 대규모 단지계획인 이 프로젝트는 조금 이른 시기의 독립기념관 현상설계와 함께 당시의 설계계를 뒤흔든 대형 이벤트였다. 여기서 당선작은 나오지 않고 6개의 우수작만 선정되었다. 이들 우수작들을 토대로 하여 최종적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는 일을 서울대 환경대학원 부설 환경계획연구소가 맡게 되었고 실시설계는 각 우수상 작가들이 나누어 맡게 되었다. 그 중 공원공간은 삼정건축과 우보기술단이 공동으로 수행하였다. 1980년대 초의 설계환경은 1970년대 중반의 조경학과 신설과 더불어 입학하여 정규 조경교육을 받고 졸업한 1세대 조경가들이 의욕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때이다. 당시 필자의 동기생들과 필자는 각각 올림픽공원의 기본계획과 실시설계에 참여하는 행운을 얻었고 그런 점에서 올림픽공원은 우리들이 본격적으로 설계를 익힌 계기가 되었던 고향과도 같은 프로젝트였다.올림픽파크의 진수는 역시 몽촌토성이었다. 1968년부터 이 일대를 국립경기장 예정지로 지정해 놓았었는데, 당시로서는 몽촌토성을 개발대상에서 미연에 보호하기 위한 이중의 목적에서 사적(史蹟)지정과 함께 이중으로 지정해 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상지 중앙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전체 면적의 대상지 전체의 30%에 육박하는 큰 면적을 차지하여 면적만으로도 전체 공원의 중심주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대공원과 한국 현대조경양식의 모형올림픽공원에는 두개의 진입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잠실대로와 연결된 것, 하나는 올림픽아파트와 연결된 것으로 이들 모두가 대칭적 형태의 직선축이라는 점에서 고전주의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중 잠실대로와 연결된 평화의 문 쪽의 축은 올림픽공원 구상에 앞선 잠실도시설계에 이미 설정되어 있었던 중심가로축의 연장이다. 현상설계시 요구조건으로도 제시된 바 있었던 주진입축이자 기념적 성격의 축이다. 또 하나의 축은 부지남쪽에 이미 설정되었던 선수촌아파트와의 연결축으로 부진입축의 성격을 갖으며 주변에 경기장 단지와 체육대학 등이 포진되어 있어 기능적 성격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잠실대로의 축은 그 정점에 올림픽공원을 위치시킴으로써 서울올림픽의 상징축이자 서울시 도시경관을 이루는 대표적 경관축의 하나가 되었다.이 두개의 바로크적 정형축은 모두 중심의 몽촌토성을 향하고 있다. 즉, 양 진입경관의 정점에 공히 몽촌토성이 입지해 있다. 이들 두 진입축과 이들을 연결시키는 공원내의 간선가로망이 전체공원의 공간골격을 이루고 있다. 크게 보아 고전주의에 의한 두개의 입구 기념광장과 이들을 잇는 자연풍경식의 곡선형 원로와 해자가 전체 조경양식의 골격을 이루고, 수변 및 기타의 부분공간들의 세부설계는 기하학적이고 기능적인 모더니즘적 양식으로 처리된 절충적 양식이 공원설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절충적 양식은 멀리 옴스테드의 센트럴파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1970, 1980년대의 우리나라 근대조경 도입기 공원설계의 일반적 모습을 집약해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특히 이러한 3자 연합의 절충양식은 한국 대형공원의 기본모형으로 정착하여 이후, 평화의 공원, 서울숲 등의 대공원의 설계에서도 그 관성을 유지해 왔다고 보인다. 이러한 절충형이 이제까지 대중적 인기를 누려왔던 것은 대형 공원의 환경특성에서 숙명적으로 요구되는 전체구조의 명료성과 기념성, 그리고 배경으로서의 자연성(회화적 전원성 또는 생태성) 그리고 부분공간의 기능성을 동시에 해결하기에 편리하다는 유혹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양식들은 이미 300~400년전 유럽을 풍미하던 양식이었고,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이 시대 한국의 경관표현을 위해 아직도 유용한 수단일 수 있겠는가에 대한 냉정하고도 광범위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그 대안의 생산을 포함하여 향후 극복해 내야할 조경설계계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생각된다. 김 한 배 Kim, Han Bae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일산 호수공원 - 별 2개 반짜리 일산 호수공원
    별 3개 반짜리 일산 호수공원 호수공원, 신도시 조성의 붐과 함께 태어나다.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건설업계에 있어서 매우 활발한 시기였다. 200만호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수도권에서는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등 소위 5개 신도시 조성사업이 진행되었으며, 각 도시별로는 도시 공원녹지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대규모 공원이 함께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일산 신도시 건설과 함께 조성된 호수공원은 분당의 중앙공원과 더불어 신도시 근린공원 계획에 많은 영향을 준 비교적 성공적인 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호수공원은 국내 최대의 인공호수와 대규모 광장을 가진 대표적인 신도시형 근린공원으로, 매년 고양 꽃전시회와 3년 주기로 고양 세계 꽃박람회가 개최되는 장소로 수도권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성공한 신도시의 얼굴일산 호수공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먼저 이 공원의 위치에 대해서 다루어야 할 것 같다. 호수공원은 자유로에서 일산으로 들어오는 진입부에 위치하여, 자연스럽게 신도시 일산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강을 따라 시원하게 뻗어 있는 자유로와 더불어 일산의 진입부에 위치한 호수공원은 답답한 도시환경에 익숙한 도시 거주자들에게 “신도시 = 전원도시”라는 공식을 각인 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의 아우토반이라고 불리던 자유로를 따라 운전을 하다가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넓은 수면이 펼쳐진 호수공원을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이러한 일종의 환타지가 호수공원 계획 당시 의도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유로가 출퇴근시 주차장이 되기 전까지는 상당히 유효했었을 것이다. 이렇듯 공원은 실질적으로 이용하는 측면뿐만 아니라 이미지 형성에 무척 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호수공원은 일단 일산의 얼굴로는 성공한 셈이라고 하겠다. 너무 넓은 호수와 불편한 이용호수공원을 가 본 사람들 대부분은 넓은 호수에 압도되고 아름다운 노을과 멋진 분수에 감동받는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불편하리 만큼 넓은 규모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너무 넓은 호수와 광장 때문에 이용하기 불편하다는 지적은 그 동안 호수공원에 대해 제기되었던 문제점들 가운데 1순위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평소 일산 호수공원을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공원에 대한 글을 쓰기에는 민망한 수준의 기억들뿐이라 지난 11월, 호수 공원으로 카메라를 들고 답사를 했었다. 한울광장에서 시작해서 주제광장을 지나 꽃 박람회장 건물 앞에 닿을 무렵, 그곳에 서 있는 공원 안내판을 바라보고는 한숨이 나왔다. 도저히 걸어서는 공원의 나머지 부분을 다 돌아보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어쩌면 필자 같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상술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공원 근처에는 자전거를 대여해 주는 곳이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겨우 공원 답사를 마칠 수 있었다. 사진찍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느라 일반 이용자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만, 자전거를 타고도 무려 4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호수를 따라 순환하는 산책로는 무려 그 길이가 4.7km에 이른다. 보통 걸음으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시작했다가는 단축 마라톤을 강요당하는 상황으로 돌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산책로 주변에 있는 광장들도 그리 편안한 크기는 아니다. 인라인을 타는 사람들에게 넓고 잘 포장된 광장은 매우 좋은 환경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공간이다. 최근에 조성한 노래하는 분수대와 분수대광장은 그 동안 거대한 규모를 지적한 사람들의 노력을 완전히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듯 하다. 광장 끝이 잘 보이지 않는 현장에서 필자는 ‘휴먼스케일’을 떠올렸다. 휴먼스케일에 관한 위한 예로 이처럼 적절한 (사실은 나쁜 예이지만) 장소는 과거 여의도 광장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이러한 대규모 공간 중심의 호수공원은 분당의 중앙공원과는 매우 대조되는 모습이다. 분당 중앙공원의 연못 주변에는 다수의 소공간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점은 다소 전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산 호수공원에 비해 이용자의 편의를 고려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의 강북권과 강남권을 흡수하는 신도시의 라이벌로서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공원의 계획방식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물론 단순히 너무 크거나 넓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원은 시공이 끝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계속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초기부터 제기된 식재된 수목의 양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으나 지속적으로 추가 식재를 하여 상당 부분 개선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 신 하 Joo, Shin Ha (주)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부설 환경계획연구소 소장(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다섯 가지 시선 ; 조경으로 사회적 발언하기
    설문결과 - 조경의 사회적 위상현대한국조경 작품 중에서 조경의 대사회적인 위상을 높인 것으로 응답된 작품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그 첫째는 일정 규모 이상이라는 점이다. 일단 규모가 커야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에 띄거나 입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점에서 수긍이 간다. 실제로 이용될 기회나 가능성도 규모가 큰 것이 더할 것이니 유리(?)할 터이다. 그러나 큰 만큼 잘못이 노출되고 회자되기도 쉬울 것이니 결국 응답된 작품들은 질적인 점에서 일정수준 이상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두 번째 공통점은 응답된 작품들 대다수가 그 조성배경이나 과정에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 빅이벤트의 장이거나 정치사회적 관심이 주목된 곳(여의도공원, 일산호수공원)인 것이다. 양재천과 길동생태공원의 경우는 자연과 생태에 쏠린 사회적 관심사와 관련시켜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에 선유도공원은 국제적 이벤트의 주무대가 아니면서 정치사회적 관심도 적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응답의 주 요인은 조성 이후의 사회적 반향에 유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애당초 사회적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조경 행위 후에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은 문화적 행위로서의 조경 본연의 의의와 가치를 살린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조경의 사회적 의의는 어떻게 추구되고 달성되어져야 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전문업은 사회적인 수요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독점적 배타적이면서 특수한 전문기술로 성립되어진다. 이 점에서 조경의 대 사회적 의의에 대한 논의는 전문기술 차원으로 모아진다. 사회적 수요 요건은 친환경, 생태의 바람과 함께 이미 우리 사회에 충분히 충족되어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전문분야로서 조경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어필하고 있느냐고 하는 것을 한두 가지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이 글에서는 조경설계라는 행위를 통한 문화적 가치 창출 관점으로 논점을 좁혀 고찰해 보기로 하자. 단순히 다루는 소재가 자연이고 친환경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조경본연의 이념도 좋지만 문화적 행위로서 조경설계를 주창하기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와의 문화적 연대를 입증하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무언가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필자는 이쯤에서 이 글의 소주제인 장소성과 전통성의 이슈를 제기하고자 한다.(물론 조경의 사회적 의의를 논하기 위한 세부 주제는 이들 외에도 많다. 본고에서 다른 더 중요한 것들을 제쳐두고 이 두 가지만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순전히 설문조사와 연계시키고자하는 기획의도에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이다.) … 후략 … 성종상 Sung, Jason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다섯 가지 시선 ; 한국 조경설계를 변하게 한 작품들
    삶의 풍경이, 문화의 지평이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다. 동시대 조경의 지형도가 변하고 있는 장면 또한 다양한 각도에서 목격된다. 시간이 존재하는 한 변화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언가의 모양과 성질과 상태는 늘 변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지만, 우리는 대게 변화를 통해 희망을 그리고 진보를 노래한다. 변화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반동이자 난제의 해법을 찾고자 하는 실천의 총체적 양상인 것이다. “한국의 현대 조경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이번 호 <환경과 조경>의 ‘열개의 공간 다섯가지 시선’은 과거의 변화를 반성하는 진단서와 미래의 변화를 예비하는 처방전을 동시에 작성하고자 하는 쉽지 않은 프로젝트다. 이 힘든 숙제의 실마리를 푸는 작업의 일환으로, 이 글에서는 지난 30여 년간 한국 현대 조경설계를 변화시킨 계기와 동력이 되었던 작품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려고 한다. 한국 조경설계를 변하게 한 작품들로 초점을 옮기기 전에 우선 점검하지 않을 수 없는 몇 가지 논점이 있다. 먼저, 현대 한국 조경이 ‘작품’이라 할만한 것을 생산해 왔는가 하는, 흔히 제기되는 반문을 짚고 가야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또 다시 한국 조경설계의 몰개성과 무표정을 문제 삼는 일은, “고독한 지형과 우울한 풍경”을 그려 온 지난 30년 현대 조경사의 왜곡된 시스템에 시비를 거는 일은 지루한 동어반복일 뿐이다. ‘작품’이라는 말의 무거운 포장을 조금만 걷어내고 본다면, 한국에도 나름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조경 작품은 있(어 왔)다. 조경 사회의 인프라스트럭처가 작품을 작품으로, 작가를 작가로 인정하는 일을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허약했을 뿐이다.그 다음의 논점은 과연 작품이, 특정한 몇몇 작품이 복잡한 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관계 속에 위치하는 조경설계라는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작품은 맥락과 관계의 작은 부분집합에 불과하므로 구조 전반의 변화에 종속되는 것이지 변화의 주연은 되지 못한다는 입장이 한 극단에, 또 다른 극단에는 뛰어난 작품은 시대의 관례를 초월하여 변화의 세례를 선사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 놓일 것이다. 그러나 이 상반된 관점을 이분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폭넓은 하나의 스펙트럼 속에 놓인 다채로운 시각을 대별하는 관점으로 유연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조경 작품은 비단 설계 행위를 통해 구현된 가시적 결과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 방식과 접근 과정, 설계 매체와 테크놀러지, 다양한 주변 맥락과 관계 등이 형성하는 복합적 함수의 산물이며, 때로는 하나의 조경 작품이 정체된 도그마적 설계 관행을 붕괴시키며 진보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는 식의 탄력적인 입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쉬운 예로 라빌레뜨공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라빌레뜨공원이 20세기 후반 공원 설계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동력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그것이 미테랑 정부의 파리 재개발 사업이라는 정치적 경제적 맥락, 파리의 도시 문화적 전통, 옴스테디안 파크의 극복이라는 역사적 과제, 베르나르 츄미의 혁신적 설계 등과 같은 복합적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후략 … 배 정 한 Pae, Jeong Hann 단국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희원 - 희원, 시간을 디자인하다
    희원(熙園), 시간을 디자인하다 … 전략 …공간과 시간의 조화호암미술관이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보여주는 많은 미술품들을 담고 있고 미술관 건물 또한 전통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수한 미술관들이 아시아 정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한국 정원을 제대로 보여주는 미술관이 국내에서조차 아직도 없는 실정이었으므로 희원이 한국 전통정원의 복원과 창조를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통성을 살린 정원을 만든다는 것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다. 여차하다간 전통성 시비에 휘말릴 우려도 있고 복원과 창조 사이에서 어디에 비중을 둘 것인지도 숙고해 보아야할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정원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여야 하기 때문이다.희원이 가지는 중요한 조경사적 의의는 우리 정원 속에 담겨있는 전통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해 조경의 담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서구의 조경 실천 경향에 온통 이목을 집중하였던 조경계의 흐름에 비해 한국적인 것에 대한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개인 정원이 아닌 공공부분에서 한국정원을 풀어낼 프로젝트가 드물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희원프로젝트는 부지의 목적과 환경 조건, 발주자의 기호, 설계가의 강한 의욕 등 모든 요인들이 딱 들어맞았던 조경계의 빅 이벤트였다.오늘 우리가 희원에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각 재료가 가진 물성을 잘 살려내었다는 점일 것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있어온 듯한 자연스러움이 재료들로부터 느껴지는 것이다. 아울러 정원으로서 갖추어야할 디테일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고유섭(高裕燮, 1905-1944)선생의 ‘무기교의 기교’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희원이 보여주는 물성을 살려낸 세심한 디테일은 한국정원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좋은 교훈이 된다.희원의 또 다른 장점은 전통적 모티브의 도출이 적합하게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희원은 전통정원의 백화점 같다. 문과 담, 정자와 연못, 돌과 재식 등 정원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 속에서 전통정원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설계 당시 가동할 수 있는 전통정원에 관한 정보를 총망라한 듯한 느낌이다. 각 부분마다 드러나는 전통 정원의 편린들은 모티브 과잉인 듯한 느낌마저 들어 오히려 정원의 자유로움을 억제한다는, 다시 말해 전통이란 것에 너무 얽매여 있다는 느낌마저 들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것은 안전한 선택이었다.세 번째는 전통의 조각들이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는 부지의 지형과 경관의 씨줄과 날줄 속에서 결을 따라 용의주도하게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힘들게 찾아낸 전통정원의 모티브들을 단순하게 꼴라주하거나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부지의 조건과 미술관이라는 기능에 충실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원야(園冶)>의 표현을 빌리자면 합의득체(合宜得體)하였다는 것이다.그러나 희원에서 보다 돋보이는 점은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주된 화두는 시간이라 할 것이다.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보물들, 미술관 주변에 널려 있는 석물들은 전부 시간의 산물이다. 그리고 정원이 지향한 한국 전통조경의 복원과 창조 또한 시간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전통이란 하나의 양식으로 우리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만 실은 보이지 않게 쌓여 있는 시간의 두께가 우리들에게 전통이란 개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무에게 나이테가 생기듯 시간의 나이테가 전통인 것이다.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 모아 놓은 정원의 요소들은 제각각의 일정대로 진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이 수십 년 수백 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싱크로나이즈 되면서 도달하게 되는 상호간의 조화를 우리는 전통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전통정원을 복원 혹은 재창조한다고 하였을 때 전통성이란 단순한 형태의 모사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시간을 얼마나 적절하게 담아내느냐가 키포인트가 된다. 이런 점에서 희원의 디자인은 뛰어나다. 대석단과 그 앞의 소나무에서부터 계류 속에 놓여진 돌들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디자인을 이루었다. 물론 모두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직도 담장과 정자의 기와는 어제 만들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도무지 시간이 깃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희원을 통해 조경가의 손길은 공간만을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기는 내용의 시간에까지도 미쳐져야 함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돌아오는 차속에서 나는 희원이 또 하나의 전통이 되어주기를 기원했다. 희원의 대석단과 소나무 위에, 그리고 담장의 기와 위에 시간이 눈처럼 쌓이고 그것이 녹고 또 쌓여 희원도 전통정원으로 남게 되길 바랐다. 희원으로 인해 전통이 박물관속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 숨쉬며 진화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리움’ 같은 현대미술관에 한국정원을 조성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모습이 될까? 이 모든 새로운 미래의 출발점에 희원이 있다. 이 유 직 Lee, Yoo Jick 밀양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하늘공원 - 디자인을 넘어선 디자인
    디자인을 넘어선 디자인 이름만큼 색다르다.도시에서 하늘을 오른다는 것만큼 색다른 경험은 없을 것이다. 공원을 오르기 전 느낄 수 있는 쾌감은 도시의 번잡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모든 것들(아파트, 자동차, 도로, 스모그 등)이 발아래에 깔리며 그 위에 올라섰다는 우월감과 함께 수직적 이동에 따른 상승의 효과를 가지게 한다. 계단을 밟고 땅에서 멀어질수록, 가쁜 숨이 기도를 자극시킬수록, 일상에서 멀어지며 자아에 충실 하고픈 다분히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자세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도시에서 발견한 헤게모니의 반전” 이것이 하늘공원을 접한 첫 느낌이다. 사건읽기와 관계적 공간을 되새기며일반적으로 공원의 유형을 구분할 때 자원 가치의 정도, 입지의 유형 그리고 조성규모 등의 척도에 따라 구분 짓고 있다. 이러한 유형속에 도시공원(체육공원이든, 근린공원이든 도시자연공원이든 간에)의 이해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도시와 관련되어진 맥락에 그 기반을 두며, 만들어지는 형태 또한 그것과 관련된 배경을 가지게 되는 것이 지극히 적합한 이야기이다.한편 감상의 측면에서 도시조경을 바라보면, 그 공간은 2차원적으로 표출되는 시각예술과는 이해의 경로가 다른 환경과 어우러진 총체적 인식을 통하여 2차적 의미(작가의 의도를 고민하는 노력보다 결과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려는 노력)를 우선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또한 전자와 비교하여 그 경험의 배열이 다르게 나열되고 조합되는 이유로 인하여, 디자인의 형태에 대한 시각적인 눈요기보다 공간에 대한 경험적 접근이 특정한 공간에 대한 감상과 감성을 자극시키는 중요한 도구인 탓에 아마도 이러한 관계성에 대해 더 집착적인 생각을 가지는 지도 모르겠다. 이해를 위한 전제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일반인의 접근이 용이치 않았던 난지도의 형상과 기억을 이 땅의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 그 흔적은 우리에게 숨기어 져야만 하는 도시인들의 어리석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돌이켜보게 한다. 하늘공원이 주는 독특한 경관에서 우리는 만족과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아름다움’이란 단어의 판단은 그렇지 못한 것과의 대조를 통하여 인식하는 언어의 선택적 수용이란 것을 객석의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설계자는 “완성되고 또 점차 성숙해가는 생태공간의 표출”이 아닌 “척박하고 버려진 환경 조건 속에서 자연이 어떻게 시작하는 지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주제를 전개하여 형태를 만들었고 과거의 흔적을 표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직적 요소들을 이용하여 개념화 하였지만 주관적 해석에 의한 상징과 함축은 관객(일반적 대중)들로 하여금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한 자칫 기형적인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사실’이란 것은 충분히 쉬우며 순응적으로 읽혀지는 객관적 나레이션에 충실 하는 것이 공간의 흔적을 읽어나가기에 손쉬운 방법인 듯 하다. ‘공간적 질서’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질서의 범위는 이해의 정도에 따라 물리적 영향의 범위를 벗어난 무한의 확장성을 가질 수도 있으며, 순열의 조합과 같은 논리의 알고리듬으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처럼 다변성을 가지기도 하며, 한편으로 손쉽게 질서를 한정하는 방법으로 객관적 사실에 주관적 논리를 합하여 디자이너의 의도를 만들어가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조경을 한다’는 것은 예술과 다른 디자인을 행한다는 의미이며 예술가가 하나의 독창적인 작업을 하며 결과물을 토해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이유인즉 조경이란 행위의 산물은 사회와 문화 그리고 환경을 아우르는 결과물로 인식되고 있으며, 자의든 타의든 디자인이라는 작업을 수행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그 대상지의 환경과 관련된 질서에 대해 고통을 겪어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그들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심오한 이데올로기적인 사회˙문화적 변화 및 현상에 대하여 궁극적인 답변, 바꾸어 이야기하면 공간적 질서에 대하여 디자인을 빌어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디자인의 변형을 통하여 잠정적인 탐색을 감행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권 진 욱 Kwon, Jin Wook 계원조형예술대학 화훼디자인과 교수(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선유도 공원 - 지층의 중심에서 희망을 외치다
    지층의 중심에서 희망을 외치다 지구상의 모든 장소에는 각각의 특이성을 창출시키는 사건의 지층이 존재한다. 이러한 지층은 접근가능한 모든 것을 움켜쥐고 고정시켜버리는 블랙홀의 위력을 가진다. 하지만 각각의 지층들은 미래와의 만남을 통해 코드화와 영역화의 영향을 받아 끊임없는 탈지층화를 모색한다.선유도공원에도 다양한 사건의 지층들이 존재한다. 지층들은 공간의 두께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코드를 표상하며 현재의 지층으로 고정되어버린다. 사건의 지층을 형성하는 주체는 선유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다. 현재 선유도 공원에 형성된 다양한 지층의 단면들을 만나보기위한 여정을 떠나보기로 하자(여기서 소개하는 지층의 단면들은 직접 인터뷰를 바탕으로 필자가 재구성한 것임).지층1: 사진 찍기 나는 20대 후반의 회사원. 사진카페 동호회 회원이다. 우리카페에서는 한달에 한두번씩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인다. 올림픽 공원, 하늘공원에도 가지만 선유도 공원은 사진 찍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기 때문에 가장 많이 온다. 현재까지 30번 이상 방문한 것으로 기억된다.선유도 공원은 콘크리트의 회색 느낌을 자유롭게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공원이다. 콘크리트와 대나무, 수생식물과 수목, 선유교 등이 어우러져 멋진 감성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른 색조의 변화는 회색조의 바탕색과 어우러져 색다르고 다양한 감각으로 다가오며, 실내의 폐기된 정수 및 펌프시설도 환경조형물로서의 역할을 멋지게 수행한다. 이슬을 머금고 있는 꽃의 모습, 서쪽으로 떨어지는 석양의 모습 등 이곳에서는 다양한 줌인과 줌아웃을 통해 장소의 압축을 경험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보다 원색적인 색감을 가지는 공간도 많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사진 찍기 편한 보다 집약된 장소를 희망하는 행복한 투정인지도 모르겠다. 지층2: 소요(逍遙)나는 시 쓰기를 좋아하는 30대 여성. 선유교를 건너 공원으로 들어와 선유(仙遊)의 의미를 되새기며 장소의 감성을 느껴 본다. 수생식물원에 가보니 하천에서 볼 수 있는 수생식물들이 수조에 담긴 채 자라고 있다. 인공적 하천정비를 통해 수생식물의 삶의 터전을 빼앗은 인간은 이제 여기에 속죄의 마음으로 다시금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느낌이다.멈춰버린 시계바늘처럼 기둥들만 덩그러니 서있는 녹색기둥의 정원. 기억만이 존재하는 곳. 현재가 부재하는 듯한 침묵이 흐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보니 멈춘 줄만 알았던 시간은 담쟁이를 통하여 느리게 흘러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인간은 도시화를 통해서 무엇을 얻으며 또한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끝없는 질문들이 녹색기둥의 담쟁이처럼 머리를 감싼다.시간의 정원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를 물을 일이다. 나는 지금 이곳에 아름답게 머물고 있는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구절이 떠오른다. 과거의 더러웠던 침전지의 물이 이제 나무와 풀에 생명을 부여하는 물이 되었다. 인간을 위한 물과 자연을 위한 물. 이곳의 주제는 물이 아니던가. 과거엔 건물의 내부였을 곳이 지금은 하늘을 향해 열려있고. 견고한 벽대신 수목이 식재되어 있다. 문화와 자연의 새로운 만남. 인간을 위한 과거의 내부공간은 현재의 외부공간이 되어 도시민을 부르고 있다. 건설하고자 했던 의지만큼 되돌리려는 또 다른 의지가 이곳에서 문화와 자연을 결합시키며 시간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수변데크에서 쌀쌀한 강바람을 맞으며 한강을 내려보다, 양지바른 담벼락에 놓여있는 벤치에도 앉아본다. 현재의 휴식을 얻으러 왔다가 이곳에서 도시의 조각들과 자연의 조각들이 어우러진 시간의 퍼즐조각들을 맞추다가 돌아가는 느낌이다. 여기저기에서 현재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아름다운 시간의 퍼즐조각들을 사진기에 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중략 … 지층의 여정을 마치며도시공원이란 도시민의 건강, 휴양 및 정서생활의 향상에 기여하기 위하여 조성하는 것이라는 법적 해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공원을 이용하는 도시민의 이용행태, 참여도, 만족도 등과 같은 도시민의 반응을 조성하는 것은 공원의 현재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공원 이용자들에 의해서 나타난 주요지층의 퍼즐조각들을 맞추어보는 것은 전체 공원의 외삽(外揷)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선유도 공원에는 위에 대표적으로 언급된 사진 찍기, 소요, 숨바꼭질, 환상체험, 걷기, 데이트, 환경교육, 답사와 같은 지층 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사건의 지층들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각각의 지층들은 현재의 특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퍼즐조각으로 기능하면서 선유도 공원의 ‘현재’라는 총체적 그림을 완성하고 있다. 현재의 지층을 파악해보는 것- 이는 미래의 지층에 대한 새로운 감성을 획득하기 위한 선행조건이다.이와 같이 고정된 지층들은 시간이 점점 흐름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탈주를 시도하기 시작한다. 현재의 지층은 미래의 시간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사건 생성에 의한 탈지층화를 준비하기 때문이다.이러한 탈지층화에 촉매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선유도 공원의 풍부한 물성과 대지의 잠재력을 극대화한 대상지 자체가 가지는 역동적인 힘이다. 다른 공원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청각적, 촉각적 메시지, 시간의 켜를 느낄 수 있는 장소에서의 공감각적 체험과 여러 갈래의 동선들은 수평적, 수직적 공간과 리좀적 리좀(rhizome)이란 곧은 뿌리, 곁뿌리로 이루어진 나무뿌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감자 등과 같이 중심이 없이 사방으로 연결된 뿌리줄기를 의미한다.연결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공간적 깊이를 제공하며 새로운 지층의 생성을 부르고 있다.참여를 통하여 지층을 형성하는 공원의 이용객들은 이러한 촉매요소들의 영향을 받아 지층의 퇴적작용(sedimentation)과 습곡작용(folding)을 발생시키며, 새로운 지층으로의 분절을 시도한다. 이는 공원에 예기치 못한 흥미를 야기 시키게 되며, 이러한 탈지층화 과정은 공원에 활력을 부여하는 동시에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가는 공원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우리의 과거의 흔적은 우리의 현재를 억압하여서는 안되며, 우리의 현재 또한 미래를 구속하여서도 안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서로를 교호하는 동시에 서로에게 자유로워져야 한다. 선유도 공원에서는 과거의 흔적이 우리를 강제적으로 억압하지 않으며, 현재의 형태가 미래를 구속하지도 않는다. 새로워지지 않는, 부스러지고 녹슬며 색이 바래가는 세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선유도 공원은 완성되지 않은 채 만들어져 나가는 미완의 가치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선물해주고 있는 것이다. 김 정 호 Kim, Jung Ho (주)랜드엔지니어링, 한경대학교 겸임교수(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평화의공원 - 도시의 초대
    평화의 공원 - 도시의 초대 00. prelude 평화의 공원에 대한 원고청탁은 내게 시기적으로 아이러니다. 원고 청탁 의뢰를 받은 이 순간에도 우리 마을에서는 불법도로 개통을 둘러싸고 주민과 시행사간의 몸싸움, 그로 인한 부상 및 구속이 끊이질 않고 있다. 반년에 걸쳐 온 시위를 일으킨 모든 정치적, 행정적 원인은 뒤로 하더라도, 계획가의 선 긋기가 우리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깊은 숙고와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라는 쉬운 말과 이의 획득을 위한 쉽지 않은 공간적 실천을 놓고, ‘평화의 공원’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무척이나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01. 틀평화의 공원은 지난 20년간 서울시민에게 오염의 상징으로 남아있던 거대한 쓰레기매립지의 치유에 우선적 의의를 둔다. 평화의 공원은 비단 땅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의해 손상된 인간의 마음까지도 치유하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환경시대를 맞이하여 환경친화적 주제를 표현한 공원 조성’이라는 목표 아래, 이미 땅 속에 오염된 얼굴을 묻기 시작한 쓰레기매립지를 바라본 설계가의 입장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쓰레기매립지를 다룬 기존의 몇몇 사례들이 선보인 실험적 접근들을 알고 있다. 토양의 조건과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약 40에이커에 달하는 공원 안에 야생잡초 외에는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없다는 하그리브스(Hargreaves)의 빅스비파크(Byxbee Park),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공간의 변화에 대처하는 경관의 동사적 진화에 염두를 두었다는 <프레쉬 킬스 공원화 설계경기(Fresh Kills : Landfill to Landscape Design Competition)>의 우승작인 제임스 코너James Corner의 <라이프스케이프Lifescape>, “프로그램의 창조적 해석과 쓰레기매립지 및 약 60만 세제곱미터의 진흙 침전물을 재활용하며 처리한 뛰어난 형태 창조”라는 심사평을 얻으며 채택된 하그리브스 어소시에이츠(Hargreaves Associates)의 테호 · 트랑카오 파크 프로젝트(De Parque do Tejo e Trancao). 이러한 사례는 평화의 공원에 인접한 두 개의 쓰레기 산을 조명해보는 틀로 활용함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그 두 개의 쓰레기 산보다는 얇은 매립 층을 갖는 평화의 공원 역시 이들 사례가 취한 부지의 해석과 접근의 시각으로 재조명해봄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얼핏, 잘 다듬어진 플랜의 스킨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당황스럽기 조차한 앞서 든 사례들의 실험적 흔적 대신- 평화의 공원은 자주 보아온 쉬크한 클리쉐(cliche)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곤혹감에 빠져든다. 스치는 물음 : ‘혹시 나 스스로가 형태 위주의 표피적 사고에서 표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앞선 사례들의 스킨을 억지로 벗겨내어 평화의 공원에 덧씌우려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평화의 공원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것을 해체해 볼수록 막연히 드는 곤혹감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반문이 일 수 있겠으나, 어쩌면 그러한 곤혹감은 플랜에 의해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 익숙함에서 오는 평화에의 유도. 지금부터 평화의 공원을 들여다보기 위한 필링(peeling) 작업을 시작한다.02. peeling #1 : 공존과 공생 - 깨어진 원의 완전한 평화평화의 공원에 들어서면, 경기장 내부에서 느껴지는 긴장 -이는 승부를 전제로 하는 경기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겠는데- 과는 달리 우리 곁을 스치는 시간의 속도는 경기장 앞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의 수면처럼 느려지고 느슨해진다. 난지호수의 깨어진 원은 ‘바로 그것’ 이외의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를 불허할 만큼 완전해 보인다. 그것은 주경기장의 상대자(counterpart)로서 경기장에서 뻗어 나온 인공데크의 강한 축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깨어진 원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물의 물성은 이 인공의 거대한 혀를 마치 스폰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난지호수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천년의 문 축과 월드컵 주경기장 축의 어긋남을 조화롭게 연결’한다는 공원 초기 계획과제 중의 하나를 최적으로 풀어낸 결과라고 보여진다. 거인의 치맛자락같이 길게 늘어진 호수변은 세심한 설계를 통해 인간과 물의 접수성(接水性)을 높이고 있고, 호수 주변의 다단식 지형 변화는 거대한 스케일의 땅덩어리에서 미약하나마 호수를 중심으로 한 영역성 부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하였는데, 그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자석에 붙은 쇳가루처럼 친절히 배려된 호수변에 걸터앉아 눈앞에 시원스레 펼쳐진 호수를 감상하거나, 호수변의 프롬나드를 따라 걷거나 달린다. 평화의 공원이라는 이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그런데 평화의 공원의 근저를 이루는 ‘상호 공존과 공생’ 이라는 계획개념을, 일명 평화의 호수로도 불리는 난지호수가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생각이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다. 상호 공존과 공생을 통해 이분법적 사고(dichotomy)를 극복하기 보다는, 인간의 땅인 여기(here)와 자연의 땅인 저기(there가 이 거대한 호수에 의해 양분된 채 접수성을 높인 호수변에만 우리의 발걸음을 묶어두는 건 아닌지? 난지호수 전체를 거미줄처럼 얽힌 다리(bridge)로 뒤덮을 수는 없겠지만, 현재 유리되어 있는 듯 한 저편의 자연에 보다 자유로이 가 닿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넓은 땅을 빙 돌아야 겨우 저기(there)에 도달하는 수고로움 없이, 보다 짧은 걸음으로도 ‘여기와 저기’가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상호 관계 맺기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이 아쉽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짐이 갖는 불완전성은 주변의 끊임없는 변화를 수용하기에 충분히 유연하다. 호수 너머에 있는 자연은 호수변에 앉아 보기만 하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2년에 걸쳐 시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희망의 숲 유지, 인접 고속화도로에 대한 적극적 대응 등 풀어야 할 과제를 풀면서, 단순한 풍경화적 자연으로 고립되고만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의 아무런 간섭 없이 새가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아담과 이브만의 에덴동산이 아니라, 인간의 참여를 수용함으로써 난지호수를 관조적 볼거리로서의 정태적 경관이 아닌 인간과 상호 교류하는 동태적 경관이 되게 하고 있다. 한강 복류수를 받아 호수 바닥을 적시고 난지천의 회복까지 노리는 난지호수는 그것의 생태적 역할뿐만 아니라, 경기장에서 바로 가 닿기 힘든 한강을 경기장 쪽으로 깊숙이 끌어들임으로써, 공원과 도시를 상호 긴밀히 연계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공원이 갖는 공간적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최 영 주 Choi, Young Ju 디스퀘어 부소장(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