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서안은 현재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로, 서북(西北)지방 최대의 관광도시이자 상공업도시이다.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하고 있는 시내에서 그 옛날의 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당나라 때의 장안성(長安城)을 본 따 명나라 때 축조된 성벽(城壁)이 바로 그곳이다.
이 성벽은 옛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중국의 성벽들 중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유적으로, 대략 6백년에 이르는 시간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당대(唐代)의 장안은 당시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품위있고 정연한 계획도시였다. 계획도시 장안의 모습에 혹한 당시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수도였던 경도(京都)를 만들면서 장안의 도시구조를 그대로 복제했을 정도였다. 장안은 기능에 따라 궁전지구 · 행정지구 · 주거지구 · 상업지구 · 공업지구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되고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요즘의 지역지구제(地域地區制)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각 지구들을 잇는 가로망은 바둑판의 격자형 체계를 이루었고, 황제가 거처하는 황성(皇城)의 남문인 주작문(朱雀門)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폭 150m에 이르는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중심대로였다.
한편으로 이 도시는 서방세계로 연결되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출발지였다. 비단길의 관문으로 서역의 상인들이 거주했고 국제적인 무역시장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장안은 인구 150만에 이르는 동양문화의 중심지로 화려한 번영을 누렸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서면서 수도는 동쪽의 개봉(開封)으로 옮겨졌다. 장안은 중심도시로서의 날개를 접었고 그 이름도 지금의 서안으로 바뀌었다. ‘서안(西安)’이라는 이름은 장안에 잔류했던 당의 후손들이 혹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서쪽 지방의 안정을 바란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후 북경(北京)에 수도를 정한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 서안은 서북지방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거점도시가 되면서 당나라 때의 장안성을 근거로 ‘서안부성(西安府城)’이 축조되었다. 지금 보이는 명대의 서안부성은 규모가 1/6 정도로 축소된 것이니, 당대 장안성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좀처럼 짐작하기가 어렵다. 주위에 해자(垓字)를 두르고 있는 성벽은 대략 12m에 이르는 상당한 높이를 보이고 있다. 성벽의 윗 폭은 12-15M로 성벽 위는 관광객들을 실은 코끼리열차가 다닐 정도로 상당히 넓다. 아랫 폭은 윗 폭보다 약간 넓은 15-18m로 안정감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고, 성벽의 사방 둘레는 12km 정도이다. 6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성벽이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 위를 코끼리열차를 타고 구경하는 현실은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급격히 성장하는 오늘의 도시에서 성벽은 도로터나 건물터로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당연히 헐리어 없어져야 될 옛 시대의 퇴물이라는 개발논리가 횡행하는 시대가 아닌가? 성벽 위에서는 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성곽 안은 고도로서의 옛 모습을 지키기 위해 전통양식의 건축물을 권장하는 한편, 스카이라인(Skyline)을 해치는 고층건물의 높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반면 성곽 밖은 급변하는 현대도시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방어의 목적과 아울러 이렇게 도시에 성벽을 쌓은 것은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안과 밖을 명확히 구분하는 성벽이라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성벽에 뚫린 도시의 문이 비로소 문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이 있기에 비로소 길은 길로서의 제 구실을 하게 된다. 결국 도시에 성벽이 있기 때문에 도시공간은 질서를, 도시가로는 체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이 성벽은 옛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중국의 성벽들 중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유적으로, 대략 6백년에 이르는 시간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당대(唐代)의 장안은 당시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품위있고 정연한 계획도시였다. 계획도시 장안의 모습에 혹한 당시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수도였던 경도(京都)를 만들면서 장안의 도시구조를 그대로 복제했을 정도였다. 장안은 기능에 따라 궁전지구 · 행정지구 · 주거지구 · 상업지구 · 공업지구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되고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요즘의 지역지구제(地域地區制)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각 지구들을 잇는 가로망은 바둑판의 격자형 체계를 이루었고, 황제가 거처하는 황성(皇城)의 남문인 주작문(朱雀門)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폭 150m에 이르는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중심대로였다.
한편으로 이 도시는 서방세계로 연결되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출발지였다. 비단길의 관문으로 서역의 상인들이 거주했고 국제적인 무역시장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장안은 인구 150만에 이르는 동양문화의 중심지로 화려한 번영을 누렸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서면서 수도는 동쪽의 개봉(開封)으로 옮겨졌다. 장안은 중심도시로서의 날개를 접었고 그 이름도 지금의 서안으로 바뀌었다. ‘서안(西安)’이라는 이름은 장안에 잔류했던 당의 후손들이 혹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서쪽 지방의 안정을 바란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후 북경(北京)에 수도를 정한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 서안은 서북지방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거점도시가 되면서 당나라 때의 장안성을 근거로 ‘서안부성(西安府城)’이 축조되었다. 지금 보이는 명대의 서안부성은 규모가 1/6 정도로 축소된 것이니, 당대 장안성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좀처럼 짐작하기가 어렵다. 주위에 해자(垓字)를 두르고 있는 성벽은 대략 12m에 이르는 상당한 높이를 보이고 있다. 성벽의 윗 폭은 12-15M로 성벽 위는 관광객들을 실은 코끼리열차가 다닐 정도로 상당히 넓다. 아랫 폭은 윗 폭보다 약간 넓은 15-18m로 안정감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고, 성벽의 사방 둘레는 12km 정도이다. 6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성벽이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 위를 코끼리열차를 타고 구경하는 현실은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급격히 성장하는 오늘의 도시에서 성벽은 도로터나 건물터로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당연히 헐리어 없어져야 될 옛 시대의 퇴물이라는 개발논리가 횡행하는 시대가 아닌가? 성벽 위에서는 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성곽 안은 고도로서의 옛 모습을 지키기 위해 전통양식의 건축물을 권장하는 한편, 스카이라인(Skyline)을 해치는 고층건물의 높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반면 성곽 밖은 급변하는 현대도시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방어의 목적과 아울러 이렇게 도시에 성벽을 쌓은 것은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안과 밖을 명확히 구분하는 성벽이라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성벽에 뚫린 도시의 문이 비로소 문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이 있기에 비로소 길은 길로서의 제 구실을 하게 된다. 결국 도시에 성벽이 있기 때문에 도시공간은 질서를, 도시가로는 체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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