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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의 ‘그린파킹 2006’ 프로젝트
    - 시민참여와 서울시의 지원으로 새로워지는 골목길 풍경 - 지난해 9월 시작된 서울시의 ‘그린파킹 2006’ 프로젝트가 1년여를 지나면서 그 결과물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린파킹(녹색주차마을) 2006’ 사업은 주차장이 부족한 서울시내 주택가의 담장을 허물고 그 대신 조경을 겸한 주차공간을 만드는 사업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차량 대수에 비해 주차장을 확보하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부지의 확보 없이 주차장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과 주변 환경까지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녹색주차마을 조성사업을 통해 25개 자치구별로 1곳씩 선정된 시범마을에서 1천5백여 가구가 녹색 주차장 조성을 신청했고, 이중 1천여 가구의 공사가 마무리된 상태다(지난 10월 1일 기준). 즉 그동안 서울시내 주택 1천여 가구의 담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녹색의 주차공간이 만들어진 셈이다. 주차장 1면당 평균 550만원이 지원되며, 조경은 주민과의 협의를 거쳐 주택의 특색과 주인의 기호에 맞는 다양한 모습으로 시공되고 있다. 담 허물기 공사가 마무리된 지역에는 보행공간을 확보하고 불법주차공간을 없애는 이면도로 정비공사가 진행중이며, 담이 없어짐에 따라 보안을 우려한 주민들의 요청으로 18개구 2백여 곳에는 CCTV설치 공사도 함께 진행중이다. 주차장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면도로를 정비하여 좁은 골목길 일부는 일방통행 도로로 만들고 보차분리를 통해 사고율과 불법주차를 줄이는 것도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 중의 하나라고 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에는 주차장 조성이 가능한 주택주의 동의를 얻는 일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한다. 대개 담당 공무원의 꾸준한 설득을 통해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단 공사가 시작되면 결과물을 보고 나서는 대부분 만족해한다고 한다. 강남구 세곡동의 윗반마을에는 공사가 가능한 주택들 중 3곳을 제외한 28가구의 공사가 진행중이거나 완료되었는데, 마을 대다수의 주택들이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주민들의 유대관계도 돈독해지고 환경도 좋아져 호응이 높은 편이다. 이곳도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지만 한 집을 시공한 것을 보고 나서는 서로 해달라는 형편이었다는 것이 담당자의 말이다. 서울시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업 외에 30개 그린파킹 사업지구를 선정해 내년에 착공하는 한편, 향후에도 계속 신청을 받아 그린파킹 사업을 확산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그린파킹 사업의 완료시기는 2012년으로 보고 있는데, 2006이라는 숫자는 사업의 50% 정도를 마무리하는 목표 시점인 2006년을 뜻하는 상징적인 숫자. 높은 담장으로 인해 커뮤니티가 형성되지 못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주택가의 골목, 주차된 차량과 이를 피해 지나가는 차량으로 항상 위험하게 느껴지던 이면도로들이 이번 사업을 통해 안전하고 편리한 곳으로 새롭게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조경의 틈새시장을 찾아서
    조경이란 무엇인가?한때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설계 업무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사치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시간이 흘러 사랑스런 후배들에게 내가 아는 작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에 시작한 강의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수많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누구에게나 꼭 질문을 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조경의 정의 -조경은 무엇인가 ?- 에 대한 질문이었다.건축이나 토목분야 같은 경우에는 간단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조경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학교 다닐 때 조경이란 것을 문자 그대로 ‘경관을 조성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각가나 화가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조각상이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인간이 이용하는 모든 옥외공간과 토지를 이용,개발,조성함에 있어서 보다 기능적이고 경제적이며 시각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보존하는 생태적인 예술성을 띤 “종합과학예술이다”」 라는 『조경학원론』 책에서 정의를 외우고 한 적도 있으면서 그 말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지금도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명쾌한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곤 하던 기억이 난다. 이번 기회에 나름대로-다분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조경의 정의를 지면을 통해 내리고자 하는데, 이 내용에 동의한다면 여러분도 이후에 어디서든지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길 바란다. “눈을 떠서 보여지는 모든 대상을 다루는 분야”가 조경이다. 즉 내가 볼 수 있는 건축물이나 땅, 나무 등 모든 보여지는 것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효율적으로 다루는가 하는 것이 조경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이처럼 조경은 건축과 토목의 동등한 삼각관계가 아니라 건축과 토목분야를 통제, 조종, 계획하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모든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 조경의 영역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모든 공간을 다루듯 공간을 이루는 모든 요소의 디자인은 바로 조경가가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조경의 틈새시장을 찾아서그래서 나는 건축과 토목의 기본적인 업무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찾게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 사례들을 정리해보고 우리가 어떻게 선점해서 주도권을 잡아야 할 것인가 살펴보려 한다.그런 대상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보면 우선은 공간디자인 분야 중에서는 환경 조형물이 있고, 구조물디자인 분야 중에는 교량디자인, 개념적 디자인 분야 중에서는 경관설계 분야가 우리가 접근해야 할 분야가 아닌가 한다.그러면 앞에서 제시한 3가지 분야를 순서대로 살펴보자. 교량 디자인최근 한강을 따라 밤에 다녀보면 보잘것없이 보이던 한강의 교량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되었는지 볼 수 있다. 교량은 A와 B지점을 연결해주는 길의 역할을 하므로 지금까지는 그저 기능적인 단순 교량으로만 인식되어져 왔다. 하지만 월드컵대회를 계기로 경관적인 중요요소로 인식을 하면서 최근에는 다수의 교량 디자인 공모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최근에 내가 참여한 교량디자인 현상공모만 하더라도 성산대교, 다수의 청계천 교량들, 무안과 영암을 잇는 무영대교, 관제대교, 무안 백련지 보행물 조형교, 평택로변 연결데크교, 대구 아양교, 싱가폴 보행교 등 정말 많은 교량현상공모가 시행되어지고 실제로 교량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내 교량공모의 경우 주로 구조분야가 포함되어 있는 엔지니어링 업체가 참여하게 되고, 대부분의 공모가 외국 교량디자인 전문업체를 상대로 디자인을 의뢰하여 막대한 외화 낭비를 하고 있어 한국내에는 전문 교량디자인 업체나 디자이너가 없음을 간과할 수 없었다. 물론 대학교에 교량디자인 전문학과도 없긴 하지만……. 결국 누가 가장 근접하게 좋은 디자인 결과물을 내느냐가 중요한데, 그나마 지금까지는 경관디자인 회사라는 간판으로 산업디자인학과 출신들이 디자인을 간간히 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공간을 다루는 조경분야가 공간에서의 구조물로 조경분야만의 디자인 접근방법을 통해 도시내에 주요 시설로서의 교량디자인을 한다면 건축이나 기타 디자인 분야보다 더욱 양질의 교량디자인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참고로 네덜란드의 West 8이라는 회사가 디자인한 교량은 교량자체가 조형물인 것이 많다. 이 회사 사주도 조경가로 널리 활동중이 아닌가? 앞으로 무수히 많은 교량이 생겨날 것이며, 여기에 대비해 교량디자인에 관련된 구조역할분야와 색채, 형태 디자인 관련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조경분야가 미리 준비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면 새로운 영역을 우리가 먼저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최 신 현 David, Choi (주)씨토포스 대표(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그리고, 남은 키워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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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볼리 가든
    여전히 찌푸린 날씨가 시간마저 가늠하기 힘들게 하지만, 말로만 듣던 티볼리 가든이 바로 눈앞에 떡하니 서있다. 동행한 김은성 소장님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약간의 흥분마저 느껴진다. 도대체 티볼리 가든이 어떤 곳이길래 테마파크에 관여했다는 사람들이 그리도 가보라고 그러는지 한번 내 눈으로 확인해보자는 오기 아닌 오기를 안고 이곳에 온지 이틀째. 시차적응도 적응이지만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이라 아침도 오후같고 오후도 아침같은 얼떨떨함속에서 피곤함도 그리 문제가 되진 않는 듯 하다. 티볼리를 보러 간다니까 서양조경사 시간에 배웠던 이탈리아 빌라를 생각하여 유명한 빌라 많이 보라던 엉뚱한 소리처럼 필자 역시 처음엔 헷갈렸던 게 사실이다. 그냥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다. 티볼리 가든은 1843년 George Cartensen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그 동기가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이끌고자 했다는 게 우리의 1980년대를 생각하게 한다. Cartensen은 영국의 Vauxhall의 경험을 티볼리 가든에 집중시켰으며, 1863년에 그랜드 바자, 1900년에 중국식 타워를 세운다. 면적은 약 8.3ha에 24개의 주요 어트랙션과 38개의 레스토랑이 있으며, 매년 하계에 하루 평균 4만명, 일년에 약 5백5십만명 정도 방문한다.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은 내용은 ‘테마의 시대’에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으므로 재론할 필요는 없겠다. 연간 이용객수가 5백5십만이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 테마파크인 에버랜드가 약6백8십만명에, 서울대공원이 연간 3백2십만명임을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것도 겨우 2만 8천여평에. 무슨 대단한게 있긴 있나보다. 이런 생각이 필자의 머리에 떠오르자 하나라도 더 보고 가야되겠다는 욕심이 앞서기 시작했다. 티볼리 가든은 코펜하겐시 중심의 중앙역에 대로를 끼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찾기가 쉬웠다. 또 인근에는 시청과 시청광장이 위치해 있어, 집시로 보이는 이들의 작은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일단 65크로네, 한화로 치면 200원을 곱해서 약 1만3천원을 주고 웅장해 보이는 입구 게이트를 통과했다.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이다. 중앙에 대로가 나있고, 그 양쪽의 독특하게 생긴 철제 반원형 프레임에 조명등이 붙어 있는데, 왠지 약간은 촌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야간에 조명에 불이 들어온다면 괜찮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입구에 보이는 안내판을 한번 휘익 살펴보는데 국내에서 포스터로만 봤던 티볼리 가든과는 차이가 느껴진다. 하지만 약 160년이라는 세월을 감안한다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니 군악이 들려오고 천막 쳐진 극장에서 황실 근위대의 군악연주가 펼쳐진다. 무대 앞은 젊은 사람보다는 노인층이 더 많아 보인다. 백발의 노인네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같이 온 듯한 할머니와 관람을 하는 게 부러워 보인다. 그나저나 대체 젊은 애들은 다 어디 있나? 오른쪽은 원형의 무대가 대칭되듯 서 있는데 거기선 야간에 정장차림의 노인들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열린다고 한다. 지금은 낮시간이라 그런지 빈 공간이다. 오케스트라 파빌리온을 지나니 길이 갈라진다. 일단 대로를 따라 둘러본 뒤 다시 세세히 보기로 하고 우측으로의 발길을 재촉했는데, 원형 연못에 있는 조형물의 형태가 독특하다. 원통형의 원기둥에 물이 차 있고 밑에서 기포가 올라온다. 물을 이용한 환경조형물인듯 하다. 야간에 주위에서 비추는 조명이 더욱 묘한 분위기를 만들 것 같다.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덴마크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다. 여기서 한가지 티볼리 가든이 여타의 테마파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선 식당이 무지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간단히 맥주한잔으로 갈증을 채우거나 패스트푸드를 먹을 수 있는 곳부터 예약을 해야만 식사할 수 있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까지 방문객들이 가히 먹으러 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듯하다. 가만히 보니 계층이 어느 정도 나누어진다. 젊은 층은 패스트푸드를 팔고 있는 카페로, 가족이나 중년층은 Formal한 레스토랑을 즐겨 찾는 듯 하다. 레스토랑을 끼고 우회전을 하니 계단이 나오고 계단 중앙의 난간이 재미있다. 계단사이의 경계난간까지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 것 같다. 그 뒤쪽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걸로 봐서 뭔가 재미난게 있는 것 같다. 앞서 지나온 레스토랑과는 또 다른 레스토랑들을 지나니 우리나라 재래식 시장골목같은 느낌의 소로가 나있고 그 주변에 갖가지 상점들이 즐비하다. 이 병 훈 Lee, Byoung Hoon (주)유림조경기술사사무소 실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고찰(古刹) 바닥
    계룡 갑사 갑사는 여느 다른 사찰과 비교하여 특징적인 모습이 있어서 오랜 동안 기억에 남아 있던 사찰이었다. 강당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적묵당과 진해당이 배치되어 길게 널려있었던 파사드가 참으로 기억에 남는 곳이었고, 특히 강당의 현판에 계룡갑사라 휘 갈려 놓은 강한 필체의 글씨가 그 맛을 더해주는 곳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찰 갑사의 옛 모습은 1970년대에 발간된 한국건축의 외부공간이란 이름의 한 사진집에 모두 여덟 장으로 간추려져 있다. 요즘 들어 절을 다녀온 사람들의 목소리는 둘로 나뉜다. 어디에고 옛 맛이 남아 있지 않아 씁쓸하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새로 잘 지어놓아 좋더라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주로 전자에 속하는 편이다. 옛 맛이 나는 것이 낡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새로 지었다 (혹은 새로 개보수 했다)고해서 반드시 옛 맛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못살던 시절에야 어차피 개보수하거나 확장을 할 여력이 없었으니 거의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었을 수밖에 없었다고 치면, 이러저러하게 근자에 크고 작은 개보수며 새로운 개발사업이 빈번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추이일수도 있다. 얼마 전, 오대산 월정사에서는 절 들어오는 긴 진입부의 도로포장을 반대하여 그 사업을 않도록 조처했다는 일을 어느 일간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도로포장에 그치지 않고 산길을 넓혀 번듯한 차도를 내려는 추이에 반하여 이미 계획되어 있었을 사업을 굳이 마다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새겨 보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갑사 들어가는 길목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티나는 고찰을 찾는 기분으로 가 볼 수 있었던 작은 산사의 이미지를 지닌 곳이 드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최근에도 그런 느낌을 주는 곳들이 여전할까? 갑사 들어가는 길목에서 옛날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서 그런 생각을 좀 해 보았다. 지금의 갑사 들어가는 길과 옛 사진에 남아 있는 그 길을 두고 잠시 생각해 본 것은, 예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볼 기회가 없었을 요즘 세대들을 위해서도 참으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는 점이었다. 게 중에는 혹 절 들어가는 길목의 포장 같은 작은 일이 무슨 사찰의 원형훼손이니 원형보존의 문제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꺼리가 되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찰의 원형이란 곧 사찰의 이미지와 직결되는 것이고 그 이미지의 보존이란 것이 반드시 대웅전 일곽에 머물러 있는 절대적인 경관 가치로써 이야기될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생각하여, 갑사 들목에서는 그냥 바닥에 블록으로 깨끗하게 포장을 하여 걷기 편한 좋은 길을 마련한 것 외의 별다른 일은 없어 보인다. 변화는 결코 대대적인 개발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바닥 포장이라는 사소한 시설물 공사가 사찰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는 것임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략) 내 생각에는 사찰에는 바닥이든 석축이든 대개가 자연석 혹은 흙바닥이었다. 새로 포장을 한다거나 계단을 잘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사찰에는 잦은 개보수 작업이 생긴다. 반드시 옛 모습을 간직한 채 흙바닥이며 자연석으로 처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마감되어야 할 것인가를 살펴 그 해법을 자연스럽게 도출해 보려는 것이다. 쌍계사든 화엄사든 잘못된 것과 잘 처리된 것이 같은 경내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문제점과 그 해답이 바로 인접하여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문제점으로 나타난 것들은 근자에 이루어진 일이고 해답을 가진 것들은 보다 전 세월에 손질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한마디로 의견을 내 보이자면, 가능한 한 기존의 현황에 가깝게 (덜) 다듬어진 재료로 마감되어 갈 때 가장 어색하지 않은 마무리가 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산사를 찾았다가 몹시 씁쓸한 뒷맛을 안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옛 맛이 없다”고 하는 이면에는 기실 도시의 차도 변에 깔아 놓은 보도 불럭 같은 전통사찰의 바닥에서 비롯되는 그 아쉬움의 토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정 기 호 Jung, Ki Ho·성균관대학교 건축·조경 및 토목공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스토우 풍경식 정원
    런던의 북서쪽 Buckinghamshire에 위치하고 있는 Stowe 정원은 풍경식 정원 중 가장 매력적인 장소의 하나로, 단지 영국을 대표하는 정원일 뿐 아니라 당시 유럽 조경계의 거장들의 역사적인 손길을 느끼며 18세기 정원양식과 정원 조성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이상적인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1593년부터 Temple 가문에 속해 있던 이 지역은 정원문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Richard Temple경 (1643-1697), Cobham자작 (1675-1749), Richard Grenville (1711-1779), 그리고 Buchingham의 첫 번째 공작인 George Grenville공작 (1753-1813)의 4명의 연속된 소유주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풍경식 정원으로 변모될 수 있었다. 이 곳이 풍경식 정원으로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사회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바로크시대까지 여러 정원양식들이 계속 발전되어 왔지만 그 발전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 정원들은 큰 흐름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태리, 프랑스 등 절대적 왕조의 고전주의를 지나면서 이에 반하는 영국의 자연주의운동은 실제로 정원역사에서는 혁명과도 비유될 수 있었으며 아울러서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는 경험적으로 점차 민주주의를 배우게 되었다. 민주적인 Whig당이 당시의 지배적이며 보수적인 Tory당과 반대세력으로 등장하는데 Stowe 정원은 Cobham경 (후에 자작 칭호를 받음) 등이 Whig당의 핵심당원으로 관계해 이런 반대세력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특히 이곳의 사원을 비롯한 많은 구조물들은 이런 정치적 이념이 그 내용에 표현된 기념물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략)Stowe 정원을 풍경식 정원으로 개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W. Kent도 이 당시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유럽대륙으로 여행을 떠나듯이 이태리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이미 조성된지 200여년이 지나 많이 훼손되어 폐허형태로 남아있는 르네상스 시기나 바로크 시대의 정원들은 마치 17세기 풍경화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조성당시의 의도된 모습이 아닌 새로운 시대정신의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는 티볼리의 신전을 복제하는 일, 또는 이태리 정원에서 받은 영감으로 재해석된 캐스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이태리 풍경을 영국식으로 해석해서 작업을 하게 된다. W. Kent는 화가, 건축가로 활동하다 조경가로 일을 하게 되는데 그의 탁월한 미적 감각은 원예에 대한 전문지식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을 그림처럼 경치를 그려가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18세기 초 Richard Temple 경은 정원 조성과 기존 주택의 개조를 위해 조경가 Charles Bridgeman 과 건축가 John Vanbrugh 경을 불러들여 구부러진 길과 정형이 아닌 비정형의 축 등을 조성하면서도 이미 조성되어있던 프랑스식의 정원 양식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C. Bridgeman의 조성 방식은 정형식 정원은 아니었고 아마도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풍경을 정원에 도입한 조경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처음 정원조성에 도입한 “Ha-Ha"기법은 원래 프랑스군의 참호를 파는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정원을 산책하면서 경계부근에서 갑자기 도랑을 발견하고 놀라면서 ”아하“ 하고 말하는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변에서 기르는 가축들이 정원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면서도 울타리 등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매혹적인 풍경이 단절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생각된 것인데, 울타리 없이 경계를 지어주는 이 건조한 도랑은 특히 주변의 풍경을 함께 정원조성에 이용하는 풍경식 정원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기법으로 후에 W. Kent도 널리 사용하였다. 김 인 수 Kim, In Su 환경조형연구소 그륀바우 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나 그리고 T.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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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안(西安)
    3천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서안은 현재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로, 서북(西北)지방 최대의 관광도시이자 상공업도시이다.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하고 있는 시내에서 그 옛날의 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당나라 때의 장안성(長安城)을 본 따 명나라 때 축조된 성벽(城壁)이 바로 그곳이다. 이 성벽은 옛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중국의 성벽들 중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유적으로, 대략 6백년에 이르는 시간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당대(唐代)의 장안은 당시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품위있고 정연한 계획도시였다. 계획도시 장안의 모습에 혹한 당시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수도였던 경도(京都)를 만들면서 장안의 도시구조를 그대로 복제했을 정도였다. 장안은 기능에 따라 궁전지구 · 행정지구 · 주거지구 · 상업지구 · 공업지구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되고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요즘의 지역지구제(地域地區制)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각 지구들을 잇는 가로망은 바둑판의 격자형 체계를 이루었고, 황제가 거처하는 황성(皇城)의 남문인 주작문(朱雀門)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폭 150m에 이르는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중심대로였다. 한편으로 이 도시는 서방세계로 연결되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출발지였다. 비단길의 관문으로 서역의 상인들이 거주했고 국제적인 무역시장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장안은 인구 150만에 이르는 동양문화의 중심지로 화려한 번영을 누렸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서면서 수도는 동쪽의 개봉(開封)으로 옮겨졌다. 장안은 중심도시로서의 날개를 접었고 그 이름도 지금의 서안으로 바뀌었다. ‘서안(西安)’이라는 이름은 장안에 잔류했던 당의 후손들이 혹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서쪽 지방의 안정을 바란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후 북경(北京)에 수도를 정한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 서안은 서북지방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거점도시가 되면서 당나라 때의 장안성을 근거로 ‘서안부성(西安府城)’이 축조되었다. 지금 보이는 명대의 서안부성은 규모가 1/6 정도로 축소된 것이니, 당대 장안성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좀처럼 짐작하기가 어렵다. 주위에 해자(垓字)를 두르고 있는 성벽은 대략 12m에 이르는 상당한 높이를 보이고 있다. 성벽의 윗 폭은 12-15M로 성벽 위는 관광객들을 실은 코끼리열차가 다닐 정도로 상당히 넓다. 아랫 폭은 윗 폭보다 약간 넓은 15-18m로 안정감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고, 성벽의 사방 둘레는 12km 정도이다. 6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성벽이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 위를 코끼리열차를 타고 구경하는 현실은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급격히 성장하는 오늘의 도시에서 성벽은 도로터나 건물터로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당연히 헐리어 없어져야 될 옛 시대의 퇴물이라는 개발논리가 횡행하는 시대가 아닌가? 성벽 위에서는 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성곽 안은 고도로서의 옛 모습을 지키기 위해 전통양식의 건축물을 권장하는 한편, 스카이라인(Skyline)을 해치는 고층건물의 높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반면 성곽 밖은 급변하는 현대도시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방어의 목적과 아울러 이렇게 도시에 성벽을 쌓은 것은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안과 밖을 명확히 구분하는 성벽이라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성벽에 뚫린 도시의 문이 비로소 문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이 있기에 비로소 길은 길로서의 제 구실을 하게 된다. 결국 도시에 성벽이 있기 때문에 도시공간은 질서를, 도시가로는 체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북부 수자원생태공원 입구 벽천
    · 위치 : 부천시 오정구 대장동 434번지 굴포천 하수종말처리장 정문 입구· 벽천 : 연장 132.9m, 높이 4.9m· 발주 : 부천시청 하수과· 시공(턴키) : (주)대우건설· 디자인 설계 : 경희대 장광집 교수 부천시의 관문에 위치한 굴포천 하수처리장. 보통 ‘하수처리장’하면 처리과정에서 발생하는 냄새 등으로 혐오시설로만 생각되기 마련이지만 부천시(시장 홍건표)에서는 장기적으로 이곳을 환경친화적인 친수공간이자 생태공원으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첫걸음으로 공원 조성에 앞서 입구에 비교적 규모가 큰 벽천을 새롭게 조성하게 된 것이다.설계자에 따르면, 겨울에는 사용할 수 없는 벽천의 계절적 한계 요인과 환경여건을 극복할 수 있는 조형성을 기준으로 상징성을 내포한 조형(Monument, Signage)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연출적 요소를 수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물을 흘릴 수 없는 겨울의 조형성을 살리기 위해 마천석 조각을 하나하나 세워 붙여가며 시공했으며, 마천석 표면의 일부는 물갈기로 매끈하게, 일부는 잔다듬으로 약간 거칠게 시공해 물이 없을 때에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도록 했다. 벽면 하단에는 여러가지 색깍의 화강석을 이용해 산과 자연을 표현한 벽면 조형이 되어 있기도 하다.벽천의 물은 돌에 부딪혀 깨어지거나, 뿜어 나오는 등 물의 특성을 이용한 다양한 연출이 되도록 했다. 또 야간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조명이 물과 조형물을 투사하기도 하며, 출수구에 설치한 LED 조명을 이용해 색이 다양하게 변화되도록 했다. 벽면 앞으로는 괴석이 놓여 있기도 하고, 연못에는 하얀색 자갈과 검은색 자갈이 깔려 있는데, 자연스럽게 풀이 식생하거나, 이끼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자 했다.한편 부천시에서 오다 보면 벽천의 모퉁이 부분이 강하게 노출되어 이곳에는 눈에 띄는 조형물을 설치하려 했으나 옮길 수 없는 지장물들 때문에 피라밋 형태의 작은 조형물로 대치하게 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벽천의 높이 4.9m는 하수처리장의 냄새가 밖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결정된 것이라고.아직 생태공원이 완공되지 않았고, 벽천 앞의 39번 국도가 확장될지 결정되지 않아 벽천 앞 공간은 밋밋한 잔디광장의 형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태공원 공사가 마무리 될 즈음에는 벽천 앞에 작은 휴게공간이 들어서고, 입구도 새롭게 단장되어 오가는 시민들을 반길 것으로 보인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칼 푀르스터
    독일어권의 최신 조경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 “Landschaftsarchitekten I, II, III권”이 조경설계사무소의 자료실이나 조경학과의 연구실에 거의 빠짐없이 꽂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조경작가나 작품은 국내에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독일은 생태의 나라이며 조경디자인은 ‘별로’라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는 듯한데 그 이면에는 독일에 대한 “심각하고 원리 원칙대로 사는 사람들의 나라” 따라서 “예술이나 디자인과는 어쩐지 먼 나라”라는 선입견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바우하우스 움직임 이후 20세기 독일 조경이 미국 혹은 영국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어 왔다는 사실이 가장 큰 작용을 한다고 보아야겠다. 이에 독일의 독특한 20세기 조경이라는 배경이 낳은 대표적 조경인들의 생애와 작품을 두 회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 중 오늘 얘기할 칼 푀르스터는 스스로 조경가(Landscape architect)라고 불리기를 거부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20세기 독일 조경의 대부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이고, 칼 푀르스터를 모르고는 독일의 현대 조경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그의 생애와 작품을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칼 푀르스터는 1970년에 96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3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의 영향력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 그가 표방한 “일곱계절의 정원(Garten der sieben Jahreszeiten)”과의 씨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표현주의 예술과 (Expressionismus) 바우하우스라는 쌍두마차를 타고 20세기의 관문을 선두로 질주하던 독일이 20년대에 불현듯 기수를 바꾸어 모더니즘의 길을 떠나 버린 데에는 1차 대전, 2차 대전과 나치라는 역사적 변수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민족적 주체성을 찾으려는 사회전반의 움직임과 더불어 새로운 조경의 방향을 잡으려는 격렬한 태동이 일었고, 이 태동은 나치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인 1929년을 전후하여 ‘新풍경주의’라는 새로운 조경양식을 낳게 한다. 新풍경주의는 결국 독일식의 모더니즘인 셈인데, 이로서 독일은 국제주의 모더니즘과 (Internationalismus) 정식으로 결별을 선언한다. 新풍경주의는 이후 독일 20세기 조경의 기틀이 되었고, 1960년대 말 환경운동이 여기서 갈라져 나오게 되는데 이를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세 명의 조경인이 칼 푀르스터, 헤르만 마테른, 헤르타 함머박허이다. 다음 호에 소개하게 될 헤르만 마테른, 헤르타 함머박허는 젊은 부부로서 당시 신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으며 칼 푀르스터는 이 둘의 代父역할을 한 사람이다. 특기할 것은 칼 푀르스터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엄밀한 의미에서 조경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원래 정원사였고 정원사이기를 고집하였으며 동시에 자연 철학자였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도 정원사가 될 것이다.” 혹은 “온 세상 사람들이 정원사라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라는 말은 괴테의 “신이 나를 정원사로 만들었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이어 받는 것으로 기실 푀르스터는 괴테의 낭만주의적 고전주의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정원사의 사회적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그는 평생 3백여종의 숙근초화류를 육종하였고 30권의 책을 썼다. 그는 낮에는 정원을 만들고 해가 지면 포츠담 자택 서재의 녹색 전등갓 아래서 글을 쓰는 생활을 70여년간 지속한다. 마지막 날까지 푀르스터는 조경과 집필의 작업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가 그리 오래 산 것은 정원사로서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그의 제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의 소망은 “온 세계의 정원화”였고, 그 방법론으로 세계 곳곳에 전시용 정원을 만들어 네트워크로 연결 할 것을 제시한다. 실제로 그는 1910년 그의 저택 정원을 전시용 정원으로 개방하고, 1934년 포츠담 프로인트샤프트 섬에 두 번째의 전시용 정원을 짓는데 성공하며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훗날 그의 제자들이 전 유럽에 세운 전시용 정원이 현재 서른 곳을 헤아린다. 그의 저택과 정원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명한 녹색 전등갓을 포함하여 그의 서재는 지금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수많은 그의 글들은 자연철학뿐 아니라 샘솟듯 하는 정원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만의 독특한 언어구사와 최상급으로만 진행되는 자연예찬은 오늘의 정보문화 시대의 정서로는 읽기가 벅찬 감이 있어 “너무 달콤하기에 쓴 독주로 중화시켜가며 읽어야 한다.”는 ‘푀르스터 독서 방법론’이 제시될 정도이다. 그는 유럽 전역에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단 한 장의 도면도 그려 본 적이 없는 조경인 아닌 조경인이다. 그럼에도 그를 기리는 기념정원이 곳곳에 만들어 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정기적으로 열리는 정원전시회에는 칼 푀르스터 이름으로 그의 아이디어를 딴 일곱 계절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 마치 필수 과목처럼 되어 있다. 고 정 희 Go, Jeong-Hi 삼성에버랜드(주) 환경개발사업부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