造營 _ 인조의 부왕 정원군(定遠君)이 광해군 11년(1619)에 서거하자 양주 곡촌리에서 장사지냈던 것을 인조 5년(1627) 8월 27일에 김포현 성산(城山)으로 천장하고 인조10년(1632)에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면서 능호를 장릉이라 고치고 이에 따라 흥경원의 조성 당시 왕의 예로서 하지 않았던 석물(石物)을 왕릉제로 개수하였다. 이후 1969년, 농업용수 공급을 위하여 재실 남쪽에 저수지를 준공하였고, 1970년 사적 제202호로 지정된 이후 조경정비 등의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향일은 양력 10월 5일이다.
立地 _ 장릉은 김포시청의 남서쪽 약 1km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계는 북성산을 중심으로 한 계곡에서 발원된 이후 2개의 수계로 나누어진다. 능 우측 수계는 장릉 연지를 거치지 않고 서측으로 흘러 장릉저수지로 유입되며, 능 좌측 수계의 명당수는 홍살문 앞 금천교를 통과해 우측 수계와 합류하여 연지로 유입되어 출수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주변환경으로는 북쪽으로는 사우동, 남쪽으로는 인천시 계양구 오류동, 동쪽으로는 고촌면 풍곡리, 서쪽으로는 인천시 서구 검단2동이 인접하고 있다. 또한 장릉저수지의 서쪽으로 장릉의 원찰인 금정사(金井寺)가 위치하고 있다.
空間構成 _ 1)配置形式
장릉은 능의 공간위계를 따라 진입공간, 전이공간, 능침공간으로 구분되며, 능침, 정자각, 홍살문이 일직선상으로 남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이에 진입공간은 홍살문 밖의 공간으로 금천교와 재실, 연지가 해당되며, 전이공간인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참도(參道), 배위(拜位), 수복방(守僕房), 비각(碑閣)이 위치한다. 정자각을 지나 낮은 언덕에 조성된 능침공간은 2기의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曲墻)내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그리고 능전(陵前)에는 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석마(石馬) 등이 위치하는 바,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릉의 능침방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 북북동에서 남남서향)의 쌍릉으로 병풍석을 양릉(兩陵) 모두 세우지 아니하고 능침 아래로 얕은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난간석 또한 설치하지 않았다. 각 능 앞에 혼유석 1좌씩 모두 2좌가 있으며 그 동서 양측에 망주석 1쌍과 양릉의 밖으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각 2쌍을 교호배치하였으며, 그 밖으로 삼면의 곡장이 있다.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하지 아니한 것은 추봉(追封)한 다른 왕릉의 전례에 따른 것이며 석물만을 왕릉으로 개비(改備)하였기 때문이다. 중계엔 문석인 1쌍과 마석 1쌍을 상면 설치하고 중앙에 팔각형장명등 1좌가 있다. 하계엔 무석인과 마석 각 1쌍이 문석인과 같이 설치되었다. 능원 아래에 정자각이 있으며 정자각 동측에 비각이 있다. 비각 아래에 수복방이 있으며 정자각 남측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으로부터 남측 아래로 내려오면 재실이 있고 재실 서남측에 연지(蓮池)가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