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rden of Time, Design as a Discovery : What Seonyudo Park Criticizes
0.1 비평
선유도공원은 애초부터 비평을 의식한 작품이다. 그리고 비평이 필요한 작품으로 태어났다.
0.2 그곳은 예상 밖이었다
비평의 렌즈를 들이대야 한다는 임무 때문에 선유도공원에 대한 갖가지 사연을 듣고 읽고 그곳에 갔다. 사람의 도시 서울 안에 있지만 갈 수 없는 미지의 섬, 30년 가까이 영등포 일대에 수돗물을 공급해 온 정수장, 원래는 섬이 아니었으나 일제강점기의 큰 홍수 후 제방을 쌓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면서 섬으로 변한 곳,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선(仙)이 노니는(遊) 봉우리(峰)"라는 이름처럼 빼어난 절경과 넉넉한 풍류를 자랑하던 곳,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긴 단골 메뉴―대충 이 정도가 급히 챙긴 그 땅의 역사적 정보였다. "한강 최초의 섬 공원"이자 "국내의 첫 재활용 생태공원"을 지향하며 열렸던 지난 1999년 말의 설계경기 수상작들을 다시 리뷰하기 위해 먼지 쌓인 잡지를 다시 꺼냈고, 잡지 반쪽 크기로 실린 조경설계서안(주)의 당선작 패널을 해부하기 위해 돋보기의 힘도 빌렸다. 서안은 적어도 다른 팀들에 비해 선유정수장의 시설과 흔적을 과감히 살리려 했다는 점에서만은 달랐다. 설계를 총괄한 성종상 소장이 수차례 언급했듯이 선유도공원은 피터 라츠(Peter Latz)의 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는 점(참고 : 성종상, "선유도공원:다시 우리 곁으로 온 섬, 선유도," 환경과조경 170호, 2002년 6월호, p.55, 주3. 되스부르그-노드파크 및 그 일대의 엠셔파크(IBA Emscher Landscape Park)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Topos 26권(1999)의 특집을 참고할 것. 엠셔파크가 동시대 공원 설계와 관련하여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 졸고를 참조할 것. 배정한, "동시대 조경 이론과 설계의 지형(5): 변신을 꿈꾸는 공원," {환경과 조경}159호, 2001년 7월호, pp.82-87.) 또한 다시 기억해야 했다. 프랑스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Rudy Ricciotti)가 설계한 한강 최초의 보행자 전용다리 "선유교"는 빈번한 매스컴 보도를 통해 가서 보지 않고도 친숙한 상태였다. 선유도공원이 "서울의 무게중심이 계속 서쪽으로 옮겨가는" 현상을 보여주는 단면의 하나라는 한 전문가의 평가는 선유도와 서울의 도시 구조 전반을 연관지어 생각하게 했다.
이처럼 나는 이것저것을 모자이크한 결론을 미리 가지고 있었다. 결론은 버킹검, 내가 구축한 버킹검은 대강 이런 그림이었다: "선유도공원은 근대화의 산물인 수도공장의 황폐화된 시설을 철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용해 디자인한 공원이며, 전통과 생태의 습관적 폭식으로 인해 만성 소화불량에 걸린 한국의 도시공원 설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 것이다. 그리고 향후 점점 늘어날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사이트(Post-industrial site)의 재활용 설계에 중요한 선례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선유도공원은 상당히 논리적인 문법을 구사하며 구성되었을 것이고 다른 공원에서 맛보기 어려운 고급 테크놀러지 비슷한 무언가를 선보이고 있을 것이라는, 교목과 잔디밭과 정자와 벤치를 비벼놓은 이 동네 저 동네의 판박이 공원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자연과 전통의 콤비네이션 피자 여의도공원과는 다를 것이라는, 적어도 그것은 공장의 기억을 함몰시키고 녹색의 분첩으로 두껍게 화장한 영등포공원이나 천호동공원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예상―물론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산역 거쳐 한강시민공원 지나 선유교 건너 힘겹게 찾은 선유도공원은 내 예상의 폭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감각적"으로 전해 주고 있었다.
1.0 감각의 지배
산업시설의 부지와 구조물을 남겨서 그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재활용한 선유도공원임에도 불구하고 테크놀러지와 디자인의 논리적 결합이 가져다주는 이성적 공간이 연출되지 않는다.(참고 : 물론 다양한 방식의 생태적 테크놀러지가 선유도공원의 가동을 지탱시켜주는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수생식물의 경우, 수생식물에 의해 정화된 물이 정원을 순환하며 다시 꽃과 나무를 키우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시간의 정원 내의 수로와 벽천을 흘러내린 물은 회수조로 집수되었다가 다시 물탱크로 순환된다. 보다 상세한 정보는 성종상, 앞의 글을 참조할 것.) 이것이 예상의 영토 바깥에 거주하고 있는 선유도공원의 첫인상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성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깨뜨리는 감성적인 면, 정체 불명의 감각적인 면이 선유도공원을 지배하며 유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유교와 몸을 맞대고 있는 지극히 가벼운 느낌의 목재 데크로 불어오는 쓸쓸한 강바람, 한번에 경험되는 서울의 풍경과 냄새, 정수장의 거친 콘크리트 잔해와 새로운 철제 재료의 동거가 만들어내는 몽타쥬, 밝음보다는 우울함에 가까운 메시지, 땀 흘리는 움직임보다는 엄숙한 성찰의 발걸음을 요구하는 사색의 원로―그것은 다분히 "미학적"이다. 미학적 판단은 논리적 판단이 아닌 "감성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감각을 통해 파고드는 선유도공원의 이 모호한 분위기를 어떠한 미학적 카테고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the beautiful) 및 픽춰레스크(the picturesque)와 함께 18, 19세기의 3대 미적 범주의 하나였던 "숭고"(the sublime)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폐허의 무거움이 연출하는 숭고함.(참고 : 영문으로 출판될 예정인 비평문 "기억의 공간 만들기: 선유도공원 디자인의 의미"(현재 미출판 상태)에서 조경진은 선유도 공원 디자인의 미학을 멜랑콜리와 숭고미로 해석한다. 그는 "감미롭기보다는 엄숙한" 선유도공원의 미적 경험은 "내면적 참여"를 통해 요청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생산과 발전이 동일시되던 20세기의 상징인 거대한 굴뚝들이 줄지어 늘어선 엠셔파크의 미학적 층위를 "공업적 숭고"(industrial sublime)라고 압축한 매트 스타인글래스의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 다음을 참조할 것. Matt Steinglass, "The Machine in the Garden," Metropolis 20(2), Oct. 2000, pp.166-67.)
숭고만으로 선유도공원을 지배하는 감각의 아우라(aura)가 해명될 수 있을까? 디지털 카메라에 담아 온 삼 백장 넘는 사진을 다시 본다. 다양한 앵글의 사진을 계속 반복시켜도 그 모호하고 애매한 감각이 시각적으로 재생되지 않는 것을 보면 선유도공원이 담고 있는 감흥의 열쇠는 공감각적(synaethetic) 경험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각의 패권을 비웃는 공감각.
"미루나무가 불러들이는 바람 소리에 취해도 보고, 강 건너 탁 트인 전망을 즐기며 사색의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습니다. 바람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때쯤 지하 공간으로 내려오면 놀라울 정도로 고즈넉한 정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수장 건물의 흔적들, 남아 있는 기둥과 벽, 그리고 물을 담아두었던 사각 공간 안에 자라는 식물들은 평온한 사색의 시간을 안겨줍니다.……낡은 것은 낡은 채로, 비어 있는 것은 빈 채로……." 방문자 안내소에서 얻어 볼 수 있는 발주처 서울시의 홍보 책자에 실린 글의 한 구절이지만 그저 과장된 레토릭일 뿐이라고 젖혀두기에는 선유도공원을 지배하는 감각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다.
▲ 물성의 노출, 시간의 반성 : 녹색기둥의 정원
2.1 시간의 지층
높이 9m의 콘크리트 옹벽 아래 둔치 습지에서 목재 데크를 관통하며 뻗어 올라간 한 그루 나무는 선유도공원에 쌓인 시간의 지층이 얼마나 두꺼운 지 쓸쓸히 고백하고 있다. 예사롭지 않은 이 감각의 섬의 패스워드는 공간에 있지 않다. 이 섬의 역동적인 요소가 시간임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과 보이지 않는 지층 곳곳을 시간과 역사와 기억이 관통하고 있다. 절경의 선유봉에서 버려진 섬으로, 다시 정수장으로, 그리고 공원으로 옷을 갈아입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사실 변화라는 두 글자로 요약되는 서울에서 선유도는 그나마 근대사의 변화 세례를 덜 받은 운 좋은 땅덩이가 아닐 수 없다. 선유도공원의 시간 암호가 매력적인 것은 시간의 경험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참고 : 한국의 조경설계가 인스턴트화된 전통의 강요에 얼마나 시달렸고 또 얼마나 강박증적으로 전통을 재생산하고 복제하는데 봉사해 왔는가를 다시 논하는 일은 식상의 범위마저 벗어난다. 물론 선유도공원에서도 어김없이 본래의 설계의 의도를 꺾고 한 자리를 차지한 정자 선유정은 시간 경험의 강요가 갖는 모순을 아낌없이 드러내주기에, 차라리 비평적이다.)
오히려 선유도공원은 감각적인 기억의 메카니즘에 호소하고 있다. 방문자 안내소 건너편의 수질정화식물원과 온실이 원래는 노천형 수조로 구성된 약품침전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이 알 필요가 없다. 한강전시관이 송수펌프실 건물이었고, 녹색기둥의 중정이 지하 정수지였다는 점도 예습할 이유가 없다. 수생식물원과 시간의 정원이 정수장의 여과지와 약품침전지였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한강에 몸체를 내밀고 한쪽 다리를 담근 카페 나루가 강에서 물을 직접 끌어오던 취수펌프장이었다는 사실을 몰라도 그만이다. 야외무대와 놀이마당과 환경교실과 화장실이 각각 두 개의 원형 농축조와 조정조를 개조한 것이라는 사실도 선유도공원의 경험을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걷고 보고 듣고 만지며 경험하는 선유도공원의 시간은 그러한 변화의 도식에서 벗어난다.
오히려 우리는 허물어진 콘크리트, 거친 표면의 시멘트 기둥, 녹슬고 부식된 철제 배관 같은 파편화된 물체를 통해 시간의 아우라를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근대사의 한 단면을, 산업화의 이면을 비로소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고착화된 녹색 자연의 이미지가 시간의 함수 속에서는 얼마나 허구적인지 깨닫게 된다.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지만 그러한 흐름 속에는 복잡하게 뒤얽힌 단편적 기억과 잘 재생되지 않는 더 깊은 심연의 기억이 두터운 층위를 이루며 공존한다는 성찰을 하게 된다. 서울의 풍요로운 여백 한강, 그 속의 작은 정원 선유도공원에 "시간의 정원"이라는 메타포를 대입할 수 있는 이유.
2.2 두껍게 하기
선유도공원에서는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 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로 치자면 롱테이크 기법보다는 몽타쥬 기법이라고 해석될 법한 이 동선 체계의 생경함은 높고 낮은 여러 갈래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경진이 말하듯, "가까이에서 보는 수생식물의 사잇길, 위에서 조망하는 시간의 정원의 보행가교, 옹벽 주위로 연결된 산책로, 정수장 외곽을 걷는 오솔길, 각각의 주제 정원 사이를 관통하는 길"이 "시선의 줌인, 줌아웃이 교차되듯이 변화"하며 다양한 궤적을 그린다. 그래서 선유도공원은 "한 눈에 잡히지 않는 공원"이다.(참고 : 조경진, "기억의 공간 만들기: 선유도공원 디자인의 의미," 앞의 미출판 원고.)
특히 하나의 층에 축이나 격자를 가지고 질서를 부여하는 수평적 공간 구성과 동선 시스템과는 달리 선유도공원은 수직적 공간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여러 층의 공간과 뒤섞이면서 올라가고 내려가는 다양한 깊이의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두껍게 하기"(thickening)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 입체적 디자인 전략은 공간 자체의 구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경험과 이용 층위를 두껍게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선유도공원의 핵심부라고 할 만한 시간의 정원은 두껍게 하기의 전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약품침전지라는 본래의 공간 조건을 살려 조성한 4미터 깊이의 선큰 공간에서는 소정원 여덟 개와 그것을 구획하는 콘크리트 기둥의 수직성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위를 지나는 지상 레벨의 목재 마루와 길에서는 아래에 펼쳐진 정원에 대한 호기심을 숨긴 채 한강의 바람과 냄새를 경험할 수도 있다. 아래층을 통해 계속 수생식물원 쪽으로 걸음을 옮길 수도 있지만 무너진 콘크리트 사이의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 수생식물원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통과해서 녹색기둥의 정원으로 다시 한층 내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껍게 하기는 공간 디자인의 전략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두껍게 하기의 대표적 사례 아드리안 구즈(Adriaan Geuze)의 에서 볼 수 있는 작위적인 공간 레이어링(layering)(참고 : 보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할 것. Alex Wall, "Programming the Urban Surface," in Recovering Landscape: Essays in Contemporary Landscape Architecture, ed. James Corner (New York: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1999), pp.244-46.)과 달리, 선유도공원의 두껍게 하기는 오히려 우연과 시간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시간의 정원을 예로 든다면, 우선 아래층은 과거의 시간을, 위층은 현재의 시간을 구성하며 경험되는 시간의 깊이를 두껍게 하고 있다는 손쉬운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같은 도식은 환원적 도식일 뿐이다. 이 두꺼운 공간은 경험자 나름의 해석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층, 즉 지하 공간에서 과거의 층위를 경험하는 가운데 새로 심겨진 방향식물과 덩굴의 초시간적 동거를 경험할 수도 있고, 위층, 즉 지상을 걸으며 현재의 시간 밑에 침전된 과거의 시간을 궁금함과 혼란함의 접점을 넘나들며 경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껍게 하기 전략은 시간의 차원과 결합되면서, 또 부지에 던져진 역사라는 조건과 복합되면서 선유도공원의 시간 지층을 더욱 깊이 있게 한다. 그 두께를 더 두껍게 하는 것은 경험자의 몫이다.
2.3 물성이 전하는 이야기
"두껍게 하기"와 함께 선유도공원에 의도된 시간 전략의 또 다른 축으로 "물성(physicality)의 노출"을 꼽을 수 있다. 울퉁불퉁한 생살처럼 드러난 콘크리트 벽과 기둥, 지워지지 않는 물의 얼룩과 녹슨 자국이 전해 주는 것은 쓸모 없어 폐기된 산업의 잔재가 아니라 재료 자체의 물성이다. 그 물성은 또한 시간의 흔적을 가감 없이 노출시킨다. 노출된 물성과 그것에 녹아있는 시간의 이야기는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 제기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의 산업 재료와 새로운 방식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꽃은 식물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문화와 함께 거주해 온 자연의 역동성을 물질적으로 전하고 있다.
직각 방향으로 공원을 가로지르며 선 한강전시관 앞의 녹색기둥의 정원은 물성의 노출을 통해 시간을 성찰하고 자연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반성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 정수지 위의 콘크리트 상판을 걷어내고 기둥만을 남겨 조성한 녹색기둥의 정원. 위층에서 산책하며 조감하면 일정 간격으로 늘어선 콘크리트 기둥의 조합이 마치 의도된 조각 작품처럼 경험되지만, 램프를 따라 아래층에 내려가 부감의 형식으로 콘크리트 기둥을 대면하면 이곳에 남겨진 시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둥 하단부를 따라 감겨 올라가기 시작한 식물은 콘크리트와 식물은 지극히 이질적이라는 선입관을 비웃으며 자연의 문화성을 잔잔히 웅변한다.
물성의 노출 전략은 이처럼 비평적 메시지를 경험자에게 전하며 공원 곳곳에 투입되어 있다. 또한 스타일이나 형태의 디자인을 뛰어넘는 물질의 디자인이 지니는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물질의 생살에서 시간을 읽고 느끼는 경험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전개된다.
3.0 사이트의 힘, 발견의 디자인
이렇게 선유도공원은 수도공장의 잔재와 흔적을 기억하고 있다. 우울하면서도 사색적인 감각적 아우라를 시간의 깊은 지층 속에 심고 있다. 또 두껍게 하기와 물성의 노출 같은 전략적 디자인을 통해 시간의 경험을 확장하고 있다. 노래방이나 돼지갈비집처럼 흔해 빠진 도시 공원의 전형을 형식과 내용면에서 모두 극복하는 대안적 실험장이라는 평가가 과장되게 들린다 하더라도, 적어도 공간적 기억상실증의 표상인 영등포공원이나 천호동공원의 실패만큼은 만회했다는 평가에 고개 저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공장의 기억을 몰개성의 반복으로 장식해 버린 1990년대 말의 "공장 및 시설 이적지 공원화 사업"에 대한 비판은 다음 졸고를 참조할 것. 배정한, "기억의 상실," (참고 : 조경과 비평:Locus 2}(서울:도서출판 조경, 2000), pp.115-30.)
그러나 우리는 아주 근본적인 물음에 마주하게 된다. "선유도공원이 숭고와 공감각의 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의 지층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공간과 시간을 두껍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 재료의 물성을 과감히 노출하며 스타일과 형태 위주의 디자인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조경가의 디자인 능력 덕분인가?" 간명한 대답이 요청된다면, 당연히 "아니오"다. "그것은 선유도라는 사이트에 주어진 조건에 힘입은 것 아닌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렇다." 사이트의 힘.
근본적인 물음 또 하나가 우리를 기다린다. "그렇다면 선유도공원에서 조경가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 "없다"라는 대답에 동의한다면, 과업을 책임진 정영선, 설계를 총괄한 성종상, 설계를 진행한 정우건, 프로젝트에 참여한 서안의 여러 멤버들뿐만 아니라 우리 조경가 모두는 아주 심각한 전문성의 위기 또는 정체성의 공백에 빠지게 된다. "그는, 그들은 운 좋게 살아남은 땅 선유도를 실험실로 선물 받은 운 좋은 사람들에 불과한가?"(참고 : 물론 그는, 그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운 좋게 잠재력 있는 사이트를 부여받고도 과장된 형태나 강박적 관념으로 땅의 힘을 무력화시킨 선례에 우리는 너무도 익숙하다.)
억지를 쓰지 않더라도 "아니다"라는 대답을 마련할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그는, 그들은 선유도의 시간 속에 담긴 사이트의 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힘을 발견하고 그 힘 속의 잠재적 가능성을 극대화시킨 "발견의 디자인"을 선유도의 시간에 선물했기 때문이다.
4.0 또는 0.3 선유도공원을 넘어, 비평을 넘어
선유도공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쟁점을 의식하고 있는, 아주 다양한 각도의 비평을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자연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는 문화적 자연, 전통적 도시 공원의 위기를 해소하는 대안적 실험,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사이트의 재활용 전략, 형태중심적 디자인을 넘어서는 물성의 실험. 물론 선유도공원은 이런 거창한 쟁점의 소재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나는 선유도공원을 놓고 한국 조경의 동시대적 환부를 진단하고 미래의 좌표를 처방하는 하는 책무를 다른 지면에, 다른 비평가에게 넘기려 한다. 단지 선유도공원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 한가지를 알리고 싶다: "그것은 새로움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아주 오래된 시간에서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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