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탑골 공원에 대한 비평 -
실어증 (Aphasia)
서울은 실어증에 걸렸다. 이 거대하고 역동적인 도시는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기억들을 간직해왔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 기억들을 잊어갔고 우리의 도시는 박제된 시간의 파편만을 드러낸 채 침묵 속으로 침전해간다. 무엇이 이 도시를 침묵하게 했는가?
현대 한국 조경은 기능에서 출발하였다. 이 땅에서 조경은 성장 위주 경제 정책의 산물로서 시작되었으며 그 주된 역할은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개발의 치유에 있었다. 자연히 도시 외부공간에 있어서도 쾌적한 환경 조성이 제 일의 목표가 되었고 디자인 역시 기능의 면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였다. 양적, 질적 성장을 거치면서 조경 설계의 영역에서는 옴스테드 양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서구 아방가르드 조경가들의 이론과 맥하그가 주창한 생태적 방법론을 받아들여 새로운 형태를 찾고자 하는 여러 가지 연구와 실험들이 시도된다. 하지만 형태상의 다양성과 변화가 나타났을지언정 모든 프로젝트의 근본 목표는 여전히 [공원 운동(Public Park Movement)]으로 대변되는 옴스테드의 이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90년대 들어 근린공원, 가로환경, 대규모공원 등 성격이 상이한 프로젝트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목표는 "쾌적한 환경 조성"이라는 동일한 모토 아래 놓여있었고 그 결과물의 성격 역시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급속한 근대화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 현대 조경은 기능주의라는 거대한 명분 앞에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도시는 많은 것을 얻은 반면 많은 것을 놓치고 말았다.
조경이 처음 이 땅에 도입되었을 시기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선진국과 비교한다면 양적, 질적인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공원들은 그 기능들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도시는 과거처럼 절대적인 녹지의 부족으로 신음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친 것 역시 작지는 않다. 도시는 물리적 실체이면서 문화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도시를 하나의 물리적 실체로만 간주하여 기능의 측면만을 고려해왔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화적 텍스트로서의 도시는 우리에게 잊혀져 갔다. 서울은 역동적이고 활기찬 도시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서울은 우리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지금 서울이라는 도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도쿄, 뉴욕, 상해의 이야기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현재 서울에는 공식적으로 176개의 문화재가 등록되어 있으며 97개의 문화유적지가 있다. 이 외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장소들을 서울 곳곳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장소만을 제외하고 이들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서울은 600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입을 닫았고 우리는 장소(Place)를 잃어버렸다. 장소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우리는 정체성과 고유성을 상실하였다. 이제 고속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가 70년대와 다른 가치관 속에 살고 있듯이 우리의 장소도 다른 가치관 속에서 성장해야 하다. 서울은 갑갑한 실어증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아야 한다. 이제 장소의 상실과 그 회복에 대한 논의를 탑골 공원을 통하여 진행해나가고자 한다.
과거 (Past)
일년 여 동안의 설계기간과 공사과정을 거쳐 탑골 공원은 지난 3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탑골 공원 재정비 계획의 공식적인 명칭은 [탑골 공원 성역화 공원 재정비 계획]이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탑골 공원은 두 가지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3. 1운동의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성역화된 장소로의 재탄생이고 하나는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의 재정비였다. 이를 거꾸로 유추하자면 재설계 이전의 탑골 공원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과거의 탑골 공원이 단순히 상징적 공간으로서, 그리고 쾌적한 공원으로서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공간이며 잃어버린 장소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장소가 지니는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설계 이전부터 탑골 공원은 이미 한국인들에게 3. 1운동과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져 왔다. 탑골 공원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명백하게, 그리고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탑골 공원은 역사를 상징하는 매개물로서의 공간이 아닌 실제로 3. 1운동이 일어났던 역사적 장소이다. 그리고 공원 안에는 그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공원 자체는 직접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지시한다. 3. 1운동과 파고다 공원의 역사적 의미도 한국인들에게 상식의 수준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동의를 얻고 있다. 때문에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굳이 3. 1운동이나 독립을 연상하게 할 매개물이 없어도 탑골 공원은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와 사건을 상징하는 기호가 된다. 탑골 공원의 입지와 주변 장소와의 인문적 관계 또한 탑골 공원이 지니는 의미에 기여를 한다. 탑골 공원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의 기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탑골 공원이 시민들이 매일 마주치는 일상의 장소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탑골 공원은 입장권을 내고 방문해야 할 장소도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야 할 장소도 아니다. 탑골 공원은 서울의 최대 번화가 중 하나인 종로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시민들을 위해 공개된 공공장소이다. 때문에 탑골 공원의 의미가 가벼운 것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리 없이 이를 일상 속의 기호로 받아들인다.
공원으로서의 탑골 공원 역시 반드시 실패작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분명 디자인의 측면에서 볼 때 과거의 탑골 공원은 훌륭한 공원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기존 탑골 공원의 디자인에 대한 진양교 교수의 평을 들어보자.
"파고다 공원을 잘 들여다보면 (아니 자세히 볼 필요도 없다.) 설계의 서투름이 역력하다. 각 공간들의 용도와 기능이 분명찮고 왜 그 공간들이 나누어졌는지도 확실치 않다. 녹지들은 조각조각 나있고 녹지들 사이의 공간은 길인지 마당인지 불분명하다. 한마디로 공간가름의 기초가 안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나마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 있다면 공원 부지의 북단 즉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는 곳 뒤쪽을 돌아가는 보행로 정도이다."
그러나 설계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조악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용자 수의 측면에서만 보면 탑골 공원은 가장 성공적인 서울의 소공원 중 하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탑골공원은 빈약한 설계내용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아야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이다. 이러한 결과는 공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재설계 이전의 이용자가 대부분 노인층이었다는 탑골 공원만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하여 탑골 공원을 노인들만이 북적거리게 되었는지는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져있지는 않다. 하지만 "한강"이라는 소설을 통해 본 파고다 공원의 이러한 독특한 모습은 60년대 초부터 있었음은 분명하다. 다른 세대들에게는 배타적인 성격을 갖는 노인들만의 공간이 된 탑골 공원의 모습이 고쳐져야 하는지 유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분명 "노인들의 장소"로서의 특징이 탑골 공원이 제시하는 또 다른 기호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탑골 공원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는 공간이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탑골 공원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상징적 기호가 명백하게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의 장소가 명확한 기호를 지닌다고 해서 그 장소가 생명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탑골 공원은 거대한 의미를 지닌 채 우리에게 침묵을 지켜왔다. 사람들은 탑골 공원을 지나치며 3. 1운동을 머리 속에서 떠올렸을 뿐 그 정신이나 의미를 체험하지는 못했다. 지난날의 탑골 공원은 3. 1운동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박제된 유물 이상은 아니었으며 탑골 공원이라는 장소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공허한 지식에 불과하였다. 하나의 역사적 장소가 존재한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1919년 3월 1일의 감동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게 그 때의 정신을 느끼라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1902년 탑골 공원이 세워졌을 때 탑골 공원은 독립정신이나 민족정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그 후 역사를 통해 이 장소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고, 독립 선언서가 탑골 공원에서 낭독된 지 8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이제 장소는 그 이야기를 잃어가고 말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자연히 오늘날에 탑골 공원이 살아있는 장소로서 생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또한 이용자의 수가 많다고 하여 공원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는 볼 수가 없다. 빈약한 설계 내용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넘쳐나는 이용자는 공원자체의 성격보다는 다른 요소에 기인한다. 노인층이라는 특수한 집단이 한 장소를 점유함으로써 나타나는 효과와 공원이 서울의 가장 번화가인 종로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입지적 특징이 이러한 탑골 공원의 불가사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용자의 수의 측면에서 공원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한다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셈이다. 탑골 공원이 서울 시내 최초의 근대 공원으로서 문을 열었을 100년 전과 현재의 탑골 공원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탑골 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종로 거리의 성격 자체가 크게 변화했으며 탑골 공원 바로 옆에 위치하는 인사동 거리는 문화의 거리로 선정되어 서울 제 일의 관광명소가 되어있다.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기에 J. M 브라운이 설계한 100년 전의 탑골 공원은 힘겨워 보인다. 과거의 탑골 공원이 현재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할 수가 없는 모습이라면, 그리고 원래의 설계가 열악하여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면 탑골 공원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 탑골공원의 기본 구상안
변신 (Metamorphosis)
탑골 공원의 재설계 작업은 분명 어려운 작업이다. 탑골 공원 내에는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유물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장소가 갖는 기호들은 중첩되고 얽혀있어 접근자체가 용이하지 못하다. 이러한 장소에 서울시는 탑골 공원의 역사적 상징성과 위상의 회복을 재설계의 제 일의 목표로 제시하였고 지난 11월 25일부터 현상공모를 실시하여 그 중 하나의 안이 채택되었다. 실제 시공되어 모습을 드러낸 탑골 공원의 모습은 설계안이 제시한 모습과 다른 점도 있으나 전체적인 구성이나 개념들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탑골 공원이 어떠한 방식으로 과거의 탑골 공원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잃어버린 장소를 회복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탑골 공원 재설계에 있어서 설계가는 3. 1 운동의 발생지로서의 장소가 지니는 역사성을 전체 설계의 핵심 주제로 삼고 있다. 탑골 공원은 다중적인 기호를 갖는 장소이다. 설계가는 이 모든 기호를 수용하기보다는 하나의 기호를 선택함으로서 다른 기호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이러한 설계가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비의 문제에 있어서 논란의 여지는 커진다. 실제로 탑골 공원은 3. 1 운동의 발생지이기 전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원각사가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원각사는 세조의 명에 의해 1464년 건립되어 조선 초기에는 조계종 본사로 번성한 사찰로서 현재 탑골 공원 내에는 원각사와 관련된 두 개의 유물이 있다. 문제는 그동안 독립운동의 발상지로서 탑골 공원이 지니는 역사성에 가려있었을 뿐, 두 유물을 통해 드러나는 탑골공원과 원각사의 관계는 무시하지 못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이와 관련하여 탑골공원 재정비 사업에서 그 동안 간과되어왔던 원각사의 역사성을 독립운동의 발상지로서의 역사성과 동등하게 부각시켜달라는 불교계의 계속적인 요구가 있어온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안에 있어서 이러한 탑골 공원과 원각사와의 관계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 원각사비는 산책로 구석으로 물러나 버렸고,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설계의 중심에서 빗겨나 있다. 설계안에 의하면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상징 기호로서 설계에 반영하려는 의도가 나타나기는 하나, 실제적으로 석탑은 사라져도 전체 설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부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설계안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노인들의 공간으로서의 상징성 역시 탑골 공원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였다. 과거의 탑골 공원은 40년 이상이나 노인들의 공간이었으며, 노인들이 유일한 만남과 정보교환의 장으로서 이용되어 왔던 장소였다. 3. 1운동과 원각사가 역사적 기호로서의 탑골 공원을 상징한다면, 노인들은 사회적 기호로서의 탑골 공원을 상징해왔다. 그러나 재설계된 탑골 공원에서는 특별히 노인들을 고려한 요소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기념적 공간을 조성하면서 노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은 더욱 줄어들었고 이는 관리 측의 의도와 맞물려 결과적으로는 탑골 공원은 더 이상 노인들의 장소가 아니게 되었다.
탑골공원의 다른 기호들을 부수적인 요소를 돌리면서 한가지 기호만을 선택한 설계가의 결정은 후에 이용자들이 어떠한 해석을 내리며 새로이 태어난 탑골 공원이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줄 지에 따라서 그 정당성이 판가름 날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설계가의 선택이 옳았다는 편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왜냐하면 탑골 공원이 지니는 다중적인 기호들을 모두 수용하다가는 자칫 의미의 과부하가 걸릴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탑골 공원은 그리 큰 장소가 아니다. 그에 비해 탑골 공원의 의미들은 너무나 다양하며 무겁다. 이 협소한 장소에서 모든 의미들을 동등하게 말하려한다면 장소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두서를 잃고 결국 아무런 것도 전달할 수 없게될 가능성이 크다. 어차피 설계는 선택의 문제이다. 설계가의 판단에 의해 필요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요소들은 제거되고 선택된 요소들은 기호로서 받아들여져 하나의 장소를 구성해나간다. 이렇게 볼 때 독립운동의 발생지로서의 역사성은 탑골 공원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기호이고, 이를 설계의 중심으로 선택한 설계가의 선택은 최선의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하나의 기호를 선택한 설계가는 자신의 설계언어를 동원하여 장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장소의 실어증을 치유해 간다. 설계가는 탑골 공원의 전체적인 공간을 기념광장과 상징광장이라는 두 개의 공간으로 분절하고, 두 공간이 3. 1운동과 독립정신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기념광장은 전형적인 기념 공간(Memorial)의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공간은 전쟁기념관이나 독립기념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형적이고 대칭적인 구도를 갖는다. 입구에서부터 팔각당까지 이어지는 축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기념비가 놓여있고 반대쪽에는 손병희 동상이 놓인다. 이 곳은 손병희 선생 동상, 3. 1운동 기념비, 기념탑, 성역화 취지문 등을 통하여 3. 1운동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려준다. 반면 또 하나의 공간인 상징광장은 비유와 은유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상징광장은 팔각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주변으로 마사토 포장이 된 광장이 있고 다시 광장을 탑골 공원 전체를 순환하는 산책로가 둘러싼다. 이러한 형태는 브라운이 조성한 탑골 공원의 원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를 통하여 새로운 탑골 공원은 과거의 탑골 공원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단절되지 않은 역사성을 표현한다. 공간의 구심점이 되는 팔각당은 탑골 공원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서 3. 1운동의 정신을 대변하며, 그 주위로 광장 바닥에 설치된 무명석은 이차적으로 장소의 역사성을 전달한다. 광장은 전체적으로 자연석 1개의 높이만큼 올려져있어 당시의 군중 집회를 원형으로 상징하며 주변과는 다른 성역을 암시한다. 이러한 상징의 요소들이 이용자에게 올바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걱정했던 것인지 광장 한편에는 10개의 부조상이 설치되어 3. 1운동의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 아래로 절개를 상징하는 자생 국화류를 식재함으로써 헌화의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기념광장과 상징광장은 하나의 강한 축으로 묶여져 있지만 두 공간의 분리는 명확하다. 바닥의 포장, 식재의 밀도, 구성에 있어서 두 공간은 대비를 이루며 공간적으로 구분이 된다. 여기에 두 공간의 경계를 전시벽이 수직적으로 가름으로 다시 한번 두 공간의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왜 설계가는 이토록 두 공간의 구분에 집착을 하는가? 두 공간상의 명확한 차이만큼이나 두 공간의 화법은 다르다. 설계가는 이 두 가지 화법을 통해 동일한 주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려 했고, 여기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성격의 상징성을 통해 전체적인 탑골 공원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점은 기념광장이 지니는 직접적 화법이 상징광장이 상용하는 간접적 화법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상징광장이 지니는 상징성은 퇴색해버리고 기념광장의 강한 언어가 전체적인 탑골 공원의 상징성을 표현한다. 의미의 무게중심이 기념광장으로 몰리면서 탑골공원 전체의 상징 체계는 큰 결함을 갖게 된다. 상징광장은 탑골 공원의 장소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3. 1운동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는 반면, 기념광장은 직접적으로 장소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기념비, 동상 등 실제적으로 탑골 공원과 무관한 요소들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기념광장이 탑골 공원 전체의 의미를 지배하게 된다면 결국 탑골 공원은 그 장소를 통해서가 아닌 전혀 무관한 요소들로부터 상징성을 이끌어내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탑골 공원의 의미 구현 방식은 안내판의 글을 통해 장소에 의미를 강요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계획상으로 상징광장에서 장소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도입된 요소들이 실제 현장에는 설치되지 않았거나 변경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상징광장에 방사형으로 설치될 계획이었던 무명석과 광장주변의 원형단은 실제 공원에서는 설치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팔각단을 둘러싼 광장의 성역으로서의 상징적 의미는 거의 퇴색해버렸으며 팔각단의 상징성 역시 약해졌다. 또한 광장 전면에 설치될 계획이었던 10개의 부조상이 산책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부조상은 광장의 상징성에 기여하는 요소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상징광장 내의 설계요소들이 기념광장내의 요소들보다 의미전달의 기능이 불분명했다는 점에 있다. 조경공간의 기호들에 있어 상징은 직접적으로 의미를 지시하는 지표나 유상에 비해 그 의미의 전달 정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상징의 기호들은 다른 직접적 기호들에 비해 더 강력한 상위의 의미를 내포하거나 형태나 규모에 있어 보다 명백히 인지되어야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상징광장에서 사용된 상징의 요소들은 그 의미의 비중에 있어 기념광장의 기호들과 큰 차이가 없으며 인지의 가능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 정도가 더 떨어진다. 기념광장의 의미구현 요소들이 공간 전체의 의미를 지배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면 상징광장의 요소들은 소품이나 장식 수준의 미약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상징광장에서 사용된 의미의 기호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주제를 형성하고 있기보다는 기능적 장소를 꾸며주는 이차적인 요소처럼 받아들여지며 당연히 전체적인 의미의 무게중심은 기념광장 쪽에 실리게 된다.
새로운 이야기 (New Story)
이러한 설계가의 선택과 결과는 이용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흥미 있는 사실은 이용자들의 반응이 연령층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노인층에게 있어 기념광장이 주는 상징성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를 통한 3. 1운동의 정신은 탑골 공원 전체에 훌륭하게 반영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반면 젊은층은 기념광장의 언어를 다소 권위적이고 식상한 것으로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젊은층에게 상징광장이 각 상징적 요소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제대로 해석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상징광장 자체는 일반 근린공원과 큰 차이가 없는 기능적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젊은층은 탑골 공원은 상징적 공간으로서는 실패했으나 기능적 공간으로서는 성공한 장소로 평가한다. 두 이용자 층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상징광장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인 탑골 공원의 의미는 기념광장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공통된 인식에도 불구하고 탑골 공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기념광장의 언어가 노인층에게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젊은층에게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잭슨(J. B. Jackson)은 라틴계 국가의 기념적 행사와 미국의 기념적 행사를 비교하면서 한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특성으로 인해 그 국가의 국민이 선호하는 기념성은 확연히 달라진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이와 유사하게 잭슨은 에릭 이삭(Erich Issac)의 글을 인용하면서 한 민족의 경관에 대한 인식은 그 민족의 종교적 성격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고 말한다. 탑골 공원에서 나타나는 두 이용자 층의 다른 평가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노인층에게 동상, 기념비와 같은 기념광장의 각 설계 요소들이 전달하는 직접적이고 안정된 의미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러한 혼란의 여지가 적은 의미 구현 방식은 전체적인 탑골 공원의 상징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에 젊은층에게 직설적인 기념광장의 언어는 구태의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현대의 정서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기념광장 밖에서 또다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기념광장의 상징성을 탑골 공원 전체의 상징성으로 간주하여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호와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두 집단 간의 해석의 차이는 장소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소의 의미는 각 집단에게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따라서 설계가가 하나의 의미만을 강요한다면 그 장소는 또 다시 침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새로운 탑골 공원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이곳이 노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탑골 공원에 가본다면 어린아이에서부터 젊은 연인, 중년의 부부 그리고 과거 탑골 공원의 터주대감이었던 노인들까지 거의 모든 세대가 벤치나 그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탑골 공원의 모습에는 약간 서글픈 배경이 있다. 관리자인 서울시가 의도적으로 노인들을 탑골 공원에서 몰아낸 것이다. 서울시는 일체의 장기, 바둑 등의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노인들의 오락물들을 빼앗아 버렸고, 1시간이상 탑골 공원에 머물 수 없다는 조항을 둠으로써 결국 노인들은 탑골 공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설계가는 노인의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지켰으나 설계자가 짐작하지 못한 다른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장소의 기호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노인들의 추방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모든 세대가 공유하며 공감을 얻는 지금의 탑골 공원의 모습이 그다지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더 이상 탑골 공원은 과거의 탑골 공원이 아니라는 점이며 탑골 공원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복을 위한 첫걸음 (The First Step to Recovery)
이제까지 탑골 공원을 통하여 장소의 상실과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탑골 공원은 분명 우리가 그대로 간과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장소였고,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겪어야만 했던 장소였다. 그리고 현상공모를 거쳐 탑골공원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변화한 모습에 대해서 나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설계가의 의도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그 의도를 구현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탑골 공원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기에는 이르다. 장소는 이용자와 대화를 나누고 교감을 함으로써 그 진정한 모습을 되찾아 간다. 탑골 공원은 이제 그 첫걸음을 디뎠고 아무도 탑골 공원이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할지는 모른다.
분명 탑골 공원은 그 성공의 여부를 떠나 우리 조경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도였다. 왜냐하면 탑골 공원은 기능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성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조경 작품들은 정체성이나 역사성, 지역성이라는 주제를 다루어오기는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주제들은 기능을 꾸며주는 하나의 장식요소로 전락했고, 그것이 하나의 목적이라고 보다는 수단이 되어왔다. 이제는 한국의 현대 조경은 기능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들은 잃어버린 장소들에 그 눈길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장소들이 잃어버린 이야기들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장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이젠만(Peter Eisenman)은 장소를 "팰림세스트"-깨끗한 표면을 만들기 위해 이전에 서명되었던 것이 지워진 양피지-에 비교하였다. 장소는 장소 위에 쓰여지며 장소가 갖는 기호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계속되는 지워짐과 재발견의 과정 속에서 장소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장소의 의미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의미 위에 다른 의미를 덮어씌우게 된다. 이런 장소를 다루는데 우리의 언어는 아직 미숙하다. 때문에 우리는 탑골 공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봐야 한다. 탑골 공원은 막 그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장소의 회복에 대한 소중한 조언이 될 것이다. 우리는 탑골 공원의 불평과 자부심을 통해 다른 장소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4월의 어느날 나는 탑골 공원의 팔각당을 바라본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어머니들을 본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을 본다. 말없이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는 노부부를 본다. 관광책자 들고 말을 묻고 있는 독일인 관광객을 본다. 그리고 손병희 선생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팔각당을 바라본다. 그 둘은 같은 장소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탑골 공원이 자랑스럽다. 10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사라지거나 박제화 되지 않고 살아있는 그 곳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 역시 이처럼 아름다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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