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굴레, 화장술 조경
엘리자베스 마이어가 명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부지 분석과 디자인 표현 사이의 단절, 즉 환경적 가치와 형태 생성 사이의 단절" 은 동시대 조경의 가장 큰 환부 중 하나이며, 이는 곧 조경을 둘러싸고 있는 예술과 과학, 디자인과 생태학의 대립으로 치환될 수 있다. 최근의 이러한 대립 양상은 1960년대 말 이후 환경론의 대두와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동의 하나로 형성된 1980년대 이후의 조경예술(landscape architecture as art)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 지점에 대한 정교한 분석은 이 지면의 영역을 벗어난다. 정작 이 글에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픽춰레스크의 진부한 낭만을 거부한, 광역 생태계획의 건조함에 도전한 조경예술운동의 성과가 아니라 그것이 노출해 온 난점들이다.
피터 워커와 마샤 슈왈츠로 대표될 수 있는 이러한 흐름의 한계는 지극히 형태중심적이라는 데 있다. 현대 미술의 언어를 적용하고 동시대의 문화적 감각을 조경에 결부시키고자 한 시도는 물론 긍정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시도가 겉모습의 복제에 그치고 있다는 점, 즉 종래의 디자인과 달라야만 한다는 강박증 내지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 한다는 "형태적 튀기 전략"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자면 예술이라는 새옷에 감추어진 조경의 몸체는 결국 장식과 화장에 골몰했던 전통적인 조경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즉 동시대 조경 행위의 주류는 자연과 문화의 대화를 중개하는 "관계의 예술"이기보다는 예술이라는 허사로 포장된 미장원 내지 피부클리닉이라는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예술로서의 조경은 곧 눈에 보기 좋은 조경"이라는 등식을 거짓 명제라고 부정해 버리기 어려운 형편인 것이다. 조경미학의 비판적 앵글이 요청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조경미학의 과제 중 하나는 가시적 형태 장식에만 치중해 온 화장술 조경을 극복할 수 있는 미학적 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으며,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것에 접근할 수 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할애할 것은 그 다양한 경로 중 "지각"의 측면이다. 예술의 굴레 속에서 형태 중심의 화장술로 부유하고 있는 조경의 이면에는 "시각 중심적 지각"이라는 전통이 자리잡고 있다는 강한 의심, 그리고 그러한 단편적 지각 모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의 탐색이 뒤를 이을 것이다.
▲ james Corner/Field Operations, Lifescape, Fresh Kills(그림제공 : Field Operations 정옥주)
공감각, 삶과 경험의 확장
시각만을 통해 어떤 환경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체가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고 환경이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에서 우리는 표면의 형식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시각은 환경의 미적 경험에 필요한 하나의 감각에 불과하다. 문화적 자연으로서의 환경에 참여(engagement)하기 위해서는 그 내부의 모든 상황을 포괄하고 연결할 수 있는 다른 감각들의 역할이 시각 못지 않게 중요하다. 개념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의 환경 경험을 기억해 보자. 멀리서 어떤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 미적 경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신체는 그러한 환경에서 환경과 함께 움직이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하지 않는가? 우리는 눈을 통해 환경의 색과 질감과 형태를 파악할 뿐만 아니라 땅과 풀을 만지고 밟거나 바람과 물의 소리를 듣거나 고유한 어떤 냄새를 맡고도 환경을 파악하고 구별하지 않는가?
환경의 미적 경험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시각에 비해 조명을 받지 못해 온 청각, 후각, 촉각, 근운동감각 등 여타 감각들의 가능성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환경의 소리는 생동감과 역동성을 가져다준다. 바람이나 파도 소리처럼 리듬이 있는 소리는 생명의 기본적 파동―심장의 박동과 호흡―과 비슷하다. 소리는 환경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성분이며, 따라서 귀를 통한 음의 지각은 환경의 미적 경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각 방식이다. 저급한 감각으로 여겨져 온 후각은 환경의 숨겨진 차원을 드러내 주며 우리의 감성에 영향을 준다. 사람마다 냄새가 다르듯이 환경의 냄새도 서로 다르다. 음식 맛도 냄새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듯이 환경의 냄새는 환경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촉각은 사물의 표면 결, 윤곽, 압력, 온도, 습도 등에 대한 지각을 담당하는 것으로, 환경의 특질을 파악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연을 만지며 즐거워하는 행위는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보장해 주지만, 우리는 주로 자연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연을 향유했다고 만족한다. 그러나 촉각은 가장 속이기 어려운 감각이며 인간이 가장 신뢰하는 감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또 하나의 감각은 근육과 골격 및 신체의 운동과 관련되는 근운동감각(kinaesthesia)이다. 근운동감각을 통해 우리는 신체 운동의 속도, 회전 각도의 정도, 방향 변화의 정도 등을 지각할 수 있다. 근운동감각은 정태적 자연 경험을 대치할 수 있는 생동감 있는 자연 경험의 전제 조건이다. 신체의 운동은 생명의 증거이다.
시각의 그림자에 묻혀왔던 청각, 후각, 촉각, 근운동감각 등 각각의 감각 영역에 주목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감각들이 환경의 경험에서 동시에 작동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른바 공감각(synaesthesia)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색깔을 연역하는 상황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공감각의 보편적 형식이다. 예컨대 음의 높이는 이미지의 밝기와 관련된다. 굵은 목소리, 드럼 소리, 천둥 소리 등과 같은 저음은 어두운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반면, 아기의 울음 소리, 바이올린 소리, 소프라노 음 등은 희거나 밝은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음의 높이는 또한 이미지의 크기 및 형태를 연상시키게 한다. 고음은 작고 날카로운 각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저음은 어둡고 둥근 양감을 준다. 이처럼 우리의 지각은 단일한 감각 경로에 의존하기보다는 여러 감각의 통합적 기작을 통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예술은 단일 감각에 의존해 왔다. 미술과 음악은 가장 전형적인 단일 감각형 예술이다. 이처럼 시각과 청각만이 고유의 예술 형식과 표현 언어와 기교를 가지고 있는 세련된 감각으로 여겨져 왔는데, 그러한 전통의 배경에는 시각과 청각을 이성의 활동과 관련되는 감각이라고 간주해 온 전통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예술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고 지각할 때는 다른 감각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각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또 콘서트홀에서 교향곡을 감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장소의 시각적 분위기, 연주자의 모습, 홀 내부의 온도, 옆 사람들과의 접촉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환경의 미적 경험과 지각은 예술의 경우보다 한층 더 총체적이며, 여러 감각들이 동시에 동원된다. 이런저런 이론과 개념을 떠나 실제의 경험을 생각해 보기만 하더라도, 환경에서는 하나의 감각―특히 시각―만이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들이 동시에 개입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환경의 미적 지각은 "여러 감각 또는 모든 감각의 연합 작용에 의해 형성되며 모든 감각이 서로 관련된다." 보기, 만지기, 듣기, 냄새맡기, 맛보기, 근육의 움직임 등과 같은 복합적 지각 행위가 경험 과정에서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미학자 아놀드 벌리언트가 적절히 분석하고 있듯이, "환경의 경험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 양태를 공감각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동시에 작용하는 감각들을 분리하여 분석하는 일은 시각에 대한 강조가 갖는 문제 이상으로 허구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각은 한층 더 설득력을 지닌다. "환경 지각에서……공감각은 ……감각 양태의 혼합을 뜻한다.……환경 지각은 전체적이자 상호적인 인간의 감각 중추와 엉켜있다. 우리는 신체와 장소의 상호 침투를 통해 환경의 일부로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 개개인을 자연적·문화적 조건과 결합시키는 연속성을 지향해야 한다면 공감각에 대한 강조는 필연적이다. 공감각은 또한 "문화의 상상력"을 "지각하고 창조하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라 밀러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감각들을 배제한 시각 위주의 "이차원적" 환경 경험은 "환경에 대한 우리의 향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감각의 전체 영역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곧 환경의 미적 경험은 물론 우리의 삶을 확장시키는 의의를 지닌다. 공감각에 대한 인식은 환경이라는 미적 장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삶에 다양한 미적 경험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전환적 사고의 하나일 것이다.
배정한 Jeong-Hann Pae
조경비평가, 조경학 박사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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