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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으로 점철된 영국의 왕권과 믿음의 역사
  • 환경과조경 2001년 2월
 시대적 여건이나 종교가 조경의 발달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바, 자연풍경식(自然風景式)의 독특한 정원양식과 도시공원체계를 수립하게 되는 영국에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고찰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다. 투쟁과 반란으로 점철된 영국에 있어 왕권이나 믿음과 연관된 처절한 피의 역사는 튜더(Tudor)왕조의 헨리(Henry) 8세로부터 시작된다.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30년간이나 다투었던 장미전쟁(1455-1485)을 매듭지은 헨리 7세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헨리 8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한 왕이었다. 국교(國敎)인 성공회(聖公會)를 수립함으로써 영국에서 크리스트(Christ)교의 물줄기를 바꾸었고, 6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 중에서 2명을 사형에 처하는 등 숱한 뒷이야기를 남긴 헨리 8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1509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첫 아내가 된 사람은 이미 죽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아내 즉 형수였던 스페인(Spain)의 공주 캐서린(Catherine)이었다. 6살 연상의 형수를 아내로 맞는 것은 누구나 내키지 않았을 것이었지만, 나라를 이끄는 국왕의 처지로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국익이 앞서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였는데, 당시 약소국가인 영국으로서는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스페인의 공주를 과부로 두는 것보다는 왕비로 삼는 것이 한층 국익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헨리 8세는 마음에도 없는 캐서린과의 사이에 딸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훗날 수만 명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사형에 처한 메리(Mary) 1세가 된다. 애정없는 결혼을 하면 한눈을 팔게 된다. 캐서린을 점차 멀리한 헨리 8세는 아름다운 눈동자의 시녀 볼레인(Boleyn)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서 6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한 나라의 국교를 바꿀 정도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는 사실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볼레인과 정식으로 결혼하기 위해서는 캐서린과의 이혼이 필요했고, 헨리 8세는 이혼을 로마(Rome)교황에게 신청하게 된다. 이혼을 금하고 있는 가톨릭(Catholic)의 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당시 가톨릭교의 막강한 후원국가 스페인의 눈치를 보고 있던 교황으로서는 이혼을 허가할 수가 없었고, 사랑에 눈 먼 헨리 8세로서는 이혼할 구실을 찾아야만 했다. "캐서린은 공주를 낳았을 뿐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낳지 못해 왕비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이 왕비를 맞아야 한다"는 논리로 청원하였지만, 교황은 이혼신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헨리 8세는 교황의 허락없이 일반적으로 캐서린과의 이혼을 선언하고, 1533년 결국 볼레인과 결혼하고 말았다. 이 결혼을 교황이 그냥 둘 리가 없었는데, 교황은 "이 결혼은 교황에 대한 모욕이며 교리를 어긴 엄청난 범죄로서, 죄인 헨리 8세는 이제 가톨릭교도가 아니다"라 파문을 하였고, 이에 격분한 헨리 8세는 1534년 로마 가톨릭과의 인연을 끊고 자신을 종교의 수장(首長)으로 하는 새로운 국교인 성공회를 수립하였다.

History of Sovereign Power and Faith in England
강철기 Kang, Cheol-Gi .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이 기사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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