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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창에서 본 무심의 조경
  • 환경과조경 2000년 12월
왠지‘조경’이라는 말은 아직도 내게 가슴에 깊이 와 닿지 않고 있다. 인위적인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조경이란 자연이 주는 공간과 공간의 절대성이 무시된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젠가 시민들과 함께 월악산을 찾았다. 단풍 그림자가 곱게 어린 송계계곡 물가에 앉아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는데, 한 참가자가 생뚱맞게 물었다. “선생님, 여기는 평당 얼마씩 가요?” 공기 좋고 산수 좋으니 별장이라도 지어 눌러 살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아름다운 대자연에 들어와 기껏 생각해낸 것이‘땅값’이란 말인가. 설령, 그 땅을 샀다 한들 그게 어디 온전히 자기 땅이겠는가. 인간보다 먼저 그 땅에서 살아온 구절초도 있고, 메뚜기도 있고, 쉬리도 있는데 말이다. 아무리 억만금을 주고 땅을 샀다 해도 그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단점용에 불과하고, 아무리 멋진 조경도 친 생태적이 아니면 자연에 대한 적대행위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조경도 자연처럼 흩어진 질서라면 좋겠다. 영덕 바닷가에 칠보산이 있다. 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식들을 하나하나 챙기고 있다. 쑥부쟁이는 이 들녘에 놓고, 호랑나비는 저 기슭에 자리 잡게 하고, 도룡뇽은 이 골짜기에 살게 하고, 붉은배새매는 저 능선께에 집을 지어주어야지... 하며 하나하나 챙긴다. 산은 떨어지는 낙엽까지도 일일이 제자리를 정해준다. 어느 것 하나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게 없다. 조경은 공간 개념에 시간 개념이 더해져야 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조경은 계절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고 했다. 강화 석모도 해명산 기슭 논밭둑은 이른 봄이면 냉이와 꽃다지가 떼지어 꽃을 피운다. 유치원 짝처럼 둘다 깨알같이 작고 앙증맞다. 냉이꽃은 하얗고, 꽃다지는 노랗다. 해명산은 그 꽃들을 소꼽놀이 하는 손녀딸 내려보듯이 너그럽게 굽어보고 있다. 생각하면 자연만큼 신중하고 과묵한 것도 없다. 그러면서도 섬세할 때는 한없이 섬세한 것이 또 자연이다. 냉이꽃은 언제쯤 피우고, 매미는 언제쯤 땅속에서 내보내고, 꾀꼬리는 언제 불러오고, 단풍은 언제 물들일 것인지를 자연은 다 알고 있다. 세상 만물은 모두 제철을 알고 있다. 저들은 땅 속에서도 계절 바뀌는 것을 알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안다. 햇볕 며칠 따사롭다고 함부로 꽃망울 터뜨리지 않고, 꽃샘바람이 아무리 차도 터뜨릴 때면 서슴없이 꽃잎을 피운다. 제때 아닌 때에 마음을 일으키고, 제 것 아닌 것을 탐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 그래서 조경은 시간의 예술이라고 했던가. 조경은 거기에 살고 있는 이들의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 마음 바탕이 위선적이고 작위적이면 조경도 그에 따라 나타난다. 그래서 참다운 조경은 무위이작(無爲而作)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여행하다보면 산수 좋은 곳에 날아갈 듯 지어놓은 별장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담장 너머로 들여다봐야 볼 게 없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더 낫다. 물욕으로만 살아온 집 주인의 마음자리가 거기에 너저분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덕유산 계곡 서벽정의 앞마당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다. 하지만, 누마루에 앉으면 멀리 덕유의 한 줄기가 무릎에 와 앉는다. 담장을 낮추면 먼 산도 뜰 안으로 들어오기 마련이다. 마음을 낮추면 세상이 와서 무릎을 꿇나니…. 지리산 칠선계곡 위에 서암과 벽송사가 앉아있다. 서암의 스님들이 절 앞에 후박나무, 동백, 사철나무와 같은 난대수목을 심어놓았다. 자연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욕심으로 심다보니 모두 죽어가고 있었다. 인간이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자연이 고생을 한다. 오히려 벽송사 뒤뜰의 빨랫줄에 아무렇게나 널린 스님의 빨래가 오히려 더 지리산적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조경이란 결국 마음 비우기이다. 한번은 동해안을 여행하는데, 마침 오징어 철이라 어촌의 아낙이 오징어를 줄에 널고 있었다. 줄에 널어 놓고보니 그대로가 조경이요, 멋진 설치미술이었다. 그 아낙은 조경이 뭔지도 설치미술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그냥 오징어를 말리기 위해 갖다 널어놓았을 뿐이다. 이게 자연과 함께 살아온 이의 마음에서 나온 무심의 미술이요, 무심의 조경이 아니겠는가. 요즘‘생태맹(ecological illiteracy)’이라는 말이 아주 익숙하게 회자되고 있다. 생태맹이란 자연에 대한 단순한 무지(無知)가 아니라 자연의 중요성, 고마움, 신비함,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감성의 결핍상태를 말한다. 생태맹은 학벌이나 재산 정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배운자와 가진자 들일 수록 생태맹들이 많음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젠 조경도 생태맹 극복 차원에서 다루어졌으면 좋겠다 ※ 키워드 : 자연적 조경, 인위적 조경, 김제일 ※ 페이지 : p114~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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