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공공성을 확보하다
만드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 이들이 서로 의논을 통해 제품을 만들면 쓰임새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물건을 만들기만 해도 잘 팔리던 시절이 있었고, 당시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점차 경쟁이 치열해지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취향도 다양해지면서 특정 소비자를 겨냥하여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소비자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만 했다. 이미 제조업에서는소비자가 제품제작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생산자는 소비자참여단, 소비자평가단 등의 이름으로 제작단계부터 의견을 반영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낸다. 제작단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그 물건에 대한 소비자의 평가를 반영하여 다음 제품을 만드는데 참고하며, 이렇게 소비자 의견이 반영된 물건은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다면 공공공간은 어떤가. 시장에서는 물건을 만들어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물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물건은 팔리지 않는다. 즉, 망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공공공간은 주인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이상한 공간을 만들어 놓아도 그것을 발주한 공무원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우리는 도시 도처에서 공공성을 상실한,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그런 공간들을 많이 보게 된다. 제품은 소비자의 평가를 받는데 공공공간은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품이 시장의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소비자를 참여시켰다면, 공공공간에서는? 바로“주민참여”의 등장이 있었다.
주민참여, 디자인을 바꿔내다
검은색 도로 위에 흰색 줄로 만들어진 횡단보도. 몇몇 횡단보도는 신호등을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 이 기본적인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변화의 모습이 보인다.
횡단보도 진입부. 화살표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화살표는 횡단보도의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 지금은 사람도 우측통행을 하지만, 예전에 좌측통행을 할 때도 횡단보도에서는 우측통행이 권장되었다. 이는 안전때문인데, 자동차가 우측통행을 하기 때문에 횡단보도에서는 횡단하려는 사람의 왼쪽에서 차가 다가오게 된다. 이때 보행자가 횡단보도의 오른쪽으로 건너면 차와의 거리가 멀어져서 조금은 안전하게 된다. 보행약자를 위한 개선도 조금씩 진행됐다. 지금은 많은 횡단보도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지만, 그동안 횡단보도의 보도턱은 당연한 듯 우뚝 솟아 있었다. 이 보도턱은 자전거에게는 불편으로, 유모차에게는 위험으로, 휠체어장애인에게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낮춰지는데도 수십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설들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보행신호가 켜졌음을 알려주는 소리나는 신호등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시설물이다. 점자블럭은 시각장애인을 횡단보도로 안내한다. 타고 건너가다가 사고가 나면 대부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자전거이용자를 위해 한쪽에 자전거의 법적 통행을 보장해주는 자전거횡단도가 달린 횡단보도도 등장했다. 사람이 도로를 건널 때 이용하는 횡단보도라는 시설은 이렇게 많은 변화를 해왔다. 이 변화의 기저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과격하게 말하면“피와 땀”이 있었고, 부드럽게 말하자면“참여”가 있었다. 이 횡단보도는 우측통행이 안전하다는 교통전문가의 연구, 10cm 짜리 보도턱 때문에 10m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휠체어장애인들의 절규, 자전거로 횡단보도를 이용하게 해 달라는 자전거이용자들의 외침 등이 디자인에 반영된 것이다. 이렇게 이용자들의 참여는 횡단보도의 공공성을 높였다. 수십년에 걸쳐. 주민들은 해당 공간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공간을 직접 이용할 사람이다. 따라서 공간을 조성할 때 주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은 공공성 확보에 중요한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어린이보호구역을 설계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린이보호구역의바닥은빨간색으로칠하며커다랗게원을그려 그 안에 30이라는 숫자를 넣는다. 보차분리가 되지 않은 곳은 분리하며 보도와 차도사이에는 가드레일을 설치한다.” 만약 이와 같은 지침이 위로부터 하달되고, 조경설계가가 지침대로만 그림을 그린다면 어린이를 위해 설치한 어린이보호구역이 어린이의 안전을 오히려 더 해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동네에서는 기존 도로폭이 너무 좁아서 보차분리를 할 경우 보도폭이 매우 좁게 나올 수 있는데, 친구들과 함께 통학하는 어린이의 특성상 그 좁은 보도를 이용할 가능성은 낮으므로 아이들은 보차분리가 되어있지 않았을 때 보다도 더 좁아진 차도 위를 걸으며 자동차를 피해다니게 될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지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는 이렇게 설계의 본 취지를 살릴 수 없게 된다. 학부모들이 설계과정에 참여했다면, 매일같이 통학지도를 하는 녹색어머니회 어머니들이 설계안에 대해 의견을 말할 기회가 있었다면 이같은 설계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주민참여를 통해 지역 주민과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안을 찾아냈을 것이다. 또한 그 지역에 맞는 설계안이 나오고, 그를 통해 실질적인 어린이통학로 개선사업이 진행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