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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식물에게] 식물의 가치를 설계 언어로 번역하다
  • 조혜령
  • 환경과조경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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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와 그림자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실내정원 공모의 출품작 ‘어느 선비의 느린 정원’에서 그림자로 대숲을 연출했다.

 

 

이성과 감성 사이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의미인가. 순간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이 생각났다. 두 주인공 가운데 언니 엘리너는 침착하고 바른 판단을 중시하는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동생 메리앤은 열정에 자신을 맡기는 ‘감성’을 대변한다. 이들은 각기 힘든 연애를 겪으며 자신에게 부족한 일면을 보완할 기회를 만들어가고 결국엔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식물을 다루는 조경가의 역할과 입장은 어때야 할까. 식물의 이름과 특징 등 개체적 탐구로부터 확장해(각주 1) 첨단 소프트웨어와 장비로 대상지의 자연(식물의 집단)을 분석하고 데이터를 도출한다. 하지만 조경계획과 설계라는 직무 특성상 이를 바탕으로 이용자의 미적 경험을 상상하는 작업은 식물을 다루는 조경가의 기초이자 목표다. 조경을 과학과 예술이 융합된 실천적 종합 예술이라고 하지 않던가. 조경가는 이성과 감성 사이를 넘나들며 식물의 가치를 설계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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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과 겨울나무 학창 시절, 동이 틀 무렵 서둘러 등굣길에 나서면 언덕에 붉게 올라오는 태양 빛과 아스라이 올라오는 안개가 낮게 깔려 겨울철 활엽수의 수간이 조각 작품처럼 느껴지곤 했다. 서리 앉은 잔디와 당시 청량했던 공기도 학창 시절의 기억 풍경이다.

 

 

조경 디자인 매체로서 식물

조경가에게 식물은 지형이나 바위, 물과 같은 자연 요소 중 하나다. 살아 있는 자연의 재료를 다룬다는 의미는 유사 분야의 직무와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낮과 밤, 날씨와 계절, 지형과 고도, 곤충과 동물 등 식물과 관계되는 모든 현상의 시공간적 함수가 추가된다. 단순히 식물이라는 재료를 나열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 적합한 식물을 선택하고 조합해 이용자들의 감각과 감정을 유발하는 재구성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때 식물은 비로소 조경 디자인의 요소가 아닌 매체가 된다.(각주 2) 디자이너로서 조경가는 식물학의 본질을 이해해야 하며 생태학의 기본에 친숙해야 한다. 원예학이나 농업학, 임업학으로부터 적절한 기술을 활용할 줄 알며 무엇보다 형태, 질감에 대한 안목과 화가의 기술이나 문학의 표현에 특별한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각주 3)

 

이처럼 식물은 조경 디자인의 매체가 되어 설계자와 이용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매개한다. 매체는 때론 정원, 공원, 초지, 숲 등의 ‘서식처 재현’의 형태로 해석되기도 하고 ‘문화적 메시지’로 안내되기도 한다. 필자는 영화나 소설, 시 구문에서 식물에 대한 문화적 콘텐츠 발굴을 즐긴다. 문학가들이 표현하는 식물은 어느 조경가의 수려한 식재 디자인 못지않는 경관을 선사한다. 특히 박완서 소설에서는 식물의 특징을 인물에 대입시켜 생명력을 불어넣는 묘사 글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다. 실제로 그는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노란 집에 거주하며 마당 가꾸기에 정성을 쏟을 만큼 식물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봄이면 딱딱한 나무줄기 가장귀에서 꽃자루도 없이 선명한 홍자색 꽃을 터뜨리는 박태기나무의 특징을 복희의 첫사랑에 요동치던 떨림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여름철 강렬한 주황색의 능소화는 팜 파탈 현금을 묘사하는 식물로 등장한다. 그밖에 싱아, 파드득나물, 며느리밥풀꽃 등 수십 종의 식물들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 또는 수필 구석구석에서 추억과 심경을 대리하며 독자와의 공감을 시도한다.

 

조선 최고 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은 어떠한가. 다산은 좌뇌와 우뇌, 이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정원가임이 틀림없다. 특히 다산의 풍부한 식물학적 지식은 정원에서 식물을 실용적으로 활용할 뿐 아니라 감각적으로 감상하는 태도도 제시한다. 국화의 아름다움을 남긴 여유당전서 1집 13권 『국영시서』에는 가을 밤 흰 벽 앞에 국화 화분을 세워 놓고는 촛불을 멀고 가깝게 비춰가며 벽 위에 어리는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몽환적인 연출 방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먹을 수 있어야만 실용이 아니라 정신을 기쁘게 해서 뜻을 길러주는 것도 가치가 있다.”(각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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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조경진 교수와 함께 리얼 DMZ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DMZ의 식물상을 들여다보며 식물을 만드는 집합적 풍경의 연작들을 전시하고 있다. 조경설계와는 다른 접근 방식의 작업은 본업을 할 때 많은 영감을 준다

 

캐스팅과 연출

몇 년 전 건설사와 함께 주택 전시관 작업을 할 기회가 있었다. 최근 많은 브랜드가 팝업 형태의 체험 공간을 만들고 브랜드의 가치와 이미지를 담는 매체로 정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드림 하우스’란 이름으로 부산에 오픈한 견본 주택 전시관은 팬데믹 시대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한 단지 조경 콘셉트와 주거 문화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좁고 높은 입면의 정원 속에는 구불구불한 산책로와 시적인 교목의 캐스팅이 중요했다. 키는 8m, 수관 폭은 3.5m 내외, 2.5m 정도의 지하고가 확보된 나무가 필요했다. 3층 홀 복도에서 계단실로 내려가는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수관고의 볼륨이 온전히 시선에 담겨져야 했으며 무엇보다 전체 공간에서 초점이 되는 구조로서 지배하는 힘도 필요했다. 수없이 많은 종류와 규격(미세하지만 다른 캐노피 형태)의 교목을 찾아다녔고 시뮬레이션했다. 주인공 나무가 결정된 후 빈 공간에도 몇 개 없는 테마 질서를 설정했다. 산책로의 시작은 향기가 은은한 은목서로, 수관 하부 주변은 온전히 비워둬 굽은 길과 빈 공간의 담백함을 살리고자 했고, 뾰족한 모서리 공간은 몇 개의 층위를 가진 식재 레이어를 두어 깊이감을 줬다. 정원의 채광은 유리를 커튼월 재료로 사용해 자연광을 충분히 들게 했지만, 자연 환기를 할 수 있는 폴딩도어 설치, 내부 덕트의 위치 등은 식물 유지·관리에 아쉬움을 줬다. 결과적으로 3년의 유지·관리 끝에 이 프로젝트는 건설사의 결정으로 철거 중이다. 나에게는 대형목 식재와 관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해준 케이스다. 관리 도중에 중견 조경가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대형 교목을 심는 일은 마치 집을 떠서 옮기는 일과 같다”며 일침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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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후박나무 구불구불한 정원 산책로는 후박나무를 감싸고 다음 공간으로 전이를 유도한다. 이 주인공 나무는 공간 체험의 몰입을 위한 핵심 디자인 매체로 캐스팅됐다.

 

윤리와 서명

몇몇 조경 현장은 관리를 통해 가까이서 두고 보고 있다. 내가 선택한 식물들이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하는지, 다음 작업에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가 시공과 관리 과정에서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반기지 않더라도 때로는 그곳을 암행해 식물을 살피기도 하고 비가 억수같이 쏟고 난 다음에는 집 주인에게 정원의 안녕을 묻곤 한다. 매번 나갈 수 없다는 핑계로 10년 가까이 내가 설계한 정원을 돌봐주는 고마운 한 시민 정원사가 있다. 그는 전문가다운 복장을 하고 식물이 심겨진 화단에 꿇어앉아서 시든 잎을 정리하고 진드기가 들끓으면 일일이 손으로 잎과 줄기를 훑어가며 박멸한다(F&B 시설 내부는 농약 살포를 되도록 지양한다). 지상부 식물을 육안으로 관찰하고 뿌리에 이상이 없다 싶으면 흙을 뒤집어 손으로 점검한 다음 내게 사진을 보낸다. 워터 컴퓨터를 다시 세팅하거나 일정 기간 잠가두라는 지시를 내린다. 때로는 그를 통해 쓰지 말아야 하는 수종과 토양 배합의 지침을 가르침 받기도 하고, 가지치기를 통해 살려 새롭게 형성되는 공간의 형태와 미(완벽한 타이밍의 전지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끊이지 않는 개화와 착과 능력)를 제공하며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죽거나 병에 걸린 상처 입은 식물도 적절한 가드닝 스킬을 통해 정원의 건강성을 향상시킨다. 비로소 정원의 식물은 디자이너와 가드너가 함께 가꾸는 과정에서 재발견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잘못 심어서 그리고 운영한 나무들에게 고백한다. 앞으로 도면에 허식을 보이거나 콘셉트를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할 고민보다 앞으로 나의 식물에게는 생명력이 넘치는 부식토와 양토를 처방하고 너희들을 더 이해하리라. 땅을 더욱 진심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각주 정리

1. 『식물의 종(Species Plantarum)』(1753)을 집필한 스웨덴 식물학자 칼 린네는 “이름 없이는 영원한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식물의 이름을 아는 것은 곧 조경의 대상인 자연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첫걸음 아닐까.

2. 김아연 외 26명,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도서출판 한숲, 2021, pp.212~223.

3. 닉 로빈슨, 『식재 디자인 핸드북』, 도서출판 한숲, 2018, p.44.

4. 성종상, 『인생정원』, 스노우폭스북스, 2023, p.68.


조혜령은 경희대학교, 그라니치대학, 서울대학교에서 원예와 조경을 공부했다. 정원이 갖는 문화적·사회적 가치를 믿으며 이론과 실무의 경계를 탐색하는 조경가로 현재는 조경하다열음의 연구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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