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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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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거진 가격 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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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리스트

[에디토리얼] 마감 날 읽은 식물 책 세 권
원래는 이달 특집에 참여한 조경가 필자들과 똑같이 ‘나의 식물에게’를 주제로 에디토리얼을 써볼 생각이었다. 공간을 만드는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존재일까. 그들에게 던진 이 질문에 조경계의 소문난 ‘식물맹’인 나도 한번 응답해보리라. 그러나 진심과 고심을 담아 눌러쓴 그들의 이야기를 밑줄 쳐가며 곱씹다 보니 마감이 눈앞이다. 예컨대 허대영 소장(조경설계 힘)의 이런 문장들. “식물은, 특히 나무는 살아갈 자리를 정한 설계자보다도 이 땅에 더 오래 살아남을 존재이기도 하다.” “조경설계는 식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공감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렇게 아름다움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조경 일의 속 깊은 본질”이다. 금요일 퇴근 시간, 마침내 김모아 기자의 메시지가 왔다. ‘월요일 오전까지 주시면 됩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런 뜻이다. ‘아무리 늦어도 월요일 아침에는 제가 꼭 볼 수 있게 보내주셔야 해요. 주말에 파이팅!’ 급하거나 불안해지면 책에 기대는 버릇이 발동한다. 책장 구석구석을 침착하게 뒤져 나름 정성껏 식물 책 세 권을 골라 주말을 보냈다. 먼저 펼친 책은 파란색 무광 표지가 매혹적인 고다 아야(幸田文)의 『나무』(달팽이출판, 2017). 말년의 노작가가 십 년 넘게 일본 열도의 북쪽 홋카이도에서 남쪽 야쿠시마까지 전국의 나무를 찾아다니며 체험하고 성찰한 기록을 엮은 유작이다. 첫 장 ‘가문비나무의 생사윤회’를 쓴 때는 1971년 1월이고, 마지막 장 ‘포플러’는 1984년 6월의 글이다. 우리는 나무의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나무를 안다는 건 과연 무슨 의미일까. 저자는 쓰러져 죽은 가문비나무 위에 새로운 가문비나무가 자라나는 현장을 목격하며 “생사의 경계, 윤회의 무참함”을 사유한다. 도심 한복판에 홀로 선 거목을 보며 나무가 거쳐 온 삶의 순간들을 읽어낸다. 나무를 만나 살피고 듣고 느끼며 빚어낸 진솔한 문장들이 나무를 안다는 건 나무의 삶을 나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따뜻한 책 『나무』에 이어 고른 『오산천 자연도감』(디자인 스튜디오 loci, 2022)은 온기뿐만 아니라 현장성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책이다. 아모레퍼시픽이 지원하고 박승진 소장의 디자인 스튜디오 loci가 진행한 프로젝트의 성과물인 이 책은, 경기도 오산천에 서식하는 식물 112종과 조류, 어류, 곤충류, 포유류 등 동물 31종을 섬세하게 조사하고 관찰해 정성스레 담아낸 도감이다. 책 앞부분에는 서해에서 배가 올라오던 옛 오산천이 오염으로 몸살을 앓게 된 사연, 그리고 생명을 품은 건강한 하천으로 거듭난 이야기도 담겨 있다. 본지에 ‘풍경 감각’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조현진 일러스트레이터가 생태 조사와 해설 글, 식물과 동물 도감의 세밀화를 맡았다. 오산천의 숨겨진 가치를 쉽게 전달해주는 세 장의 그림 지도도 흥미로운데, ‘오산천 자연 탐사 지도’에는 천변을 산책하며 비인간 생명체들을 관찰할 수 있는 28개 지점이 꼼꼼히 표현되어 있다. ‘오산천 정원 지도’는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시민들이 참여해 조성한 120개 정원의 위치를 보여준다. 1년 넘는 식생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한 ‘오산천 식생 지도’는 버드나무류와 물억새 군락지를 비롯해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할 식물들의 위치를 알려준다. 마지막 책은 조금 어렵다.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라는 부제를 단 『식물의 사유』(알렙, 2020)는 식물성에 대한 사유에 기반해 인간과 식물의 창조적 만남을 확장하는 시도를 펼친다. 32편의 서신 교환으로 구성한 이 책에서 루스 이리가레(Luce Irigary)와 마이클 마더(Michael Marder)는 ‘식물 존재’를 통해 자연과 문화, 물질과 정신, 감각성과 초월성, 주체와 타자, 여성과 남성, 비인간과 인간 등 서구 근대 정신을 지배해온 이분법과 동일성의 교의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들은 왜 자연과 생명이 처한 위기 진단과 대안 모색의 중심에 식물을 위치시키는 것일까. 인간 중심주의가 지구 행성의 존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생태계 위기의 원인이라는 반성이 일면서 동물과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동시대 담론의 뜨거운 주제로 떠올랐지만, 식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의지와 주체성을 지니지 못한 가장 미발달된 생명체이며 생산의 원자재나 바이오 연료 정도로 치부되어왔을 뿐, 인간이 그 일부를 이루는 생명의 토대로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식물을 호명하지 못하고 식물 책들에 기대 지면을 채운 데 대한 변명 삼아, 마이클 마더가 전하는 나무 이야기 한 부분을 옮긴다. “한 그루 나무가 다양한 성장의 총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럿으로 갈라지면서 얽히는 나무의 몸통, 가지를 덮고 있는 이끼와 담쟁이, 가지 위를 기어오르는 다람쥐, 가지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새들, 뿌리와 뿌리 근처에 살고 있는 미생물 등등 하나의 성장의 공동체로서 나무는 식물적일 뿐 아니라 원소들과 식물 형태들과 종들이 만나는 장소이자 생물의 왕국입니다. 나무는 그 위아래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또 그것이 살고 있는 장소와 함께 자기 자신을 우리의 시각과 사유에 건네줍니다. 또한 나무는 분류를 알지 못하는 자연의 낯선 영역으로 열린 창문이 될 수 있습니다”(『식물의 사유』, 231쪽). 그가 뉴욕의 좁고 누추한 아파트 뒷마당에서 만난 한 그루 나무는 “더불어 자라는 공동체의 표상”이었다.
[풍경 감각] 정원 계획
갑작스레 알보 몬스테라가 생겼다. 평소 관심을 두었던 식물이기에 길러보겠냐는 친구의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좋다고 했다. 그런데 작업실에 나타난 친구의 손에는 길이가 1m는 족히 넘는, 친구네 정원 한 켠을 몇 년간 지키던 녀석이 들려 있었다. 요즘 무척 바빠진 탓에 잘 보살펴주지 못한다며 내가 길러주면 좋겠다고 했다. 몬스테라는 줄기 한 마디를 심어 새 포기로 키워낼 수 있으니 다시 여력이 될 때 조금 잘라 달라고만 부탁했다. 친구가 돌아간 뒤 뜻밖의 새 식구를 살펴보았다. 흰 물감이 튄 것 같은 불규칙한 무늬와 시원하게 갈라지고 구멍 뚫린 잎사귀. 친구는 꽤 어렵게 이 몬스테라를 데려왔다. 무늬가 좋은 새싹을 골라 심고 잎 한 장, 뿌리 한 가닥 나올 때마다 SNS에 사진을 올렸다. 돌돌 말려 올라온 뒤 하루하루 조금씩 펼쳐지는 새 잎을 기다리고, 잎사귀마다 뚫린 구멍과 찢어진 갈래를 헤아렸다. 시들할 땐 식물 카페에 도움을 구했고, 잎 끝에 맺힌 물방울마저 기록하곤 했다. 아쉽지만 작업실 공간이 넉넉하지 않아 친구의 몬스테라를 여러 마디로 나누었다. 모종이 필요하지 않을 땐 잘라낸 것들을 그냥 버리지만, 친구의 몬스테라는 모두 모아 물병에 꽂아 두었다. 뿌리가 내리고 싹이 트면 내가 기를 것 하나와 친구에게 돌려줄 것 하나를 골라야지. 그리고 다른 것들은 잎사귀 한 장 한 장 헤아려줄 사람을 찾아 건네야겠다. 우리 집 정원에는 당분간 어린 몬스테라가 가득할 것이다.
더샵갤러리
상품으로서 조경 ‘아파트는 상품이다’라는 말이 세속적으로 느껴지지만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집은 자산으로 사는(living) 곳이 아니라 사는(buying) 것이라는 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유로 지난 20년간 아파트 조경이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 아파트 공화국에서 조경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단순히 많은 양의 녹지를 만드는 것을 넘어 새로운 경험과 자극을 줄 수 있는 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아파트는 선분양 방식으로 판매된다. 그래서 모델하우스는 아파트 분양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과거의 모델하우스가 분양할 아파트의 평면과 인테리어, 모형을 보여주는 공간 중심으로 구성됐다면, 현재의 모델하우스는 브랜드 가치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전시장으로서의 공간이 아닌 경험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느낄 수 있게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추세다. 서울 강남구 자곡로에 위치한 포스코이앤씨의 모델하우스 ‘더샵갤러리’도 이런 흐름과 함께하며, 포스코이앤씨의 전문성과 최신 건축 기술을 결합해 분양 상담 및 체험 공간, 전시 및 문화 프로그램, 카페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그린 라이프를 표방하며, 실내외 공간에 오감을 자극하는 자연 요소들을 공격적으로 도입했다. 연속된 자연의 풍경 조경의 가장 큰 가치는 식물에 있다. 이를 증명하듯 아파트 조경에 대한 한 연구를 보면 식재 요소가 다른 요소들보다 입주민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 받았다. 또한 업계에서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바이오필릭 디자인 또는 ESG 디자인 경영 전략의 주요 대상이기도 하다. 카페, 쇼핑몰, 백화점 등 일상 속 생활 공간에서도 식물 위주의 정원과 플랜테리어 공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결국 자연 중심의 공간 계획은 매우 경쟁력 있는 상품이다. 더샵갤러리는 그린 라이프를 표방하며 실내외 모든 장소에 녹색을 더했다. 그리고 식물 중심의 디자인을 추구했다. 가장 다양한 식물군이 자리 잡은 옥상정원은 20cm 깊이의 인공 지반이라서 식재를 위한 플랜터가 불가피했다. 북측 대모산 자락의 숲과 롯데월드타워를 향한 조망 공간을 제외하고 3면으로 화강석 플랜터를 둘러 위요감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플랜터의 평면 선형은 주변 경관에 따라 직선과 곡선을 오가며 1.5m에서부터 6.5m까지 다양한 폭원의 녹지대로 디자인했다. 플랜터 상단에는 마가목, 산딸나무, 당단풍나무, 배롱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등 여러 수종의 중간 키 나무를 배치하고, 교목 사이에 낙상홍, 수수꽃다리, 산수국, 사철나무, 꽃댕강나무, 생강나무, 조팝나무 등 을 식재해 입체적 볼륨감을 연출했다. 그리고 약 50여 종의 지피초화류를 주변으로 식재했다. 정원 중심에는 다양한 이벤트와 전시를 위한 110m2의 잔디마당이 있다. 이곳 역시 토심 때문에 15cm 정도 단이 생겨났다. 잔디마당과 플랜터 사이에는 2~4m 폭원의 드라이가든을 만들어 암석을 배치하고 왕마사를 깔았다. 그리고 플랜터 내 식재 밀도보다 넉넉하게 초본류를 배치했다. 드라이가든의 초본이 0.6m의 화강석 플랜터와 수경 시설의 하부 수조를 자연스럽게 가려준다. 남서쪽 코너 플랜터의 일부 구간은 간격을 두고, 플랜터의 지형이 자연스럽게 드라이가든으로 흘러들어오게 만들었다. 수직·수평적으로 층위를 만들어 녹시율을 높이는 동시에 다양한 녹지 유형을 한 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대모산 자락의 다양한 자연 경관을 모티브로 한 식재 기법으로, 포스코이앤씨가 추구하는 자연형 식재 스타일에 부합된다. 4층은 실내 카페 공간과 외부 테라스로 구성했다. 두 개의 공간은 유리 커튼월로 나뉘는데, 인테리어의 디자인 선형을 반영해 하나의 공간처럼 이어지도록 했다. 실내외 공간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플랫폼과 그 주위를 둘러싼 녹지대로 구성했다. 실내는 모두 인공 식물을 사용했고 실외는 다년생 지피초화류를 식재했다. 하나로 연결된 선형 녹지 디자인으로 인해, 인공 식물과 살아있는 초화류가 유리 커튼월을 넘어 연속된 녹색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테라스 너머 대모산 자락의 숲까지 시야가 확장된다. 외부 테라스 녹지에는 지름 2.8m 원형 콘크리트 플랫폼이 살짝 띄워져 놓여있다. 초장이 높은 식물들이 플랫폼을 둘러싸며,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층 웰컴정원 녹지에는 소나무를 심었는데, 수종을 선택하는 데 고민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활엽수를 심고 싶었지만, 발주처의 다양한 의견을 고려해 소나무로 선정했다. 7m 높이의 건축물 입구를 고려한 수고 6m 조형 소나무를 인근 농장에서 수급했다. 가로 녹지에는 보행자를 위한 초화류 정원을 만들었는데, 건축물 입면 재료에 맞춰 유리 커튼월 구간에는 중간키 나무들을 함께 심어 내부 라운지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고려했다. 물의 여정 물은 공간 전체를 관통하며,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통일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이정화 부장(포스코이앤씨)의 아이디어로, 실내 공간과 외부 공간을 순환하는 방문객의 동선을 따라 물의 요소를 배치해 더샵이 추구하는 친환경 가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층 웰컴정원에는 굴곡진 수형의 소나무와 미러폰드가 있는 작은 화단이 있다. 고요한 물은 소나무를 비춘다. 실내로 들어오면 수직 이동을 위한 승강기와 원형 계단이 웰컴정원에 면해 있다. 원형 계단은 4층까지 이어지는데 계단 중앙 천장에 연결된 비닐 와이어를 따라 물줄기들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물을 받는 폰드 안에는 3개의 자연석이 섬처럼 놓여 있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수면 위에 끊임없이 잔물결을 만든다. 계단을 오르며 위를 올려다보면 가느다랗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조명에 반사되어 마치 빛이 떨어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4층 테라스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면 철재 루버와 자작나무를 배경으로 독특한 수경 시설이 위치한다. 수경 시설의 각기 다른 높이의 워터채널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들이 청량한 소리를 만들며, 다양한 식물과 함께 포스코 고유의 친환경 정원 풍경을 자아낸다. 고요하게 시작된 물의 여정은 빛의 물줄기를 따라 층별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공간을 제공하며, 하늘로 열린 옥상정원에서 맑고 서늘한 물소리로 마무리된다. 철의 정원 철은 포스코를 상징한다. 소재만으로 브랜드를 떠올리게 하는 건 엄청난 강점이다. 그래서 건축은 오목한 곡면의 철재 외장재를 미디어 파사드로 외피에 둘렀다. 빛과 시각에 따라 변화하는 건물은 철의 유연함을 강조하며 자곡사거리에 명확한 포스코이앤씨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다. 더샵갤러리의 철재 갑옷이 도시 스케일에서 강한 인상을 전달한다면, 옥상정원의 철재 루버와 수경 시설은 휴먼 스케일에서 세련된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 철재 루버는 옥상 서측 편에 놓인 실외기들을 차폐하는 목적으로 설치했다. 그리고 루버와 실외기 사이에 녹지대를 조성했다. 높이가 다른 두 단의 플랜터를 만들어 자작나무와 산수국, 다양한 지피초화류를 식재했다. 정원에서부터 실외기까지 3.5m 남짓한 좁은 녹지지만, 입체적 식재 기법과 루버의 적절한 가림 효과로 4m 높이 실외기 외벽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루버 디테일은 디자인의 통일성과 비용 절감을 고려해 건축 외장재를 그대로 활용했다. 문제는 뒷부분의 각관 구조물들이 루버 간격과 각도에 따라 노출될 우려가 있었다. 여러 시뮬레이션을 거쳐 보는 시점에 따라 변화감이 느껴지면서도 배면의 각관이 노출되지 않는 최적의 각도를 찾았다. 따라서 승강기나 계단을 통해 옥상에 들어서면 마치 건축 입면과 같은 솔리드 한 루버 풍경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잔디마당으로 걸어가면서부터 서서히 루버 사이의 틈이 보이게 되는데, 정원 안쪽 콘크리트 벤치에서 틈이 가장 많이 열린다. 그 틈 사이로 다양한 녹색 식물이 차가운 철재 루버와 함께 포스코만의 정원 풍경을 연출한다. 루버 뒤편으로 심은 물철쭉 가지들이 루버 틈 사이로 나오도록 연출하기 위해 시공 현장에서 현장 소장과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루버 사이로 약 6m 길이의 워터채널이 돌출된다. 워터채널은 V자 모양으로 접힌 5개의 스틸 플레이트로 만들어 서로 다른 길이와 높이로 설치했다. 물은 V자 홈을 따라 하부 6개의 수반 위로 떨어지며 경쾌한 물소리를 만든다. 그리고 각각의 수반에 떨어진 물을 받는 타원형 수반을 하나 더 설치했다. 이 물이 모여 워터채널이 시작되는 각각의 물홈통으로 순환 공급된다. 물홈통은 자작나무 식재 플랜터 뒤 실외기 외벽 아래에 위치해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방문객은 물의 시작점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마치 자작나무 숲 사이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시공 과정에서 워터채널로부터 떨어지는 물줄기의 두께와 물의 세기에 따라 물을 받는 하부 수반의 위치가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장에서 물의 강도와 두께를 고려한 연출을 여러 번 시행했고, 의도한 최적의 효과를 결정해 하부 수반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리고 그 지점에 정확히 물이 떨어질 수 있도록 V자 모양의 워터채널을 현장에서 잘라가며 위치를 맞췄다. 워터채널에서 떨어진 물이 수반에서 넘쳐흐르며 물막이를 형성하는데 그 모습이 꽤 괜찮았다. 예상치 못한 작은 수확이었다. 그래서 수막이 잘 형성될 수 있도록 수반의 한쪽 면을 기울이고 수반의 에지를 살짝 갈았다. 상품을 넘어 설계를 하며 포스코만의 조경 스타일에 대한 고민과 함께 이 정원이 기여할 수 있는 공익적 가치를 고민했다. 비록 작은 면적의 옥상정원이지만, 국지성 호우 시 빗물이 잠시 머물러 갈 수 있도록 서로 다른 투수율을 가진 녹지대의 하부를 연결한 드라이가든을 조성했다. 국립수목원과 기술 교류를 통해, 유용식물증식센터가 자체 개발한 여러 비비추 품종들을 최초로 도심 옥상 정원에 적용했다. 한반도 희귀종 및 특산식물 27종 및 산딸나무, 마가목, 전나무, 산수국, 단풍나무 등 한국의 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수목과 약 80여 종 15,000본의 식물을 식재했다. 정원은 열악한 인공 지반 환경에서 새로운 품종의 비비추와 그밖에 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얼마나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테스트 베드가 될 것이다. 진행금민수 디자인 팽선민 이정화·조용준·강인화·최재훈 인터뷰 모두의 공간을 위한하나의 목소리 도산공원에 위치했던 더샵갤러리를 자곡동으로 옮기면서 새롭게 개장했다. 이전의 더샵갤러리와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달라졌나. 이정화(이하 이) 공간 및 프로그램 구성은 대체로 비슷하다. 포스코의 브랜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도록 외장재를 철로 사용하고, 지역 주민을 위한 휴게 및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모델하우스로 기능하는 분양관 등을 설치했다. 이전에는 도산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옥외 테라스를 두었는데 생각보다 이용률이 낮았다. 자곡동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더샵갤러리에서는 리모델링을 통해서 이러한 점을 보완해 시민들과 접점을 늘리고자 했다. 그래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옥상정원을 만들고, 그린이라는 키워드를 공간에 담았다. 바이오필릭 디자인을 적용해 1층 웰컴정원부터 5층의 옥상정원까지 이어지는 실내외 조경을 통해 자연을 몸소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자곡동은 차량이 없으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접근성이 좋은 도심의 다른 복합문화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 낮은 접근성을 극복하기 위해 모퉁이 필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자곡 사거리에 위치한 기존 건물은 밤고개로 방향으로 입면이 있고, 나머지는 옆면으로 사용되는 어디서나 흔히 볼법한 건물이었다. 그래서 건물의 입면과 옆면을 모두 철재 곡면 외장 패널로 감싸고, 아트리움과 4, 5층 공간은 투명한 유리로 마감해 밝은 공간을 연출했다. 야간에는 입면을 활용해 미디어 파사드를 선보인다. 포스코를 상징하는 철재 입면과 투명한 공간 연출로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공간에 대한 궁금증과 흥미를 유발하고자 했다. 조용준(이하 조) 대상지가 사거리에 있어서 유동 인구가 많다. 모퉁이 필지도 허투루 쓰지 않고 모두 끌어안는 전략으로 만든 독특한 입면이나 미디어 파사드 덕분에 사거리 어디에서 바라보든 이 공간이 눈에 띤다. 4층과 5층에 올라가면 대모산 자락이 훤히 보이는 입지적 조건은 큰 장점이다. 대모산 자락과 이어지는 4층과 5층의 녹지가 공간을 담고 있는 녹색 뚜껑처럼 느껴지는데, 이러한 점이 눈길을 끄는 요소로 작용한다. 갤러리 외부 공간 중 옥상을 정원으로 활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도산공원 때보다 면적은 더 작아졌는데, 용적률을 최대한 높이다 보니 주어진 공간이 옥상밖에 없었다. 리모델링을 통해서 시민들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싶었는데, 대모산과 롯데월드타워가 한눈에 보이는 옥상이 이를 위한 장소 중 하나라고 판단했다. 5층 옥상정원에 기능과 미학을 담고 싶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지성 호우 등으로 비가 많이 내렸고, 대상지가 위치한 강남에서 비로 인해 침수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을 접하면서 LID를 활용한 정원에 관심이 생겼고, LID를 활용하되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수 등을 적절히 활용해 물을 머금고 있는 동시에 도심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할 수 있는 정원을 옥상에 만들고자 했다. 현실적 여건으로 모든 아이디어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여러 시도를 해 볼 수 있어서 뜻깊었다. 옥상정원의 식재 설계는 대모산 자연 경관에서 영감을 얻었나. 조 작은 것들로부터 경험이 확장되어 입체적인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소우주. 이 공간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공간은 작지만 입체적인 자연을 최대한 보여주고자 했다. 물과 식물이란 소재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바이오필릭을 구현하고자 했다. 작지만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는 소우주처럼 작은 공간에서 물을 머금고 있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대모산 끝자락에 있는 대상지의 맥락을 고려했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대모산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연결되는 또 하나의 숲 경관을 만들고자 했다. 식재의 밀도와 수종을 조절하고 수직과 수평으로 다양한 켜를 만들어 숲 경관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옥상정원의 플랜터와 잔디마당 사이의 자투리 공간을 포장하는 대신 드라이가든 같은 녹지로 구성해 조금이라도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5층 진입 공간에는 국립수목원과 기술 교류를 통해 받은 비비추 등 한국 자생종을 심어 방문객을 환영한다. 이 전반적인 식재 연출은 포스코가 추구하는 자연형 식재의 결과 맞닿아 있다. 포스코는 아파트 단지 내 다층형 식재를 통해 입체적인 자연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피초화류와 관목, 교목으로 군락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치와 구도를 면밀히 살핀 후 시간이 지났을 때 어떤 숲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섬세한 식재를 추구한다. 또한 외래종보다는 월동이 쉬운 자생종을 최대한 활용하며, 다년생으로 관리가 용이한 자생종을 선호한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서 자생종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자생종의 활성화를 바라며 국립수목원과 기술 교류를 통해 비비추 등을 옥상정원에 도입했다. 시민들에게 자생종의 매력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자생종의 매력을 알고,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이들이 많아져야 더 다양한 자생종을 현장에서 쓸 수 있다고 본다. 자생종 활용의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선순환을 만들기 위한 테스트 베드가 5층 옥상정원이다. 디자인 전략 중 하나로 물을 이용한 스토리텔링을 꼽았다. 진입부의 미러폰드부터 옥상정원의 워터채널까지 물을 중심으로 층마다 다른 수공간을 배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건축가와 조경가는 물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 조경가는 물을 활용한 연출을 시도하지만, 건축가는 물을 배수로만 인식하며 해결해야 할 문제로 다룬다. 하지만 정원이나 광장의 수공간은 매력적이다. 광화문광장만해도 수경 시설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지 않나. 그래서 물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물을 단순히 건축물의 안 보이는 곳에 선홈통을 연결해 빼버리는 존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원형 계단에서 보이는 인공폭포도 그러한 관점에서 연출된 것이다. 빗물을 모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방문객들이 공간 내부에서 물이 떨어지는 인공폭포를 직접 마주하며 물이란 존재가 주는 감각적 체험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원래 우수를 재활용한 인공폭포를 만들려고 계획했지만, 비용 문제 등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실현하지 못했다. 조 1층의 미러폰드부터 5층 워터채널까지 이어지는 수공간은 방문객의 동선과 시선을 고려해서 계획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음이 늘 궁금한 법이다. 그래서 1층, 원형 계단, 5층의 수공간을 각각 다르게 구성해서 공간마다 흥미를 유발하고 다음 공간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거리에서 보이는 옥상정원의 녹지를 보고 관심이 생긴 사람이 1층에 오면 굴곡진 수형이 아름다운 소나무와 주변 풍경을 반사하는 미러폰드가 흥미를 유발한다. 4층까지 이어지는 원형 계단을 오르며 인공폭포를 통해 떨어지는 물을 감각하고, 4층 전시 공간에서 나와 작은 정원을 감상하고 5층으로 올라와 시크릿 가든처럼 숨겨진 옥상정원에서 만나는 워터채널. 이러한 물의 여정을 통해 하나의 숲에서 계곡과 샘물을 마주하는 것 같은 경험을 선사하고자 했다. 강인화(이하 강) 물을 토대로 한 연결성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상류부터 하류로 이어지는 강의 흐름처럼 물이라는 개념이 워터채널부터 1층의 미러폰드까지 하나로 이어지게 하려고 노력했다. 물로 이어지는 각 공간을 어떤 식으로 연출할지 고민했고, 특히 방문객 동선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옥상정원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워터채널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많이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워터채널의 물홈통을 보이지 않게 연출해 물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게 했다. 이를 통해 공간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5층 옥상정원 계획 시 원안의 복층 구조를 없애는 대신 워터채널과 계단식 벽천 중에서 고민한 것 같다. 이 복층 구조로 하면 건물 구조 상 토심 확보가 어려웠고, 전체적으로 공사비가 증가해서 완성도가 다소 떨어질 수 있었다. 복층 구조를 없애는 대신 완성도에 집중했다. 흔히 사용하는 계단식 벽천은 안전한 선택지 중 하나였지만, 협의 과정에서 새롭고 특별한 경험을 연출할 수 있는 수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워터채널을 계획하게 됐다. 자칫 공사장 펜스처럼 보일 수 있는 철재 구조물의 미관과 강풍 등에 의한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구조물을 다룰 수 있는 시설물 업체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우려와 달리 설치됐을 때 내부 반응이 좋았다. 개인적으로 시간에 따라 바뀌는 빛에 의해서 색감과 느낌이 달라지는 게 맘에 든다. 아침에는 철재 루버에 샴페인 골드 빛이 드리우는데 저녁에는 약간 오렌지 빛이 드리우는 걸 보면서 참 뿌듯했다. 최재훈(이하 최) 물을 이용한 연출이다 보니, 워터채널에 흐르는 물의 유량부터 시작해서 수반에 담겨 떨어지는 모습까지 도면만 보고 시공하기엔 설계자의 의도를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운 디테일이 많았다. 설계와 시공의 감도를 높이기 위해서, 조용준 소장, 이정화 부장과 함께 현장에서 논의하며 워터채널을 현장에서 재단하고, 수반의 위치, 기울임 정도를 수정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수반을 앞쪽으로 기울여 워터커튼을 만드는 연출로 변경되기도 했다. 철재 루버로 실외기 외벽을 가리고 루버와 실외기 외벽 사이에 녹지를 마련했다. 자작나무 등 수종 선택 시 고려한 사항이 있다면 무엇인가. 조 녹지에 상록수는 쓰지 않으려 했다. 루버 뒷공간에 상록수처럼 가지와 잎의 밀도가 높은 나무를 사용하면 하나의 면처럼 보이기 때문에 특유의 깊이감이 사라진다. 루버와 식재가 어울리며 만들어 내는 빛과 그림자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멀리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수고가 높고 하늘하늘 거리며 잎이 밝은 수종을 찾다가 발견한 게 자작나무였다. 자작나무는 많이 심어도 잎의 밀도가 높지 않아서 루버 틈과 틈 사이로 녹지를 보여줄 수 있다. 루버 뒷 공간에 상록수를 심으면 면과 면처럼 느껴지는 반면 자작나무는 면과 선의 대비가 분명하게 느껴져 공간의 깊이감을 만들 수 있다. 물철쭉 가지들이 루버 틈으로 보이게 연출하는 등 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경관이 달라지는 루버의 특징을 활용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일 수 있게 식재를 했다. 4층과 5층의 공간 구성이 다채롭다. 녹지 위에 원형 콘크리트 플랫폼을 배치하거나 층마다 플랜터의 소재를 다르게 연출했다. 이 한 공간 안에서도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분양관, 전시 공간, 카페 공간 등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다양한 공간이 층마다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공간마다 특성에 맞춰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다. 가령 4층은 실내 정원 및 인테리어부터 외부 테라스까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며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5층은 옥상정원을 중심으로 싱그러운 자연의 느낌을 담아내려 했다. 이러한 이유로 4층과 5층의 플랜터 소재를 각각 철과 화강암으로 다르게 활용했다. 조 가장 처음 생각했던 건 4층과 5층에서 디자인적 통일성을 만드는 거였다. 그래서 4층과 5층의 플랜터 소재를 포스코를 상징하는 철재로 통일시키는 방향으로 접근했고, 그 안에서도 역동적 표면을 만들어 디테일의 완성도를 높이려 했다. 원형 콘크리트 플랫폼의 경우 녹지와 공간이 분리된 느낌을 준다. 경복궁 근정전의 월대처럼 단차를 두어 격을 높이는 효과를 연출했다. 이런 연출을 통해 모든 방문객을 귀한 손님처럼 모시고 싶었다. 궁극적으로 녹지와 단차가 있는 콘크리트 플랫폼 위 휴게 공간을 통해 나만의 아늑한 정원을 소유하는 느낌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4층 실내 정원이 실내 전시 및 휴게 공간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연출을 시도했나. 최 4층 공간은 높은 층고와 실내외의 경계에 있는 통창으로 이뤄진다. 이런 특징들은 햇빛과 같은 외부 자연환경을 내부로 끌어들이고 공간을 밝고 개방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면과 실내 정원의 레벨이 같게 만들어 외부의 자연이 건물 내부로 흐르는 느낌을 연출하고, 실외까지 시야와 공간감이 확장되면서 이용자가 실내에서 외부 정원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만들고자 했다. 또한 4층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고객들에게 개방된 공간으로, 더샵이 추구하는 그린라이프를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전시가 진행된다. 진입했을 때 공간의 의도를 한눈에 드러내기보다 숲이라는 첫인상을 전달하고 싶었다. 공간의 높은 층고를 활용하여 수고가 높은 인조목을 최대한 많이 배치하고 벽면의 미러월을 통해 깊이감을 만들었다. 숲 사이사이에 공간이 배치되고, 그 안에서 프로그램과 전시물을 경험하는 동안에도 고객들은 손만 뻗어도 되는 거리에 자연이 항상 있게 된다. 중앙에 배치된 유선형의 대나무 조형물을 통해 자연 속 둥지의 곡선적인 형태와 유기적인 구조를 표현해 자연 속에서 찾은 주거의 가치를 담아냈다. 이처럼 물리적 환경 구축과 동시에 브랜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다. 이 내부 공간의 토심 부족과 생육 환경을 고려해 인공 식물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실내외 풍경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했다. 그래서 실내 공간과 외부 테라스의 식재 톤을 맞췄다. 인공 식물로 연출할 때 필로 덴드론 등과 같이 흔히 실내 조경에서 쓰는 열대지방 식물을 지양하고, 한국의 산에서 볼 수 있을법한 수종으로 연출하려고 노력했다. 실내 조경하면 식물원을 대개 떠올리는데, 그런 전형적 인식에서 벗어나 실내 정원에서도 충분히 한국적 자연 경관을 선보일 수 있다 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외부공간디자인 더숲은 다양한 유형의 실내외 조경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상업 공간에 실내 정원을 만들 때 원칙이 있나. 최 상업 공간을 설계할 때 방문객들에게 어떠한 경험을 제공할지 고민을 많이 한다. 이를 토대로 단순히 아름다운 디자인에 그치지 않고 브랜드와 소비자의 정서적 연결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결국 방문객들에게 오랫동안 좋은 기억을 남기는 공간이 오래 간다. 그래서 클라이언트와 소통을 많이 하며, 때로는 역으로 공간 브랜딩을 위해 제안하기도 한다. 한 카페 프로젝트의 식재 디자인을 맡았는데 특색이 없던 공간의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식재와 더불어 외관 디자인 변경을 새로 제안함으로써 공간의 전체적인 톤을 바꾼 경우가 있었다. 우리의 역제안을 흔쾌히 수락해 준 클라이언트 덕분에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디자인 언어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조경에 그치지 않고, 전체적인 공간 브랜딩을 보려고 한다. 이를 토대로 상업 공간을 상업적으로 흥행할 수 있는 공간, 나아가 브랜드를 고객들에게 오롯이 잘 전달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KT 디지코 가든과 비슷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조 업으로 조경을 선택한 이유는 조경을 통해 공공의 가치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KT 디지코 가든과 이 프로젝트 모두 민간 프로젝트였지만 조경이 가진 공공적 가치와 역할을 충분히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다만 그때와 다른 건 브랜드 이미지를 좀 더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포스코라는 브랜드의 상징성을 보여주기 위해 철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와 동시에 식재로 다양한 켜를 만들어 내고, 국지성 호우를 대비한 드라이가든 등을 조성함으로써 물을 머금은 자연 경관을 입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 또한 실내외가 연속된 녹색 풍경으로 이어지는 통합 디자인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건축, 인테리어, 조경이 공간 브랜딩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뜻깊었다. 최근 공간 브랜딩을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려는 곳이 많아졌다. 공간 브랜딩이 정말로 소비자들에게 유의미한 효과가 있다고 보나. 최 우리가 공간에서 연출하고 의도했던 바를 방문객들이 100% 알아봐 주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공간을 유심히 살피는 고객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 인테리어, 조경이 공간 브랜딩을 위해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 통합된 디자인을 통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공간의 톤은 확실히 다른 곳과 차별점을 만든다. 방문객이 디자인 의도를 명확히 알아차리지 못해도, 한목소리를 내는 공간의 정돈된 톤은 일정 부분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가보고 싶은 공간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고 본다. 조 그간 공간 브랜딩에서 건축이나 인테리어의 역할이 부각됐는데, 이제는 조경도 같이 브랜딩을 이끌어갈 수 있는 정도가 됐다. 이전까지 공간 브랜딩에서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요소 중 하나가 조경이었다면, 이제는 건축, 인테리어와 함께 공간의 이상적인 상을 같이 그려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본다. 단순히 상품으로 끝나는 조경이 아니라, 상품 이상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조경의 역할이 필요하다. 공공성을 띤 조경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조경가 로서 늘 고민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이 공간이 방문객들에게 어떤 공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나. 이 포스코의 조경을 담당하며 철이란 차가운 소재 안에 조경이라는 따뜻함을 불어넣기 위해서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도 그러한 고민이 많이 담겼다. 세대를 불문하고 이곳을 지나가는 누구나 옥상의 작은 숲을 보고 한번쯤 들러서, 물소리도 듣고 작은 정원에서 쉬다가 갔으면 좋겠다. 작은 자연 속에서 아늑한 쉼을 이곳에서 즐기면 좋을 것 같다. 최 브랜드와 소비자들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입장에서 더샵의 좋은 공간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서서 좋은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더샵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강 설계 과정에서 포스코의 브랜드 이미지를 드러내는 철과 자연의 뚜렷한 대비가 잘 드러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현장에 와서 보니 철재 루버와 루버 사이로 보이는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의 대비가 강한 직선과 곡선의 대비처럼 느껴져 아름다워 보였다. 이러한 곡선과 직선의 대비가 이 공간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러한 공간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면 기업도 공공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조 조경가로서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통해 좋은 상품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의 의도를 알아봐 주고 귀하게 여겨주는 것도 좋지만, 내가 만든 공간에서 세대와 상관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공공적 가치를 위해서 조경을 선택했던 처음의 마음처럼 조경가로서 늘 조경의 아름다움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이곳 역시도 인근 지역 주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동네의 대표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본다. 디자인 팽선민 글 조용준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 조경 설계 총괄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조경 설계 진행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강인화, 김병철,서유진, 이지현, 김성일, 허지선) 조경 디자인 감리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강인화) 조경 시공 외부공간디자인 더숲 건축 설계 포스코에이앤씨, 가아건축사사무소 인테리어 설계 이웨이(EWAI), 동일인테리어 발주 포스코이앤씨 위치 서울시 강남구 자곡로 210 면적 2,555.3m2 완공 2023. 9. 사진 외부공간디자인 더숲, 조용준 2004년 설립된 CA조경기술사사무소는 작은 공간의 설계부터 도시 스케일의 계획에 이르는 국내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www.cadesign.co.kr 이정화는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건축학과 조경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북미 조경사 자격증을 소지한 미국 공인 조경가로서 SOM, Brightview, HOK에서 도시 개발 계획, 주거, 학교, 병원 및 기업 사옥 시설 부대 조경설계를 담당했다. 현재 포스코이앤씨(전 포스코건설)에서 조경 상품 기획, 개발 및 외부 환경 디자인 마스터로 근무하고 있다. 자연 친화적인 주거 브랜드 상품으로 단지 내 식물원 플랜트리움, 스타라이트로드, 바이오필릭 주차장 등을 개발했다.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를 이끌고, ‘워커힐 더글라스 정원 기본 및 실시설계’, ‘이스탄불 하천 회복 프로젝트’, ‘종로구 통합청사 설계공모’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개인 자격으로 즉흥적인 기획, 전시하지 않는 그래픽 작업 등을 즐기기도 한다. 강인화는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전공했으며 CA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 실무를 담당했다. 현재 ‘서울광장숲 조성사업’, ‘도심공원 기본계획 및 개방형녹지 등 지침마련‘ 등 다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최재훈은 강원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외부공간디자인 더숲의 책임으로 ‘롯데아울렛 동부산/김해점 리뉴얼 계획’, ‘더샵갤러리 2.0 실내조경 현상설계’ 외 다양한 하이엔드 정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다분화된 소비자 취향의 최전방에서 공간을 제안하고 있다.
나의 식물에게
조경의 특징 중 하나는 살아 있는 재료, 식물을 다룬다는 점입니다. 식물은 참 재미있는 소재입니다. 자라나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다시 지며 공간에 변화를 만들어내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합니다. 굵어지는 줄기와 점점 높아지는 수목의 캐노피는 세월의 적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식재가 조경설계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식물은 설계에 더해지는 요소일 뿐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공간을 만드는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존재일까요?” 이 물음을 토대로 식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내게 영감을 주는 식물, 좋은 나무를 고르는 법, 모두가 말리겠지만 꼭 한 번 써보고 싶은 수종, 식재 과정에서 겪었던 웃지 못 할 에피소드, 잘못된 식재 사례 바로잡기, 조경에서 식물은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 등 식물과 얽힌 다채로운 글감을 여덟 명의 조경가에게 건넸습니다. 식물에 대한 조경가들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가 닿기를 기대합니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식물의 가치를 설계 언어로 번역하다 _ 조혜령 불가피한 난제, 불가능한 애도 _ 허대영 식물의 감 _ 최재혁 아름다운 공간을 지키기 위한 고민 _ 박경탁 조경가, 식물을 얼마나 잘 알아야 할까 _ 이해인 나의 디자인 중심 _ 김태경 조경가와 식물, 조경가의 식물 _ 박주현 식물의 가치를 만드는 법 _ 김수린
[나의 식물에게] 식물의 가치를 설계 언어로 번역하다
이성과 감성 사이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의미인가. 순간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이 생각났다. 두 주인공 가운데 언니 엘리너는 침착하고 바른 판단을 중시하는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동생 메리앤은 열정에 자신을 맡기는 ‘감성’을 대변한다. 이들은 각기 힘든 연애를 겪으며 자신에게 부족한 일면을 보완할 기회를 만들어가고 결국엔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식물을 다루는 조경가의 역할과 입장은 어때야 할까. 식물의 이름과 특징 등 개체적 탐구로부터 확장해(각주 1) 첨단 소프트웨어와 장비로 대상지의 자연(식물의 집단)을 분석하고 데이터를 도출한다. 하지만 조경계획과 설계라는 직무 특성상 이를 바탕으로 이용자의 미적 경험을 상상하는 작업은 식물을 다루는 조경가의 기초이자 목표다. 조경을 과학과 예술이 융합된 실천적 종합 예술이라고 하지 않던가. 조경가는 이성과 감성 사이를 넘나들며 식물의 가치를 설계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다. 조경 디자인 매체로서 식물 조경가에게 식물은 지형이나 바위, 물과 같은 자연 요소 중 하나다. 살아 있는 자연의 재료를 다룬다는 의미는 유사 분야의 직무와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낮과 밤, 날씨와 계절, 지형과 고도, 곤충과 동물 등 식물과 관계되는 모든 현상의 시공간적 함수가 추가된다. 단순히 식물이라는 재료를 나열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 적합한 식물을 선택하고 조합해 이용자들의 감각과 감정을 유발하는 재구성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때 식물은 비로소 조경 디자인의 요소가 아닌 매체가 된다.(각주 2) 디자이너로서 조경가는 식물학의 본질을 이해해야 하며 생태학의 기본에 친숙해야 한다. 원예학이나 농업학, 임업학으로부터 적절한 기술을 활용할 줄 알며 무엇보다 형태, 질감에 대한 안목과 화가의 기술이나 문학의 표현에 특별한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각주 3) 이처럼 식물은 조경 디자인의 매체가 되어 설계자와 이용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매개한다. 매체는 때론 정원, 공원, 초지, 숲 등의 ‘서식처 재현’의 형태로 해석되기도 하고 ‘문화적 메시지’로 안내되기도 한다. 필자는 영화나 소설, 시 구문에서 식물에 대한 문화적 콘텐츠 발굴을 즐긴다. 문학가들이 표현하는 식물은 어느 조경가의 수려한 식재 디자인 못지않는 경관을 선사한다. 특히 박완서 소설에서는 식물의 특징을 인물에 대입시켜 생명력을 불어넣는 묘사 글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다. 실제로 그는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노란 집에 거주하며 마당 가꾸기에 정성을 쏟을 만큼 식물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봄이면 딱딱한 나무줄기 가장귀에서 꽃자루도 없이 선명한 홍자색 꽃을 터뜨리는 박태기나무의 특징을 복희의 첫사랑에 요동치던 떨림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여름철 강렬한 주황색의 능소화는 팜 파탈 현금을 묘사하는 식물로 등장한다. 그밖에 싱아, 파드득나물, 며느리밥풀꽃 등 수십 종의 식물들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 또는 수필 구석구석에서 추억과 심경을 대리하며 독자와의 공감을 시도한다. 조선 최고 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은 어떠한가. 다산은 좌뇌와 우뇌, 이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정원가임이 틀림없다. 특히 다산의 풍부한 식물학적 지식은 정원에서 식물을 실용적으로 활용할 뿐 아니라 감각적으로 감상하는 태도도 제시한다. 국화의 아름다움을 남긴 여유당전서 1집 13권 『국영시서』에는 가을 밤 흰 벽 앞에 국화 화분을 세워 놓고는 촛불을 멀고 가깝게 비춰가며 벽 위에 어리는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몽환적인 연출 방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먹을 수 있어야만 실용이 아니라 정신을 기쁘게 해서 뜻을 길러주는 것도 가치가 있다.”(각주 4) 캐스팅과 연출 몇 년 전 건설사와 함께 주택 전시관 작업을 할 기회가 있었다. 최근 많은 브랜드가 팝업 형태의 체험 공간을 만들고 브랜드의 가치와 이미지를 담는 매체로 정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드림 하우스’란 이름으로 부산에 오픈한 견본 주택 전시관은 팬데믹 시대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한 단지 조경 콘셉트와 주거 문화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좁고 높은 입면의 정원 속에는 구불구불한 산책로와 시적인 교목의 캐스팅이 중요했다. 키는 8m, 수관 폭은 3.5m 내외, 2.5m 정도의 지하고가 확보된 나무가 필요했다. 3층 홀 복도에서 계단실로 내려가는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수관고의 볼륨이 온전히 시선에 담겨져야 했으며 무엇보다 전체 공간에서 초점이 되는 구조로서 지배하는 힘도 필요했다. 수없이 많은 종류와 규격(미세하지만 다른 캐노피 형태)의 교목을 찾아다녔고 시뮬레이션했다. 주인공 나무가 결정된 후 빈 공간에도 몇 개 없는 테마 질서를 설정했다. 산책로의 시작은 향기가 은은한 은목서로, 수관 하부 주변은 온전히 비워둬 굽은 길과 빈 공간의 담백함을 살리고자 했고, 뾰족한 모서리 공간은 몇 개의 층위를 가진 식재 레이어를 두어 깊이감을 줬다. 정원의 채광은 유리를 커튼월 재료로 사용해 자연광을 충분히 들게 했지만, 자연 환기를 할 수 있는 폴딩도어 설치, 내부 덕트의 위치 등은 식물 유지·관리에 아쉬움을 줬다. 결과적으로 3년의 유지·관리 끝에 이 프로젝트는 건설사의 결정으로 철거 중이다. 나에게는 대형목 식재와 관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해준 케이스다. 관리 도중에 중견 조경가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대형 교목을 심는 일은 마치 집을 떠서 옮기는 일과 같다”며 일침을 줬다. 윤리와 서명 몇몇 조경 현장은 관리를 통해 가까이서 두고 보고 있다. 내가 선택한 식물들이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하는지, 다음 작업에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가 시공과 관리 과정에서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반기지 않더라도 때로는 그곳을 암행해 식물을 살피기도 하고 비가 억수같이 쏟고 난 다음에는 집 주인에게 정원의 안녕을 묻곤 한다. 매번 나갈 수 없다는 핑계로 10년 가까이 내가 설계한 정원을 돌봐주는 고마운 한 시민 정원사가 있다. 그는 전문가다운 복장을 하고 식물이 심겨진 화단에 꿇어앉아서 시든 잎을 정리하고 진드기가 들끓으면 일일이 손으로 잎과 줄기를 훑어가며 박멸한다(F&B 시설 내부는 농약 살포를 되도록 지양한다). 지상부 식물을 육안으로 관찰하고 뿌리에 이상이 없다 싶으면 흙을 뒤집어 손으로 점검한 다음 내게 사진을 보낸다. 워터 컴퓨터를 다시 세팅하거나 일정 기간 잠가두라는 지시를 내린다. 때로는 그를 통해 쓰지 말아야 하는 수종과 토양 배합의 지침을 가르침 받기도 하고, 가지치기를 통해 살려 새롭게 형성되는 공간의 형태와 미(완벽한 타이밍의 전지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끊이지 않는 개화와 착과 능력)를 제공하며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죽거나 병에 걸린 상처 입은 식물도 적절한 가드닝 스킬을 통해 정원의 건강성을 향상시킨다. 비로소 정원의 식물은 디자이너와 가드너가 함께 가꾸는 과정에서 재발견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잘못 심어서 그리고 운영한 나무들에게 고백한다. 앞으로 도면에 허식을 보이거나 콘셉트를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할 고민보다 앞으로 나의 식물에게는 생명력이 넘치는 부식토와 양토를 처방하고 너희들을 더 이해하리라. 땅을 더욱 진심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각주 정리 1. 『식물의 종(Species Plantarum)』(1753)을 집필한 스웨덴 식물학자 칼 린네는 “이름 없이는 영원한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식물의 이름을 아는 것은 곧 조경의 대상인 자연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첫걸음 아닐까. 2. 김아연 외 26명,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도서출판 한숲, 2021, pp.212~223. 3. 닉 로빈슨, 『식재 디자인 핸드북』, 도서출판 한숲, 2018, p.44. 4. 성종상, 『인생정원』, 스노우폭스북스, 2023, p.68. 조혜령은 경희대학교, 그라니치대학, 서울대학교에서 원예와 조경을 공부했다. 정원이 갖는 문화적·사회적 가치를 믿으며 이론과 실무의 경계를 탐색하는 조경가로 현재는 조경하다열음의 연구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나의 식물에게] 불가피한 난제, 불가능한 애도
특별한 설계자 1990년 조경학과에 입학했고, 고향의 시골 어르신들은 “대체 조경이 뭐냐”며 물었다. 동네에서 그래도 세상 물정 꿰고 있다는 어르신이 먼저 나서서 “조경은 나무 심는 게지”라고 답하곤 했다. 당시에는 조경을 한낱 나무 심는 일로 잘못 알고 있다고 억울해하면서, 전체 배치도도 그리며 포장과 시설물을 섬세히 디자인하는 일도 조경이라고 애써 항변하기도 했다. 이제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 식물만을 다루는 건 분명 아니지만, 우리는 ‘식물’이라는 ‘특별한’ 재료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특별한’ 설계자들이다. 식물 재료는 탄생과 성장과 쇠퇴라는 삶의 여러 단계를 지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한다. 개체가 처한 환경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모습을 지니므로 그 개별 형태는 실로 무한하다. 게다가 적절히 관리해서 무리 없이 자란다면, 식물은, 특히 나무는 살아갈 자리를 정한 설계자보다도 이 땅에 더 오래 살아남을 존재이기도 하다. 이 재료에는 내구 연한이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식물을 대하는 마음이 한없이 숙연해진다. 발췌한 마음, 난제 고백하자면, 천변만화하는 식물 재료에 대한 내 지식은 체계적인 공부와는 거리가 멀고 관심도 변변치 않아서, 설계사무소에서 함께 고생한 고수들이나 협의에서 만난 발주처 조경 담당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주워섬긴 게 대부분이다. “석류나 노각은 겨울 바람에 약해서 담으로 막힌 데 모아 심어라”, “산사, 마가목은 도시에서 잘 살지 못하니 다른 나무로 바꾸라”는 식으로 실제 식재 공사와 식물 성장, 유지·관리 과정을 지켜본 경험 많은 실무자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수종, 초종의 식물 리스트를 만들 때 언제나 조심스러운데, 그러다가도 읽던 책에서 불현듯 영감을 받기도 한다. 이를테면, 징그러운 묘사들이 있어 ‘호더(hoarder)’와 ‘호러’를 오가는 김인숙 작가의 소설 『자작나무 숲』의 도입부한 대목. “하얗게 서 있는 나무들의 숲이었다. 하얗고, 곧게. 그리고 빛을 뿜어내는 숲이었다.”(각주 1) 눈앞에 희부연 밤 풍경이 펼쳐지는데 껍질이 찬연한 이 나무들을 외면할 재간이 있겠는가. 하자 걱정일랑 잊어버리고 빛을 쏘아 올리기 위해서 식재 평면도의 표를 늘려서 자작나무를 넣고 무리 지어 심는다. 기본이 탄탄치 못한 잡지식과 뜬금없는 충동도 문제지만, 설계한 식물들을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실수와 오류를 보완하는 피드백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는 게 무엇보다 뼈아프다. “초보들이 식재 도면을 그리나 봐요”(천만에, 초안은 내가 한 거야), “좁은 땅에 식물들이 자잘하게 뒤섞여서 너무 조잡해요”(맙소사, 또 빌어먹을 스케일 감이 문제로군), “중요한 공간이니까 소장님이 직접 신경 써주세요”(알았다고 이 양반아, 내가 그렸다니까). 별나게도 식물에 밝으시나 심사는 까탈스러운 자문위원이나 발주처 담당자를 만나게 되면, 볼 빨간 얼굴과 너덜너덜해진 심정을 애써 감추고 다스리면서 사무실로 돌아온다. 뭐가 문제인가, 괜찮아. 하지만 그런 날 밤이면 비평에 관한 책을 절로 떠올리고 남몰래 뒤적인다. 이를테면, 꾹 눌러 밑줄 친 이런 부분. “비평가들이란 하렘의 환관과 같다. 매일 밤 그곳에 있으면서 매일 밤 그 짓을 지켜본다. 매일 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은 그걸 할 수가 없다.”(브랜던 비언)(각주 2) 물론 품위 있는 오십 대 쿨가이로서 맹세컨대 이렇게 야멸차고 한편으로는 애잔한 문장들을 즐기지 않는다. 다만 검토와 지적, 비판과 비평을 당하는 비슷한 처지에 공감한 나머지 그저 음험한 미소가 지어질 뿐이다, 라고만 해두겠다. 발췌한 마음, 애도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초·중·고교의 신축보다는 증·개축 사업들이 대폭 늘어나서 사무실 프로젝트 중에서 비중이 꽤 커졌다. 교사동의 증축, 개축은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게 무엇보다 앞서는 전제라서, 새 건축물을 운동장이나 녹지가 있던 자리에 짓고 원래 건물을 철거해서 운동장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하면, 식물을 새로 심는 일에 앞서서 원래 있던 나무와 풀들을 옮기거나 제거하는 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뜻이다.(각주 3) 우리가 설계한 대학 캠퍼스 강의동 신축 공사를 사례로 보면, 건축물 한 동을 짓기 위해서 평균 5,000~6,000m2 면적의 숲과 그곳에서 살던 교목 약 700~800그루를 거의 전량 제거하며, 여기서 임목 폐기물은 땅 위 줄기, 가지와 지하의 뿌리를 모두 합쳐서 적어도 100톤 이상 나온다. 도시지역 초·중·고교들도 증·개축 사업을 하면 학교 한 곳마다 교목은 평균 100~200주, 임목 폐기물 60~70톤을 처리해야 한다. 대지 전체를 파헤치니까 가식할 장소가 마땅치 않고 옮겨 심자고 해도 공사비가 빠듯해서 이식 수목의 유지·관리는 뒷전이다. 이런 프로젝트들의 설계 초반에 존치와 이식, 제거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현장 조사를 다니다 보면 흔치 않은 나무들을 만나기도 한다. 작년 춘천의 학교에서는 이름만 들으면 왠지 별똥별 같은 위성류渭城柳(Tamarix chinensis)를 난생처음 봤다. 그다지 말쑥하지는 않지만 키 10m, 흉고직경 45cm로 우람하게 서 있는 유별난 모습. 화석으로만 남았던 메타세쿼이아가 1943년 7월 말 중국의 깊은 산속에서 무려 35m 높이의 커다란 나무로 살아있음을 기적처럼 목격한 학자의 충격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되겠으나, 잎이 나질 않아서 처음 본 2월에는 그냥 버들일까 했던 그 나무가 바로 위성류임을 구글 렌즈와 수목 도감으로 거듭 확인하고 올려다보는 마음이 묘했다. 2023년 7월 말의 작열하는 여름 볕을 잠시나마 잊을 정도로. 하지만 이 나무도 갑작스레 죽음을 맞을 것이다. 위성류는 불운하게도 운동장으로 바뀔 건물 중정 귀퉁이에 서 있고, 이식해서 살리기에는 덩치가 너무 큰 나무다.(각주 4) 애도하며 반성한다. 시인 이성복의 아포리즘을 모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의 제목 자체를 즐겨 인용하며, 그래도 내역 작업으로 고통스럽게 야근하면서 유기질 비료를 무수히 잡아줬기 때문에 “나는 예외다”라고 너스레를 떨어왔건만, 이제는 푸른 잎은커녕 나무를 통째로 없애는 일에 가담하는 처지니 말이다. 정작 식물을 사랑해야 할 사람은 놓치고 사는데 소설가 김연수가 일깨우는, 이를테면 이런 장면. “나무는 저마다 다른 나무인데 하나의 이름으로만 부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은행나무니 향나무니 하는 이름 말고 그 나무만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여기 모였습니다.”(각주 5) 아파트 단지 철거를 앞두고 그곳에서 삼십여 년을 함께 살아온 나무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주민들이 스무 명 남짓 모여서 치르는 의식은 나무마다 각자 고유의 이름을 붙여서 함께 불러보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반려견 ‘궁금이’를 추억하며, 어느 칠엽수에게 ‘궁금이와 함께 웃는 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식물들이 개별화된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니, 순전히 우리가 세심하게 지켜보고 알아듣고 불러주어야 하는 일이다. 나에게 별다른 기억이 없는 개체, 개별적이지 못한 개체에 대한 애도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일하다 보면 식물을 아끼고 보호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이들이 식물과 나눈 교감을 찬찬히 새겨듣고, 커다란 나무는 공사 범위에 대해 설득하고 고쳐가면서 최대한 존치하며 작은 나무는 가식장을 잘 골라서 한 그루라도 더 옮기고 살려야 할 것이다. 학교 나무인 목백합 주변의 잘 가꾼 나무들까지 함께 동산으로 만들어 달라고 신신당부하던 교무부장, 원래 나무는 잘 몰랐는데 재산 대장 처리를 하느라 나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정이 들어서 마냥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던 학교 행정실장, 캠퍼스 나무를 하나라도 건드리려면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소문이 난 교수. 모두 식물과 함께 한 추억들을 온전히 지켜내고자 설계자를 바르게 인도하는 든든한 후원자다. 나이가 들면서 야속하게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일에만 유독 예민해진다. 그러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지키기 힘들 것이다. 어디까지가 이웃한 생명이며, 어떻게 이웃의 고통을 지겨워하지 않고 그 삶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조경설계는 식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공감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렇게 아름다움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조경 일의 속 깊은 본질이라고 믿는다. **각주 정리 1. 김인숙, “자작나무 숲”,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북다, 2023, p.177. 2. 빌 헨더슨·앙드레 버나드, 최재봉 역, 『악평: 퇴짜 맞은 명저들』, 열린책들, 2011,pp.154~155. 참고로 브랜던 비언(1923~1964)은 아일랜드의 작가. 3. 전에는 주로 산림에 적용하는 ‘벌목’과 ‘뿌리뽑기’만 있었는데, 올해 『2024년 건설공사 표준품셈』은 유지·관리 부문에 ‘가로수 제거(1-2-20, 24년 신설)’를 추가했다. 도시에서도 가로수나 도시림 등 수목을 제거하는 공사가 많아졌다는 하나의 방증일 것이다. 4. 한국도로공사에서 이식한 약 2만 그루의 자생 수목을 대상으로 성공한 비율을 정리한 논문에 따르면, 근원직경이 커질수록 이식 성공률은 감소하며 예측 회귀 모형은 “Y=-0.811X+88.627(X=근원직경, Y=이식성공률)”이었다. 이 식에 따르면 흉고직경 45cm(근원직경 54cm)의 위성류를 이식해서 성공할 확률은 45%에 불과하며, 가식 후 다시 옮겨서 정식한다면 20%까지 생존율이 줄어들 것이다. 이상철 외 2인, “자생수목 이식 성공률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43(2), 2015, pp.23~29. 5. 김연수,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레제, 2023, pp.25~26.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1999년 이후 사반세기에 걸쳐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조경설계 힘(studio HYMH) 소장이다.
[나의 식물에게] 식물의 감(感)
공간을 만드는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존재일까. 질문에 내포된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즉답이 망설여진다. 이 질문은 ‘조경가라면 꼭 식물을 다루어야 하는가’와 같은 직업 정체성에 대한 원론적인 물음이 담길 수도 있고, ‘조경가는 식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와 같은 태도나 방법론에 대한 물음이 담길 수도 있다. 광범위한 주제를 펼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원론적 주제를 다루기보다 조경가로서 일상에서 식물을 어떻게 감각하는지를 소개하며 나의 미적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조경가에게 식물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공간 연출 소재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살아 있는 생명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특별한 감흥을 전달한다. 식물의 어떤 측면이 사람들에게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키는지, 또한 왜 그렇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세심하게 살피고 섬세하게 감각하는 것은 조경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조경가는 그런 과정을 통해 식물을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서 탐구하며 인식하기 시작하고, 주관적인 해석과 분류의 과정을 통해 종국에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미적 재료로 주관화하기 때문이다. 식물이 전달하는 무수한 감각이 있겠지만 그중 네 가지 식물에서 느낀 양감, 색감, 질감, 형태감을 소개한다. 단편적인 미적 경험으로 주관적 관점에서 서술했음을 미리 밝힌다. 이를 통해 조경가가 식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최재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조경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정원과 조경설계 실무를 익혔다. 2017년 오픈니스 스튜디오(Openness Studio)를 창업해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정원, 공공예술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나의 식물에게] 아름다운 공간을 지키기 위한 고민
사람의 활동과 관계하는 공간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기능이 그 공간에 담겨야만 한다. 하지만 단지 태어났다고 계속 실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공간이 오래도록 세상 속에서 지켜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이유는 그 공간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을 이루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요소는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꽤 다양하며 식물은 그러한 요소 중 하나다. 조경가로서 다루어야 하는 대상지를 만날 때 계획의 꽤 이른 단계부터 식물을 포함한 포괄적인 공간의 이미지를 구상하곤 한다. 어쩌면 식재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어떤 조경 요소보다도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 꾸러미일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나는 많은 프로젝트에서 ‘어떤 식물을 어떻게 식재할까’ 고민했었고 지금까지도 고민해 오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면서 ‘어떻게 식재를 할까’가 아닌 ‘식재를 해야 할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순간도 많아졌다. 이 글 첫머리에서의 표현처럼 세상에 태어날 필요가 있는 공간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오래도록 사랑받게 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최소한의 식재만이, 때로는 그것조차 없어야 할 필요가 있다. 최소의 식재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꽃 시장을 가면 이 집 저 집 비슷해 보인다. 가게마다 분명 서로 다른 식물이 있지만 방문객이 특별한 목적이나 관심이 없다면 대동소이해 보일 것이다. 만약 단일 수종을 통일성 있게 진열해 놓은 가게나, 빈 공간에 하나의 아름다운 식물만 진열한 가게가 있다면 분명 꽃시장 안에서 상대적으로 그 존재가 잘 드러날 것이다. 정원박람회에서도 비슷한 스케일인 다수의 작가정원이 인접해서 위치하게 되면, 작품 간의 차별성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복잡한 박람회 속에서 작가가 전하려는 이야기나 경험의 순간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 되지 않는 공간에 이용/가용 면적과 식재 면적을 모두 움켜잡고 있는 것보다 단순하고 과감한 방법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더 잘 부합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스케일의 정원이라지만 하나의 공간을 계획할 때 주변 환경과의 관계는 결정적인 고려 사항이며, 그 관계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큰 스케일의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극단적으로 미로와 같이 수많은 경험의 연속을 모두 담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의 극단으로 큰 스케일 전체를 하나의 경험으로 극대화할 수도 있다. 끝없이 펼쳐진 논밭 가운데 있는 큰 땅과 복잡한 도심 속이나 도시의 끝단 클라이맥스에 위치한 큰 땅에서 같은 방법은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이러한 생각은 2017년부터 7년간 이끌어온 인스파이어 복합 카지노리조트(Inspire Entertainment Resort) 프로젝트에도 담겨 있다. 선택과 집중, 최소의 식재를 통해 사업비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대상지가 가진 스케일과 주변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했다. 최소의 비용을 수반하는 최소의 식재 그리고 최대의 효과로 작동하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어느 발주처나 품고 싶은 아이가 될 것이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박경탁은 사이트닷(SITEDOT)의 공동 대표로, 서울시립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민우건축사사무소, O3SCOPE, SWA 샌프란시스코 오피스 등에서 설계 실무를 했다. 2022년까지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의 소장으로 팀을 이끌다 2023년 사이트닷에 합류했다. 현재 인스파이어 복합 카지노리조트, 하인즈 퀀텀 랜드마크 타워, 힐링 네이처랜드, 용산파크웨이 등의 조경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나의 식물에게] 조경가, 식물을 얼마나 잘 알아야 할까
조경이 식물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조경에 식물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조경가가 다루는 공간이 자연을 배제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으레 자연의 한 요소로 식물을 다루게 되는 것인데, 조경가를 식물 전문가로 바라보는 시선이 종종 갑갑하다. 한편으로는, 식물을 다룬다는 점이 그래도 여러 공간 설계 분야 중 조경을 특별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기에 많은 조경가가 식물을 잘 모른다는 점을 종종 불안해한다. 식물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나의 식물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니 식물 지식, 식재 설계에 대한 노하우를 감히 내놓을 재간은 없어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몇 가지 식물에 대한 기억을 소소하게 적어본다. 객관적이지 못하고 개인적 선호가 드러나는 점은 양해를 구한다. 찔레 찔레는 꽤 어렸을 때부터 정확하게 이름을 알고 있던 식물이다. 원래 자연에 관심이 많아 농업대에 가고 싶었다는 아버지는 관찰력이 좋아서 (과장된 기억이겠지만) 운전하고 지나가면서도 “저기 대벌레가 숨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는 이런 것도 먹었다고 설명하며 찔레 껍질을 벗겨 그 속살을 먹어보기도 했다. 목으로 넘길 수는 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정도로 맛은 없다. 어쨌든, 먹어본 기억 탓에 이 식물이 꽃이 있든 없든 찔레인 것은 늘 알아봤다. 가시가 없는 민찔레도 있다. 탐조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새 관찰에 대한 열정을 불꽃처럼 일으키는 종’을 뜻하는 스파크 버드(spark bird)가 있는데, 조경하는 나에게는 이 식물이 나의 ‘스파크 버드’다. 쇠뜨기 모두가 말리겠지만 써보고 싶은 식물이다. 뱀밥이라고 불리는 생식 줄기가 올라올 때는 조금 징그럽게 생겼는데, 녹색의 영양 줄기는 질감이 부드럽고 균일해서 들판에 쫙 펼쳐져 있을 때 햇빛을 받으면 꽤 예쁘다. 어릴 때 지나다니면서 보이면 쉽게 끊어지는 게 재미있어서 뚝뚝 끊고 다녔던 풀이다. 잘 퍼져서인지 대부분 잡초 취급을 받는다. 들판이라 쇠뜨기를 심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본 적이 있는데 비웃음만 사고 심지 못했다. 이 식물을 검색해보면 어떻게 없애는지에 관한 내용만 나온다. 붉나무 이름처럼 단풍이 많이 붉다. 사실 붉나무를 한국에서 설계에 써본 적은 없지만, 뉴욕 하이라인에 있는 붉나무의 사촌 격인 대가지붉나무의 특성을 좋아해 대체목으로 생각해두고 있는 식물이다. 너무 붉어서 투명한 느낌이 날 정도로 짙은 단풍이 들기까지 노란색과 주황색을 거치기도 해서 가을 풍경을 다채롭게 해준다. 대가지붉나무만큼 색이 붉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돈되지 않은 듯 거친 야생 느낌의 식물이 필요할 때 붉나무를 활용해 볼 계획이다. 수양버들 탄천을 따라 자전거로 하천변만 달려 출근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이다. 출근길 구간에 수양버들 커튼이 드리우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아침 해를 받아 투명해진 수양버들 커튼 뒤 탄천에 꽂혀 있는 한 배수구 끝 돌무더기에 앉은 민물가마우지를 찍는 게 일상이 됐다. 봄에 호흡기 질환을 일으킨다고 해서 수양버들을 점점 쓰기 꺼리는 추세라 물가 근처가 아니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도심 한가운데 엉뚱하게 있는 수양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크기가 좀 크다면 더운 지방의 후추나무 같은 느낌도 난다. 가로수나 정원수로 쓰이는 이 나무의 다양성이 적어서인지 이런 엉뚱함이 도시 경관을 다채롭게 하는 것 같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이해인은 조경설계사무소 HLD 소장이다. 디자인을 통한 주장과 혁신이라는 철학 아래, 공간적 문제와 도전 과제에 대한 핵심적 개입 제공을 목표로 한다.
[나의 식물에게] 나의 디자인 중심
내게 식물이란 석재, 목재, 철재, 콘크리트 등과 더불어 조경 디자이너로서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소재 중 하나다. 다른 모든 소재가 질감, 무게감, 형상 등이 매우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듯이, 식물도 마찬가지로 땅에서부터 줄기가 하나 혹은 여러 개가 뻗어 올라가고 그 가지들을 따라 수많은 녹색의 잎이 붙어 있고, 그 형상, 크기, 질감, 색상 등이 다양한 소재일 뿐이다. 포장과 시설물로서의 식재 포장 설계, 시설물 설계는 소재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공간의 구성 요소로서의 분류 체계다. 하지만 식재 설계는 소재에 의해 분류된 설계 단계다. 실시설계 도면 작성을 위한 과정과 시공성을 고려한다면 식재 설계가 분류된 방식을 이해하겠지만, 디자인 단계에서 식재 설계를 별도의 단계로 분류하고 접근하는 방식이 유효한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잔디는 석재, 콘크리트, 벽돌 등과 함께 바닥을 표현할 수 있는 포장재가 되기도 한다. 나무 9주가 만들어내는 공간과 퍼걸러의 캐노피가 만드는 공간 모두 위요된 쉼터를 형성하듯이 나무는 때때로 퍼걸러와 견줄 수 있다. 다만 포장 및 시설물의 기능과 표현하고자 하는 분위기에 따라 어느 소재를 선정하는 것이 설계에 적합한가를 고려하게 되며, 이에 따라 콘크리트 포장과 철재 캐노피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잔디와 나무를 심기도 한다. 따라서 식물이 조경설계의 필수는 아니라고 본다. 대학원 시절 조경가 마사 슈워츠(Martha Schwartz)의 설계 수업을 수강했는데, 그 수업의 주제가 ‘도시의 인프라스트럭처 설계를 통한 도심 재생’이었고 전제 조건은 식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굳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했고, 수업을 들으며 식물을 배제한다는 것이 과감한 시도라 모종의 의구심을 가졌지만 그 수업은 조경가로서의 관점을 결정짓게 만들어준 인생 터닝 포인트와 같은 시간이었다. 글로는 어떻게 설명해야 당시의 내 감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식물이 나의 손에서 없어지고 나니 주어진 대상지 본연의 가치와 사용자의 경험에 대해 더 많은 스터디를 하게 됐으며, 내게 조경이라는 분야가 예술이라는 분야와 더 가까워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김태경은 고려대학교에서 생태공학을, 하버드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미국과 한국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2017년부터 얼라이브어스를 운영하고 있다. 디테일과 식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다듬어진 공간의 미감에 주목한다.
[나의 식물에게] 조경가와 식물, 조경가의 식물
독특한 디자인 소재 “식물이 없는 공간도 정원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질문의 본질은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더 좋은 정원’ 혹은 ‘더 좋은 조경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각종 도시 환경 문제와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 현 인류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공간을 만드는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존재일까.’ 이에 대한 답은 ‘조경가가 만드는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당위성에 대한 질문을 통해 명확해진다. 인류가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로 번창하면서 만들어 낸 도시, 공원, 광장, 정원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 공간을 바라보는 조경가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조경가가 만드는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조경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고민과 더불어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조경인으로서 두 가지 중요 포인트를 담을 수 있다. 첫째 생태적으로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둘째 미적으로 가치 있으며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쯤 되니 본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능해진다. 첫째로 생태계 일부로서의 식물이고, 둘째로는 디자인 소재로서의 식물이다. 다시 말해 조경가에게 식물은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디자인 소재 중 하나다. 살아 있는 디자인 요소 식물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며 중요한 특성은 살아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살아 있기에 번식하고, 군락을 이루며, 병들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다른 디자인 소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개념인 생육 환경, 서식처를 디자인에 적용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겨준다. 이 개념은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식물을 관찰함으로써 오랜 세월을 거쳐 터득되어 왔다. 윌리엄 로빈슨에서부터 칼 푀르스터, 리하르트 한젠, 우르스 발저, 피트 아우돌프, 카시안 슈미트까지 자연 속에서 식물이 어떻게 살아가고 번식하며 적응하는지 관찰하고 실험하며 디자인에 적용해왔다. 식물의 개체와 군락이 스스로 번식하며 조화를 이루는 방법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생육 환경 및 서식처 특성을 파악해 그에 적합한 식물을 바르게 조합해 식재하는 것은 기후위기 시대 속에서 조경가가 만드는 공간이 생태적으로 건강한 환경으로 거듭나는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지속가능한 디자인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식물은 살아있기에 성장한다. 식물은 키가 자라고 부피를 늘리고 생육 영역을 넓히면서 경관을 변화시킨다. 이는 디자이너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식물의 생장은 평면상에서 식재 위치, 간격, 밀도 등 많은 고려 사항을 만들어낸다. 입면을 생각하면 더 복잡해진다. 수종마다 유전적으로 정해진 수고와 초장, 가지치기와 적심을 통해 유지 가능한 수고와 초장, 꽃이 피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초장 등. 식물은 생존을 위한 번식 과정을 통해 계절마다 모습을 변화시킨다. 식물은 지구상에서 좀 더 오래, 넓은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새와 곤충을 유인한다. 꽃은 벌, 나비, 새가 날아들도록 하기 위해 더 크고 아름다운 형태와 색채를 만들어 낸다. 눈에 띄기 위해 꽃대를 높게 솟아올리기도 하고 꽃 개체 수를 늘려 수정 확률을 높이기도 한다. 바람에 잘 흔들리는 구조를 택해 자연 현상을 이용하고 향기를 통해 유인하기도 한다. 꽃의 형태(꽃송이의 형태), 크기, 꽃대 구조와 높이, 색, 밀도, 꽃이 피는 시기, 열매 색과 형태 등은 식재 디자인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시간이 만들어 내는 찰나의 경관은 그 시간과 장소에만 존재하는 아쉬움이 되지만 그래서 감동을 배가시킨다. 그 외에도 상록성과 낙엽성, 1년생과 다년생 등 생육 습성, 단풍과 낙엽과 같은 계절 변화(온도)에 대한 적응 등 식물 고유의 특성은 조경가의 공간을 다른 분야 디자이너의 공간과 구분하게 한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박주현은 서울여자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더 올림 플라워와 가든 스튜디오(The Ollim Flower&Garden Studio)에서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는 정원을 중심으로 실내외 공간의 기획, 설계, 시공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나의 식물에게] 식물의 가치를 만드는 법
직립형 느티나무를 찾아서 광화문광장 공사가 한창이었을 때 CA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CA조경)는 설계 의도 구현이라는 용역으로 공사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조용준 소장은 수목 답사에 참여하지 못할 때마다 팀원 중 한 명을 번갈아 답사를 보냈고, 나 역시 팀원으로서 서울시 공무원, 공사 감리 담당자, 식재 공사 담당자와 함께 지방 곳곳을 돌아다녔다. 2021년 12월 23일, 충청북도로 답사를 갔다. 광화문광장 설계 도서를 작성할 때에도 수목 농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시공 단계에서 수목 농장을 방문한 건 처음이었고 전문가들이 나무를 선별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먼저 서울시 공무원이 도면과 자재수급현황표를 보고 오늘 선별해야 할 나무의 수종과 규격을 파악했다. 그 다음 식재 공사 담당자가 농장주에게 전화를 걸어 방문 허락을 받고 해당 농장을 찾아갔다. 농장에서 괜찮은 나무를 발견하면 둘레를 재서 규격을 확인하고 설계사에게 설계 의도에 적합한 나무인지 확인했다. 특별한 이견이 없으면 나무를 끈으로 묶어 다른 현장에 팔리지 않도록 표시를 해놓았다. 이때 전문가들이 좋은 나무를 판별하는 기준은 나무의 수형이었다. 농장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수형이 아름다운 나무를 발견하면 모두가 “이 나무 참 잘생겼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나무가 광화문광장에 식재될 만한 나무인가”라는 물음에는 조금씩 의견이 달랐다. 서울시 공무원은 공기에 차질이 없게 수급 일정을 맞출 수 있는 나무가, 공사감리 담당자는 수피에 상처가 없고 옹이가 없는 깨끗한 나무가, 식재공사 담당자는 규격에 맞는 나무가 좋은 나무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어떤 것을 기준으로 좋은 나무를 선별해야 했을까. 그 답을 2022년 2월 15일 전라북도로 답사 갔던 날 찾았다. 조용준 소장은 내게 직립형 느티나무를 찾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잎이 높은 지점에서부터 나고 수관 폭이 좁은 느티나무를 구해오는 것이 요구 사항이었다. 수목 답사에 참여했던 다른 관계자는 그런 나무는 없다며 차라리 다른 수종으로 변경하라고 말했지만, 조용준 소장은 직립형 느티나무를 본 적이 있다고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직립형 느티나무를 고집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광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주기 위해 느티나무여야 하고, 멀리서도 광화문이 보여야 하기 때문에 직립형이어야 한다. 직립형 느티나무는 식재 담당자의 수소문 끝에 발견됐고, 지금은 해치마당과 광화문광장을 잇는 화강석 스탠드 일대에 식재되어 있다. 좋은 나무란 무엇이며 좋은 나무를 고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광화문광장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배운 교훈은 단순하다. 수형이 아름다우면서도 설계가의 의도를 구현해낼 수 있는 나무가 좋은 나무이며, 좋은 나무를 찾기 위해서는 발품을 많이 파는 수밖에 없다. 직립형 느티나무는 없다고 말렸던 관계자의 말에 더 이상 발품을 팔지 않았다면, 광화문광장 설계 의도를 구현할 수 있는 좋은 나무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김수린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과 조경을 복수전공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CA조경기술사사무소에 입사해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 디지코 KT 기본 및 실시설계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실무를 익혔다. 2022년 LH 작가정원으로 정원설계 활동을 시작했고, 2023년 순천만국가정원에 LH 공공정원을 조성했다.
먀오징 강
중국 상하이에서 북서쪽으로 20km 떨어진 쿤산(Kunshan) 시는 오래전부터 물이 풍요로운 도시였다. 대규모의 운하로 인해 도시 전체 면적 중 물이 차지하는 면적이 8,000헥타르에 달하는데, 이는 쿤산의 주요 산업이 관개 농업에서 첨단 기술을 지닌 혁신 산업으로 전환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덕분에 혁신 산업이 차지하는 GDP 비율이 70%까지 증가했다. 쿠이레이 호수(Kuilei Lake)와 구시가지 사이에 위치한 쿤산 서부 지역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남북으로 이어진 축은 센트럴 호수의 소매상점 센터, 산림 공원, 남부의 스포츠와 상업 센터 등 다양한 공공 공간을 연결한다. 산림 공원의 북쪽에 위치한 양청 호수 동부 생태 통로(Yangcheng Lake East Ecological Corridor)는 쿠이레이 호수와 구시가지를 이어준다. 쿤산 지역 생태 축 일부인 먀오징 강 중앙 수로(Miaojing River Central Water Corridor)는 상수도 시스템을 지니고 있어 쿤산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상수도를 대신할 새로운 배관 시스템이 마련되었고, 2016년 지방 정부는 먀오징 강의 공공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마스터플랜 공모전이 개최했고, 플랫 스튜디오의 설계안을 공모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후 플랫스튜디오와 현지 엔니지어, 생태학자로 구성된 디자인 팀을 결성했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글 PLAT Studio Landscape Architecture PLAT Studio Design Team Liao Fred, Lan Shih-Lin, Wang Kit, Kao Maggie,Sophanut Pao, Tang Angela, Waiyasith Looknum, Qin Xiaoqing, Sui Tiger, Wang Daniel, Sun Yinuo, Li Xiangyu, Soh Iris, Ortiz Katrina, Orchard Ellen, Liu Can, Gwise Camille, Liu Roulin, Yang Vera, Wei Pan, Miao Qianhu, Prostak Daniel Ecological Consultant Great Ecology Client Kunshan City Construction Investment DevelopmentCompany Location Kunshan, China Area 600,000m2 Completion 2022 Photograph ZHIYI Photography, KCID, PLAT Studio 플랫 스튜디오(PLAT Studio)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본사를 둔연구 중점 디자인을 지향하는 도시계획, 조경설계사무소다. 조경과 도시, 연구와 디자인 프로세스를 통합하고, 디자인을 환경과 사회 체계를 구성하는 일이라 생각하며 지속가능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상지의 역사와 문화를 설계에 반영하고, 대상지가 가진 제한 요소에 대한 혁신적 접근법을 고안해 많은 사람이 찾는 장소를 조성하고자 한다. 대규모 도시 공공 공간, 지역 및 도시 공원, 캠퍼스 등 도시 스케일부터 작은 정원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벤짜끼띠 공원
담배 공장에서 도심 공원으로 태국 방콕 시내의 중심 클롱 또이(Khlong Toei) 지역에 있는 대상지는 태국 재무부 소유의 담배 공장이었다. 1991년 12월, 지방 정부가 공장 이전을 승인하고, 빈 부지에 20만m2 규모의 워터파크와 9.8만m2(2004년 완공)의 벤짜끼띠 공원(Benjakitti Forest Park)(2016년 완공)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19년에는 태국 시리낏 왕비(Queen Sirikit)의 탄생 9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벤짜끼띠 공원 2단계 설계(2021년 6월 완공 목표)를 위한 공모전을 개최했다. 대상지는 밀도 높은 주거지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벤짜끼띠 공원은 인근에 거주하는 약 25만 명의 주민과 수천 명의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공공 녹지 공간으로 구상됐다. 공모에 6개 국제 디자인 팀을 초청했으며, 투런스케이프(Turenscape)+아르솜실프 커뮤니티 및 환경 건축(Arsomsilp Community and Environmental Architect) 팀의 제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대상지의 현재와 과제 차오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 삼각주에 위치한 방콕은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로 1,050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 가량으로 몬순 기후에 속한다. 본래 대부분의 도시 지역이 습지였으나, 농업 관개를 위해 운하를 설치하고 지하수를 활용하며 점점 육지화가 됐다. 과도한 지하수 추출은 심각한 지반 침하 현상을 초래했고, 지구 온난화와 부적절한 도시 배수 인프라의 영향이 더해지며 홍수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방콕에는 공공 공원이 세 곳 뿐이었고, 녹지 공간은 고도로 파편화되어 활용도가 낮은 상태였다. 방콕의 복잡한 생태 환경과 문화적 맥락도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서쪽의 고속도로는 대상지와 인근 커뮤니티를 단절시켰다. 동쪽에는 인공호수, 남쪽에는 병원, 호텔, 시리낏왕비국립컨벤션센터가 있다. 북쪽 배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은 도시 유출수와 하수로 오염된 상태였다. 대상지는 단층 창고와 포장면으로 덮여 있으며, 네 개의 건물을 제외한 모든 구조가 철거되면서 대량의 건설 폐기물이 발생했다. 대상지에는 91종, 865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수목 대부분이 보행로를 따라 자라고 있었는데, 그중 무늬벤 자민고무나무의 단단한 뿌리가 포장면 안쪽을 파고 들고 있었다. 이 나무를 보존하면서도 계획에 맞는 기능 적 특징을 살리는 계획이 필요했다. 프로젝트 감독인 태국 왕립 육군이 조경 프로젝트를 관리해본 경험이 적다는 것을 고려해 가급적 시공하기 쉬운 설계를 해야 했다. 예산이 넉넉지 않아 벤짜끼띠 공원 1단계 유지·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반면교사 삼아 2단계 공원 부지의 유지·관리 비용을 줄이는 방법도 고안해야 했다. 목표 대상지와 밀집된 도시 환경에 야기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체적인 생태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중앙 공원을 구상했다. 변화하는 몬순 기후에 대한 회복 탄력성을 갖출 수 있도록 공원이 197,500m3의 우수를 저류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덕분에 공원은 도시 하수도 시스템으로 우수를 배수하지 않고도 10년 주기 홍수를 견딜 수 있게 된다. 더불어 5등급 물을 3등급 물로 정화할 수 있는 여과 시스템을 구축하고, 숲, 풀, 습지로 구성된 생태계를 조성해 토착종과 야생 동물의 서식처를 마련했다. 문화 서비스 증진을 위해 시민들이 일상적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대규모 공공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다. 전략 1. 모듈형 다공성 스펀지 습지 습지는 홍수와 가뭄 예방, 토양과 수자원 보존, 생물 다양성 유지, 휴양과 관광 등에 기여하는 중요한 시스 템이다. ‘다공성’을 강조한 설계로 경관생태학 원칙에 입각해 회복탄력성이 있고 물과 섬이 얽힌 스펀지 습지 시스템을 구축한다. 우선 간단한 절토와 성토를 통해 수백 개의 나무 섬으 로 구성된 네 개의 호수(습지)를 조성했다. 습지는 얕은 계단식 연안을 가진 호수와 좀 더 깊은 코어 영역을 가 진 호수로 나뉜다. 기존 식생에 공사가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섬의 직경을 대상지에서 가장 많이 관찰되는 수목 캐노피인 6m, 12m, 25m를 섬의 직경 으로 설정하고, 각 섬의 중앙에 나무를 그대로 보존했다. 표준화된 공사는 단단한 점토 표면의 토양을 일련의 촉촉한 해면질 생물 서식지로 바꾸었고, 물은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을 촉진하는 매개체가 됐다. 이 호수 는 우수를 저류할 뿐 아니라 수위 변화에 따른 다채로 운 수생 서식지를 형성한다. 얕은 계단식 연안은 공원 북쪽과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놓인 L자형 선형 습지와 연결되는데, 이곳에서 운하의 물이 유입되어 정화되는 일일 정화 용량은 8,152m3다. 전처리된 오염수는 L자형 표층 유수 습지 와 지하 유수 습지로 유입되어 표고 차에 의해 동쪽에 서 서쪽으로, 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간다. 폭기(산소 공급을 통한 정화), 정수 식물 및 수중 식물에 의한 정화, 미생물 분해, 생물학적 포식 등 일련의 정화 과정을 거 쳐 물 속 오염 물질의 농도가 크게 감소하게 된다. 질소와 인 등 물속에 든 부영양화 물질은 비료로 흡수되어 습지 작물과 농작물의 성장에 도움을 주고 자급자족의 선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몇몇 창고는 스포츠 센터와 에코 팔레트 아일랜드로 재설계해 울창한 녹색 건물로 바꾸었다. 전략 2. 적은 공사비와 유지·관리 비용을 고려한 ‘지저분한 자연’ 적은 예산과 짧은 공사 기간을 고려해 기존 고속도로를 공원 동선 시스템의 골격으로 활용하고, 기존 수목과 지하 공간을 최대한 그대로 유지했다. 또한 구조물을 철거하면서 발생한 콘크리트 잔해를 나무 섬의 기슭과 경사면 또는 공원 포장도로에 사용하는 등 대상지의 기존 자재를 공원 설계에 활용했다. 이러한 모듈형 설계안은 굴삭기 한 대로도 쉽게 시공할 수 있고, 숙련된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그늘을 드리우는 토착 수종을 주요 수목으로 정해 나무 섬 식재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했다. 다양한 미시적 환경을 갖춘 지형에 씨앗을 뿌리고 묘목을 심어 유지· 관리가 적게 이루어지더라도 반자연적 식물 군락으로 진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공원은 장마철 동안 우수를 최대 20만m3까지 저류할 수 있어 건기에 최소한의 관개와 유지·관리만으로 토착 식물 군립이 자립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전략 3. 접근성 및 몰입형 여가 경험 개선 공원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고 공원과 주변 커뮤니티, 녹지 공간의 연결성이 강화되도록 나무 캐노피 사이를 관통하는 스카이워크를 놓았다. 스카이워크는 수십 년 동안 도로로 인해 단절됐던 공원을 하나로 이어줄 뿐 아니라 야생 동물에 대한 교란을 줄이고, 열대우림 속에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주요 도로를 보존하고 재사용했는데, 도로 중앙에 자전거 도로와 보행자 도로를 분리하는 투수성 생물 습 지와 화단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본래 트럭 통행을 위해 설계된 넓은 도로가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규모의 길로 바뀌었다. 인공 습지에서 도시의 자 연을 몰입감 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습지 가장자리를 따라 다양한 산책로를 설계했다. 공원 중심부의 넓은 잔디밭과 원형 극장, 개조된 박물관 옆의 논, 다수의 지하 공간은 방콕 시민과 방문객의 다양한 여가 활동을 위한 무대가 된다. 성과와 반성 벤짜끼띠 공원은 매우 촉박한 일정으로 조성됐지만 큰 성공을 거뒀다. 지난 여름 방콕의 많은 지역이 홍수로 침수됐지만, 이 공원과 인근 지역은 물에 잠기지 않았다. 수질 정화 습지가 잘 작동하고 있으며, 건기까지 습지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양한 조류와 야생 동물이 공원에 서식한다. 가장 놀라운 성과는 이 자연 재생 시스템을 갖춘 녹지가 방콕 도심 의 가장 큰 공원이 되어 매일 수만 명의 방문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점이다. 벤짜끼띠 공원은 조깅, 자전거 타기, 가족 모임, 학교 입학식, 피크닉, 데이트, 웨딩 촬영 등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공공 장소이자 태국 수도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거듭나고 있다. 글 Turenscape Landscape Architecture Turenscape Team & Partners Arsomsilp Community and EnvironmentalArchitect of Thailand Client Finance Ministry of Bangkok, Thailand Location Khlong Toei, Bangkok, Thailand Area 52.7ha Completion 2022 Photograph Turensape & Arsomsilp Community andEnvironmental Architect, Pierrick 투런스케이프(Turenscape)는 1998년에 위쿵젠(Yu Kongjian)이 설립한조경설계사무소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500여 명이 조경설계, 건축설계, 도시설계, 환경설계, 엔지니어링 등 다양한 스케일과 범주의 프로젝트에서 최신 기술과 친환경적 설계를 결합하는 혁신적이고 회복탄력적인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자연, 인간, 영혼의 통합은 투런스케이프의 기저를 이루는 설계 철학이다. 투(tu)는 흙, 땅 또는 대지를 런(ren)은 사람, 인간 또는 인류를 의미한다. 즉 투런(turen)은 땅과 사람, 그리고 대지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뜻한다. 설계 철학과 사명에 담긴 의미를 바탕으로 대지와 인간의 조화를 창조하고 미래를 위한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김동훈
『순수의 시대』를 쓴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이 정원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워튼이 쓴 『이탈리아 빌라와 그 정원(Italian Villas and Their Gardens)』은 잡지사의 의뢰를 받아 수개월 동안 이탈리아 현지를 눈으로 읽고 발로 걸으며 취재해 쓴 정원 안내서다. 출간된 지 120년이 지난 지금도 이탈리아 정원뿐 아니라 서양 정원에 관한 고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책이, 지난 2023년 11월 한국 최초로 완역됐다. 번역가는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연구관 겸 공보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동훈.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법률가가 정원 서적을 번역했다니, 보통 정원하면 꽃이 화려한 영국 정원에 관심을 둘 법한데 비교적 단조롭게 보일 수 있는 이탈리아 정원이라니. 의문을 품고 인터뷰 장소인 헌법재판소 공보관실에 들어섰다. 책장 위 줄지어 선 토기 골동품과 벽을 빼곡히 채운 (로마의 풍경을 담은 걸로 추정되는) 사진과 태피스트리가 눈에 띄었다. 책장 한 칸은 이탈리아를 비롯해 로마에 관한 책이, 냉장고 옆면은 해외여행을 다니며 모은 게 분명한 마그넷이 빼곡했다. 무언가에 관심이 생기면 그에 대한 역사, 예술, 문화를 깊게 탐구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원이 궁금하다면 무작정 식물을 사 심기보다는 정원의 뿌리를 파헤치고 이해하기를 원하는 사람. 어쭙잖은 짐작이었는데 빗나가지 않았다. “프랑스식 정원의 아버지가 이탈리아 정원이고, 영국식 정원은 프랑스식 정원에 대응하며 만들어졌죠. 결국 영국식 정원을 이해하려면 프랑스식 정원을 알아야 하고, 프랑스식 정원을 알려면 이탈리아식 정원을 알아야 해요. 이를 모르는 채로 정원을 탐구하려다 보니 자꾸 멈칫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 책을 만나는 순간 그 관계가 명쾌하게 이해됐어요.” 어제는 뭐했나요? 출근해서 여러 가지 업무를 했어요. 아마 자세한 얘기는 재미없을 겁니다. 퇴근 후에는 가족들과 늦은 저녁을 같이 먹고, 아이들과 살금살금 배구-탁구 게임을 했어요. 두 가지 종류의 귤을 먹으며 맛을 비교하고,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요. 헌법연구관, 공보관이라는 직업을 낯설어하는 독자가 많을 거예요. 평소에 어떤 일을 하나요. 같은 법조계에 있어도 헌법연구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일 겁니다. 헌법연구관은 헌법재판소에 사건이 들어오면 헌법적 쟁점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판결문 초안을 쓰는 일을 합니다. 재판을 하는 헌법재판관을 뒤에서 보조하는 일을 하는 것이죠. 본래 헌법 연구관인데 지금은 공보관 보직을 맡고 있습니다. 공보관은 대언론 관계 일을 합니다. 헌재 결정이 나올 때 국민에게 그 내용과 취지가 잘 알려질 수 있도록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기자에게 설명하는 역할이 제일 큽니다. 그밖에도 헌재 관련 이슈가 있을 때 언론 대응을 하죠. 다른 기관에서는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보통 대변인이라고 부릅니다. 정원 가꾸기를 취미로 삼고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깊게 연구하는 일은 드물죠. 줄곧 법과 관련된 일만 해온 사람이 『이탈리아의 빌라와 그 정원』(글항아리, 2023)을 번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기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정원에 언제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요. 어렸을 때 주말마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갔어요. 냇가에서 놀고 농사일을 거들었는데, 그때부터 전원에 대한 사랑이 있었나 봐요. 결혼 후에는 꽤 큰 규모의 텃밭을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농사일만 하다가 점점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텃밭 한편에 정원을 꾸렸죠. 몇 년 전에는 50년도 더 된 할머니 댁을 새로 짓게 됐는데, 그곳에 집과 정원을 나름대로 설계하고 직접 만들게 됐어요. 저뿐 아니라 가족 모두의 추억이 많은 곳이라 가능하면 집의 원 형태를 유지하고 옛 나무도 살리려 했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같은 자리에 같은 수종의 나무를 심었고요. 그 과정에서 정원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꽃나무를 적당히 심으면 예쁘기야 하겠지만 나만의 특색이 있는 정원을 만들고 싶었죠. 법을 전공해 업으로 삼고 있지만 직업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일하는 틈틈이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여행도 하며 여러 취미를 즐겼는데, 그중 제게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준 게 정원이었어요. 로마대학의 방문학자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로마대학은 어떤 이유로 선택하게 됐나요. 연구 주제도 궁금합니다. 어릴 적부터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사랑이 컸어요. 그리스 로마의 자유롭고 당당한 사람들의 생각과 활동이 아주 인상 깊었어요. 헌법학 박사 논문 주제가 ‘한국 헌법과 공화주의’였는데, 공화주의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비롯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가장 관심 있는 분야와 관련한 내용으로 논문 주제를 정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유학을 갈 때도 아무도 가지 않는 이탈리아를 선택했어요. 보통 법과 관련해 유학을 떠나면 미국이나 독일을 가거든요. 그 결과로 ‘이탈리아의 헌법과 헌법재판제도’라는 논문을 쓰게 됐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위대한 로마법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엄청나요. 흔히 이탈리아 하면 예술, 관광, 패션의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법학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국가입니다. 이탈리아 건축과 정원은 어떤 식으로 공부했나요. 무언가를연구하러 간 곳에서 또 다른 분야를 깊숙이 탐구하는 게 대단하게 느껴져요. 어디에서 원동력을 얻나요. 특별한 방법은 없었고, 관련 책을 폭넓게 깊이 읽었습니다. 이탈리아는 건축과 정원에 관심이 많은 나라이기에 관련 자료가 아주 풍부했습니다. 길가다 마주치는 서점에 들어가도 정원을 주제로 한 책이 가득했고, 아름답고 세련되기까지 해서 보기만 해도 좋았죠. 값이 비싸더라도 예쁜 책을 소장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커서 구매를 망설이지 않았어요. 유럽에서 아름다운 책을 많이 본 경험 때문인지 『이탈리아의 빌라와 그 정원』 번역서도 가능한 아름답게 만들어 소장 욕구를 돋우는 책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다행히 출판사의 의견도 같았고요. 정원을 좋아하니 공부도 즐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거나 직업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관심으로 공부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건축과 정원도 전체 사회의 한 부분이고 결국 사회 현상이 반영됩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면 자연스럽게 건축과 정원 공부에 도움이 됐습니다. 이탈리아식 정원은 중세를 탈피해 새 시대를 연 르네상스의 정신적‧물질적 산물입니다. 르네상스에 대해 이해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죠. 그러면 정원을 볼 때 단순한 감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지적 아름다움까지 느끼게 돼요. 저는 이탈리아 정원하면, 회백색의 건물과 진초록 수벽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사실 저도 처음에 이탈리아 정원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서양 정원의 양대 산맥이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탈리아식 정원은 어디에 자리매김하면 되는 것인지, 또 이탈리아식과 프랑스식이 비슷해 보이는데 뭐가 다른 건지 몰랐죠. 그런데 『이탈리아의 빌라와 그 정원』의 원서를 읽으며 이탈리아 정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죠. 말씀한 것처럼 오래된 회백색 건물에 잘 깎은 초록 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이 이탈리아 정원의 이미지예요. 그 단순한 이미지 속에 엄청난 것들이 숨어 있습니다. 책에서 이디스 워튼은 이탈리아 정원은 대리석과 물, 상록 식물이라는 간단한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지 미스터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받은 감동과 깨달음을 설명하며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던 것이죠. 정원은 태생적으로 건축과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죠. 건축 양식과 주거 방식에 따라 변화해 왔으니까요.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정원을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해요. 한국 사람도 이제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흔히 옛날에는 먹고 살기 급급해 정원 가꿀 여유가 없었다는 말을 하잖아요. 자투리땅이 있으면 채소를 키우고 콩을 심어야지 정원을 가꿀 상황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정원이 별로 없어요. 서민은 물론이고 형편이 넉넉한 집이나 양반집에도 정원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를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 이탈리아 부유층이 빌라를 지을 만큼의 부富가 우리에겐 없었어요. 둘째는 유교적 금욕주의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왕이 창경궁 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구리로 된 수로로 만들려고 하자 신하들이 반대합니다. 왕이 검소한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백성들이 사치에 빠진다는 거였죠. 즉 아름답게 꾸미고 즐기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거부감이 있었어요. 현대에 들어 많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마음 속 깊은 곳에 금욕주의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과거 조선은 도시화가 안 된 국가였으며 자연과 전원을 가까이 두고 있었기에 정원의 필요성을 덜 느낀 것 같습니다. 한국의 자연이 상당히 아름다운 편이기에 굳이 정원을 가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이런 과거와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나아갈 길이 보일 거예요. 옮긴이 해제에 썼듯이, 저는 우리 정원이 ‘한국 정원’ 또는 ‘한국식 정원’으로 재탄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 땅에 만들었다고 다 한국 정원이 아닙니다.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예컨대, 전원주택 마당에 까는 초록 잔디밭은 과연 우리 정원의 모습일까요? 아파트 단지에 흔히 보이는 가지런하고 둥글게 깎아 놓은 철쭉이나 회양목은 우리의 것일까요? 전통 정원에 없던 요소이니 배척하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적어도 그런 요소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활용할 때도 우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언젠가 누가 봐도 한국적이면서 누군가에게 확연히 아름다운 한국식 정원이 탄생하기를 기대합니다. 수많은 책 중 『이탈리아의 빌라와 그 정원』을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나요? 유학 시절 이 책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다른 정원 서적에서 이 책이 종종 언급되기에 원서를 구해 읽었는데, 첫 문장을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탈리아 정원에는 꽃이 없다고 하면 과장이리라.” 대가만이 쓸 수 있는 첫 문장이었어요. 이탈리아 정원을 여러 곳 다니며 이상하게 느낀 점을 한방에 명쾌하게 해결해주는 문장이었습니다. 보통 유럽의 정원을 상상할 때 푸른 잔디밭이 드넓게 펼쳐지고 장미와 수선화가 만발한 장면을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그런 정원은 프랑스, 영국, 독일 등 북부 유럽의 것입니다. 제가 이탈리아에서 본 정원은 달랐어요. 잔디밭도 잘 없고, 꽃도 별로 없고, 한여름엔 얼마나 덥고 건조한지 나무가 다 말라죽을 것처럼 보였거든요. 당황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못 본 무언가가 숨어있는 건가, 다른 계절에 찾아오면 다르려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니 이탈리아 정원에는 꽃이 없고 초록으로만 구상하는 게 기본이더라고요. 처음엔 번역까지 할 작정은 아니었는데,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국 독자에게도 알리면 우리 정원 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했죠. “우아한 문체와 절제된 감상, 그리고 공정한 평가”를 이 책의 강점으로 뽑았어요. 번역 작업이 굉장히 까다로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책을 꼭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이기도 해요. 정원에 관한 웬만한 책은 모두 읽었지만 정원에 대한 감상과 평가를 적절한 비율로 다룬 책을 보진 못했거든요. 정원 설명서는 무미건조한 해설만 있기 마련이고, 정원 에세이에는 저자의 감상이 지나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정원을 모두 넘나들면서 통찰력을 보여주는 서술을 하는 책도 드물었고요. 반면 이 책은 우아한 문체와 격조 높은 감성을 보여줍니다. 저자만의 개인적이고 가벼운 감성이 아닌 거죠. 이탈리아에 오래 머물며 살아온 사람만이 아는 애정도 살포시 깃들어 있었고요. 20세기 초를 전후한 구미 상류층만이 쓸 수 있는 내용도 많았습니다. 그만큼 마음의 부담이 컸습니다. 원전의 격을 훼손하지 않아야 하는데 제가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고민했고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도 직접 달고 직접 찍은 사진도 넣었고요. 책의 모든 주석을 직접 달려면, 건축 양식, 주거 방식, 역사, 언어학까지 전부 파헤쳐야 했을 것 같더라고요. 이디스 워튼이 대작가이자 정원 전문가이기에 책 자체가 서양 문화, 건축, 정원에 대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이미 전제로 하고 있어요. 책을 풍요롭게 읽기 위해서는 주석이 반드시 필요했죠. 사실 책에 실린 주석은 준비한 내용의 3분의 2가량에 불과합니다. 출판사와 역자 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오래 의견을 주고받았어요. 주석을 모두 달면 책이 너무 번잡해지고 원전을 훼손하는 느낌이 들 테고, 주석을 너무 줄이면 책을 이해하기 어려워지죠. 그 타협점이 지금의 형태입니다. 한 단락, 한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며칠씩 공부해야 할 때도 있었어요. 뉴턴이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죠. 이처럼 독자들이 홀로 공부하느라 고생하지 않고 일단 먼저 공부를 시작한 제 어깨 위에 서서 더 멀리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번역 작업을 할 때 가장 유의했던 점과 그 과정에서 느낀 매력이 있다면요. 1904년 출간되어 저작권이 오래 전에 소멸된 이 책을 왜 아무도 번역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는데, 번역을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됐어요. 영어를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탈리아어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하고, 이탈리아 정원들을 직접 가보고 또 정원을 직접 가꾸어본 경험이 있어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가보지 못한 정원에 관한 내용을 번역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묘사와 서술을 대충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정확히 번역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인터넷 시대이기에 구글 지도를 수없이 돌려보며 책에 묘사된 장면을 확인했지요. 역자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글은 생명력을 잃습니다. 물론 제가 원서의 깊이와 맛을 얼마나 잘 살렸는지 모르겠고 가끔 부끄럽기도 합니다. 번역을 하며 그리스 로마 고전을 줄기차게 번역해온 천병희 선생의 말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번역을 하냐는 물음에 그는 번역도 창작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우리말로 읽는 것이 열 배는 더 효율적이라고 답했어요. 번역은 새로운 문물을 가장 쉽고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창구입니다. 충실한 번역이 있을 때 이를 바탕으로 고유의 문화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저는 애매한 창작 논문 한 편보다 충실한 논문 번역 한 편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번역의 가치를 상당히 저평가하고 교수의 실적으로도 인정해주지 않죠. 번역을 통해 더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의 가치가 더 인정받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번역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다른 언어에요. 조경가 사이에서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조경’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왔어요. 책을 보니, 김동훈님은 조경가라는 단어를 기본으로 쓰되, 경관 건축가, 경관 정원가, 정원 건축가라는 단어를 적절히 섞어 사용했더라고요. 원칙적으로는 조경, 조경가란 단어를 채택했습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번역어이기 때문이죠. 필요한 경우에는 경관 건축가, 경관 정원가, 정원 건축가라는 말을 썼고요. 조경造景이라는 말을 그대로 풀면 경관을 만든다는 것인데, 의미와 간결성 측면에서 보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의 최선의 번역어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흔히 조경가를 단순한 정원 관리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죠. 조경이 대지를 다루고 설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거나 조경을 대체할 더 나은 용어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쉬운 대로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오렌지나무 화분이 가득 놓인 이탈리아식 정원과 집, 빌라 카스텔로 사진을 인상 깊게 봤어요. 화분은 정원을 꾸릴 만한 땅이 없는 사람이 식물을 기르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도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거대한 화분을 꽤 큰 규모의 땅에 열 맞춰 놓으니 그럴듯해 보이더라고요. 이탈리아 정원을 상징하는 나무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오렌지나무나 레몬나무는 이탈리아와 지중해를 떠올리게 만들죠. 그런데 오렌지나무는 따뜻한 곳에서만 살 수 있기 때문에, 나폴리 같은 이탈리아 남부라면 모를까 피렌체 같은 중북부에서는 겨울에 노지에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화분에 심어 봄이 되면 밖에 내놓았다가 늦가을이 되면 다시 레몬 하우스에 넣어 월동을 하게 하죠. 노지에서 자란 오렌지나무와 화분에 심은 오렌지나무의 느낌이 참 달라요. 화분을 활용한다는 발상 자체도 훌륭하고, 열 맞춰 질서정연하게 늘어놓은 것도 이탈리아인의 절묘한 감각인 것이죠. 게다가 이탈리아 토분의 질감과 색, 모양이 오렌지나무와 아주 잘 어울리죠. 토분의 경우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었어요. 모두 조금씩 달라 변화가 보이면서도 가지런히 놓음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조화와 질서를 이루죠. 한 아름 크기의 큰 토분은 수십만 원이 넘습니다. 이탈리아 정원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가 작은 소품에도 신경을 쓴다는 점이죠. 책에 소개된 정원 중 하나의 정원만 추천해야 한다면 어떤 정원을 뽑고 싶은가요. 빌라 란테(바냐이아)와 빌라 파르네세(카프라롤라)가 제일 인상 깊었어요. 로마 북쪽으로 고대 로마의 길을 따라 난 현대의 2차선 도로를 달리면 한 시간 만에 도착하는 곳인데, 빌라는 작은 마을 뒤편에 있습니다. 정원과 더불어 이탈리아의 숨은 매력인 소도시의 분위기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죠. “아 이게 이탈리아의 느낌이구나!” 하게 되는 곳입니다. 코모 호수의 빌라 발비아넬로도 좋았습니다. 코모 호수는 밀라노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가는 곳인데, 당일치기 하지 말고 꼭 2박 정도는 여유롭게 묵으며 아름다운 호수와 정원을 구경하길 바랍니다. 알프스 자락의 호수라 여름에는 아주 시원하고 쾌적한데, 아름다운 마을과 정원을 배를 타고 하나씩 찾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 정원 문화가 발달한 만큼 관련한 법령이 있나요. 정원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법령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고, 특히 경관에 관한 여러 법령이 자세하고 체계적입니다. 더구나 이탈리아 헌법은 “국가는 경관을 보호한다”는 조항을 명시적으로 두고 있죠. 정원은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원은 주거와 함께하기에 인근에 마을이 있기 마련이고, 정원이 아름다우려면 짝을 이루는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정원이 아름다워도 눈을 들어 멀리 봤을 때 이를 해치는 경관이 있다면 정원의 가치가 확연히 낮아집니다. 한국도 2007년 ‘경관법’을 제정했지만 큰 실효성이 없는 상태입니다. 경관에 대한 인식이 더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국제역사정원위원회가 1981년에 만든 ‘역사 정원에 관한 헌장(플로렌스 헌장)’이 있습니다. 서양 정원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피렌체에서 만들어졌죠. 역사와 정원의 특질이 잘 보존된 정원을 ‘역사 정원’이라 부르고, 이를 보존하고 복원하는 방법이 상세하게 쓰여 있어요. 우리도 앞으로 정원을 복원해야 한다면 꼭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만난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전망 좋은 방’(1989)에 당시의 정원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한 부분이 나옵니다. 마음 가볍게 천천히 음미하면 정말 낙원 같은 정원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또 영상미의 절정을 보여주는 영화 ‘그레이트 뷰티’(2014)에서 스치듯 나오는 정원들이 긴 잔상을 남긴 기억이 있어요. “가장 행복한 삶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저녁엔 책을 읽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는 소개 문구가 굉장히 낭만적이에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궁금해요. 정원과 관련해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지는 않나요. 마키아벨리는 정계에서 강제로 은퇴당한 뒤 자신의 시골 별장에 머물렀는데, 낮에는 잡다한 일을 하고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저녁이 되면 정복으로 갈아입고 책상에 앉아 옛 위인들과 마주했다고 해요. 그게 참 멋지게 느껴졌어요. 텃밭에서 가벼운 채소들은 다 키워봤고, 다음에 석류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요. 어릴 적 마당 있는 집에 살았을 때 봤던 석류나무의 아름다운 꽃과 이파리, 몽글몽글 풍요롭게 맺히는 빨간 열매가 지금도 눈에 선하거든요. 더구나 석류는 페르시아에서 왔다지요. 그 옛날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중국을 거쳐 한국에 자리 잡은 수목이라는 점이 참 매력적입니다. 몇 번 심어 봤는데 겨울이 지나면서 다 죽더라고요. 또 정말 꿈같은 이야기지만, 제 할아버지가 그랬듯 논에서 벼를 직접 키워보고 싶습니다. 내손으로 벼를 키워 밥을 지어먹어 보고 싶어요. 일과가 끝난 저녁에는 동서고금의 고전을 한 권 한 권 읽어나가고요. 논어, 한비자, 장자부터 아리스토텔레스, 단테까지 천천히 읽고 싶어요. 언젠가는 토스카나의 메디치 빌라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요. 이미 메디치 가문에 관한 글이 많지만, 그들이 위대한 업적을 어떻게 만들어 나갔는지 알기 위해선 좀 더 내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피렌체라는 도시에서의 공적, 사적 활동과 시골 별장에서의 휴식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그런 업적을 만들어낼 수 있던 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즈음이면 한국 정원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요. 정립된 이론을 바탕으로 멋진 한국식 정원을 직접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설계호원
자연의 평온 2023년 12월의 어느 날 사원 개별 면담 중 한 선임 디자이너가 물었다. “설계를 잘하고 싶은데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쉬운 물음이지만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일은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할 수 있겠지만, 설계를 잘하고 못하고의 판단 척도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 설계를 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의 디자인에 대해서 잘하고 못하고를 구분 지을 수 있을까. 목적 지향적인 단순한 가치를 오피스의 이상으로 두면 한계에 직면할 수 있다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에 모든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대지의 선물 9년 전, 조경설계호원(HOWON)(이하 호원)은 호수(湖)와 동산(園)을 담은 자연의 평온한 공간 조성이라는 다소 진부한 이름으로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과 함께 한 자연 공간,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장소 사이에서 많은 영역을 차지했던 자연의 물과 녹음의 동산은 우리의 삶을 조금이나마 평온하게 하는 대지의 선물일 것이다. 호원은 이렇듯 세상의 선물과 같은 존재로 미약하나마 존재하려 한다. 한 개인의 시작에서 우리의 시작으로 변한 지는 오래됐다. 오피스의 이름은 이름일 뿐, 그냥 불리기 편한 이름이면 그뿐이다. 허울 좋은 이름 대신 그 안에 담긴 선물처럼 본질을 추구하는 집단이 되고 싶다. 잘하고 못하고를 조경설계의 잣대로 들이대는 게 불편하지만 우리는 잘하며, 잘하고자 한다. 공공의 가치를 구현하다 설계사무소의 철학은 한 개인의 산물이 될 수 없다. 다양한 사고의 흐름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의 대상지 해석은 그 대상이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과 장소가 가지는 정체성에서 출발한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최종적으로 결과물에 대한 가치 발견과 평가로서 공공 가치에 우리의 작업이 필요했는지, 장소에 대한 해석을 잘했는지 생각해 본다.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조경이 가지는 공공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양한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를 시도하며, 성과를 보이고 있다. 남산예장공원 2015년 호원 창립과 함께해 온 중요한 프로젝트다. 조경설계사무소로서 무한한 자긍심의 공간이기도 한 예장공원은 호원의 처음과도 같은 장소로 우리가 바라보는 공공 도시 공간에 대한 해석 방법을 잡아가는 시작이었다. 청주 충혼탑 추모공원 마스터플랜 국내 600여 개가 넘는 충혼탑의 엄숙한 추모 공간을 일상의 시민 공간으로 환원하고 추모의 기념적 공간과 도시의 상징 공간으로 장소의 가치를 재해석했다. 2023년 3월 공모에 당선됐으며 이제 설계 막바지를 바라보고 있다. 부산유엔평화공원 화합의 뜰 부산유엔평화공원 화합의 뜰은 메모리얼 공간의 정면성을 확보하며 공원의 사회적 공공 가치 구현을 위한 도시 인프라로서 기능을 수반하는 중첩의 공간으로 계획했다. 2023년 공모에 당선되어 설계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포기하지 않는 열정 우리는 모든 조경의 영역에서 활동한다. 다양한 공모에서 낙선의 쓴맛을 보고 있다. 당선안과 낙선안에 대한 해석과 가치를 논하자면 어려울 것이다. 낙선안에 우리가 부족했던 점이 보이기도 하며, 다른 사람과의 대상지 해석의 차이를 되새겨 보기도 한다. 사무실의 모든 구성원이 공모에 참여한다. 오피스 운영 차원에서 보면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는 것을 인정한다. 공모 운영에 적합한 구성원이 한 팀이 되어 진행하는 것이 보편적 방법일 수 있지만, 설계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물론 미흡한 부분으로 인한 문제가 수시로 발생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조직에서 집단 지성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모든 공모에 참여한다. 현장에서 시작하는 디자인 설계는 현장의 모습을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수히 많은 현장의 조건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협의 과정이 조성될 공간의 잠재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동주택 프로젝트에서부터 경험하기 어려운 골프 코스 경관 설계와 클럽하우스 등에서 수시로 진행되는 현장 답사를 통해 디자인과 시공의 간극을 좁히며, 조경가의 생각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임을 피부로 접하며 깨닫고 있다. DMC SK 스카이 뷰 아이파크 공동주택 조경은 조경가의 능력과 의지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킨다. 각종 규제와 많은 전문가 및 관계자의 다양한 의견은 디자인의 한계를 만들 수 있으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해석을 만들기도 한다. 이해 관계자를 설득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어떠한 프로젝트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문제 해결 능력이 필요하다. 자칫 편향된 설계의 방향을 보일 수 있는 설계 대상인 공동주택은 조경가를 훈련시키는 최고의 수단이자 대상이다. 덕평 H1 클럽하우스 실시설계를 참여한 클럽하우스 진입 공간의 경관 구역이다. 레저 및 여가 공간 설계는 디자이너의 눈높이를 크게 변화시키는 기회가 된다. 단정한 디자인, 세심한 디테일, 재료의 통일성, 시퀀스의 변화 등 다양한 툴을 이용한 시뮬레이션이 클라이언트 설득과 대상지 해석에 도움을 주었다. 여주 루트 52 코스 및 클럽하우스 골프 코스 경관 설계와 클럽하우스 조경설계를 진행했다. 토목 공사의 공정률이 어느 정도 진행된 대지의 모습을 보며 조경이 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미래를 함께 바라보며 호원의 구성원은 설계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다. 프로젝트 수행에서 업무의 편중이 발생하는 것이 국내 설계사무소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공모, 계획, 실시설계, 각종 제안서, 시각화 작업 등 설계의 세부 업무에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디자인 역량을 시험해 볼 수 있고 도전과 협력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팀 조합이 자유로운 그룹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우리는 독특한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표 소장 외 경력 15년 이상의 수석 디자이너 4명, 경력 3년 이상의 선임 디자이너 4명, 주임 디자이너로 이뤄진 원통형 구조다. 얼핏 보면 고인물이 모여 원통형 구조가 됐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의도된 디자인 그룹의 조직 구성이다. 10명 이상의 국내 설계사무소 운영 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과 디자인 인력과 규모의 확장성을 언제든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구성했다. 탄탄한 수석 디자이너 4명의 디자인 역량과 경험치는 프로젝트의 안정적 진행과 전문 기술을 담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별 디자이너와 일대일 그룹 구성으로 발전된 도제식 설계 교육을 운영한다. 설계사무소의 객관적 디자인 역량을 수치화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으나, 의사 결정의 객관성과 미래의 가치를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체계적인 운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운영과 관련해 동료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이를 통해 회사의 지속적인 노력에 모든 구성원 또한 함께하고 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유연한 경계 그룹별 성과 경쟁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룹 간 경계가 유연하게 구축되어 있어, 정보를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다. 유연한 일정 조율은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하게 되고, 팀원들이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게 된다. (곽민호 주임 디자이너) 우리의 프로젝트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에는 구성원 모두의 고민과 노력이 들어있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책임 디자이너를 정해 놓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각 프로젝트 담당자는 최상의 결과물을 위해 수시로 의논하고 대화한다. 그렇기에 너희 팀, 나의 팀이 아닌 우리의 프로젝트다. (김재욱 수석 디자이너) 전문적인 배움 프로젝트 진행이 안정적이고 전문적이라 느껴지는 까닭은 네 명의 수석 덕분이다. 사원 입장에서는 수석과 거의 일 대 일 팀 구성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덕분에 알음알음이 아니라, 제대로 배울 수밖에 없다. 옆에서 보고 듣는 간접적인 배움도 많지만, OJT 같은 직원 교육 프로그램이나 질문과 답이 오가는 시간에서 여느 사설 강의와 과외 못지않은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임모니카 선임 디자이너) 모두의 발전 나 자신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해 노력한다. 경력 디자이너로서 신입 디자이너가 업무 역량 및 경험의 부족으로 힘들어할 때 내가 가진 노하우를 알려줌으로써 모두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프로젝트가 이 사회에 이바지하기를 기원한다. (차윤철 수석 디자이너) 주도적인 디자이너 호원의 사람들은 평범하지만 살아있다. 디자인 그룹에서 디자이너에게 기대하는 무한한 능력은 개개인의 역량과 잠재력에 기대어 운영될 수는 없다. 프로젝트 운영 외에 각자의 주도적 참여를 다양한 방향성을 가지고 이끌어 내고자 한다. 월간 세미나와 문화데이, 필드 트립, 리프레시 투어는 프로젝트 업무 외에 조경가의 다양한 사고와 경험을 위해 시행하고 있다. 수석 디자이너가 하는 톱다운 방식의 도제식 교육 외에 모든 구성원이 참여해 강의와 개별 사내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수동적 태도를 지양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월간 세미나 월간 세미나를 통해 조경설계의 프로젝트 진행 외 필요한 부분을 회사 구성원 각자의 시선으로 공부하고 정리해 그룹 모두에게 강의하고 있다. 강의 후 서로 의견을 나누고 그 내용을 정리해본다. 길지 않은 이 시간이 조경이란 일을 하며 부족했던 부분이나 잘 알지 못했던 내용을 조금 더 편하게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직급 제한 없이 모두가 강사라는 이름을 달고 진행하는 세미나가 우리를 조금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가게 해준다. (김승인 수석 디자이너) 서로의 발전을 위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의 무기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장점은 빛을 발하지만, 그 빛 뒤에 가려진 약점들이 더 많다. 매달 월간 세미나를 통해 본인의 장점과 약점을 공유하며 강의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배우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프로그램 관련 세미나에서부터 재료, 시공 디테일, 식물 소재, 더 나아가 조경 트렌드와 미래의 조경 상에 대한 세미나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한자리에 모여 나누며 서로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김서하 선임 디자이너) 효율적 업무와 워라밸 네 개로 나누어진 팀은 각각 효율적인 일정 관리를 통해 합리적인 업무와 협업을 이루어 낸다. 더불어 유연근무제, 야근 사전 결제 시스템 도입은 실질적인 직원들의 워라밸 향상에 기여하며, 전반적인 직무 만족도를 높일 뿐 아니라 회사 내 탄력적이고 협력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김소라 선임 디자이너) 일과 삶을 공유하다 회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다. 일해서 돈 버는 곳. 하지만 일하고 돈만 버는 회사는 미래가 없으며 함께 바라볼 비전이 없으면 발걸음에서 점점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 일하며 발전하고 놀며 삶을 공유하는 재밌고 편한 회사가 좋다. 그래서 업무 시간은 너무나도 바쁘지만 리프레시데이와 문화데이, 필드트립을 진행할 때는 열심히 놀며 배운다. 매달 행사가 있는 셈이다. 모든 행사에는 구성원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하거나 가고 싶었던 곳에 간다. 좋은 장소를 보며 즐기며 경험한다. (홍지송 수석 디자이너) 조경설계호원(HOWON)은 사회적 공공 가치 구현을 위한 디자인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 모든 과정에서 도전과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상적 디자인 스튜디오를 구성하고자 조직의 체계와 운영을 중시한다. 디자인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활동을 섭렵하며 미래 지향적 디자인 오피스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1857년 뉴욕, 어떤 30대
에피소드 1 1857년, 35세(각주 1) 6월, 여름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서: 결국 잡지사가 문을 닫는다. 온갖 분야를 다 해보는 대책 없는 아들이 사업을 하겠다고 나서도 흔쾌히 지원해준 아버지께 죄송할 따름이다. 미국 사회에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선 출판사가 사업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실용주의에 미친 신사들(practical man) 속에서 실용성 아닌 의미를 찾는 이들의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쩔 수 있는가. 이제 다른 일을 찾아봐야지. 저번에 보니 시에서 추진하는 공원의 감독관을 찾고 있다고 하던데. 9월, 성공했다: 여름에 넣었던 감독관 지원 서류가 통과했다는 소식.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공원에 집중할 수 있는 공화당의 인재임을 어필한 게 효과적이었다. 의원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도움을 주신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분들께 감사하다. 이제야 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일까. 걱정은 중요한 일에 손을 보탠다는 흥분감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843에이커의 땅에 공화당과 민주당의 의견을 수렴해 뉴욕에 걸맞은 공원을 만드는 일이다. 수백의 사람들이 관리하는 일이다. 지금부터 할 일이 태산이다. 10월, 새로운 기회: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다우닝 씨의 동료였던 캘버트 복스(Calvert Vaux) 씨의 연락을 받았다. 공원 설계 공모에 함께 나가보지 않겠냐고 한다. 어쩌면 1851년 런던에서 마주쳤던 그 그림 같은(picturesque) 공공 공원(public park)을 미국 땅에서 실현할 기회일지 모른다. 이 부지의 전체 지형을 조사했던 빅엘(Viele) 씨가 설계한다고 들었을 때는 나도 함께할 여지가 있을까 싶었지만, 딱히 말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복스 씨와 같이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느낀 게 많다. 뉴욕 시민들은 미처 모르겠지만 이 공원은 우리의 가장 큰 유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100년, 200년 뒤 뉴욕의 가장 중요한 장소, 뉴욕 시민들의 허파이자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이다. 지난 세기 프라이스가 “픽처레스크에 대한 에세이”(1794)에서 말한 ‘그림 같은’ 경관에 관한 이야기와 기록은 영국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그 이상에 가장 근접하게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19세기 미국 땅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1월, 결국: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 가족의 자랑스러운 존, 내 사랑하는 동생이 끝내 영원히 눈을 감았다. 행복했던 뉴헤이븐의 나날들이여! 기억 속 젊음이 충만한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가길. 1858년 4월, 드디어: 공모에 당선됐다는 소식이다. 감독관에서 책임 건축가로 승진했다. 33번째, 마지막으로 공모작을 접수했었는데, 지금 보니 다들 공원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앞으로 계속해서 확장될 이 찬란한 대도시에 공원을 만든다는 대업을 자신의 허영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게 분명하다. 이런 허영 덩어리들이 만드는 공원이 아닌, 미국인의 영혼을 달래주는 진정한 의미의 ‘공공의 공원(public park)’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2024년으로 빨리 감기 166년 전 중앙공원, 즉 센트럴파크가 처음 생겼다. 공원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겼다고 할 수는 없 겠지만, 센트럴파크가 오늘날 한국 곳곳에 널리 조성된 ‘중앙공원’이라는 녹지 유형을 안착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부인하기란 쉽지 않다. 이후 연재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한국의 도시민치 고 각 시군의 중앙공원을 안 가본 사람이 있을까. 참고로 한국의 도시화율은 8할이 넘는다. (각주 2) 공원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석가의 사고적 환기가 필요하다. 중앙공원이 빠르게 도시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것처럼, 공원의 속성은 우리의 일상 배경으로 너무 쉽게 치고 들어왔다. 지난 달 글에 짧게 적었지만, 필자가 센트럴파크를 흥미로운 대상으로 인지한 것 역시 뉴욕살이 만 6년 이 지난 시점이었다. 조경을 전공하기 전이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대형 주제를 왜 놓치고 살았는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만 큼 옴스테드가 치밀하게 공원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한창 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던 1859년에 그 려진 지형도에서 옴스테드의 집착에 가까운 면이 쉽게 포착된다. 온갖 공을 들여 식재를 하느라 공원 조성 예산을 훌쩍 넘겨버리는 바람에 위원회와 끝없는 마찰이 있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것인 마냥, 한 번의 의심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냥. 그렇다고 해서 옴스테드가 마냥 영국식 픽처레스크 정원을 미국에 옮겨오는 데 그쳤다면, 센트 럴파크 ‘공모전’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옴스테드와 복스의 설계안, ‘그린스워(Greensward)’는 어마어마한 토목 공사를 바탕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센트럴파크 공원위원회가 1857년 공모전 을 개최하며 내건 여덟 가지 필수 조건을 맞춘 결과다. 여덟 조건은 다음과 같다.(각주 3) 첫째, 공원법에 따라 정해진 약 1,500,000불의 공원 조성비에 대한 구체적 지출 계획 둘째, 59번가와 106번가 사이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며 공원을 가로지르는 4개 이상의 도로 셋째, 20~40에이커 사이 규모의 연병장과 관객들이 편히 관람할 수 있는 편의시설 넷째, 각각 3~10에이커 규모의 놀이터 3개 다섯째, 전시, 콘서트 등 행사를 열 수 있는 건물을 위한 부지 여섯째, 대규모 분소 1개소와 전망대를 위한 부지 일곱째, 2~3에이커 규모의 화훼 정원을 위한 부지와 그것에 대한 설계 여덟째, 물이 흐르는 공간을 남겨두어 겨울에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만들 것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온갖 ‘도로’의 얽힘이다.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도 ‘교통’ 과 ‘체증’에는 한없이 민감하지 않는가. 마차가 대규모 보급되어 속도를 즐기는 방법을 깨우치고 있었던 옴스테드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숲속 산책로를 그대로 떠다 만든 듯 거미줄처 럼 얽혀 있는 램블스(Rambles)의 보행로 네트워크와 그것을 둘러싼 마차로(Carriage Road)를 보면, 센트럴파크에서 (적어도 옴스테드가 바라봤을 때)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은 단연코 산책과 드라이브였다. 그리고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지형을 뚫고 만든 횡단로(Transverse Road)는 분명 공원 조성으로 인해 맨해튼의 동서가 나뉘는 사태를 걱정하고 있던 공원위원회의 마음에 쏙 들었을 것이다. 19세기 북미에서 옴스테드, 약간의 살 붙이기 사실 옴스테드의 ‘동화 같음’은 그의 정치사회적 사상과 태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정말 많은 것―자기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희생도―을 희생하고 바친 사람이다. 이런 점은 그의 미국에 대한 애정과 민주주의에 대한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사실 공원에 대한 수많은 글의 시작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노예 제도에 대한 그의 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미의 19세기는 쳇바퀴 돌아가듯 새로운 문물과 발견이 연이어 이어지는 시기였다. 1840년 대에 텔레그램이 생겨났고, 1820년대 말부터 동부를 중심으로 시작된 철도 건설에 박차가 가해 져 1850년대에는 이미 9,000km 이상의 철로가 깔려 있었다. 철로가 깔리면서 산업이 급격히 발 전했고 남부와 북부의 갈등도 점차 커져 결국 남북전쟁(1861~1865)으로 이어졌다. 남북전쟁이 발발한 원인인 노예 제도에 대한 첨예한 대립은 옴스테드의 공원론에서 남다른 위치를 차지한다. 아직은 공원의 ‘공’ 자도 모르던 시절, 옴스테드는 남부를 여행하며 「뉴욕타임스」 에 이른바 ‘노예주(Slave States)’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그는 노예 제도에 반대했지만, 동시에 남부가 반대하는 북부의 자본주의적 이기심과 도덕적 해이를 경계하기도 했다. “이처럼 저질스럽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목표를 지닌 정치가와 (남부의 가장 훌륭한 신사조차도 여기 포 함된다) 저질스럽고 편협하며 당에 종속된 물질적인 사람들로 (북부에서 흔히 보인다) 우리의 민주주의 국가관이 대체 어떤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될 것이란 말인가 ……. 우리에게는 어렵고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높일 수 있도록 더욱 직접적으로 지원할 기관이 필요하다. 우리의 교육관은 확장되어야 하며 이런 비참하고 그저 평범 할 뿐인 교육 기관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포괄해야 한다. 힘들고 약한 자들을 그저 내버려 둘 수 만은 없다.”(각주 4) 옴스테드는 정부가 나서서 노예 제도를 근절시킬 것이 아니라 교육과 계몽을 통해 각 지주가 직접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고 외쳤다. 즉,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되 올바른 해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적 이상주의자를 그대로 본뜬 것 같은 사람이 공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옴스테드이니, 우리가 무의식중에 공원을 무언가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에피소드 2 2024년 서울, 여기 30대 “뭐지?” 싶을 제목을 5초만 참고 넘어가 보자.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수업 시간에 ‘나의 인생 그 래프 그리기’ 과제를 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기억이 거의 그렇듯 완전히 잊고 지냈다.몇 년전 분가를 핑계로 대대적인 짐 정리를 하다 이 그래프가 굴러 나왔다. 세상에나, 모든 것이 기억났다. 혹독한 청소년기를 보내서인지 냉소를 달고 살던 고등학생 필자는 10분 만에 뚝딱뚝딱 단순하 디 단순한 그래프를 완성했었다. (물론 혹독함은 나보다는 부모님에게 해당하는 표현일 것이다. 지면을 빌려 당시 부모 님의 고생에 고개를 숙인다) 만 18세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24세에는 취직을 하며, 35세에는 박사학위 를 받고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다고 적었다. 70대 이후로는 ‘17세의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단계니 적지 않겠다’라며 패기 넘치는 설명과 함께 수업 시간에 발표했었다. 자잘하게 삶의 크고 작은 목표 지점을 표시해가는 친구들을 보며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바뀔 걸 뭘 저렇게 귀찮게 하나하나 적고 앉았을까’하고 뚱하게 앉아 시간을 때운 기억도 난다. 박사 논문을 본격적으로 쓰 기 직전 ‘발굴된’ 이 그래프는 놀랍게도 내 인생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어이없을 정도로 일관적으 로 진행되고 있음을 잘도 보여줬다. 말 그대로 18세에는 대학을 마쳤고, 24세에는 첫 직장에 들 어갔으며, 35세에는 박사학위를 받고 말았으니 점쟁이조차 혀를 내두를 계획 중심의 인간이 여기 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내게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옴스테드가 튀어 나올 테다. 그는 조경의 아버지라서? 아니다. 그가 그린 인프라를 사실상 시작했기 때문에? 절대 아니다. 그 가 지금의 내 나이, 35세에 센트럴파크의 조경가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19세기 중반에 35세라는 나이는 지금의 헛-35세와는 결이 다르다. 1850년대 북미의 평균 수명이 35.1세였는데, 영유아 사망률이 워낙 높은 시기라고 해도 결코 젊 은 나이라고만 보기 힘들다)(각주 5)박사학위를 연구 분야의 ‘자격증’이라고 부른다면, 필자는 이제야 막 자격 증을 따냈으니 앞으로 갈 길만 구만리다. 옴스테드가 35세에 비로소 ‘자격’을 획득했다는 사실은 20~30대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보내며 (물론 매우 즐겁게 보냈다) 연구자 자격을 따기 위해 노력한, 그리 고 노력하고 있는 나와 내 동료들에게 약간의 편안함을 준다. 당장 내년의 커리어를 고민하는 모 든 밀레니얼에게 똑같이 다가오는 사실 아닐까. 이것이 어른을 위한 동화가 아니면 무엇일까. 다만, 독자들을 위한 옴스테드의 경고문 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또 옴스테드가 쓴 다른 글을 읽으며 경탄을 금치 못하는 모두들, 경 계하시길. 그가 조경가이기 전에 작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옴스테드가 직접 쓴 1차 사료를 읽고 있노라면 그 유려한 문장에서 연상되는 꿈 빛 같은 민주주의 사상에 쉽게 빠져들게 되기 마련이다. 옴스테드가 뉴욕 시민의 미래를 위해 센트럴파크를 계획했다는 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그 속 에는 엘리트주의적 속성, 교육과 계몽을 통해 바람직한 사고를 지닌 미국의 시민을 키워야 한다는 의지, 우수한 리더십을 통해 도시에서 시민의 행동을 제어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믿음이 존재하고 있다. 엘리트주의자의 전형 같은 모습이다. 실제 센트럴파크 조성 이후 공원에서 의 수많은 ‘규정’이 만들어졌던 것이 이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이후 명상을 위한 센트럴파크가 아닌 화려하고 풀어지기 좋은 놀이공원 코니 아일랜드(Coney Island)가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지.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옴스테드의 1차 사료가 여러 차례 등장할 예정이다. 날카롭고 뼈를 치는 비판적 사고 회로를 최대한 돌려 소개해드리니, 이 글을 읽는 분들 역시 예리하게 뒤통수를 노리 는 갈매기의 눈빛으로, 비판적으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각주 정리 각주 1.혹시나 하는 마음에 짚고 넘어간다. 옴스테드 아카이브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가 상상력을 보탰다. 19세기 북미 신사인 옴스테드는 이렇게 경박한 말투를 쓰지 않았다. 각주 2. 국가통계포털 KOSIS “도시화율”, 2022년 9월 업데이트. kosis. kr/index/index.do. 각주 3. 센트럴파크 공원위원회, “Document No. 8, Friday, September 11, 1857”, Documents of the Board of Commissioners of the Central Park, for the Year ending April 30, 1858(1858년 4월 30일로 끝나는 회계 연도에 대한 센트럴파크 공원위원회 의 결 문서집), New York: New York City Central Park Board of Commissioners. 각주 4. Frederick Law Olmsted, “Letter to Charles Loring Brace”, in The Papers of Frederick Law Olmsted: Volume 2. Slaver y and the South, 1852~1857, Charles Capen McLaughlin and Charles E. Beveridge, eds.,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1, p.234. 괄호는 옴스테드가 적은 그대로 옮겼다. 각주 5. Human Mortality Database, 2023. www.mortality.org/ Home/Index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수변활력거점 조성사업 제안공모 당선작
2022년부터 서울시는 도시 곳곳에 흐르는 소하천과 실개천의 수변 공간을 새롭게 조성해 수세권을 중심으로 한 서울형 수변감성도시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지역의 특성을 담은 보행로, 쉼터, 놀이 공간 등 시민들에게 곳곳에 흐르는 물길을 따라 여유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나갈 예정이다. 2025년까지 총 30개소, 1개 자치구 당 1개소 이상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상반기에 이어 2023년 10월 20일 2개 천변(안양천, 중랑천)의 수변활력거점 조성 사업 제안공모가 개최됐다. 두 차례의 심사를 거쳐 12월 1일 당선작이 발표됐다. 두 개의 당선작을 간략히 소개한다. 안양천, HLD 안양천은 한강의 제1지류로 경기도를 거쳐 영등포구 등 서울시 서남권역의 도심을 지나가는 주요 하천이다. 안양천 하류 오목교~목동교 구간은 철새보호구역으로 지정될 만큼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생태 하천이다. 이러한 생태적 경관은 대상지까지 이어지며 수려한 풍경을 선사한다. 대상지 인근은 서부간선도로 등 하천변 기반 시설로 인해 가로막혀 있지만 다수의 주거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지하철, 육교 등을 활용한 보행 접근성이 좋아서 산책하는 지역 주민이 많다. 우수한 경관, 생태성 등 하천의 가치를 최대한 보존하고 산책하는 시민에게 자연 친화적인 휴식 공간을 마련해 수변의 활성화를 도모해야 했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감각을 자극하는 다층적 공간 경험
‘자연과 가까운’, ‘도시와 떨어진’, ‘산에 둘러싸인’ 등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과천관)을 소개할 때 종종 등장하는 표현들이다. 대공원역(4호선)에서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20분 정도 달려야 만날 수 있으며, 청계산과 관악산을 배경으로 둔 지리적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연을 소재로 조성된 과천관 내 공간도 자연 속 미술관이란 특징을 두드러지게 한다. 과천관은 이런 자연 친화적 장소성을 기반으로 ‘MMCA 과천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2020년, 야외 조각 공원을 배경으로 한 ‘MMCA 과천프로젝트’를 시작으로 2021년에는 과천관 버스 정류장을 재편한 ‘MMCA 과천프로젝트 2021: 예술버스쉼터’로 새로운 기다림의 여정을 모색했다. 새롭게 변모한 버스 정류장을 통해 생태적 실천에 대한 환대, 미술관으로 향하는 숲길의 여정, 미술관에서 자연과 예술을 즐기고 그 여운을 누리는 장소적 경험을 제공했다. 2022년에는 미술관 옥상 공간을 재생하고 조망하는 ‘MMCA 과천프로젝트 2022: 옥상정원’을 진행했다. 옥상 공간을 예술·생태적으로 재생해 주변 자연을 즐기고, 미술관에서의 미적 경험을 야외 공간의 자연 속 다양한 감각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예술적 장소로 탈바꿈시켰다. 2020년과 2021년이 미술관 밖의 야외 공간을 재생하는 프로젝트였다면, 2022년에는 물리적으로 미술관의 안과 밖에 공존하는 정원 일대를 재조명했다. 2023년 MMCA 프로젝트는 ‘연결’이란 키워드로 지난 프로젝트의 조성 공간과 흔적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조성하고자 한다. ‘MMCA 과천프로젝트 2023: 연결’의 대상지는 2층 야외 원형정원과 내부에서 그 풍광을 관조할 수 있는 동그라미 쉼터, 두 공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3층 옥상정원이다. 세 공간에 연결성을 부여하고 관객들이 다층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의 활성화를 시도했다. *환경과조경430호(2024년 2월호)수록본 일부
겨울마다 꺼내 쓰는 스킬
한 번 배우면 오랜 시간 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 타는 법, 악기 다루는 법, 운동 동작 등. 배울 때 반복해서 익혀서 그런지, 오랫동안 하지 않다가 다시 해보면 처음엔 조금의 버벅거림이 있지만 어제 해본 것 마냥 금방 몸이 움직여진다. 그리고 이와 엮인 추억도 함께 소환해준다. 손과 발이 시리고, 눈이 오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이맘때만 즐길 수 있는 스키다. 스키 타는 법은 초등학생 때 처음 배웠다. 학교에서는 겨울 방학이 되면 스키 캠프를 떠났다. 참여할 수 있는 나이는 3학년부터. 언니가 먼저 스키 캠프에 가는 걸 보며 나도 따라 가고 싶었지만 아직 어려서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3학년이 되자마자 바로 스키 캠프에 참가했다. 처음 온 학생들은 스키를 배워야 했고 소정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자유롭게 슬로프를 즐길 수 있었다. 스키 배우는 조에서 스키 플레이트와 부츠, 폴 드는 법부터 넘어지는 법까지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롤러스케이트와 스케이트를 탈 줄 알았고 나름 운동 신경이 좋다고 생각해서 스키도 금방 배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만한 자신감이었다는 걸 첫발을 내딛는 순간 바로 깨달았다. 캠프 첫 날, 스키 플레이트를 A 모양으로 만드는 법과 슬로프에 S자를 그리며 내려오는 법을 하루종일 배우고 익혔지만 넘어지기 일쑤였다. 다음 날도 반복해서 연습했고 그러던 중 잘 타는 사람들은 자유 스키 조로 승격됐다. 하지만 나는 매번 테스트에서 탈락해 캠프 마지막 날까지 리프트도 못 타본 채 첫 번째 스키 캠프는 끝났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는지 다음해 스키 캠프에도 참가했다. 이때도 스키를 못 탈 줄 알았는데, 몸이 원리를 터득했는지 넘어지지 않고 슬로프를 잘 내려왔다. 초등학생 때는 스키 캠프로 매년 스키를 탔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학업 이유로 스키를 잠시 멀리했다. 그러다 대학생 때 오랜만에 스키를 타러 갔는데, 다행히 실력이 녹슬지 않고 오히려 초급 슬로프를 벗어나 중급 슬로프로 레벨 업 됐다. 이때부터 겨울이 되면 종종 스키를 타러 스키장으로 떠난다. 가본 여러 스키장 중 가장 좋아하는 스키장은 모나 용평이다. 모나 용평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에 위치한 스키장으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 알파인 스키 경기장으로 사용된 곳이다. 해발 약 1,450m인 발왕산을 배경으로 다양한 수준의 슬로프가 펼쳐져 있는데, 특히 곤돌라를 타고 발왕산 정상인 평화봉에서 시작되는 레인보우 파라다이스 슬로프는 용평의 매력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준다. 국내 최장 길이로 약 6km에 달하는 슬로프는 발왕산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내려온다. 눈 덮인 산자락을 보며 스키를 타는 순간만큼은 눈꽃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 들게 해준다. 영화 ‘겨울왕국’ 주인공 엘사가 다녀갔다고 해도 믿을 만큼 새하얀 세상이 펼쳐진다. 꽤 가파른 경사도 있어 스릴도 즐길 수 있다. 설산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내려가기를 반복하다 보면 추운 날씨도 잊고 온전히 스키에 빠져들게 된다. 도착 지점에 있는 매표소를 보면 겨울왕국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 든다(이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강원도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하루 혹은 이틀 뒤에 이곳으로 떠나는 걸 추천한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추운 몸을 녹여줬던 어묵 국물과 허기진 배를 달래줬던 핫도그와 추로스는 스키 여정에 행복함을 더해줬다. 20여 년 전에 배웠던 기술을 몸이 잘 기억해줘서 이런 소확행(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종종 타는 자전거도 첫 페달만 잘 돌리면 씽씽 내달릴 수 있고, 더운 여름에 즐기는 수영도 동작을 기억해내면 물살을 가를 수 있다. 스키를 습득했던 그맘때 배운 악기가 떠올랐다. 콩쿠르까지 준비했던 플루트다. 꽤 오랜 기간 배웠는데, 성인이 되고는 한 번도 연주해 보지 않았다. 과연, 그때처럼 잘 불 수 있을까, 한 곡은 완주할 수 있을까. 버벅거림이 있을지언정 매번 입력값을 잘 출력해준 나의 몸과 머리를 믿는다. 중구난방으로 다양한 기술과 행동들을 몸과 머리에 구겨 넣었는데, 오랜 시간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 기억에서 휘발시키지 않고 잘 꺼내주는 나의 몸과 머리에 미안함과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나무쟁이. 친구가 조경학과에 입학한 나를 핸드폰에 저렇게 저장해 두었었다. 대학생이 됐다는 사실 그 자체에 기뻤기에 그냥 웃고 말았다. 꼬인 구석 없던 신입생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싹튼 열등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조경학이 조리경영학의 준말이냐고 진지한 얼굴로 묻고 장난스럽게 길에 선 모든 나무의 이름을 물어볼 때, 친척이 요새는 무슨 나무를 심어야 비싸게 팔 수 있냐고 추천을 해달라 할 때마다. 특히 화분에 심은 식물이 왜 죽는지 물어올 때면 짜증이 났다. 내가 다루는 세계가 광활한 도시 시스템과 공원에서 한 그루의 나무로, 마침내는 화분에 심긴 작은 식물로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찌됐건 좋아하는 식물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계수나무를 예뻐하게 됐다. 학생회관 앞 가로수로 심긴 계수나무는 쭉쭉 뻗은 수형과 달리 아기자기한 구석이 있다. 그 귀여운 면모를 보려면 가지에서 막 초록빛이 보이기 시작할 때 까치발을 들어야 한다. 동전만 한 작은 잎은 한 쪽이 조금 뾰족한 동그라미인데, 하트보다는 심장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그 모양 그대로 점점 커져 손바닥만치 자란다. 노랗게 단풍이 들면 잎에서 향기가 난다. 꽃을 보는 재미는 덜하다. 꽃이 다 피어도 꼭 꽃봉오리를 다 열지 못한 모양이라 가지 끝에 보얗고 말간 분홍 물감을 흐리게 발라놓은 것 같다. 형태보다 색으로 느껴지는 신기한 꽃이었다. 조경학과 학생이라면 무릇 (졸업을 하고 싶다면) 수목학 수업을 들어야 했다. 학생 대부분이 나무를 모르는 초짜라 그에 걸맞은 과제가 주어졌다. 나무 열 그루를 정해서 수목 관찰 일기 쓰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성실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밀린 방학 숙제를 울며 하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를 또 다시 만났다. 수목학 시험은 우리를 다른 학과생의 구경거리로 만들었는데, 독특한 시험 방식 때문이었다. 조교가 교내의 나무 중 스무 그루를 선정해 번호표를 붙여놓으면, 줄지어 서 답안지에 1번부터 20번까지의 나무 이름, 학명, 음수와 양수를 구분해 적었다. 커닝을 방지하기 위해 조교들은 학생끼리 일정 간격을 두도록 관리했다. 30여 명이 개미처럼 느리게 한 줄로 움직이니 꽤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거다. 잔혹한 점은 이 시험이 겨울(잎이 없다!)에 치러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치 수목학’과 ‘잎 줍기’ 스킬을 개발했다. 위치 수목학은 말 그대로 나무의 특징 대신 위치를 기억하는 거다. “제1공학관 모퉁이에는 병꽃나무 다섯 그루, 그 옆에 큰 나무는 수수꽃다리” 같은 식으로. 이렇게 시험을 쳐서 뭐가 남나 싶었지만 돌아보니 어떤 나무를 무슨 용도로 심는지, 어디에서 자라나는지, 어떤 나무와 이웃해야 서로 해를 끼치지 않는지를 알게 된 것 같다. 잎 줍기는 잎 없이 맨둥맨둥한 나무 앞에 섰을 때 당황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잎을 줍는 기술이다. 잎만으로 나무를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수피나 가지가 자라난 모양 만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나는 잎이 없는 참나무 앞에서 잣나무 잎을 주웠고, 활엽수랑 침엽수도 구분 못하는 바보가 됐다. 입학할 당시만 해도 식물에 별 관심 없던 동기들은 어느 날부터 회양목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을 보면 화를 냈다. 골프를 치러 다니는 친구 이야기를 들을 때면, 죽으면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골프 즐기는 제자의 머리에 번개를 꽂아주겠다던 한 교수님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식물을 좋아(사랑까진 아닌 것 같다)하게 되며 옅어지는가 싶던 열등감은 도시과학대학 공동작품전에서 건물 외부에 거대한 공원을 설계한 건축학과의 작품을 보고 불안감으로 변했다. 그래서 식물을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설계 스튜디오에서 식물 없이 설계를 해보고 싶다는 동기의 말에 교수는 이곳에 식물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납득시킬 수 있다면 해도 좋다고 했다. 교수를 설득하라니, 당시에는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그 공간을 조경가가 설계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라는이야기로 느껴진다. 식물이 필요한 이유를 알아야 식물이 없어도 되는 이유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이성복 시인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42쪽)고 말했지만, 주어진 대상지에 식물이 필요한지 아닌지 고민하는 조경가의 고통은 분명 지구 어딘가를 푸르게 만들 것이다.
[COMPANY] 도슨트퍼니처
물건들이 칼같이 진열된 곳에 가면 몸이 긴장하고, 아늑한 곳에 들어서면 어딘가에 앉아 늘어지고 싶어진다. 사람의 태도나 행동은 공간의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공간의 중심에는 가구가 있다. 새해를 맞아 가구로 방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면 방법은 쉽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의자만 검색해도 수만 가지 물품이 길게 늘어지고, 상세 페이지의 다양한 연출 이미지는 인테리어 활용법까지 알려준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실내에 갇혀 있지 않다. 시선을 방안에서 창밖으로 돌리는 순간,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비에 젖어도 잘 마르고, 햇빛에 색이 잘 바래지 않으며, 내구성이 좋아 오래 쓸 수 있는 가구의 폭은 굉장히 좁다. 캠핑 생활이 각광받으며 선택지가 그나마 늘어나긴 했지만, 다양한 삶의 형태를 담기에는 다양성이 턱없이 부족하다. 외부공간디자인 더숲(이하 더숲)의 이주호 대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가구는 공간을 완성한 후 마지막 단계에서 배치되고, 프로젝트 초기부터 콘셉트에 맞추어 가구를 함께 고민하는 경우는 드물다. 공간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어울리는 소재와 분위기의 가구를 배치하고 싶지만 선택의 폭은 늘 좁고 가격이 합리적이지 않은 데다 급하게 진행되는 과정은 공간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민 끝에 이주호 대표는 2018년 더 좋은 공간을 향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도슨트퍼니처를 열었다. 도슨트퍼니처는 외부 공간 디자인 전문가가 전개하는 야외 가구 플랫폼이다. ‘플랫폼’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단순히 가구를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가 아니다. 도슨트퍼니처는 외부 공간을 하나의 전시장으로 여기며 야외 가구라는 작품을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제안하는 도슨트를 자처한다. 자세한 전략과 지향점을 들어보기 위해 김가영 브랜드 매니저와 신수현 디자인팀 팀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신수현 팀장은 “전시회에서 해설하는 사람을 도슨트라고 부른다. 그 도슨트처럼 가구에 대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플랫폼이 되고자 한다”고 사명에 담긴 뜻을 설명했다. 다양한 야외 가구를 소개함으로써 더 좋은 야외 생활을 추구하고 야외 공간의 한계를 깨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좋은 가구를 소개하고 선별해 사람들에게 안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제품군은 아웃도어 가구, 라운지, 파라솔, 시스템 퍼걸러, 기타 액세서리로 나뉜다. 김가영 매니저는 획일적이었던 야외 가구 시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자 국내뿐 아니라 다양한 해외 업체와 소통하고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년 11월, 단순한 아웃도어 가구 브랜드를 넘어 고객에게 필요한 양질의 서비스와 좀 더 다양한 상품을 제공하는 플랫폼 브랜드로 거듭나기 위해 ‘도슨트퍼니처 디파트먼트’로 브랜드 리뉴얼을 마쳤다. 소재, 내구성, 색감 등 다각적인 분석을 통해 중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국가의 독특하고 현대적인 가구를 들여오며 도슨트퍼니처만의 특색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가구는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으로 수입해서 들여오는데, 도슨트퍼니처에는 디자인 팀이 있어 ODM(제조 업체 개발 생산) 방식으로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을 하고 있다. DCT는 수년 간 카페, 리조트, 팝업 스토어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연구를 토대로 만든 도슨트퍼니처의 자체 브랜드다. 녹이 슬지 않는 알루미늄 소재를 사용해 오랜 시간 사용 가능하며, 화이트, 옐로, 그린, 파스텔 톤 등 화사하고 풍부한 색감이 특징이다. 신수현 팀장은 “기존 야외 가구의 색상 대부분이 자연스러운 목재나 무채색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소비자에게 좀 더 다양한 색상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마그나니(Magnani)는 이탈리아 체세나 지역에 위치한 75년 역사의 비치파라솔 및 선베드 제조 브랜드다. 도슨트퍼니처는 2023년 4월 아시아 최초로 마그나니와 단독 라이선스를 체결해 이탈리아의 전통에 뿌리를 둔 여러 가구를 선보이고 있다. 신수현 팀장은 “마그나니는 해변과 수영장을 위한 다양한 가구를 갖춘 브랜드다. 해가 많이 내리쬐는 이탈리아의 기후 특성에 따라 견고하고 비바람에 잘 버티는 소재를 사용해 국내에 적용하기 좋다고 판단했다”며 “강렬한 태양빛과 어울리는 다양한 색상과 패턴을 갖추고 있어, 공간에 이색적인 느낌을 더하기에 제격”이라고 덧붙였다. 김가영 매니저와 신수현 팀장은 도슨트퍼니처는 이미 한차례 발돋움했지만 여전히 새로움을 찾아 혁신을 거듭하는 단계라 말한다. 김가영 매니저는 “늘 소비자의 관점에서 생각하려 한다. 도슨트퍼니처를 처음 접하는 소비자도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부분들을 개선하고, 마케팅 및 감각적인 해외 소싱을 통해 타 브랜드와는 다른 차별점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며 도슨트퍼니처만의 강점을 소개했다. 신수현 팀장은 “도슨트퍼니처는 단순히 가구를 판매하는 회사가 아니다. 외부 공간 디자인을 하는 더숲과의 협업 체계를 갖추고 있고, 가구 판매를 넘어 공간에 맞게 제안하고 디렉팅까지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글 김모아 사진 도슨트퍼니처 TEL. 02-431-0947 WEB. www.docentfurniture.com
[PRODUCT] DMZ로 떠나는 모험 모험놀이터 누리성 모험마을
분단의 역사와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고 있는 DMZ 일대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장소이자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많은 만큼 다양한 연령대가 휴식과 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가이아글로벌이 임진각 관광지에 조성한 ‘누리성 모험마을’은 어린이가 모험을 떠나며 성장하는 여정을 주제로 다양한 놀이를 즐길 수 있는 모험놀이터다. 누리성 모험마을은 ‘누리탐험대와 함께 떠나는 신나는 모험’을 콘셉트로 자연을 감상하고 온 가족이 함께 쉬고 놀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구름, 평화, 별빛, 희망의 의미가 담긴 성 형태의 조합 놀이대는 어린이의 다양한 연령대와 발달 유형을 고려한 시설물 배치와 놀이 난이도 조절 등을 통해 다채로운 모험을 어린이에게 제공한다. 기존 소나무 군락지를 활용한 트리하우스와 셸터 등을 조성해 제방 너머 임진강의 경관을 감상하며 쉴 수 있게 했다. 친환경 소재의 놀이 기구가 넓은 공간에서 자연과 어우러지고 기존의 놀이터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동선을 배치했다. 진입광장에 바닥분수를 배치해 여름철에도 시원하게 놀 수 있게 했다. 서로 다른 테마가 있는 네 개의 성을 오가는 여정은 어린이들의 모험심을 키우고 정서적, 신체적 발달을 도모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TEL. 02-521-3875 WEB. gaiagloba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