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성, 목적, 효과 모든 면에서 논란을 가득 안은 채 강행된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13일 서울시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결과를 발표했다. 4월 29일의 심사 다음 날 당선작을 공개한다고 예고한 일정과 달리 선정 결과 발표에 2주의 긴 시간이 흘러서 『환경과조경』 편집부에는 때 아닌 비상이 걸렸다. 이미 세 달 전에 서울역 고가를 이번 호 특집으로 정하고 60쪽에 가까운 지면을 할애해 놓았으니 월간지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비공식 채널로 제출작들의 패널과 설계 설명서를 구해 발표 전에 미리 편집을 해놓는 무리수를 두느냐, 발표 때까지 인내한 후 사나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느냐로 고심을 거듭하다 대책 회의 장소를 근처의 치킨집으로 옮겼다.
공모전 출품작을 지면에 담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공이 들어간다. 우선 에디터가 작품을 충분히 해석한 후 잡지에 실을 다이어그램, 도면, 이미지, 텍스트를 선별한다. 동시에 내부에서 직접 번역을 하거나 외주를 맡긴다. 이런 1차 작업이 끝난 원고가 디자이너에게 넘어가 편집 디자인된 초고가 나오고, 수정과 교정 작업이 세 차례 정도 이어진다.
그래서 공모전을 잡지에 싣는 달이면 (출품자들의 수고에야 못 미치겠지만) 편집부 모두 의욕 과잉과 심신 탈진을 동시에 경험하곤 한다. 특히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세 편의 비평을 붙이기로 했던 편집 계획이 문제였다. 오래 전에 섭외한 비평자들이 단 사흘안에 작품을 읽고 평문을 쓰기란 사실 불가능했다. 대책 회의의 소품이었던 맥주잔이 점차 쌓여가자 마침내 단순 명쾌한 해법이 나왔다. 한 달 연기! 역시 계획은 유연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환경과조경』은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당선작을 비롯한 모든 출품작을 7월호에서 보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룰 것을 약속드린다. 다음 달에 실릴 출품작과 비평을 안주 삼아 많은 토론 생산하시길.
당선작으로 발표된 비니 마스Winy Maas(MVRDV)의 ‘서울수목원The Seoul Arboretum’을 두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여러 SNS 매체에서는 이미 다양한 견해가 쏟아지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처음 구상된 작년 후반기와 다를 바 없이, 사업 자체의 당위성에 대한 의구심, 정치적 목적에 대한 의혹, 주변 상인들의 반대와 서울시의 소통 부족, 설계공모의 과정과 지명 초청 방식 등에 대한 의견과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당선작 발표 후에는 비니 마스의 안에 대한 촌평도 꼬리를 물고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은 적절한 논증이 없는 단순한 취향 고백이거나 인상 비평이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관점도 눈에 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불투명한 설계 환경에 대처한 전략적 작품, 일견 유치한 키치kitsch로 보이지만 서울의 도시 환경을 단도직입적으로 비판한 작업, 콘크리트 환경에 가장 쉽게 대응할 수 있는 기술적 제안이라는 반응도 있고, 여러 각도의 혹평도넘쳐난다. 한 지인은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큰 어항”이라고 비판했던 어느 외국 전문가의 말을 패러디해서 이번 당선작을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 조경가는 여러 일간지에 실린 분홍빛 식물로 가득한 당선작의 이미지 컷을 두고 “어느 기독교 이단 종파의 선교 책자 표지 같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다음 달 『환경과조경』에서는 당선작과 여러 출품작은 물론 공모 지침과 과정을 아우르는 보다 심층적인 분석을 만나실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자체의 비전과 실천성에 대한 평가는 다음 달로 미루지만, 이 지면에서 간단하게나마 먼저 짚어 보고자 하는 쟁점은 앞으로의 ‘과정’이다. 당선작 ‘서울수목원’은 공중 보행로를 수목원으로 조성한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서울역 고가를 하나의 큰 나무로 설정한 후 퇴계로에서 중림동까지의 고가 구간에 ‘가나다’ 순으로 국내 수목을 심는다는 구상이다. 심사위원회는 ‘서울수목원’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서울역 일대를 녹색 공간화하는 확장 가능성을 제시한 점”과 “다양한 시민 및 주체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세스를 중시한 점”이라고 밝혔다. ‘녹색’과 ‘확장’은 다른 제출작에서도 거의 공통적이므로 결국 당선작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시민 및 주체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세스”인 셈이다. 그런데 과연 그 프로세스라는 건 무엇인가? 다음의 세 가지 단서를 통해 애써 짐작해 볼 수 있다. 비니 마스는 공식 인터뷰에서 “여러 시민이 참여하는 연합 프로젝트로 진행할 것”이며 “서울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선택하고 관리하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심사위원을 겸했던 승효상 서울시 총괄건축가는 “이번 당선작이 지니는 가치와 장점을 구현하기 위해선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거버넌스가 운영되어야 하며, 특히 당선작이 지향하는 ‘열린 디자인’의 정신이 프로젝트 전개 과정에서 잘 구현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서울시의 보도 자료를 보면 “이번 당선작은 확정된 설계안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 주민설명회, 분야별 전문가 소통을 통해 설계를 구체화할 것”이라고 한다.
함께 만드는 프로세스, 열린 디자인, 참여, 거버넌스 등은 명확한 의미로 쓰였다기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으로 읽힌다. 그러나 서울시가 이번 프로젝트를 과정 중심적으로 끌어갈 것이라고 신뢰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번 설계공모 과정이 열린 과정보다는 닫힌 결과를 위한 하나의 절차였기 때문이다. 전문가 그룹조차도 침묵하고 지나갔지만, 이번 지명 공모전은 통상적인 지명 방식인 RFQRequest for Qualification(자격 심사)나 RFPRequest for Proposal(제안서 심사)도 생략한 채 기형적으로 진행되었다. 마치 재벌오너가 사옥을 지을 때 자신의 목적과 취향에 맞는 건축가들을 초청해 경쟁시키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경우, 과정은 빠른 결정과 진행의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다. 만일 비니 마스의 당선작이 과정 중심적인 ‘열린 디자인’을 지향하고 있고 서울시가 열린 디자인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과정을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 몇 차례 주민 설명회와 전문가 자문 회의를 거친다고 해서, 홍보 이벤트를 몇 번 더 연다고 해서 참여와 소통과 과정을 존중하는 열린 디자인이 완성될 리 없다. 공모전 당선작 발표를 일주일 앞두고 주변 상인들의 반대에 대한 대응책으로 대체 고가도로 건설 계획을 내놓은 게 지금 서울시가 생각하는 ‘과정’의 단면이다.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에 열린openended디자인이 필요하다면, 서울시의 계획과 일정 자체가 열려 있어야 한다. 토건시대를 연상시키는 속도전을 통해 박원순 시장의 임기 내에 완공하는 게 목표라면 열린 디자인은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