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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의 영국정원 - 유럽 최초의 ‘민주적’ 정원
프랑스에서 풍경화식 정원은 마치 잠시 스치고 지나간 유행병과 같았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좀 달랐다. 프란츠 공의 작은 정원 나라를 선두로 하여 서서히 전역에 확산되어 19세기 중반에 그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으며 독일 조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시기에 영국과 마찬가지로 굵직한 풍경 전문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한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스켈Friedrich Ludwig Sckell(1750~1823), 베를린·포츠담의 문화 경관을 만든 페터 요셉 르네Peter Joseph Lenné(1789~1866), 동쪽 폴란드와의 접경 지역에 있던 자신의 영토를 모두 풍경화로 바꾸어 놓은 퓌클러-무스카우Pückler-Muskau(1785~1871) 공 등이다. 풍경화식 정원이 독일에서 이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서로 맞물렸기 때문이다. 우선 느릿느릿한 독일인의 정서에 맞았을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자연 종교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1 그에 더해 18세기 말, 독일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낭만주의를 구현하기에 풍경화식 정원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해 9월호 연재 ‘26.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히의 정원 풍경화’에서 미학자 히르시펠트를 잠깐 언급했다. 그가 드레스덴에 있는 어느 풍경화식 정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미학자 요한 게오르크 줄처Johann Georg Sulzer(1720~1779)의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묘사했다. “외로운 산책을 즐기는 현자 중 발길이 숲 속에 이르러 문득 이 웅장한 기념비를 발견하고 전율을 느끼지 않는 이가 과연 있을까? 내가 흠모해 마지않던 인물이 여기 이렇게 높이 기려지고 있다니. 마침 보름달이 둥실 떠 이를 환히 밝히고 사위는 죽은 듯 고요하다. 떡갈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니 깊은 한이 서려온다. 다시 눈을 들어 그 고귀한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짓는다.”2
조선의 방랑 시인 뺨치는 이런 시구들은 당시 독일 문학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다. ‘외로운 방랑자’, ‘죽음 같은 고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풍경화식 정원을 널리 퍼지게 한 1세대의 감성이었다면 그 다음 세대에서는 폴크스파크volkspark라는 건조한 개념이 등장하여 풍경화식 정원의 키워드가 되었다. 폴크스파크라는 단어를 풀이해 보면 ‘백성을 위한 커다란 정원’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원이다. 이 역시 히르시펠트가 던진 개념이다. 이후 독일의 풍경화식정원은 곧 시민 공원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공원을 조성할 때 풍경공원Landschaftspark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1789년, 바이에른 공국의 군주 칼 테오도르는 뮌헨에 있는 자신의 넓은 수렵원을 개조하여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유럽에서 최초로 시민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한 공원이 뮌헨에 탄생했다. 공원의 면적은 총 375헥타르로 뵈를리츠 정원의 3배가 넘는다. 처음엔 왕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르 정원이라고 불렀다가 영국풍을 따랐다고 해서 ‘영국정원’으로 개명되었다. 물론 영국의 왕립 정원들도 이미 백성들에게 ‘개방’되긴 했지만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왕실에 있었다. 처음부터 시민들을 위해 만든 것은 뮌헨의 영국정원이 처음이라고 뮌헨 사람들은 자부하고 있다.
얼핏 듣기에 칼 테오도르가 무척 훌륭한 군주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파리에서 대혁명이 일어난 해의 일이었으니 그 저의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어주어 민심을 한 번 다독여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참모였던 미국인 벤자민 톰슨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뮌헨의 영국정원이 자리 잡은 곳은 오래전부터 군주들이 사슴 사냥을 하던 곳으로서 이자르 강을 따라 깊은 숲과 평야가 번갈아 펼쳐진 매력적인 곳이었다.
혁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런 매력적인 땅을 백성에게 내준들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 군인들을 위해주말 정원을 지을 생각이었다. 좀 더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여가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군 주말 정원 위원회를 결성하고 톰슨에게 럼포드 백작의 작위를 주어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공사가 막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고 럼포드 백작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시민 공원을 짓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럼포드 백작은 이제 공원 조성 위원장의 자격으로 루드비히 스켈을 불러 조언을 구했다. 스켈은 당시 바이에른 공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정원 예술가였다. 대대로 왕실 정원사를 지내던 집안에서 태어나 정원사 교육을 착실히 받았다. 일찍이 그 재주를 인정받아 ‘국비 유학생’으로 파리 식물원과 베르사유에서 수학했다. 풍경화식 정원이 유행하자 다시 5년 동안 영국에서 풍경화식 정원을 공부하고 돌아와 슈베칭엔의 바로크 정원 담당자로 부임했다. 기존의 바로크정원 주변에 풍경화식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당시는 왕실 소속 정원사들이 왕실 비용으로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스켈에게는 그동안 영국에서 공부하고 슈베칭엔에서 일하는 동안 성숙해갔던 아이디어를 구현해 볼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캐퍼빌리티 브라운의 작품 세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켈뿐만 아니라 독일의 조경가들은 하나같이 브라운의 커다란 ‘한 획’과 명상적인 정서에 이끌렸다. 스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공원과 도시와의 화합을 꾀한 것이다. 그는 공원이 도시 안에 섬처럼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멀리 보이는 성당의 첨탑과 웅장한 궁의 높고 낮은 실루엣이 공원의 녹색 실루엣과 서로 중첩되었다가 다시 풀어지는 관계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 안에서 바라보면 도시 실루엣이 ‘가장 아름다운 녹색 의상’을 입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게 도시와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속에서 계층 간의 구분 없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스켈이 추구했던 풍경화식 정원의 이상이었다.3 이 점은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의 커다란 특징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페터 요셉 르네를 포함한 후배 조경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도시와 녹지가 하나로 얽혀 시민의 집과 정원이 된다는 생각은 이후 독일 도시 설계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어째서 독일에서는 고층 건물을 거의 짓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건물 몸체의 높이가 30m를 넘어가면 녹색 의상을 제대로 갖춰 입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든 간에 영국정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테오도르 공의 정치적 이념 역시 변화를 겪었다. 그때까지 주종 관계로만 이해했던 ‘군주와 백성’의 관계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가관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이 ‘민주적인 그린’은 독일 조경사와 도시설계사뿐만 아니라 사회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런 중요한 정원이 1960년대 외곽 순환 도로가 건설되면서 남북으로 단절되었다. 지난 2010년부터 ‘영국정원 통일’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뮌헨 영국정원 운영 재단에서 발의하고 알리안츠 환경 재단에서 후원하는 프로젝트로 도로를 지하로 집어넣고 그 위에 남북으로 갈라졌던 정원을 다시 만나게 한다는 계획이다. 여론도 긍정적이므로 영국정원은 조만간 스켈의 원안대로 복구될 가능성이 크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