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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15년 8월

정보
출간일 2015년 8월
이매거진 가격 9,000

기사리스트

[에디토리얼] 마감에디토리얼을 쓰다가
“비행기 의자 하나 사드릴게요!” 얼마 전 남기준 편집장이 던진 진심어린 농담이다. 사연은 이렇다. 봄과 여름이 때 이른 줄다리기를 하던 어느 날, 마감전쟁을 치르는 동료들을 나 몰라라 뒤로 한 채 학회 참석을 구실로 이탈리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안한 마음에 에디토리얼이라도 빨리 넘겨야겠다고 작심했다. 굳은 결심의 효과였을까. 어깨를 펼틈도 없이 좁은 이코노미 좌석은 집중을 넘어 몰입의 경지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구상, 검색, 커피, 흡연, 산책 등 글쓰기의 필수 과정이라고 여겼던 일련의 습관을 강제로 생략당하니 글이 단숨에 풀렸다. 육필로 휘갈겨 쓴 원고를 옆 자리 승객에게 빌린 노트북으로 타이핑한 후 모니터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착륙 후 와이파이 터지는 곳에서 ‘원고 사진’을 카톡으로 보냈다. 원시와 첨단이 뒤섞인 이 이상한 프로세스에 아마 독자들은 물음표를 던지실 것 같다. 몸은 바다 건너 멀리 있었지만 그 어느 달보다 빨리 끝낸 원고를 칭찬하며 편집장은 한 달에 한번 마감 때마다 국내선이라도 꼭 탈 것을 권했고, 마침내 비행기 의자 선물이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까지 떠올린 것이다. 이제 2년 반이 넘었으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매달 잡지의 첫 지면에 무언가를 쓴다는 게 영 어색하다. 한두 시간이면 충분한 A4 두 장의 짧은 글, 하지만 한 달 내내 어깨를 내리누른다. 사례는 나의 힘! 서점과 온라인을 두루 헤매며 국내외 저명 전문지는 물론 잘 나간다는 상업 잡지의 에디토리얼을 사례 연구하기도 수차례. 그러나 답은 없다. 근사한 스타일로 간명하게 독자들을 사로잡는 멋진 글들을 흉내 내보지만 결국 아류의 티를 보정할 수 없다. 그달에 실리는 내용을 두루 안내하면 모범생이 쓴 교과서 서문처럼 재미가 없어진다. 공들여 기획한 특집에 한 명의 독자라도 더 끌어들일 요량으로 특집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중언부언이 되기 십상이다. 약간의 메시지를 담거나 주장을 넣으면 진부한 계몽이나 어설픈 설교의 곁길로 샌다. 최근에 마음 꽂힌 책이나 작품에 초점을 두면 먹물 버릇이 발동해 당장 고루한 논문이라도 쓸 태세다. 이른바 조경계의 현안(?)이란 걸 다루자니 수영복 입고 지하철 타는 기분이고, 그 현안을 다른 프레임으로 진단하자니 매국노 취급당할 게 뻔하다. 재치를 발휘한답시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프로 편집장과 편집팀장, 그리고 아마추어 편집주간이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거나 아이디어를 메모하거나 수다를 떠는 용도로 쓰는 ‘단톡방’의 대화내용을 버무려 집단 창작이라는 미명 하에 이 지면에 적은 적도 있다. 잡지 리뉴얼 때부터 지금까지 어려울 때마다 고견을 들려주고 있는 몇몇 선배들로부터 얻어내는 아이디어나 정보를 가공해 싣기도 한다. 연구실 대학원생들과 함께 한 세미나의 줄거리를 옮긴 적도 몇 차례. 심지어 어느 제자와 나눈 대화를 조금 살을 붙이고 가다듬어 기록하기도. 고백하자면 어느 학기의 종강 때 수강생들에게 나눠주었던 편지를 에디토리얼에 재탕으로 우려 싣기도 했다. 참으로 놀랍고 곤혹스러운 사실은 의외로 이 지면을 읽는 독자가 많다는 점이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편집부에 들려오는 여러 소문을 종합해 보면, 비교적 열독률이 높은 지면은 에디토리얼과 잡지 제일 뒤쪽의 코다CODA, 본문 중간중간의 텍스트 양이 많지 않은 짧은 연재 글들이라고 한다. 특히 잡지의 첫 쪽이다 보니 이 지면을 펼치고 잠시 시간을 투자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만, 에디토리얼보다는 열심히 만든 특집, 그달에 힘준 작품, 필자의 많은 공이 들어가는 연재 글들에 시선을 던져 주십사 이 자리를 빌려 독자들께 부탁드린다. 앞에서 구구절절 징징거리며 늘어놓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 에디토리얼 지면은 매달 잡지의 마감일을 지연시키는 주범이 된다. 디지털 출력본의 교정까지 끝내고 인쇄소로 넘어갈 준비가 완료된 상황, 모두가 목을 빼고 내 원고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 대략 난감이다. 또 한 달이 흐르고 어김없이 만난 막다른 길, 머릿속을 산만하게 떠다닌 글감 세 조각을 소개한다. 원래는 다음의 세 가지 주제가 강력한 후보로 경쟁했는데 마감에 몰려 쓰다 보니 어디론가 휘발된 모양이다. 첫 번째 후보는 조경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 최정민 교수(순천대학교 조경학과)가 “조경,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것은 어떤가”(라펜트, 2016년 7월 10일)라는 칼럼을 통해 6월호 에디토리얼 “조경이라는 이름”의 문제의식을 확장해 주었다. 공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는데, 이 지면보다는 조금 더 넓은 공간에서 깊이 있게 다루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가 명쾌하게 진단하고 있듯이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이 하는 일이나 결과물을 대변하지 못하고 … 조경이 하는(할 수 있는) 일을 제한하고 있다”면, 40년 넘게 정든 이름이라 아쉬움 가득하지만 개명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경은 조경에 갇혀 있다. 경합을 벌인 두 번째 후보는 용산공원. 수면 아래에서 잠잠하던 용산공원이 지난 4월 이후 심심찮게 언론을 타고 있다. 공원에 들어갈 ‘콘텐츠’를 선정하는 공청회 이후의 일이다. 2012년의 국제 설계공모 이후 당선작을 바탕으로 기본설계가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실종되었던 용산공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하지만, 쟁점의생산 과정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그 핵심 이슈가 시간을 역행하는 양상이라 우려된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의 비논리적인 주장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의 책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긴 호흡으로 천천히 추진하는 것과 예산의 전액 삭감에 따른 계획 중단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슈다. 심도 있게 기획해 본문에서 다시 다룰 것을 약속드린다. 마지막 후보는 이번 특집인 파빌리온이었다. 짐작하시겠지만 8월의 특집 ‘파빌리온’은 무더위에 지친독자들을 의식한 계절형 기획이다. 폭염으로 가득한 한여름의 도시, 어딘가에 숨겨진 나만의 자유의파빌리온을 찾아보시길. 참고로, 비행기 의자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중고로 나온 물건도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CODA] 여행의 기술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때는 어딘가로 떠나기를 결정하고 출발을 기다리며 기대를 부풀리는 시간일 것이다. 무려 6개월 전부터 비행기 티켓을 끊어두고 동행과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만날 때마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볼지, 어떤 맛있는 음식(술)을 먹을지 등을 이야기했다. 바르셀로나나 파리, 런던 등 대도시와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프로방스나 지중해의 도시를 따라가는 여행. 가보고 싶은 장소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들뜨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통장에서 따박따박 빠져나가고 있는 여행 경비 따위는 외면하고 말이다. 이런 흥분 상태는 먹고사는 일을 잠시 제쳐 두고 익숙한 공간을 떠나 벌어질 미지의 일들에 대한 기대와 상상 때문에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우리에게 이번 여행은 현실 탈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여행을 떠날 때가 되자 (“꿈이 현실로 바뀔 시간”이 다가오자) 그전에 마쳐두어야 할 일들에 대한 부담과 준비 부족으로 인한 걱정이 여행에 대한 기대를 슬그머니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상향이 부담스러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출발 전부터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생각났다. “늘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그 현실 사이의 관계이다.”1 여행 전에 가졌던 기대와 달리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환희의 시간은 매우 짧다는 그의 예민한 관찰에 열렬히 동의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감동적인 풍경의 사이사이는 낯선 환경의 고달픈 현실이 채운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예상치 못한 현실이란, 답사를 위해 준비한 새 신발은 길이 들지 않아 걸을수록 상처만 내고, 기상이변으로 기온은 40도까지 치솟는데 한국에서는 흔하게 팔고 있는 아이스 커피가 없는 식이다(카페에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면 점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뜨거운 커피가 담긴 잔과 딸랑 얼음 두 조각이 담긴 유리잔을 함께 내밀곤 했다. 얼음이 든 음료를 잘 마시지 않는 유럽 문화의 체험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더위를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는 사방에 널려 있는 매력적인 노천 카페를 두고 결국 익숙한 스타벅스에 찾아들곤 했다. 예전에는 전 세계의 맥도날드화를 우려했다면 지금은 스타벅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다. 여하튼 우리에게 스타벅스 커피는 고향의 맛이었다. 낯선 것을 열망해 떠난 여행에서 다시 익숙한 것을 소망하는 아이러니라니!). 신체적 욕구의 충족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도 여행의 질에 영향을 미쳤다. “아름다운 대상이나 물질적 효용으로부터 행복을 끌어내려면, 그 전에 우선 좀더 중요한 감정적 또는 심리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목조 오두막을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 긴 여정에 몸이 피곤해지니 사소한 의견 차에도 감정이 예민해졌다. 관심사와 스타일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니 보고 싶은 것도 제각각이어서 아무리 팀을 나누어도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돌발 상황도 속출했다. 어느 순간 우리는 희망한 그 모든 곳에 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답사 리스트에 올려 두는 것과 치밀하게 동선을 짜는 것은 다른 일이다. 꼼꼼한 답사 계획을 짜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을 접어두고) 여건이 되는대로 또는 그날의 리더가 이끄는 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여러 지역을 단체로 움직였던 이번 여행에서 습득한 ‘여행의 기술’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하나의 도시를 차근차근 둘러보거나 한 공간을 음미하며 답사하기보다는 빠르게 둘러보고 파악하기, 그리고 대책 없이 나열해 놓은 답사지 리스트를 다음 방문을 기약하며 포기하기가 주요 포인트였다. 그런데 여행의 빛나는 순간은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이를테면 주요 스팟을 징검다리 건너듯 답사하다가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큰 기대 없이 돌아선 길에서 마주친 길거리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식이다. 그리고 보면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거리나 광장 혹은 공원의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좋은 계절 탓인지 공원이나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극성수기 해변 모래사장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파라솔들처럼 낯선 사람들과 큰 거리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딱히 특별한 일을 하는것도 아니다. 그저 대화를 나누거나 누워서 햇볕을 즐기거나 홀로 앉아 있다. 서양인들은 햇볕을 종교처럼 여긴다는 상식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잘 꾸며진 공원뿐만 아니라 어디든 자리만 있으면 그렇게들 앉아 있다. 하다못해 파리 센 강의 더러운 지천 양편에도 맥주 한두 병을 든 젊은이들이 마치 술집의 바인 양 줄지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치 많은 실내 공간을 오픈스페이스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달 전 편집부 카톡방에서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가을이 되면 소풍을 겸해 ‘공원’ 특집을 기획하자는 내용이었다. 실제 공원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미세하게 들여다보자고 했다. 공원의 원조인 서구의 공원과 우리의 공원 문화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공원이나 거리가 어떻게 받아주어야 할지도 고민해보자고 했다. 아마 올 가을에는 ‘즐거웠던’ 이번 여행을 추억하며 한국의 공원과 거리를 쏘다닐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고달팠던 현실은 생략된 채 감동적인 장면을 이어 붙여 편집한 여행이 남아 있을 것이다.
[편집자의 서재]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조경학과 학생들이 대상지를 이해하기 위해 답사를 다녀오는 것처럼 국문학과 학생들도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혹은 밤샘 술자리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를 대기 위해) 문학의 고향을 찾는다. 하지만 의도한 것과 반대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 나는 우연히 청양에 들렀다가 내가 사랑하는 시의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에 헛되이 돌멩이를 던지며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나희덕의 시 ‘천장호에서’를 읽으며 과거에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천장호에는 적막 대신 거대하고 시뻘건 청양고추·구기자 조형물과 뜬금없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용 한 마리가 세워져 있다. 이 끔찍한 기억 덕분에 나는 이번 달에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국제공모를 다루면서 늦기 전에 세운상가를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줄곧 시골에서 살았던 터라 아쉽게도 세운상가에 대한 추억도, 찾아가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골뜨기에게 유하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의 시집이었다. 지금은 시인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그는 자신의 시와 영화에서 줄곧 과거의 서울에 대한 향수를 노래해왔다. 최근작 ‘강남 1970’에서는 1970년대 초 강남의 재개발을,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1970년대 말죽거리(양재동) 일대의 풍경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서는 1990년대의 압구정동을 스케치했다.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도시의 풍경은 사실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욕망의 통조림 공장’1이나 ‘쩝쩝대는 파리크라상, 흥청대는 현대백화점, 느끼한 면발 만다린, 영계들의 애마 스쿠프, 꼬망딸레부 앙드레 곤드레 만드레 부띠끄, 무지개표 콘돔 평화이발소, 이럇샤이마세 구정 가라, 오케’2 등으로 표현되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욕망으로 넘쳐나는 공간이다. 그가 영화에서 묘사하는 공간에도 언제나 폭력과 부패가 넘친다. 그런데도 그의 시를 읽다보면 혐오의 감정 속에 왠지 모를 그리운 마음이 뒤섞인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운상가에 대해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3, ‘고담시市에 뒹구는 쓰레기들의 환희, 유혹’4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난 모든 종류의 위반을 사랑했고 버려진 욕설과 은어만을 사랑했다’5고 고백한다. 이 모순된 감정은 특히 시집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시 ‘모텔, 카사블랑카’에서 ‘세월의 불안, 경멸과 모독, 기다림 따위들을 견디며 난 길 위의 먼지 묻은 사과를,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산다’는 구절로 압축된다. 시금털털할 것이 분명한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사는 시인의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공존할 수 없는 양가감정 사이에서 헤매다가도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6라는 아름다운 시구에서는 알듯 말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지난 주말 세운상가를 답사하면서 시인이 표현한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페인트칠이 누더기처럼 지저분하게 벗겨진 건물 외벽, 많이 훼손되어 바스라질 것 같은 시멘트 계단, 비아그라, 흥분제, 도청장치, DVD, CCTV를 모두 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으슥한 상점,건물 주변으로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길게 누워있는 세운상가는 과거라는 행성에 불시착한 은하철도999를 현실 세계에 옮겨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처음 세운상가 입구에 들어설 때는 ‘여기서 걷다가 어디 이상한 골목에 끌려가 장기를 떼이고 버려지는 게 아닐까’하는 무서운 상상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안쪽으로 진입하니 좁은 골목 사이로 오토바이와 트럭이 끊임없이 들락날락 거리며 무언가를 날랐다. 칼빵(?)이 한두 개쯤 있는 무서운 얼굴일 것이라 생각했던 정체불명의(?) 상점 상인들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세운상가 건물 중 가장 낡고 허름한 진양상가에서는 그 어둡고 쇠락한 건물 속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세운상가 일대에서 본 가장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한동안 세운상가는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성급한 행정과 건축가의 의도가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실패한 건축으로 인식되었다. 지역 슬럼화의 원인으로 지적되며 철거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일정 부분 맞는 평가다. 하지만 그 B급의 정서가 없었다면 세운상가가 지금처럼 영세한 부품 가게, 특수 용품점, 소규모 작업공장 등을 하나로 품는 독특한 장소성을 가진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오피스텔 단지와 공원으로 바뀐 세운상가를 상상하는 것은 천장호에 세워진 고추와 용 조형물을 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더디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철거 대신 활성화를 택한 세운상가의 미래를 응원한다. 그리고 활성화 과정에서 특유의 B급 정서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세운상가엔 ‘시금털털한 푸른 사과만큼의 희망이 있’7으므로.
2015 조경비평상 심사평
‘2015 조경비평상’에는 총 네 편의 작품이 출품되었습니다. 심사는 ‘조경비평 봄’ 회원들이 맡았습니다. 심사자마다약간의 견해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인 심사 기준은 문제의식의 독창성과 주장의 타당성,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완성도, 비평가로서의 태도와 문장력이었습니다. 이번 응모작들은 비평의 소재가 다양화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작가나 작품 위주의 비평을 넘어 일상의 경관(응모작1, 2, 3)과 조경가 혹은 조경계의 문제(응모작4)로까지 비평의 대상이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는 글쓰기 못지않게 주관적인 서술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도 절반을 차지했습니다(응모작2, 4). 작가가 있는 작품에 대한 비평에 비해 일상을 소재로 한 비평이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주관적인 서술 스타일의 글이 비평으로서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소재와 스타일에서 참신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비평’의수준과 완성도가 문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응모작들은 다소 미흡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네 편의 글에서 장점 또한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서 그 장점에 대해 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응모작1. ‘일상의 풍경을 새롭게 보기 - 가로수’는 지적 의욕이 넘치는 글입니다.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자료 조사와 준비를 충실히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데이터와 정보를 근거로 한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저자가 그 근거를 바탕으로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호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구조도 부실했다는 것이 공통된 심사 의견이었습니다. ‘가로수’와 ‘가로’에 대한 문제의식의 혼란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응모작2. ‘위로의 산책’은 문장 자체가 편안하게 읽힙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주관적인 시점으로 서술하는 형식에 대해서는 심사위원의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이런 서술 방식은 비평문으로서 부적합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참신한 전략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사적인 것을 넘어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글 자체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글은 그 문턱을 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저자의 기억, 감정, 생각 등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을 글로 풀어 쓴 부분과 공간에 대한 주관적인 분석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응모작3. ‘무제’는 삼청동을 ‘권력의 공간’으로 읽으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이 글은 권력의 의미를 정치권력 외에 자본권력으로 확장하여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권력을 이렇게 정의했기 때문에 삼청동이라는 장소 선택은 퍽 흥미로워집니다. 삼청동이 청와대로 대표되는 정치 권력과 최근의 상업 및 자본 권력이 함께 나타나는 권력 중심지가 되었다는 관점입니다. 이렇게 저자는 삼청동의 장소 특성을 논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잘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에서 삼청동만을 대상으로 한 고유한 논의가 이루지지 못했고,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기존 논의의 반복에 머문 점이 아쉬웠습니다. 응모작4. ‘건축가 아닌 승효상 탐구 - 어느 30대 조경가의 길 찾기’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몰입도가 강한 글입니다. 문제의식과 주장이 선명하고 문장 자체가 잘 읽힙니다. 개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글은 우선 진실하고, 성공할 경우 우리 모두의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조경가로서 자신의 진로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경계의 문제 해법을 건축가 승효상과 건축계의 성공 전략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자칫 무비판적이고 순진하게 비춰질 위험이 있습니다. 세련미와 참신한 대안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네 작품 모두는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목표 지점까지 완주하는 지구력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각자의 장점을 더욱 살리고 짜임새 있게, 끝까지 힘 있게 글을 쓴다면 좋은 비평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사를 하면서 입상작을 내지 못한 결론이 심사자들에게 부담스러웠습니다. 이런 결과가 조경비평의 앞날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매 회마다 반드시 수상작을 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가능성의 문은 늘 열어두되 그 결과에 조급해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당선작이 없어도, 가작 한 편 없어도 매년 신진 조경비평가의 등용문을 마련하는 주최측의 ‘은근과 끈기’를 응원합니다. 내년에는 조경비평상에 부합하는 글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심사평을 마칩니다.
2015 IFLA 세계대회
지난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제52회 세계조경가협회 세계대회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IFLA)’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됐다. 최근 러시아는 매년 새로운 조경 디자인, 논문, 전문 서적이 쏟아져 나오는 등 ‘조경의 호황기’를 맞고 있다. 조경에 대한 시민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국가적으로도 조경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경제적·정책적 뒷받침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번 IFLA 세계대회는 러시아에서는 처음 개최된 것으로 총 35개국에서 304명의 관련 전문가가 참여했다. ‘미래의 역사History of the Future’를 중심 의제로 제시한 이번 행사에서는 잃어버린 경관의 재건과 재생의 사례를 바탕으로 조경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도전과 기회에 대해 폭 넓은 논의가 전개됐다. ‘미래의 역사’를 위한 사흘간의 토론 이번 세계대회는 세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고, 총 95개의 세부 사례와 연구 발표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첫 번째 세션, ‘동에서 서로: 현대 조경의 통합과 혁신’에서는 현대 조경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어떠한 연구방법론이 필요한가에 대한 발표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 모두에 속한 러시아에서 어떤 조경이 펼쳐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토픽이 주목을 받기도했다. 두 번째 세션, ‘21세기의 역사와 자연 경관: 보전, 재건, 복원을 중심으로’에서는 문화 유산의 보전과 역사적 장소에 대한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한 복원 및 재생에 대해 미국, 러시아, 터키, 중국, 스웨덴 등 각 국가의 사례 연구가 발표됐다. 지형학적, 생태적,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른 각기 다른 해법을 공유했다. 세 번째 세션은 ‘그린-블루 인프라스트럭처와 지속가능한 도시 개발’을 주제로 미래 도시의 오픈스페이스 활용과 미래지향적 도시 시스템 등이 논의됐다. 워터프런트 리노베이션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시티, 에코시티,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문제, 미생물 연구를 통한 조경 분석, 돌로 만들어진 식재 기반 연구등 미래 도시의 오픈스페이스와 시스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 2015 IFLA 세계대회의 주요 주제 발표 사흘 동안의 본 회의에 앞서 매일 두 개의 기조 발표keynote presentation가 진행됐다. 러시아에서 개최된 만큼, 러시아 주요 도시의 도시 경관 개선 프로젝트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1일차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총괄 조경가인 라리사 카누니코바Larisa Kanunnikova가 ‘경관 시나리오’를 주제로 향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될 경관 개선 사업을 개괄했다.‘생명을 위한 장소들 Places for Life’을 키워드로 도시 속에 녹색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성할 것이라 밝혔다. 2일차 회의에 앞서 세르게이 쿠슈네트소프Sergey Kusnetsov 모스크바 총괄 건축가는 ‘2035 모스크바 강변 개발 사업’을 주제로 모스크바 강 주변 10,400헥타르 면적에 펼쳐질 대규모 경관 개선 및 도시 인프라 구축 사업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사업은 2014년 모스크바 시정에서 주최한 공모전의 당선작인 ‘메가놈 프로젝트Meganom Project’(설계: SUE Research and the Project Institute)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같은 날, 중국 투렌스케이프Turenscape의 조경가 콩지안 유Kongjian Yu는 ‘도시의 자연 속에 딥폼Deep Forms 만들기’라는 제목의 기조 발표를 하기도 했다. 딥폼은 다랭이 논과 같이 인간이 오랫동안 자연과 함께 지내면서 만들어낸 형태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딥폼 방식의 예로 자르고 채우기, 틀 세우기, 관개와 토지 개량, 수확을 제시하며, 이를 도시 속에 자연 환경을 재건할 때 적용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홍수, 가뭄, 황사, 기근 등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조경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스웨덴 농업과학대학교Sweish University of Argriculture Sciences의 마리아 이그나티에바Maria Ignatieva 교수가 ‘러시아의 조경: 동서양의 상호작용’을 주제로 1900년대 초부터 1990년대까지 러시아의 사회문화적 변화 흐름 속에서 조경이 어떤 역할을 해왔고 어떤 영향을 받아왔는지 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유라시아 지정학적 영향권에서 큰 다양성을 갖게 된 러시아의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세계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오픈스페이스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에 많은 청중이 주목했다. 한편 같은 날, 올가 밀리샤Olga Militsa 러시아 국가문화유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러시아의 역사적 정원과 공원에 대한 주state 단위 관리 시스템’이란 기조 발표에서 러시아 오픈스페이스의 변화 양상과 현재를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사례로 제시하며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인 발표 이번 세계대회가 끝나고 게재된 리뷰 글에서도 여러번 언급될 만큼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주제 발표가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서는 김준현(서울대학교), 윈쟈엔(서울대학교), 황주영(서강대학교) 등이 세션 발표자로 나섰다. 김준현은 ‘공원 설계와 정치의 경계에서’를 통해 정책 결정권자가 공원 설계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치 이데올로기가 공원 설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는 어디인가, 정치 영합적으로 조성된 공원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윈자엔은 ‘상하이 스쿠먼Shikumen 경관: 과거, 현재, 미래를 엮어내다’를 발표했는데, 스쿠먼의 ‘신천지Xintiandi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 1990년대 이후 중국과 서양의 건축 문화 양식이 융합되는 과정을 해석했다. 황주영은 ‘예수회Jesuits로부터 유입된 시느와즈리Chinoiserie 취미에 대하여’에서 조경의 유입 경로에 새로운 의견을 개진했다. 흔히 조경은 서구에서 동아시아로 유입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17~18세기에 유럽의 정원 문화는 중국의 시느와즈리(중국 예술풍의 일종)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밖에 심지수(서울대학교), 유수진(고려대학교), 이명준(서울대학교) 등이 포스터 발표자로 참가했다. 2016년은 이탈리아 튜린에서 제53회 세계조경가협회 세계대회는 이탈리아의 튜린Tulin에서 2016년 4월 20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내년의 의제는 ‘테이스팅 더 랜드스케이프Tasting the Landscape’로, 환경, 경제, 사회적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성으로 경관을 다루는 다양한 접근과 경험이 발표, 토론될 것이다. 참가를 원하는 조경가와 학생은 오는 8월 10일까지 영문 초록과 관련 서류를 공식홈페이지(http://www.ifla2016.com/)에 제출하면 된다.
유토피아를 향한 건축가들의 여정
건축가들은 때로는 파격적이었고, 낭만적이기도 했으며, 내밀하게 욕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키토피아의 실험’ 전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건축가들의 여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키토피아의 실험’은 건축architecture이 꿈꾸는 유토피아utopia, ‘아키토피아architopia’를 쌓아올린 건축가들의 사회적 실험을 영상, 그래프, 텍스트,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소개한다. 건축가, 사진가, 비평가, 미디어 아티스트, 만화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 22명이 참여해 전시를 구성했다. 도시의 괴물, 세운상가의 꿈 이번 전시는 건축의 꿈과 욕망이 투영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키토피아로 세운상가, 파주출판도시, 헤이리 아트밸리, 판교 신도시를 꼽으며 이들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전시의 첫 장 ‘유토피아의 꿈’을 여는 세운상가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괴물 빌딩’1으로 불리는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이지만 그 시작은 화려했다.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라는 뜻의 ‘세운世運’ 상가는 김현옥 전 서울 시장의 진두지휘 아래 1968년, 국내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로 완공되었다. 당시 세운상가의 설계를 맡았던 젊은 건축가 김수근은 쪽방과 판자촌이 즐비하던 소개 공지에 옥상 정원, 건물과 건물을 잇는 공중 보행로, 건물을 유리로 덮는 아트리움 등 도시의 구조를 건축물에 압축한 파격적인 설계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시공사가 8개 회사로 조각나면서 당초 설계대로 진행되지 못한 채 완공되었고 반짝 인기를 끌었다가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건축가 김수근의 세운상가 기본 설계 도면을 5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또한 당시의 신문 기사, 홍보 전단지, 관련 문서 등을 통해 세운상가의 번영과 쇠락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이곳에 움트고 있는 새로운 미래에 주목한다.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학예사는 세운상가에 대해 “기본 설계 도면을 보면 원래 아주 미려한 건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메타볼리즘을 보여주는 진보적인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당시 실현되지 못한 건축가의 꿈이 미래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건축가의 작업실을 옮겨온 듯한 전시의 배치는 관객을 세운상가와 그 일대의 청사진을 그리는 건축가의 치열한 고민의 현장으로 데려간다. 유토피아의 낭만과 현실 파주출판도시의 퇴근 시간, 사람들은 거리가 스산해지기 전에 서둘러 셔틀버스에 올랐다. 파주와 서울을 오가는 출퇴근 셔틀버스는 언제나 만석이었다. ‘출판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꿈의 도시’를 꿈꾸며 야심차게 출범한 출판도시의 밤거리와 주말 카페 테라스엔 도시로서의 생명력이 부족하다. 파주에 근무하는 직장인 500명을 설문 조사해 출퇴근 시간과 거리를 인포그래픽으로 나타낸 옵티컬레이스의 작품 ‘출판단지 가는 길’(2015)은 출판도시의 스산한 밤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파주출판도시와 헤이리 아트밸리는 기존의 마스터플랜 식의 도시 개발의 대안으로 건축 코디네이터 개념을 도입해 출발한 도시다. 1부에서 소개한 세운상가가 1960년대 후반 기존 도심지에 정부 주도로 세운 아키토피아라면 2부 ‘건축도시로의 여정’에서 소개하는 파주의 사례는 1990~2000년대 도시 외곽에 민간이 주도해 이룩한 아키토피아다. 2부는 생태 도시, 민주적 도시, 문화·예술의 도시의 낭만적인 기치 아래 이룩된 아키토피아가 도시로서의 기능을 자족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상업주의와 절충하는 모습을 비춘다. 배형민, 정다운의 공동 영상 작업 ‘목소리의 방’(2008)을 통해 파주출판단지를 둘러싼 건축가, 건축주, 주민 등의 다양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의 이율배반 3부 ‘욕망의 주거 풍경’은 2000년대 이후 젊은 건축가들의 데뷔 무대가 되고 있는 판교 단독주택 단지를 조명한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서울로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형성된 판교 단독주택 단지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저밀도 신도시다. 도시근교에서 여유와 멋이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건축주의 요구와 자신의 철학과 개성이 담긴 작품을 짓고 싶어 하는 건축가의 이상이 맞물려 탄생했다. 판교 단독주택 단지는 도시와 동떨어진 반쪽 도시가 아니라 주민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삶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파주의 사례와 다른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판교의 ‘저녁이 있는 삶’은 이율배반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건물 크기에 비해 좁고 작은 창문을 가진일련의 단독 주택을 촬영한 이영준의 사진 작품 ‘왜 판교는 창문을 싫어할까’(2015)는 이웃과 함께 하는 ‘저녁’이 과연 판교에서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게 한다. 이웃과 소통하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의미에서 담장을 만들지 못하게 한 규정은 오히려 단지 곳곳에 무인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고 주택의 창문을 극도로 작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최호철의 일러스트 작품 ‘판교택지개발지구-돈이 자라는 땅’(2005)은 평범한농촌 마을이 신도시 개발 붐으로 인한 부동산 투기로 어수선해진 모습을 묘사했다.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욕망이 누군가의 소박한 저녁을 망가뜨리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 직후, 백지와 같던 도시의 밑그림은 어느새 빽빽한 획으로 들어찼다. 저성장 시대, 앞으로 건축가들은 아키토피아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실험을 펼칠까. 이번 전시는 건축가들이 지금까지 펼쳐온 실험의 부산물과 열매를 소개하며 미래의 아키토피아에 대해 묻는다.
보고 듣고 만지고 즐기는 ‘지붕감각’
지난해 구름 풍선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신선놀음’에 이어 올해는 파동 형태의 거대한 지붕이 미술관 마당을 뒤덮었다. 갈대를 엮은 발로 만든 지붕이 바람에 너울거리듯 커다란 파동을 이루며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뉴욕현대미술관(MoMa-PS1), 현대카드와 함께 여는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8_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2015’는 올해의 최종 건축가로 SoA(이치훈, 강예린)를 선정하고, 작품 ‘지붕감각’을 지난 7월 1일 선보였다.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oung Architects Program(YAP)은 뉴욕현대미술관이 신진 건축가를 발굴하고, 이들에게 프로젝트 기회를 주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공모 프로그램이다. 칠레(CONSTRUCTO), 이탈리아(MAXXI), 터키(Istanbul Modern)의 유명 미술관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각국의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고 있으며, 지난해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도입되었다. ‘지붕감각’은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9월 30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극대화된 지붕의 감각 최종 건축가로 선정된 SoA는 미술관 주변의 북촌 한옥마을과 경복궁의 지붕에서 영감을 받아 이번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날 점점 사라져가는 지붕의 느낌을 되살려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지붕의 형태를 수직적으로 왜곡하고 과장시켜 시각적 경험을 극대화시켰다. 또한 커다란 갈대발을 재료로 이용해 비와 바람에 스치는 갈대발의 소리와 움직임, 발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발이 만들어내는 그늘의 시원함을 동시에 체험하게 한다. 지붕은 폭 1.5m, 길이 2.5km의 갈대발을 엮어서 만들었다. 강예린 SoA 소장은 “근 두 달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애타게 돌아다니며 ‘갈대발’을 생산하는 곳을 찾아보았지만, 한국에서는 더 이상 ‘갈대발’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작업 과정 중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했다. 결국 SoA 팀은 중국 산둥 지방의 가장 큰 늪지대에서 갈대발을 생산하고 있는 마을을 찾아 3대째 갈대발을 만들고 있는 장인을 섭외해 갈대발 지붕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고정관념을 부수는 대안 건축 ‘지붕감각’은 2차원적인 형태의 갈대발을 철골 지지물에 ‘걸어’ 3차원의 공간으로 구현했다. 따라서 지붕감각은 갈대발을 말아 올리거나 걷어서 상황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갈대발은 소재의 특성상 덥고 습한데다 때로는 태풍까지 몰아치는 한국 여름 기후에 풍화되거나 마모되기 쉽다. 기후 상황에 따라 갈대발을 걷어 보관하고 마모된 부분은 여분으로 만들어 둔갈대발을 이용해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지붕감각’의 이러한 특징은 ‘건축은 한번 지어지면 변형할 수 없는 고정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부수고 대안 건축의길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안과 밖, 반전의 묘미 ‘지붕감각’의 가장 큰 묘미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느슨하면서도 안과 밖에서의 체험이 극명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작품 밖에서는 지붕감각의 거대한 크기와 과장된 형태가 시선을 사로잡지만, 내부로 들어오면 소리, 향, 촉감 등 미시적 요소의 경험이 두드러진다. 당초 ‘지붕감각’의 내부 조경은 단순히 지형을 구축하고 잔디를 입히는 설정이었지만 롤 잔디의 비용과 관리 문제, 급박한 시공 일정 등으로 인해 불가능하게 되었다. 안기수 부장(울림조경), 김지환 과장(Studio L)과 함께 팀 동산바치를 결성해 ‘지붕감각’ 조경 부분의 설계와 시공을 진행한 최영준 소장(Laboratory D+H)은 “현장에서 테스트를 거쳐서 바닥 재료로 최종 확정된 바크는 우려와는 달리 철골 구조물을 안정적으로 받치고 소나무 수피 고유의 향을 공간 내부에 가득 채워 ‘지붕감각’의 감각을 진하게 더해주었다”고 전했다. 갈대발이 드리우는 그늘과 부드럽게 밟히는 소나무 바크, 수크렁과 관중 등의 식물이 어우러진 갈대발 내부로 들어오면 마치 숲 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갈대발을 지지하는 철골 지지대가 내부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서 철재의 차가운 재질감을 완화시키고 기둥의 위압감을 줄이기 위해 둥근 마운드를 조성하고, 그곳에 여러 종류의 식물을 식재했다. 그중 가장 높게 쌓은 둔덕 위로 매트를 깔아 동선을 만들고 갈대발에는 구멍을 뚫어 안과 밖을 넘나드는 이질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최영준 소장은 “우리 팀이 가장 특별히 생각하는 둔덕이었는데, 미술관 측에서 이 마운드에 대해 ‘무덤 같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작가의 의도를 앞세우기 전에 공간에 대한 공공의 보편적인 인식도 존중해야 된다는 점에 수긍하고, 약간의 추가식재를 통해 논란을 잠재웠다”고 둔덕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미술관 제 8전시실에는 최종 우승팀과 최종 후보군의 설계안과 뉴욕, 칠레, 이탈리아, 터키에서 진행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우승팀의 작품이 전시된다. 한여름, 도심 속 피서지를 선물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뜨거운 계절을 지나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시네마 스케이프] 한여름의 판타지아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나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은 한일 공동 제작 영화다. 영화제측은 나라 현 고조五條 시에서 촬영할 것, 일본인 스태프와 배우를 기용할 것, 고조의 지역 축제인 불꽃놀이를 포함시킬 것을 조건으로 제작비를 지원했다. 조건은 창작자에게 제약이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감독이라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도시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주변에 고조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검색을 해봐도 무엇 하나 특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난감하다.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할까. 우선 답사를 가야지.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시청 직원이 제일 좋겠다. 시에 대한 기본 정보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인문·사회 분석을 하는 거지. 만약 시청직원이 타지 사람이라면 그 동네 사람을 소개받아서 그곳 사람들만 아는 오래된 이야기부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듣는 거야. 이런 자료들이 모아져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장건재 감독은 영화를 두 개의 챕터로 나누었다. 흑백 영화인 첫 번째 챕터에서는 감독이 겪었던 낯선 도시에서의 사전 답사 내용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영화감독 태훈이 통역과 함께 고조에 답사 가서 시청 직원을 만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고조는 나라 현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4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소박한 고조 역 앞, 오래된 가옥, 좁은 골목, 여관, 동네 카페 등의 장소는 예전의 정취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지극히 서민적인 독일의 풍경
#54 뮌헨의 영국정원 - 유럽 최초의 ‘민주적’ 정원 프랑스에서 풍경화식 정원은 마치 잠시 스치고 지나간 유행병과 같았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좀 달랐다. 프란츠 공의 작은 정원 나라를 선두로 하여 서서히 전역에 확산되어 19세기 중반에 그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으며 독일 조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시기에 영국과 마찬가지로 굵직한 풍경 전문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한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스켈Friedrich Ludwig Sckell(1750~1823), 베를린·포츠담의 문화 경관을 만든 페터 요셉 르네Peter Joseph Lenné(1789~1866), 동쪽 폴란드와의 접경 지역에 있던 자신의 영토를 모두 풍경화로 바꾸어 놓은 퓌클러-무스카우Pückler-Muskau(1785~1871) 공 등이다. 풍경화식 정원이 독일에서 이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서로 맞물렸기 때문이다. 우선 느릿느릿한 독일인의 정서에 맞았을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자연 종교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1 그에 더해 18세기 말, 독일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낭만주의를 구현하기에 풍경화식정원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해 9월호 연재 ‘26.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히의 정원 풍경화’에서 미학자 히르시펠트를 잠깐 언급했다. 그가 드레스덴에 있는 어느 풍경화식 정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미학자 요한 게오르크 줄처Johann Georg Sulzer(1720~1779)의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묘사했다. “외로운 산책을 즐기는 현자 중 발길이 숲 속에 이르러 문득 이 웅장한 기념비를 발견하고 전율을 느끼지 않는 이가 과연 있을까? 내가 흠모해 마지않던 인물이 여기 이렇게 높이 기려지고 있다니. 마침 보름달이 둥실 떠 이를 환히 밝히고 사위는 죽은 듯 고요하다. 떡갈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니 깊은 한이 서려온다. 다시 눈을 들어 그 고귀한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짓는다.”2 조선의 방랑 시인 뺨치는 이런 시구들은 당시 독일 문학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다. ‘외로운 방랑자’, ‘죽음 같은 고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풍경화식 정원을 널리 퍼지게 한 1세대의 감성이었다면 그 다음 세대에서는 폴크스파크volkspark라는 건조한 개념이 등장하여 풍경화식 정원의 키워드가 되었다. 폴크스파크라는 단어를 풀이해 보면 ‘백성을 위한 커다란 정원’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원이다. 이 역시 히르시펠트가 던진 개념이다. 이후 독일의 풍경화식정원은 곧 시민 공원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공원을 조성할 때 풍경공원Landschaftspark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1789년, 바이에른 공국의 군주 칼 테오도르는 뮌헨에 있는 자신의 넓은 수렵원을 개조하여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유럽에서 최초로 시민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한 공원이 뮌헨에 탄생했다. 공원의 면적은 총 375헥타르로 뵈를리츠 정원의 3배가 넘는다. 처음엔 왕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르 정원이라고 불렀다가 영국풍을 따랐다고 해서 ‘영국정원’으로 개명되었다. 물론 영국의 왕립 정원들도 이미 백성들에게 ‘개방’되긴 했지만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왕실에 있었다. 처음부터 시민들을 위해 만든 것은 뮌헨의 영국정원이 처음이라고 뮌헨 사람들은 자부하고 있다. 얼핏 듣기에 칼 테오도르가 무척 훌륭한 군주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파리에서 대혁명이 일어난 해의 일이었으니 그 저의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어주어 민심을 한 번 다독여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참모였던 미국인 벤자민 톰슨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뮌헨의 영국정원이 자리 잡은 곳은 오래전부터 군주들이 사슴 사냥을 하던 곳으로서 이자르 강을 따라 깊은 숲과 평야가 번갈아 펼쳐진 매력적인 곳이었다. 혁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런 매력적인 땅을 백성에게 내준들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 군인들을 위해주말 정원을 지을 생각이었다. 좀 더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여가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군 주말 정원 위원회를 결성하고 톰슨에게 럼포드 백작의 작위를 주어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공사가 막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고 럼포드 백작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시민 공원을 짓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럼포드 백작은 이제 공원 조성 위원장의 자격으로 루드비히 스켈을 불러 조언을 구했다. 스켈은 당시 바이에른 공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정원 예술가였다. 대대로 왕실 정원사를 지내던 집안에서 태어나 정원사 교육을 착실히 받았다. 일찍이 그 재주를 인정받아 ‘국비 유학생’으로 파리 식물원과 베르사유에서 수학했다. 풍경화식 정원이 유행하자 다시 5년 동안 영국에서 풍경화식 정원을 공부하고 돌아와 슈베칭엔의 바로크 정원 담당자로 부임했다. 기존의 바로크정원 주변에 풍경화식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당시는 왕실 소속 정원사들이 왕실 비용으로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스켈에게는 그동안 영국에서 공부하고 슈베칭엔에서 일하는 동안 성숙해갔던 아이디어를 구현해 볼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캐퍼빌리티 브라운의 작품 세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켈뿐만 아니라 독일의 조경가들은 하나같이 브라운의 커다란 ‘한 획’과 명상적인 정서에 이끌렸다. 스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공원과 도시와의 화합을 꾀한 것이다. 그는 공원이 도시 안에 섬처럼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멀리 보이는 성당의 첨탑과 웅장한 궁의 높고 낮은 실루엣이 공원의 녹색 실루엣과 서로 중첩되었다가 다시 풀어지는 관계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 안에서 바라보면 도시 실루엣이 ‘가장 아름다운 녹색 의상’을 입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게 도시와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속에서 계층 간의 구분 없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스켈이 추구했던 풍경화식 정원의 이상이었다.3 이 점은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의 커다란 특징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페터 요셉 르네를 포함한 후배 조경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도시와 녹지가 하나로 얽혀 시민의 집과 정원이 된다는 생각은 이후 독일 도시 설계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어째서 독일에서는 고층 건물을 거의 짓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건물 몸체의 높이가 30m를 넘어가면 녹색 의상을 제대로 갖춰 입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든 간에 영국정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테오도르 공의 정치적 이념 역시 변화를 겪었다. 그때까지 주종 관계로만 이해했던 ‘군주와 백성’의 관계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가관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이 ‘민주적인 그린’은 독일 조경사와 도시설계사뿐만 아니라 사회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런 중요한 정원이 1960년대 외곽 순환 도로가 건설되면서 남북으로 단절되었다. 지난 2010년부터 ‘영국정원 통일’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뮌헨 영국정원 운영 재단에서 발의하고 알리안츠 환경 재단에서 후원하는 프로젝트로 도로를 지하로 집어넣고 그 위에 남북으로 갈라졌던 정원을 다시 만나게 한다는 계획이다. 여론도 긍정적이므로 영국정원은 조만간 스켈의 원안대로 복구될 가능성이 크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다양성의 도시, 단조로움의 도시
도시 다양성이란 무엇인가 눈을 감고 한 번 떠올려보자. 지난 몇 년간 경험한 도시 중 ‘다양성의 감각’을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는 가로 환경은 어디인가? 다양성의 대상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리적 대상일 때도 있고 사람이나 커뮤니티, 혹은 문화 환경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뉴욕을 다녀온 독자라면 태피스트리tapestry처럼 촘촘하게 짜인 맨해튼 도시 블록의 한 가로를 떠올릴 수도 있고, 어떤 독자는 업종 분화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신사동 가로수길과 세 로수길의 교차점에서 만난 십인십색의 사람들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 어느 곳을 떠올렸든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해당 가로에서 경험한 ‘무엇’이 그토록 다양하다고 느꼈는가? 나아가 이러한 다양성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다양성인가, 아니면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특성인가 도시 공간에서 다양성이란 한 지역 내에 서로 다른 성격의 건축물과 가로, 용도와 사람, 서비스나 지역 문화가 그 고유성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한 채 섞여 있는 특질이다. 여기에는 다양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에 대해 접근하고 누릴 수 있는 ‘물리적 경험’의 차원과 함께 차이에 대한 관용이나 상호 존중 같은 ‘비물리적 인식’까지 포함된다(그림1, 2). 나아가 한 장소에서 누릴 수 있는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이국적인 행태가 오랜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전통적 환경과 대비를 이룰 때도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차이와 다름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나 상호 존중이 다양성을 위한 전제 조건이긴 하지만, 때로는 한 커뮤니티가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대해 상당 기간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즉 수용하기 어려운 차이를 문화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에—고유한 문화가 한 장소에 온전하게 정착하고 결국 지역 다양성의 한 요소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커뮤니티 일부가 문화적 동질성을 갖는 모집단으로부터 분리·독립함으로써 다양성이 시간에 따라 분화되고 공간적으로 확산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실제 도시 공간에서 다양성의 감각을 일으키는 요소가 무엇인지 좀 더 따져보자. 다양성의 세 가지 요소: 물리적 환경, 사회적 특성, 재화·서비스의 종류 많은 도시 이론가는 도시의 물리적 환경, 사회적 특성, 그리고 제공되는 서비스나 재화의 종류가 다양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라고 본다.1 첫째, 물리적 환경의 관점에서 작게는 가로의 표면을 덮고 있는 간판이나 건축물 크기, 건축 유형과 용도, 지어진 시기나 스타일, 외장재의 특성을 비롯해, 크게는 가로의 물리적 폭과 연속성, 필지 크기의 균질성과 도시 블록의 크기 등이 다양성과 단조로움의 차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를테면 용도와 건축 유형 측면에서 보았을 때, 홍익대학교 입구 주변은 1957년 토지구획정리사업 대상지로 지정된 후 1960~1970년대에 걸쳐 비교적 균질한 저층 주거지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를 전후로 상업·문화·소비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면서 최근 다양한 비주거 용도와 형형색색의 건축 스타일을 접할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그림3). 그렇지만 상업화가 진행된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언제나 더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보인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같은 홍대 입구 지역이지만 도시 블록 전체가 상업화된 서교동에 비해 기존의 모습이 유지된 단독 주택 단지 환경에 게스트하우스, 공방, 제과점, 이자까야가 골목 구석구석 흩뿌려지고 있는 연남동에서 더 풍부한 다양성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2. 둘째, 다양성의 또 다른 요소인 사회적 특성은 도시 공간의 소비자이자 문화의 생산자인 사람들이 나타내는 문화적·사회적·경제적 차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거주자의 소득 수준, 직업군, 연령대, 인종과 국적, 언어와 취향이 다채로운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그림4). 반면 도시 변화에 따라 이러한 사회적 특성의 차이가 점차 옅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국내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1~2인 가구를 대상으로 민간 주도의 소형 주택 공급을 확대하려는 ‘도시형 생활 주택’ 정책이 2009년 도입되었다. 그런데 하나의 주택 유형이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어지면서 짧은 시간에 해당 지역의 사회 구성원이 교체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강서구 화곡동에는 2014년 인허가 건수 기준으로 서울시에 지어진 전체 도시형 생활 주택 중무려 9.1%에 해당하는 1,718세대가 들어서게 되었다.3 이로 인해 화곡동의 20~30세대 1~2인 가구, 특히 젊은 직장인 부부, 전문직종 1인 가구, 취업 준비생의 비율이 갑작스럽게 늘어났으며 이는 해당 지역 거주자의 연령대나 직업군이 오히려 유사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심각하게 놀기
두 번째 글이다. 첫 번째 글에서는 나의 네 가지 설계태도―물어보기, 다시 그리기, 노동하기, 설계 안하기―와 설계 시작점에 관해 짧게 써보았다. 이번에는 2년 전 미국 뉴욕 MoMA PS1Museum of Modern Art PS1에서 주최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oung Architect’s Program(YAP)의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던 작품을 바탕으로 좀 더 구체적인 설계 과정에 대해 써보려 한다. YAP은 디자인 분야 인재 육성을 목적으로 매년 다섯 팀을 선정해 미술관 방문객을 위한 야외 휴양 공간 아이디어를 공모한다. 그리고 그 중 당선작은 MoMA PS1의 여름 웜-업Warm-Up 행사 때 사용될 임시 설치물temporary installation로 구현된다. 동료 회사와 뭉쳐 템프에이전시TempAgency라는 팀을 구성했고 다섯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비록 우리 팀의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약 한 달간 혹독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설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그만큼 나누고 싶은 점이 많은 프로젝트다. 우리의 YAP 설계 과정은 놀이터 같았다. 아니, 그렇게만들려 노력했다―어떻게 보면 이것이 나의 다섯 번째 설계 태도다. My Hair is at MoMA PS1 프로젝트 이름 그대로 우리가 내놓은 설계안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다. 미쳤다고, 이상하다고, 장난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신기하고 색다르고 만들어지면 가보고 싶다는 사람도 많았던, 아무튼 설계안에 대한 주변 반응이 너무나 대조적이면서도 다양했던 프로젝트임에는 틀림없다. 어떻게 보면 거의 도박 수준인 아이디어였지만 우리는 정말 진지했다. 이제껏 시도해보지 않은 도전적인 설계, 한 번 해보자고 했다. 아니, 그보다는 “떨어지더라도 밋밋하지 않게 떨어지자”고 했다. 많은 공모전에 참가해 보았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놀면서 설계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노력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클라이언트가 예술을 항상 접하는 큐레이터였기에 좀 더 과감해도 되지 않겠냐는 상상 혹은 편견을 가졌던 것 같다. 여기서 잠시 템프에이전시 팀 구성을 설명해야겠다. 쿠토노톡KUTONOTUK의 나와 공동 대표 매튜 줄Matthew Jull, 그리고 맥도웰스피노자mcdowellespinosa의 두 공동 대표까지, 총 네 명이 팀의 중심이었고, 버지니아대학교 건축학과와 조경학과 학생 여섯 명―풀타임 네 명,파트타임 두 명―이 어시스트를 해주었다. 본격적인 작업은 12월 초 가을 학기가 끝나자마자 시작되었고, 겨울방학 한 달 동안 학생들과 같이 일할 작업장은 학교 건물 안의 교실 한 곳에 마련했다. 거의 눌러 앉은 셈이다.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1일, 새해를 맞았을 때도 그나마 구색을 맞춘다고 어디선가 구해 놓은 샴페인 두병을 터뜨리며 컴퓨터와 드로잉 사이에서 우리끼리 자축했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학생들과 같이 우선 아이디어부터 짜기 시작했다. 설계안 제출까지 시간이 촉박해서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리서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역시 처음엔 별의별 토픽이 다 나온다. 마네킹, 잠수 어항, 나무 쓰레기, 거인 얼음, 정글, 돌 밭, 임대 노동 등등. 한 명당 20~30개 정도의 아이디어를 내고 이미지, 논리, 내러티브 등 각 아이디어에 대한 큰 윤곽을 정리하여 3~4시간에 한 번씩 팀 멤버들과 교류하며 발전시켜 나갔다.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트(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 디자인과 조경 및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조경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 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 매튜 줄(Matthew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구겐하임 헬싱키(Guggenheim Helsinki)와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 MoMA PS1 젊은 건축가(Young Architects Program), 유로판 등에서 주관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아크틱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D.C.의 정책 연구 기관과의 협력 아래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 .com | www.arcticdesigngroup.org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로버트 험버
“내가 원하는 정원은 가난하든 부자든, 덩치가 크든 작든, 노숙자이든 장님이든, 혹은 목발을 짚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뉴욕의 대표적 지역 공동체 정원, 므핀다 칼룬가 가든을 설립하고 30년 넘게 운영해 온 로버트 험버가 내비친 소망이다.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1980년대 초반의 맨해튼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그는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긋나가던 10대 청소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정원을 선택했다. “저는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도와줄 수 있냐고. 그들에겐 그러한 질문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니니까요.” 그리고 그의 생각은 어린이와 노인을 비롯한 지역 주민 전체로 퍼져 나갔다. “10대들은 농구에 관심이 있지만 모든 사람을 위해서는 식물을 함께 키우는 것이 최고죠.” 그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공원의 한 귀퉁이를 시로부터 위임받았다. 한 번도 정원 일을 해 본적 없었지만, 동네 주민, 노숙자, 부랑자, 거리의 매춘부 등에게 도움을 청해 므핀다 칼룬가 가든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원의 이름은 오래 전 이 부근에 있었던 흑인 매장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의미에서 스와힐리어로 지었다. “이전에 이 공원은 그저 빨리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곳일 뿐이었죠.” 도시의 변방, 어둡고 위험했던 장소는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도 정원을 중심으로 마약상을 몰아내고 이미지를 바꾸었다. 노인 센터의 앞마당으로도 쓰이며 그들이 마음 편히 안전하게 채소를 가꾸고 소일할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했다. 밥 험버의 헌신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은 점차 알려졌고 커뮤니티 가든의 모범 사례로 통하게 되었다. 관광객과 미디어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지역 주민에겐 보석과 같은 공간. 므핀다 칼룬가 가든은 오늘도 조용히 맨해튼의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밥 험버는 오늘도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다. Q. 이 정원이 문을 연 첫 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A. 아, 무척 오래된 이야기다. 어느덧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원래 근처에 있는 어린이돕기협회the Children’s Aid Society에서 일했고, 주로 남자 아이들 그룹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자연스럽게 공원에서 소년들과 모임을 갖는 일이 잦았는데, 뭔가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 것도 그 즈음이었다. 협회에서 퇴직하고 난 후, 나는 여기에 좀 더 머물면서 공원 자체를 바꾸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공원에서 빈번히 볼 수 있던 마약 거래상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 후 정원을 가꾸는 기술을 점차 배우면서 동네 아이들에게도 뭔가를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이 정원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Q. 어린이돕기협회의 일과 정원 일을 시작한 계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어린이협회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가? A. 지역의 불우한 어린이와 청소년을 돕는 단체다. 주로 집에 아버지가 없는 소년들인데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우리는 뉴욕 시 전체를 교실로 이용했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연극이나 야구 경기도 보러갔으며 모여서 방과 후 숙제를 함께 하기도 했다. 뭐, 말하자면 그런 종류의 일들이다. Q. 이곳에 정착하게 된 개인적인 배경과 가족에 대해서 궁금하다. A. 우리 가족은 중남미 파나마 출신으로, 조지아 주로 이주했다. 나는 조지아에서 태어났고 취학 연령이 되었을 즈음 뉴욕으로 이사해 여기 맨해튼에서 평생을 살았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지만, 내 친척 중에는 유창한 사람이 많다. 지금은 대부분 뉴저지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이번 독립기념일에도 가족들을 방문해서 휴일을 보낼 계획이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몇 있다. 자기들의 생부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심지어 아버지가 있어도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다니기도 한다.이 공원은 수십 년간 나에게 더할 수 없이 귀한 우정을 선물해 줬다. Q. 므핀다 칼룬가 가든의 초기 시절을 묘사한다면? A. 1980년대였고, 무척이나 거친 시절이었다. 공원에는 온갖 종류의 마약이 횡행했고 위험했으며 심하게 지저분하고 불결했다. 칼에 찔릴 뻔하거나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닥에 총알이 널려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전혀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게 위협적인 곳이었다.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소년들을 데리고 온 시내를 돌아다녔다. 주중에는 함께 모여서 농구를 하거나, 시시콜콜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남자아이였는데, 지역 주민이었던 델마 프리차드Thelma Pritchard 여사가 여학생 모임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내가 공원에서 처음 그 분을 만났을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 아이가 지금 스물서넛 정도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프리차드 여사 또한 아직도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돌봤던 아이들이 어느덧 커서 그들의 자녀를 데리고 오면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다. 이것이 내 인생이고 나는 그것을 즐긴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재료와 디테일] 콘크리트 벽돌, 그 변신은 무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늘 경계에 눈이 간다. 긴 담장이 공간을 구획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사용된 소재의 대부분이 벽돌이다. 붉은색 벽돌도 있고 회색 콘크리트 블록도 많이 보인다. 쉽게 쌓을 수 있고, 땅의 압력(사면 압력)을 크게 받지 않는 곳이라면옹벽을 치지 않고도 좋은 입면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널리 활용되었을 것이다. 몇 장씩 내어 쌓기도 하고 구멍을 만들어 내는 등, 벽돌만이 만들 수 있는 특유의 패턴으로 거리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재료비를 많이 쓸 수 없는 외곽이나 사람의 시선이 덜 가는 외진 곳에 쓰이는 경우가 많다. 요지에 쉽게 쓰지 못하는 이유를 소재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서 찾기도 한다. 벽돌이란 소재의 가치를 아는 일반인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벽돌을 활용해 건축물 내부를 구획한 공간을 우연히 본 적 있는데, 소재의 원초적 질감에 생경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런 소재가 외부에만 나오면 이상하게 저급한 재료로 치부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 주위에 있는 군부대 담장이나 예비군 훈련장의 시가 전투장, 혹은 저렴하게 지은 경비실 등에서 돈들이지 않고 손쉽게 지어진 공간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재료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새롭게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몇 해 전 지방의 한 정원박람회장에 작은 공간을 만들 기회가 있었다. 실제보다는 관념적인 공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작업에 임했으나 결과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공간 공감]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 ‘공간 공감’ 코너에서 두 페이지로 다루기에는 그 무게감을 이기기 힘든 장소다. 국가대표 정원을 대상으로 허투루 설계 담론을 펼치다가는 뭇매를 맞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한 차례, 그것도 제한된 시간의 가이드 투어를 통해 담론의 깊이를 추구한다는 것 역시 무리수다. 하지만 공간 자체가 위압적이거나 엄숙함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고 정갈하다. 불과 몇 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복닥거리는 현대의 삶과 대비되는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진다. 처음이 정원을 만들고 가꿔 온 다양한 스토리를 상상하면서 다른 각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참이다. 메르스 여파로 비교적 한산한 토요일 아침, 해설사가 인솔하는 무리에서 가장 뒤쳐져 걸으며 ‘후원 달리 읽기’궁리를 시작했다. 후원은 왕의 정원이었다. 정원의 첫 시작은 지금부터 약 610년 전인 태종 때였다. 여러 왕을 거치면서 확장과 수정이 행해졌으며, 230여년이 지난 인조 때 옥류천 일대까지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다시 140년의 세월이 흘러 영·정조 때 부용정 일대를 조성했고, 순조 때 연경당을 지으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후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무려 420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꿔 온 장소다. 당시 왕이 거닐던 후원의 모습은 또 다시 180여년이 지난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비평: 늙은 근대성과 도시 공공성의 스펙터클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해 공공 공간을 다루는 전략적 태도는 무엇인가? 서울시는 지난 6월 16일 제출된 82개 작품 중에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 당선작으로 이_스케이프(대표 김택빈)와 장용순(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이상구(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팀이 공동으로 제안한 ‘현대적 토속Modern Vernacular’을 최종 선정했다. 이번 공모전에서 요구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 공간 설계는 세운상가의 민간 소유 영역을 제외하고 서울시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공중 보행 가로인 데크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당선작을 중심으로 설계안을 들여다보자. 당선작, 2등작, 그리고 3등작은 일견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한 인식의 차이를 갖고 있다. 애매모호한 가치를 설정하거나 경직된 건축화의 태도로 일관한 안들과 달리 당선작은, 세운상가를 둘러싼 공간 담론, 세운상가에 대한 공적 개입의 타당성, 세운상가 내부목소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도시와 삶의 흔적에 대한 존중이란 네 가지 측면에서 볼 때 확실한 비교우위를 갖는다. ‘Modern Vernacular’ 즉 ‘현대적 토속’이란 제명이 대변하듯이 당선작은 공공공간에 개입함으로써 세운상가를 넘어서서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좀 더 큰 틀에서의 도시 역사, 공간 구조와 장소성을 보완하거나 복원하는 데 가치를 부여했다. 당선작의 보행 데크 활성화는 크게 보면 남북축의 기능에 의존한다. 세운상가의 동서축 연결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느슨하다. 개발 시대 세운상가라는 거대한 구조물로 인해 단절되었던 동서 양축과 기존 도시 조직의 연결에 대해 여백과 흐름의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있다고 본 점은 인위적 개입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있어서 좋다. 남북을 잇는 보행 데크를 복원하여 구체적인 프로그램 공간을 삽입하고 세운초록띠공원 자리는 종묘와 연결되는 경사진 광장으로 전환하는 제안이 남북축 보행 데크 활성화의 주된 내용이다. 이렇듯 남북과 동서축에 대해 서로 다른 언어로 접근한 것 역시 도시 구조의 역사와 장소성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듯하다. 당선작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세운상가의 공공 공간에 대한 개입은 여전히 개념과 해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거기엔 세운상가 내부의 치열한 목소리가 들리기 않기 때문이다. 세운상가를 소유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개의 주체로 분리해서 접근하다 보니 복잡하게 얽힌 내부의 목소리를 공공이 소유한 공공 공간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다. 이는 결국 세운상가 활성화를 ‘밖에서부터 안으로’, 즉 추진하기 쉬운 곳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서울시의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해 서울시가 공공 공을 다루는 전략적 태도다. 본질이 문제의 핵심을 우회하고 있는데, 세운상가는 과연 활성화 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빅 플랜을 넘어서기 위한 공공 공간 개입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확보될 수 있을까? 세운상가를 개발 시대의 빅 플랜Big Plan의 상징이라고 보자. 시대가 바뀌고 도시적 상황이 변화했다. 가장 크게는 세운상가를 지탱해 온 도시 산업 생태계의 몰락을 들 수 있다. 이제 다른 가치로 세운상가의 시대성을 읽어 내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면, 가장 우선해야 할 태도와 접근이 과연 공공 공간인 데크의 활성화이어야만 했을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울시가 내세운 세운상가 보행 데크 복원이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봐야만 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 거대 스케일의 보행 데크가 완성되면 종묘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보행 녹지축이 형성된다고 한다. 서울 시민들이 도심에서 남북으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도 한다. 더 큰 틀에서 보면 보행 데크를 통해 연결된 남산은 향후 용산과 한강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곧 종묘, 북악산, 삼각산을 통해 백두대간이 한강까지 이어지는 생태계의 중요한 연결 통로의 회복을 상징하는 역할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환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리는가? 이영범은 1986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영국 AA 스쿨 대학원에서 도시 공간 이론으로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에는 시민단체인 도시연대에서 커뮤니티디자인센터를 설립해 주민참여 디자인을 통한 마을만들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저서로는 『도시의 죽음을 기억하라』, 『뉴욕 런던 서울의 도시재생 이야기』(공저),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다』(공저),『건축과 도시, 공공성으로 읽다』(공저), 『사회적 기업을 이용한 주거지 재생』(공저), 『새로운 도시재생의 구상』(공저), 『우리, 마을만들기』(공저), 『도시 마을만들기의 쟁점과 과제』(공저) 등이 있다.
3등작: Urban Filter
세운상가는 단순한 빌딩 그 자체를 넘어 도시를 대표하는 근대 문화 유산이다. 이러한 세운상가가 앞으로도 제자리를 지키며 더욱 활발히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현재’의 모습을 바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야만 한다. 서울의 미래를 위한 비전을 생성하는 과정이지만, 지나치게 거대하고 유토피아적인 이미지에 의해 그 본래의 가치와 의미가 함몰되지 않도록 파편화된 현재의 세운상가를 통합하고 확장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시스템 세운상가군에는 대상지를 활성화하기 위한 네 개의 주요한 디자인 요소―자연 서식지(natural habitat), 통합적 프로그램(program integration), 구조적 독립(structural independence), 도시적 공존(urban coexistence)―가 제안된다. 이 디자인 요소들은 그저 허울뿐인 형태를 불필요하게 제안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을 구축하여 세운상가의 자율적인 운영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제안된 요소들은 세운상가와 개별적 또는 통합적으로 결합하며 기존에 볼 수 없던 다양한 환경과 활동을 만들어 내는 촉매제로 기능한다. 이러한 변화는 주변 상권의 시민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지속적인 관심과 흐름을 유도하며 넓게는 서울의 도시 조직과 연계될 기회를 창출한다.
2등작: Time-lapse of Lying Enormous
세운상가는 서울의 산업화 시대를 상징하는 근대 산업유산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능을 잃어버린 시설은 우리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기억의 흔적을 간직하고 이어나가야 하는 시대의 자산이다. 세운상가는 자연과 이야기가 함께 하는 일상의 공공 공간이며 특별한 시설이 아닌 일상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하이퍼폴리스의 기억술Mnemonics in Hyperpolis 하이퍼폴리스Hyperpolis는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도시의 각 공간이 시공간적으로 압축되고 농축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따라서 혼성적이며 다중적인 수많은 계열들 사이의 불확정적 교차라는 특유의 현상을 공유하게 된다. 하이퍼폴리스의 작업에는 장소의 생성을 위한 장치로서 기억술이 어떻게 조직되는가의 문제가중요하다. 혼성의 풍경 민가에서 소개 공지로 변화한 공터에는 무허가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이후 세운상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계획 의도와는 다르게 공공의 기능은 1층에서 복잡하게 형성되어갔고 3층은 공공 기능을 상실하면서 축소되고 변형되었다. 이 모든 장소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서로 공존하며 혼성의 풍경Heterogeneous Scape을 만들어내고 있다.
당선작: Modern Vernacular
세운상가는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도시 조직을 삭제하는 백지화tabula rasa, 그리고 거대 구조물megastructure과 인공 대지의 환상이 결합된 하향식top-down 근대 도시론의 유산이다. 우리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주변 맥락이 가지고 있던 골목길의 도시 조직을 세운상가로 침투시키고, 주변 맥락의 활기가 세운상가 안으로 침투하며, 동서의 도시 조직이 다시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제안하는 세운상가의 데크는 종묘부터 남산까지의 남북축을 연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서를 연결한다. 현재 데크가 지상층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중간 레벨의 데크를 제안한다. 상부 데크와 하부 데크, 지상층이 엘리베이터, 계단, 브리지를 통해 유기적이고 3차원적으로 그물망network처럼 연결되면서, 기존 도시 조직urban fabric과 세운상가 사이의 끊어진 조직을 뜨개질 하듯이 연결해 나간다. 이런 3차원적 길과 보이드는 기존의 도시 조직과 긴밀하게 연결되며,역사의 흔적과 기억을 되살리면서 기존 세운상가의 거대한 조직으로 침투해 조직을 재구성한다. 거대 구조를 그물망 같은 리좀rhizome 구조로 복원하는 것이다.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
설계공모경과 및 심사평 다음은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의 심사평 전문이다. “현재 세운상가군의 데크와 주변의 공공 공간을 재정비하여 보행 환경을 개선하고 다양한 활동을 담고 있는 주변 지역과 연계하여 서울 역사의 중심인 북악산-종묘-세운상가군-남산을 잇는 남북 보행축을 복원하기위한 목표로 진행된 이번 국제 공모에 총 82점의 작품이 접수되었다. 국내 작품이 38점, 해외 작품이 44점 접수되어 이번 국제 공모에 대한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지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심사는 종묘에서 퇴계로까지 세운상가의 데크를 직접걸어서 체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외국인 심사위원들에게는 독특한 체험이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끊어져 있는 데크를 오르내리며 세운상가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심사위원들은 데크 위를 걸으며 조용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삼삼오오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당선작Modern Vernacular 현대적 토속 김택빈(이_스케이프 건축사사무소), 장용순, 이상구 2등작Time-lapse of Lying Enormous 누워있는 거인의 저속 촬영 우의정(건축사사무소 메타), 안종환(건축사사무소 안) 3등작Urban Filter 도시의 필터 김현수(이소우 건축사사무소), 피터 윈스턴 페레토(Peter Winston Ferretto, 홍콩 중문대학교 교수),. 최성열, 안영주, 강상철
벨레녜 시티 센터 프롬나드
슬로베니아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벨레녜Velenje는 1950년대에 등장한 전원 도시the garden city라는 이상적 근대 도시 개념에 기초하여 계획된 도시로 현재 슬로베니아 도시 중 다섯 번째로 큰 규모다. ‘벨레녜시티 센터 프롬나드Velenje City Center Pedestrian ZonePromenada(이하 벨레녜 프롬나드)’는 벨레녜 도심의 중심축을 구성하는 공공 공간으로서 도시 중심 가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벨레녜 프롬나드는 도심 재활성화 사업의 첫 번째 단계로 추진된 프로젝트로서 도시에 부족한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벨레녜가 처음 조성될 당시 도입되었던 ‘공원 속의 마을town-in-a-park’이라는 도시 조성 개념을 되살리려는 목표를 갖고 진행되었다. 기존 벨레녜 프롬나드는 파카Paka 강과 중심가로 주변으로 차량 도로나 주차장 부지가 과도하게 많다는 문제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벨레녜 프롬나드에는 보행자 중심의 가로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 ‘공원’, ‘상가 거리’, ‘프롬나드’라는 세 가지 공간 조성 개념이 적용되었다. 공원 파카 강의 북쪽 둑에 조성된 공원 구역은 한쪽 면은 강으로 그리고 다른 한쪽 면은 학교 단지를 향해 놓인 운송용 도로로 둘러싸여 있다. 이 구역은 강의 급류 구간으로서 안전을 고려하여 강으로의 접근을 제한하기 위해 식재 위주의 계획을 했다. 강의 남쪽 구역은 공영주차장으로 이용된다. 도심에서 차량 도로와 주차 공간을 제한한다는 계획 방침에 따라 공원 녹지는 파카강의 양쪽 둑과 스쿨 존, 나아가 문화 센터와 전 탄광시설관리소까지 전체적으로 확장되었다. DesignENOTA(Dean Lah, Milan Tomac, Tjaž Bauer, AndrejOblak, Polona Ruparčič, Nuša Završnik Šilec, Alja Černe,Nebojša Vertovšek) Structural EngineeringElea iC Mechanical ServicesNom biro Electrical PlanningElsing ClientVelenje Municipality LocationVelenje, Slovenia Area17,020m2 Budget€2,700,000 Completion2014 PhotographsMiran Kambič, Roman Bor VideoMiran Kambič 에노타(ENOTA)는 1998년 알조사 데클레바(Aljoša Dekleva), 데안라흐(Dean Lah), 밀란 토마크(Milan Tomac)가 공동 설립한 건축설계사무소로, 2002년부터는 데안 라흐와 밀란 토마크가 대표 이사를 맡고 있다. 건축 설계와 더불어 도시적 개입을 통한 도심 활성화 프로젝트를 주로 수행해왔다. 객관적 자료와 그에 대한 분석 및 해석을 기반으로한 건축적 해결책을 내놓는 것을 목표로 건축·조경·도시 등의 공간 설계 분야를 넘어 사회·문화·경제 등의 전문 분야까지 광범위한 리서치를실시한다.
뉴 테살로니키 워터프런트
테살로니키Thessaloniki는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 주의 항만 도시다. 테살로니키 워터프런트는 에게 해를 향해 펼쳐진 3.5km 길이의 해변을 따라 조성된 선형의 공공 공간이다. 2000년에 이르러 테살로니키 시 당국은 기존 테살로니키 워터프런트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국제 건축 공모전Internationa Architectural Competition for the Redevelopment of the New Waterfront of the City을 실시했다. 뉴 테살로니키 워터프런트는 총 두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다. 첫 번째 구역(약 75,800m2)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2011년에 착공된 두 번째 구역(약 163,000m2)은 2014년에 완성되었다. 총 238,800m2의 면적으로 이루어진 뉴 테살로니키 워터프런트는 바다와 육지 사이의 경계라는 독특한 자연 및 사회문화적 생태계의 다양한 켜를 받아들여 3.5km길이의 산책로와 열세 곳의 녹지 공간 속에 풀어냈다. 이 프로젝트의 기본적인 목표는 바다와 도시의 경계지역의 생태계를 되살리고 해변을 따라 연속성과 통일성을 띨 수 있는 공공 공간을 만드는 데에 있다. 화이트 타워White Tower(북쪽 끝)부터 콘서트 홀(남쪽 끝)까지 이어지는 해변 길은 경사나 레벨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도록 처리되었다. 또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주기 위해 일정한 폭을 유지하도록 했으며, 경질 포장 처리가 필요한 모든 곳에 현장 타설 콘크리트만을 사용했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 부분(해변 길)보다 높은 레벨에 조성된 산책로는 일련의 정원을 따라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다. 해변 길과 바다의 경계에 놓인 방파제의 끝부분에는 방킬라이bangkirai 소재의 목재 데크가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의 식재 공간 사이사이에는 휴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 구역은 해안가의 상이한 두 영역인 보도와 녹지사이를 중간에서 이어주는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DesignNikiforidis-Cuomo Architects Urban / Architectural StudyProdromos Nikiforidis, BernardCuomo, Atelier R.Castro – S.Denissof Structural StudyIakovos Lavasas, Maria Stefanouri Electromechanical StudyDimitris Bozis, Panagiotis Kikidisand collaborators E.P.E., Gerasimos Kampitsis Phytotechnical StudyIloriki E.E. – Fotis Fasoulas Geotechnical StudyEvaggelos Vasilikos Supervision of the StudiesKonstantinos Belibasakis, MariaZourna, Katerina Bletsa, Eleni Fountoulidou, Sevasti Laftsidou,Dimitris Katirtzoglou, Dimitris Sotiriadis Supervision of the ConstructionAndreas Spiliopoulos, DimitrisTzioras, Nikolaos Mourouzidis, Ioanna Karagianni, SpiridoulaParaskeva ClientMunicipality of Thessaloniki LocationThessaloniki, Greece Area238,800m2 Completion2014 PhotographsAris Evdos, Bernard Cuomo, Erieta Attali, GiorgisGerlympos, Prodromos Nikiforidis, Teo Karanikas, Tsoutsas 니키포리디스-쿠오모 아키텍츠(Nikiforidis-Cuomo Architects)는 프로드로모스 니키포리디스(Prodromos Nikiforidis)와 베르나르드 쿠오모(Bernard Cuomo)가 1991년 설립한 건축설계사무소다. 그리스 테살로니키(Thessaloniki)를 중심으로 활동해왔으며 대표작으로 메네메니 문화 센터와 극장(the Cultural Center and Thatre inMenemeni), 필레아 테크노폴리스 빌딩(the Technopolis Buildingin Pylea), 뉴 테살로니키 워터프런트 등이 있다. 수상 경력으로는 2009년 그리스 건축 협회(the Greek Institute of Architecture) 건축상,2013년 아테네 재개발 사업 공모전(the Architectural Competition“Re-Think Athens”) 당선, 2015년 모네므바지아-니아폴리 해안가 재개발 사업(the Architectural Competition for the Redevelopmentof the Littoral Zone of Neapoli in Monemvasia) 당선 등이 있다.
볼 스테이트 대학교의 스튜디오 수업
지난 5월 11일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전략디자인 본부의 인턴 크리스틴 존슨(Christine Johnson)을 인터뷰했다. 존슨은 미국 인디애나 주에 위치한 볼 스테이트 대학교(Ball State University)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1월~5월)에 교수의 권유로 한국에서 인턴십을 수행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설계 교육’을 주제로 한 이번 특집의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었고, 볼 스테이트의 설계 교육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볼 스테이트 대학교는 지난 10년간 『크래머 리포트(The Cramer Report)』에서 선정한 ‘미국 내 세계적인 건축학 프로그램’에서 20위권에 올랐으며, 조경학과 학사·석사프로그램은 지난 2012년 『디자인 인텔리전스(Design Intelligence)』에서 발표한 ‘미국 조경학 프로그램 상위 10개 대학’에 선정되기도 했다._ 편집자 주 Q. 볼 스테이트 조경학과의 교과 과정이나 스튜디오환경은 한국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특히 5년제라는 점과 건축·도시·조경 통합 학부로 입학한다는 점이 한국과 크게 다른 점인데. A. 그렇다. 볼 스테이트 조경학과는 5년제로 구성되어 있다. 1학년 과정을 수료한 후, 건축, 조경, 도시계획의 세 가지 전공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본격적인 조경학과 전공 수업은 2학년부터 시작된다. 1학년은 ‘창의적 예술 교육’이라는 수업 목표 하에 일반 디자인론과 스튜디오 문화를 배운다. ‘건축 및 계획 대학The College of Architecture and Planning(이하 CAP)’에 입학한 학생들은 전공 심화 과정에 앞서 ‘1학년 공통 필수 프로그램’을 반드시 수료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디자인이라는 공통 키워드를 통해 건축, 조경, 도시 분야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목적을 갖는다. 1학년 교과 과정에 ‘디자인과 드로잉 코스’라는 기초 설계 스튜디오가 있지만 공원이나 정원 같은 전문 분야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보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배우기에 앞서 스케일 감, 도면을 보는 방법, 프리핸드 스케치 등을 익히는 과정이다. Q. 건축, 조경, 도시계획 분야 중의 하나를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게 되는가? 또 조경학과에 대한 학생들의 선호도는 어떠한가? A. 1학년 과정 수료생은 기본적으로 건축, 조경, 도시 모든 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각 학과마다 정원이 있기 때문에, 정원이 초과될 경우 성적 평가와 면접 등의 선발 절차를 거치게 된다. 사실 건축학과에 비해 조경학과에 대한 선호도가 높지는 않다. 건축학과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조경학과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이후 2년 동안, 조경학과 교과 과정이 너무 어렵다거나 충분한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의 비율이 5%가량 된다. 그렇지만 대개 조경학과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졸업하는 학생들은 조경학 프로그램에 대해 높은 만족도를 표하며, 이후 이들이 갖게 되는 직업도 조경 관련 직종인 경우가 상당수다. Q. 향후 직업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감은 어떠한가? A. 명확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재학생 대부분이 ―조경 관련 직종을 선택할 경우― 졸업 후 취업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취업의 기회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생태 복원, 정원 설계, 공원이나 마스터플랜 설계, 주거 공간 설계 등 교과 과정에서 다루었던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오피스가 다양하게 있다. 많은 학생이 설계 위주의 업무를 선호하지만, 설계와 시공을 모두 아우르는 오피스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다. 또 원하는 직장을 찾기 전까지 기타 디자인 관련 업체에서 일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버드 GSD의 설계 교육을 묻다
지난 7월 17일 본지 발행인이 그룹한 사옥에서 하버드 GSD의 전 학과장 니얼 커크우드 교수를 인터뷰했다.그는 설계 교육자라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핵심 지식을 가려내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며,디지털 매체가 발달한 요즘에도 설계 스튜디오에서 아날로그 방식이 유효하다고 강조했다.더불어 설계 중심으로 구성된 하버드 GSD의 교과 과정과 통합적 설계 스튜디오에 최적화된 ‘건드 홀’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_편집자 주 Q. 『환경과조경』 이번호 특집의 주제는 ‘설계 교육’이다. 전국 조경학과의 설계 담당 교수 열세 분에게 설계 교육의 철학과 설계 스튜디오의 진행 방식 등에 관해 질문했다. 오랜 시간 설계 중심 대학원에서 가르쳐온 당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며 인터뷰를 시작하고자 한다. 조경 교육에서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또 설계 교육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A. 설계는 조경 교육에 있어서 명백하게 중심적 역할을 한다. 예비 디자이너와 계획가인 새로운 세대를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새롭게 대두되는 연구 내용을 제시하는 역할, 즉 설계 교육 자체가 조경의 다양한 지식을 배양하는 툴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모든 조경 교과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핵심 내용―역사, 식재 등―은 비슷비슷하다.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이하 하버드 GSD)의 교육은 1901년에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등 어학과 토목공학이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의 교과 과정과 2009년 내가 하버드GSD 조경학과장(2003~2009)으로 있던 시기의 과정을 비교해 보면, 그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차이가 없다. 즉 조경 교육의 핵심core이나 철학은 지난 100여 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튜디오 교육 역시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프랑스의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교수가 아니라) 학생이 직접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기)시작해야 하는 스튜디오 교육은 리플렉티브 프랙티스reflective practice이자 주관적인 사고 과정이다. 학교측은 1대1로 가르쳐야 하는 스튜디오 시스템을 반겨하지 않는 측면도 있는데, (대형 강의와 비교해) 상대적인 비효율성과 수치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평가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조경 교육에서 그 과정을보다 객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사키 어소시에이츠Sasaki Associates를 설립한 히데 오 사사키Hideo Sasaki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학생 개개인에게 코멘트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공통의 대상지를 스튜디오 과제로 내주고 학생들이 과제를 해오면 10여 개의 과제를 벽에 일렬로 붙였다. 기존 환경을 가장 많이 보존하는 안에서부터 가장 과감하게 변화를 가져오는 안까지, 또는 가장 녹지가 많은 안에서 가장 녹지가 적은 안 순으로 나열을 한다. 이 자체가 스튜디오 강의법이다. “같은 대상지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생각과 안을 구상할 수 있다”고 말이다. 특정 안을 강조하거나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고, 각각의 안이 갖고 있는 생각과 장점, 특징 등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생각의 발전을 유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지난 15~20년 사이 스튜디오 시스템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의 방식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해 온 것이다. 근래에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아날로그 방식만 존재하던 스튜디오 시스템을 접하지 못했다. 그 결과 요즘 학생들은 크리틱을 받기 위해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난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진행하는 크리틱을 거부하는데, 이런 경우 학생들에게 “네가 화면으로 보여주고 있는 도면의 스케일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그럼 대부분의 학생들이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변명하기에 바쁘다. 혹은 “우리가 3분 전에 봤던 그림을 다시 볼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면, 학생들은 잠깐만 기다리라며 폴더를 뒤적거린다. 나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크리틱은 특정 스케일로 프린트하거나 핸드 드로잉을 벽면 혹은 책상에 펼쳐 두고 해야 한다. 이는 컴퓨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과정을 위해서는 아날로그 방식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설계법은 시공 도면을 그리거나 적산 등의 과정에서는 매우 좋은 방식일 수 있다. 하지만 개념 생성 단계나 디자인 발전 단계에서는 아날로그 방식이 더욱 적합하다. Q. 역사적으로, 특히 20세기 말 이후 하버드 GSD 조경학과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의 지향점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A. 그간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나 회복탄력성resilience 등에 대한 전문가가 생겨났을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반면 학교 밖 실무의 98%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아카데믹한 측면에 집중하는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그러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실무를 병행하지 않기에 현실을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행’은 변화한다. 과거 유행을 주도했던 개념이나 이론들 가운데 이제는 거론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한때 구조주의structuralism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되면서 관련된 책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 대한 담론이 사라졌다. 물론 이런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변화하고 있느냐를 이야기하기 전에, ‘무엇이 변화하지 않는지’를 얘기해야 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핵심 지식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런던의 템스 강은 1970년대에는 6주씩이나 얼어서 녹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위에서 축제를 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얼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지구의 온도는 40여 년에 걸쳐 변해 왔다.
우리가 바라는 스튜디오 수업
이번 호 칼럼의 핵심은 이 문장으로 요약된다. “진정한 교육은 선생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주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건축·도시·조경 설계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세 교수가 참여한 좌담에서도 ‘자기 주도 학습’에 방점이 찍혔다. 유대인의 교육법인 탈무드에 나오는 ‘현명한 부모는 아이들에게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격언 역시 일맥상통한다. 교육이 ‘일방적’이어선 안 되는 까닭은 이외에도 무수하다. 하지만 강의식 수업을 ‘자기 주도’로 진행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모든 교육이 자기 주도적이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의·토론·스튜디오·실험·실습 수업의 적절한 안배가 필요하다. 그 비율은학과(학문)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 조경학과에서는 이 모든 형식의 수업이 가능하고 요구된다. 그중에서도 학생의 ‘자기 주도’가 특히 빛을 발하는 경우는 아무래도 스튜디오 형식의 설계 수업이다. 결국 그림은 학생이 그리는 것이니까. 그리고 ‘자기 주도 학습’의 주인공은 두말할 필요 없이 학생이다. ‘설계 교육’을 특집 주제로 정하고 나서, 그 주인공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금 여기의 설계 교육을? 스튜디오 중심의 설계 수업을? 당연한 궁금증이기도 했다. 교육의 주체는 가르치는 자 못지않게 배우는 자이니까. 가르침만 있을 수도, 배움만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전국 34개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통신원에게 물었다. ‘①설계 교육에서 기억에 남는 점이 있다면, ②스튜디오 수업에서 아쉬웠던 점은, ③어떤 설계 교육을 원하는가’ 다음은 거칠지만 생생한 그들의 바람이자 강의 평가다. 때론 울분이, 때론 애정이 행간에서 진하게 읽혔지만, 설계 교육에 대한 무관심과 스튜디오 수업에 대한 무지가 나타난 경우도 있었다. 그중 일부를 옮긴다. 이 역시 지금 여기의 ‘설계 교육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일부 경어체를 살리기도 했지만, 문맥상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에는 일부러 경어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교수님들께서는 오해가 없으시기를). 왜 고래만 춤춰야 하나요 “설계 수업을 들으면서 항상 드는 의문점은 ‘왜 교수와 강사는 비판만 하는가’다. 매주 진행되는 크리틱에서 내가 들은 말은 칭찬보다는 날카로운 비판이 더 많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설계 수업에서는 왜 칭찬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학생의 도면에 비판을 더 많이 하는 것이 우리 학교만의 분위기인지도 궁금하다. 생태와 설계가 제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도 중요한 고려사항일 텐데, 생태 교수님과 설계 교수님의 지향점이 너무 다르다. 수목학과 설계를 동시에 배우고 있어서, 학생들은 설계를 할 때 자연스럽게 나무의 수종과 배치에 대해서도 고려를 하게 된다. 그런데 생태학 수업에서 배운 대로 나무를 배치하면 ‘예쁘지 않기’ 때문에 고치는 게 좋겠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과연 어디에 중점을 두고 나의 설계 방향을 잡아나가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설계, 그 단어만 들으면 감탄사가 나오는 아주 멋스러운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조경학과에 입학한 후 현실로 다가온 ‘설계’는 나의 잠을 빼앗고 스트레스를 주는 고민덩어리다. 우리 학교에서는 단일 설계 수업도 있지만, 타과와 공동으로 건축도 함께 배울 수 있는 연계 전공을 개설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강의를 수강하며 내가 느낀 것은 ‘혼란’ 그 자체다. 한 주 한 주의 과정이 효율적이지 못하고, 두 교수님의 스타일과 선호하는 지향점이 너무나도 달라 6주간의 수업 뒤, 다른 교수님을 마주했을 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만 같았다. 6시간이라는 스튜디오 시간 동안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가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또 우리가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이 커졌다. 나는 설계 교육은 좀 더 체계적이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창의성, 한마디로 설계에 대한 ‘센스’를 키우는 교육이길 바란다. 어떻게 하면 교수님께 덜 혼날까를 걱정하는 내가 아닌, 내가 생각한 것을 오늘은 또 어떻게 들어주실까를 기대하게 된다면 좋겠다. 정답이 없는 과목에서 이미 선생님의 머릿속에 그려진 정답을 찾길 바라는 것부터가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마지막 결과물을 보면 모두 비슷비슷한 패널들이 걸리는 것만 봐도 현설계 교육의 문제점을 짐작할 수 있다. 때로는 그 방향을 잡아주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며 손쉽게 성적을 매겨버리는, 그런 혼란만 주는 설계교육은 바뀔 필요가 있다.”
설계 교육의 내일을 고민하다
설계 교육은 단지 설계의 테크닉을 가르치는 수단이 아니다. 스튜디오 중심의 설계 교육은 미래의 조경가에게 비전을 심어주고 자기주도적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조경 교육의 핵심 과정이자 방법이다. 그러나 설계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설계 자체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 제도권 조경 교육의 역사는 이미 40년을 넘어섰지만 설계 스튜디오가교육 과정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설계 교육은 예전과는 다른 지평을 열었지만, 여전히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지난 6월 5일, 같은 학교에서 건축설계, 도시설계, 조경설계를 가르치고 있는 세 명의 설계 교수를 『환경과조경』의 회의 테이블로 초대했다. 설계 교수의 역할, 설계 교육의 목표, 건축·도시·조경의 통합적 설계교육과 분야 간의 왜곡된 협업 구도, 설계 교육의 과제등 설계 교육의 다층적 논점에 대한 토론이 자정을 넘겨 펼쳐졌다. 스튜디오 교육의 지향점과 설계 교수의 고민 배정한: 어려운 걸음, 감사드린다. 오늘 서울시립대학교(이하 시립대)에서만 세 교수님을 모신 이유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도시과학대학이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서 건축, 도시, 조경 교육의 시너지를 실험하고 있는 시립대 선생님들로부터 얻을 게 많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현재의 교육 구조와 설계 환경에서 설계 교육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지, 학교의 설계 스튜디오는 교육 수요자의 요구에 답하고 있는지, 건축·도시·조경의 통합적·협력적 설계 교육은 가능한지 등 설계 교육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쟁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설계 교육자의 역할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할까 한다. 설계 교육에서는 외적 환경도 중요한 이슈이지만 내적 구성원이라는 요인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설계 교수로서 그간의 고민을 자유롭게 들려주시면 좋겠다. 김아연 교수는 최근에 설계 교육을 주제로 한 논문을 몇 편 발표하기도 했는데. 김아연: 늘 고민이다. 고민을 이론적으로 해소해 보고자 논문을 써보았다. 이번 좌담에 참여한 세 명 모두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교수가 되었다. 설계 교수 이전에 설계가였다. 그런데 학교 밖에서 설계를 하는 것과 학교 안에서 설계를 가르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설계를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설계를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무의 복잡한 상황에는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으로 대처할 수 있었지만, 학교 수업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기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교육자로서 갖추어야 할 교육 방법론을 배우지 못한 상황에서 강단에 서게 되니 자연히 문제가 발생한다. 교수도 학생도 모두 불만족스럽다는 게 뻔히 보이지만, 그 원인에 대한 분석조차 쉽지 않다. 설계 교육의 문제점이 설계 그 자체에 있지 않다는 점이 분명했다. 그래서 겉핥기 수준으로라도 교육학을 새롭게 공부하며 설계 ‘교육’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자구책으로 설계 교육을 주제로 한 논문을 쓰기 시작한 셈이다. 우선 학생들이 설계 교육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부터 파악했다. 3~4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설계 교육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계 교육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지 설문을 해보았다. 그 결과 대략 현상은 파악되었지만 개선할 방법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워싱턴 대학교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유익한 자극을 받았다. 스튜디오 페다고지pedagogy를고민하는 일군의 교수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그 과정에서 한 대학원생이 진행한 관찰 연구를 접했다. 교육대학원의 박사 과정 학생이 두 학기 동안 조경 설계 스튜디오에 참여해 내부자적 관점에서 수업 관찰을 시도한 것이다. 교육학 전공자들은 방법론적 관점에서 스튜디오 교육에 주목하고 연구하고 있는데, 정작 스튜디오 수업을 운영하는 우리는 교육학적 반성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배정한: 논문을 쓰면서 파악한 설계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김아연: 우선 설계를 근대적 패러다임의 이론 수업처럼 가르치는 점이다. 현대 교육학에서는 지식을 교수가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구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구성주의적 교육 방법 중 스튜디오 수업은 최근 그 중요성을 주목받아 여러 분야에 도입되고있다. 그런데 스튜디오라는 틀 속에서도 많은 설계 교수들은 일방적으로 지식이나 기법을 전달하려고만 한다. 학생들은 할 수 없이 교수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고 점검을 받고 교수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스튜디오 고유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학생들이 스튜디오 수업을 이론 수업보다 더 무서워하고 폭력적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꽤 있다는 점이다. 강의식 수업은 그냥 앉아서 듣기만 하면 되지만, 스튜디오 수업은 대면 방식이어서 수업의 모든 과정이 개인적 차원으로 다가온다. 관계가 긴밀한 만큼,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교수를 만나게 되면 적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설계를 좋아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스튜디오 수업 자체에 대한 부담감이 진로 결정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건축이나 도시 분야는 사정이 좀 나을 수도 있지만, 조경학과의 경우엔 스튜디오 교육을 받지 않았던 분들이 스튜디오 수업을 맡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고 스튜디오 교육을 받은 교수들도 자신들이 학생 때 받은 도제식 스튜디오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배정한: 건축학과는 건축학 인증제 도입 이후 설계 교육이 더욱 강화되는 동시에 이제 어느 정도 체계화·안정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김소라: 건축학과에서는 이제 스튜디오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스튜디오 수업을 담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속적으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교육 방식의 트렌드도 바뀌어 왔다. 과거의 설계 교육은, 유명한 건축가가 가르치든 실무를 하는 교수가 가르치든, ‘이 방법을 따라 하라’는 식이었다. 검증된 방법을 그대로 따르는 도제식 교육이 과거 서양이나 우리나라 설계 스튜디오의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설계 교수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스튜디오 담당 교수들이 교육자의 역할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실무를 하다가 강단에 서게 되면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무척 고심했다. 도제식의 강압적 방식이 아닌, 새로운 교육 방식이 무엇일까를 계속 모색했다. 건축 스튜디오를 맡고 있는 다른 설계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도 고민은 늘 비슷하다. 내 경우는, 나만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전수하기보다,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각자의 장점을 깨달을 수 있도록, 자신만의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방식에도 단점은 있다. 학생마다 코멘트를 달리하다 보니 오히려 아이들이 개별적인 코멘트에 의지하게 되는 역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설계 스튜디오는 정답이 없는 선택의 문제’라고 늘 이야기해 준다. 내가 해주는 코멘트는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으로서 어떤 선택이 옳을 것 같다는 조언일 뿐이므로 하나의 정답으로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러한 스튜디오의 특성과 틀을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취사선택하는 태도를 보이는 학생들은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반대로 개별적인 코멘트를 그대로 따르는 학생들은 결과물이 좋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경우, “녹음해도 됩니까”라고 묻는 학생도 있다. 학생들의 만족도가 대체로 높다는 점은 나로서는 위안거리다. 배정한: 교수 입장에서는 에너지 소모가 무척 많을 것 같다. 김소라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김아연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유석연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사회배정한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홍윤순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조경학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설계 교육은 ‘문제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실천적 응용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얽혀 있는 세상에서 엄밀한 판단을 요구받고 있다. 즉 시시각각 쏟아지는 정보의홍수 속에서 명료한 의사결정을 하고, 이를 조경계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와도 신속히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론 교육을 통해 습득되는 다양한 지식은 하나의 상태로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확대·재생산·진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세상은 조경의 영역이 기존 고유의 범위를 넘어 인문학과 사회학으로, 생태학으로, 미래학으로 끊임없이 확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작금의 현실에서는 이렇듯 복잡하고 유동적인 상황에서 문제를 종합하고 해결하는 메타 인지meta cognition 능력1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이에 최근에는 학생들이 ‘무엇이 진실로 중요한 문제인지를 판단하고 정리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자극하고자 한다. 예를들어 프로젝트 또는 대상지에 내재된 본질적·구조적 문제를 스스로 규정해 보게 하고, 이를 타파 또는 개선하기 위해 요구되는 전략과 수단, 세부 설계까지 일관된 뚝심으로 관철시킬 것을 요구한다(허나 실로 말이 쉽지 어려운 문제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최정민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가르치다’라는 단어의 정의를 적용하면, 설계를 가르친다는 것은 ‘설계를 깨닫거나 익히게 하는 것’이다. 당장 난감해진다. 설계를 익히게 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은데, 어떻게 깨닫게 하지? 그래서 오랫동안 설계 교육은 설계를 익히게 하는 데 초점을 두었나 선 긋기, 심벌 그리기, 스케치 등으로 시작하는 설계(드로잉) ‘익히기’는 내가 조경 공부를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해오던 방법이다. 여전히 유효하고, 오히려 더욱 강조되기도 한다. 교육의 성과를 취업률로 평가하는 시대에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사 자격증 취득이 독려되고, 제도판과 T자를 이용하여 드로잉하는 기사 시험을 위해서는 드로잉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것 이다. 손이 빠르고 좋은 드로잉은 선망의 대상이다. 좋은 드로잉이 좋은 설계라는 인식에 대한 지지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지만, 그 대안들에 대한 지지도가 오르는 것도 아니다. 좋은 드로잉은 반복을 통한 숙련이 필요하다. 약간의 재능이 더해진다면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지만, 평범해도 반복적 연습을 통해 일정 수준에 이를 수 있다. 반복의 지루함을 이겨내고 일정 수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칭찬보다 따끔한 지적과 훈육이 유효했던 것 같다. 흔히 ‘도제식 교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방식은 교육자의 경험이 중시된다. 교육자의 취향이 녹아있는 경험은 권위이자 권력이다. 그를 존중하고 따르는 것은 피교육자의 의무이자 피교육자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척도다. ‘같은 사람에게 교육받은 학생들은 같거나 유사한 스타일을 가지게 되는 교육이 현대 사회에도 유효할까’, ‘교육자가 교육받은 시대의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이 미래에 활동할 세대에게도 유효할까’와 같은 회의적 자문을 하게 된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뚜렷한 대안을 찾기 어렵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조동범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설계는 조경 교육에서 기초와 근간을 이루며 종합적 지식과 사고를 배양하는 매체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설계 교육의 지엄한 명제이자 한편으로는 설계 교육이 필요한 최소한의 근거를 들 때 구차하게 동원되기도 하는 말이다.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 교육자들은 다른 분야와 비교해 설계 교육의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그만의 전문성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 고민의 골이 점차 깊어지는 배경에는 ‘설계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 뿐더러 설계 분야에서 꿈을 펼치기도 어렵다’는 인식이 짙게 개입되어 있다. 설계 시장이 위축되어가는 상황에서 어려운 점은 ‘설계를 할 것도 아닌데 어렵게 설계에 매달려야 하나요’라는 의문에 답을 주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인가에서 설계 교육의 중요성을 찾는 것인지 모른다. 공무원과 같은 보다 안정된 직업을 선택하려는 학생들에게 설계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일은 설계 교육에서 꽤나 어려운 일이다. ‘안정적 진로’라는 말이 어째서 ‘설계 과목 기피’의 의미로 통용되는지 모르겠지만, 취업을 앞둔 학생들의 판단을 무시하기도 어렵다. 우선 얕은 곳에서부터 설계 교육의 필요성을 찾아본다면, ‘공무원이 된다 해도 자체 설계를 할 수도 있고 외주 설계를 맡길 때에도 설계 과정을 감독하고 현장까지 돌보려면 설계 마인드가 있어야 해’라든지, ‘설계 사무소이든 시공 현장이든 경력을 쌓은 다음에 공무원이 된다면 더욱 인정받지 않을까’, 심지어 ‘민간 영역과 공적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채용 방식이라면 설계 경험이 도움이 될 텐데’ 정도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넘어 교육자 사이에서 공유되는 생각일 것이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정태열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조경 설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과학적·예술적으로 파악하여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간’으로 표현하는 창조적 행위다. 설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상적인 풍경이나 공간을 보고 그 공간을 잘 느끼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행태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나는 학생들에게 많이 보고 느끼고 상상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공간을 만들 때 그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면 죽은 공간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조경 설계는 과학과 예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수학처럼 객관적인 수식에 의해서 설계의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설계의 의사 결정 단계에서는 다양한 판단 기준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계획 단계에서는 사회적 배경, 경제적·환경적 제약 조건, 토지 고유의 가치 등을 파악하여 객관성과 논리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며, 설계 단계는 창조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경험, 가치관 등 개인적인 능력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조경설계는 환경 인지 능력 및 사적인 감성을 높이고, 토지가 갖고 있는 고유의 가치를 발견하여 극대화시키고, 사람들에게 감흥을 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조경 설계를 가르칠 때 공간에 대한 개념, 표현력, 편집 능력 등을 요구한다. 한편 조경 설계는 토목, 도시, 건축, 산림, 예술 등 관련 분야와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인간 주변의 모든 환경이 대상이 되므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고 경험해 지식의 영역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최근 토목, 도시, 건축 등 관련 분야 전문가와 협업이 늘어나고 있는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조경가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꽃. 나무, 새, 동물 등)을 다루는 기술, 즉 ‘자연과의 접점’을 만드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정욱주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기본적으로 오픈스페이스를 다루는 직접적인 기술의 습득을 목표로 한다. 공간은 쉽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한 지식의 축적과 가상 훈련이 필요하다. 전문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함부로 다뤄진 공간을 경험해보면 왜 설계가 중요한지 알게 된다. 공간은 자원과 같은 것이라서 활용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공간과 쓰임, 이 두 단어가 조경 설계 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설계 교육의 목적은 공간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교양의 차원까지 넓혀 논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설계 교육을 통해 생각을 전개하는 방식을 찾게 하고, 대상을 보는 안목을 높이고, 이치와 관계를 이해하게 하고, 구상을 실행에 옮기는 추진력을 장착하게 하는 것이다. 즉 설계 교육이 자아를 실현하는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삶의 주인공이 되고 경쟁력 있는 사회인으로 자라나게 하는 유용한 인문 교육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Q. 설계 스튜디오, 어떻게 구성하여 진행하고 있나? A.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원과 공원에 대한 설계스튜디오 두 과목을 진행하고, 3학년은 식재 설계, 4학년은 졸업 설계 스튜디오, 그리고 대학원에서는 대규모 도시 조경 설계 연습과 식재 계획과 설계까지 총 여섯 과목의 스튜디오를 담당하고 있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이애란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Why: 조경 교육을 받고 20여 년 실무에서 활동하다 학교로 돌아온 입장에서 본 조경이란, 통찰력과 조직적 사고 체계를 가지고 과학적 연구와 창의적 설계를 넘나들어야 하는 실용 학문 분야다. 조경의 범주, 과정, 결과물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생적 다양성은 장점과 단점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유리한 점으로는 대규모 신도시부터 작은 화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를 다룰 수 있고, 인문사회과학부터 자연과학에 이르는 기초 학문과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능력 그리고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사고 체계 능력까지 고루 섭렵하는 내용적 범위다. 단점으로는 위와 같은 다양한 범주를 소화하여 자기화한 후 창출해내는 과정의 어려움과 지속가능한 결과에 대한 무한한 갈증 그리고 일반인에게 완전히 이해시키기 힘든 우리 영역의 구체화된 설명일 것이다. What: 교육으로서의 조경 설계는 위와 같은 과정의 학습과 결과적 산물 만들기, 일반인에게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사고하고 창출해내는 필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조경의 대상에 대한 이해와 기초적 학문의 습득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생물, 자연환경 그리고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전문적 기초 지식으로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통찰력과 조직적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조경의 다양성을 자유자재로 다루거나 체계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생각은 거시적 안목으로 넓고 크게, 실천은 대상지로 들어가 현실적인 최적안으로’ 만들어야 한다. 셋째, 양날의 검처럼 중요한 창의적 사고와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좌뇌와 우뇌, 마음과 몸이 완벽할 순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마지막으로 ‘소통의 리더십’이다. 조경의 대상은 절대 하나의 전문 영역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범주를 가지고 있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윤영조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학교로 직장을 옮긴 지 이제 갓 3개월 정도 지나고 있다. 여러 교수님들의 교육과 설계 내공을 따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선뜻 설계 교육에 대한 의견을 표하기가 조심스럽다. 조경 설계 실무를 하면서 신입 직원들을 보고 느꼈던 몇 가지 대학 설계 교육에 대한 단상과 정원 설계 과목을 진행한 경험을 토대로 답하고자 한다. 최근 대학의 설계 교육은 업역의 세분화와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아 범용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설계 교육은 조경 분야의 실무(기획, 계획, 설계, 시공, 감리)를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목이며, 조경 이외의 분야에서 요구되는 업무 프로세스와도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대학에서의 체계화된 설계 교육을 통해 사회적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우수한 자질의 계획가, 조경 디자이너, 시공 전문가를 배출할 수 있다. 설령 조경 외의 분야로 진출하더라도 계획 및 설계 프로세스 수행 단계에서 습득하게 되는 인문·자연·물리적 환경에 대한 이해력과 분석력, 사고력, 기획력, 표현력은 필수적인 업무 수행 능력이 될 수 있다. 대학의 설계 교육 현장과 설계사무소를 겸직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근래 설계 분야 기피 현상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당연시되던 공급자 위주 설계 교육에서 수요자 중심의 교육으로 그 궤도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양건석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21세기에 들어 정부나 기업체는 ‘디자인은 국가 경쟁력의 열쇠다’라고 강조하면서 산업 디자인 분야에 엄청난 지원을 쏟아 붓고 있다. 디자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조경 설계 분야는 여전히 3D 업종에 버금가는 냉혹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조경과 인접한 타 분야는 ‘통합’을 내세우며 조경 고유의 영역을 다루고 있다. 조경만의 고유한 업역을 강조하고 새롭게 발전시켜야 하는 이 시기에 설계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설계 교육은 조경의 특성을 극대화하고 타 분야와 구별되는 조경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현재 조경학과에서 설계 이외에도 다루어야 하는 분야가 너무 많다. 각 학교마다 지역별, 문화별, 학문별로 특성화해서 설계 교육을 진행하면 좀 더 나은 수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조경 설계 분야에 특화된 인재가 좀 더 많이 배출될 수 있을 것이다.1 설계 수업을 통해 학생은 조경 계획·설계·시공·관리 분야에 대하여 디자인 프로세스2를 적용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 창의적인 설계는 디자이너가 본인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과정으로 디자인 프로세스를 완벽하게 수행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은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멋진 조경 설계 도면을 그려내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지독한 디자인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설계안은 점차 진보되어 간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황당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설계에는 반드시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안세헌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설계를 가르치기에 아직 부족함이 많다. 설계 교육에 대한 철학도 부재하고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문제 역시 큰 고민이다. 설계 교육이 단편적인 몇 장의 드로잉과 전문적인 기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초 학습과 연구가 필요하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체계적인 조경학과 커리큘럼과 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는 지난 30년 동안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조경 계획 및 설계 분야에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고 자부한다. 가천대학교의 설계 특성화 중심에는 설계 교육에 대한 철학이 분명했던 몇 분의 좋은 선생님들이 계셨다. 이 분들의 협업이 설계 교육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진행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 민경현 교수의 한국 전통 조경에 대한 이론적 토대는 설계 교육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으며, 퇴임하신 우정상 교수의 정원 설계 교육과 김덕삼 교수의 공원 설계 교육은 설계교육의 실무적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시대를 앞서는 안목과 조경가의 자세를 강조하셨던 최정권 교수는 조경 계획 분야에서 큰 가르침을 주었다. GIS 분야의 권위자인 김은형 교수의 컴퓨터 설계 교육과 산림 생태 분야의 전문가인 전승훈 교수의 식재설계 교육은 설계 교육이 질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이형숙 교수의 공간 디자인 기초교육은 창의적인 설계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서예례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영국의 건축 비평가인 레이너 벤험Reyner Banham은 그의 마지막 에세이 “블랙박스: 건축의 비밀 직업A Black Box: The Secret Profession of Architecture” (1990)에서 건축architecture과 건물building의 차이는 ‘무엇what’이 아닌 ‘어떻게how’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건축 행위가 건물을 짓는 것과 차별화되기 위해서는 스튜디오 문화인 도제식 작가주의에서 비롯된 ‘블랙박스’의 신비로움을 좇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게 되는recognised by its output though unknown in its contents” 텅 빈 블랙박스와 같은 건축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행위적 가능성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건축뿐만 아니라 조경·도시설계 등 스튜디오 문화에 기반한 모든 설계교육에 여전히 적용할 수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강사와 학생간의 심도 있는 교류, 경쟁과 팀워크의 시너지, 다양한 미디엄의 활용, 그리고 생산적 비평과 담론을 기반으로 하는 설계 교육의 스튜디오 문화는 타분야에서는 보기 드문 강력한 행위력을 내재하고 있다. 지식의 전수라는 위계적 관계 대신 상호 협력의 수평적 공동체가 주가 되는 스튜디오 문화는 예상할 수 있는 ‘결과’보다는 미지를 지향하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설계 스튜디오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에 초점을 두게 되며, 결과 대신 탐구적 실험의 과정을 통해 공간 및 환경 분야의 창의성과 실천적 행위성을 함께 모색하고 축적해 나가는 기반을 제공한다. 나아가 설계 교육은 학교 내에서 소진되는 일시적 교육이기보다는 사회 진출 후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될 수 있는 지식과 행위 생산의 플랫폼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행위 구조가 상호 유동적으로 얽혀 있는 글로벌 사회에서 다양한 미디엄을 통해 공간과 환경을 다룰 수 있는 건축·조경·도시설계 전문가들은 스페셜리스트이기보다는 제너럴리스트로서 강력한 행위 능력을 지닌다. 이들은 좋은 디자이너인 동시에 연구자·교육자·코디네이터·시민운동가·회계사·컨설턴트·선동가·사업가·정치인·공무원의 역할을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는 트릭스터trickster가 되어야 하며, 설계 교육은 이러한 다각적 행위자들을 길러내기 위한 생성적 방법론을 고민하고 실험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민병욱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학생들은 설계 스튜디오를 통해 한 분야에서―물론 이번 경우에는 조경이 되겠지만―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이론과 실천의 내용을 분석analysis과 합성synthesis의 과정을 통해 종합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특히 응용 학문의 관점에서 조경을 보게 되면, 설계 스튜디오는 학생들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실천적으로 익힐 수 있는, 교과 과정을 통틀어 가장 중심이 되는 학업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설계’가 교육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설계를 배운다’가 설계 스튜디오에서 ‘어떤 주제를 다루느냐’를 앞선다―은 그 자체만으로 지극히 지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경이 다루는 설계 대상이 주로 공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공공 오픈스페이스라는 점에서,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프로젝트의 가치를 공증받을 수 있는 정합성에 기초한 소통의 역할을 학생들에게 강조해야 한다. 나아가 문제를 찾고 정의하는 분석 과정에서는 비판적인 사고를,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고 공간의 형태를 잡아가는 합성의 과정에서는 추론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물론 예쁘고 세련된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도 설계가로서 지녀야 할 중요한 자질 중 하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배우고 익혀야 하지만, 이러한 설계 과정은 주관적이고 감각적 영감의 결과물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타인에 의한 훈련보다는 학생 각자가 스스로의 안목과 소양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김영민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기계공학이나 토목공학 분야에서도 설계 교육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설계가 공학의 정체성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설계 교육이 조경 교육의 중심이라는 생각에는 조경의 정체성이 기술이나 과학의 영역보다는 예술, 더 넓게는 문화의 영역에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렇게 볼 때 설계 교육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문화적 영향력을 지닌 예술적 공간을 구상하고 구현하는 종합적인 능력이다. 그렇다면 그 능력을 어떠한 방식으로 배양해야 하는 가? 얼핏 생각하면 선생의 능력이나 철학에 따라 설계 교육의 성패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제도권 교육에서 설계 교육 방식의 핵심은 선생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학교에서 적용하고 있는 설계 교육 시스템은 서구, 그중에서도 미국의 시스템을 따르고 있다.1 다른 대안의 여지를 주지 않는 범용적인 제도권 교육에 반감을 가진 이들도 많지만, 400년에 걸쳐 수정되고 발전되어 온 이 시스템이 매우 강력하고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선생 개개인이 대답할 문제가 아니라 이미 전 세계의 대부분의 학교가 따르고 있는 모범 답안이 분명히 있는 문제다. 라이트의 탈리에신2이나 솔레리의 아르코산티3와 같이 제도권 교육과는 전혀 다른 교육 방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면 이 주어진 모범 답안에서 벗어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권진욱
Q. 설계 교육은 왜 중요한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A. 문화의 생산·유통·소비 체계에 조경을 비유하자면 ‘설계하는 것과 그에 따른 결과물’은 문화의 생산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조경이 다루는 영역의 범주가 방대하여 ‘설계=생산’의 등식이 언제나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만드는 설계의 중요성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설계에서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대한 질문에 앞서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설계 교육에서 ‘집합 교육’이란 무의미하다. 하나의 단어 혹은 하나의 현상에 대한 감성은 개별적이며, 설계는 공식을 대입하여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주로 학생 개개인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이끌어내면서 학생 자신이 생각하는 의도에 가장 가까운 설계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교육한다. 그 외에 나의 또 다른 역할이 있다면 학생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외의 가능성을 조금 더 제시하는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대한 대답으로 돌아가면, 나는 경로를 만들어가는 것을 가르치며 그 경로 상에 펼쳐지는 연출과 경로 상에 전개되는 체험의 방법을 만들어가는 것에 수업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따라서 나는 학생들에게 설계자가 아닌 체험자의 관점으로 그 경로를 연상하며 피드백 하기를 권유하고 싶다. 간혹 학생들로부터 “설계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많은 경관을 감상하고 그에 대한 감성을 머릿속에 담아두어라”라는 당부가 전부다.
설계 교육의 단면들
설계 교육은 단순히 설계 지식과 기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 이상이다. 스튜디오 중심의 설계 교육은 조경 교육의 핵심적 과정이자 통합적 방법이다. IFLA-UNESCO의 조경교육헌장(2005)과 ECLASEuropean Council of Landscape Architecture Schools의 조경교육지침(2010)은 설계 스튜디오에 조경 교과의 절반 이상을 편재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설계도 어렵고 교육도 어려우니 ‘설계 교육’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우리나라 조경 교육에서도 설계 교육은 다양한 차원의 현재진행형 과제를 안고 있다. 현재의 교육 구조와 설계 환경에서 설계 교육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가? 설계 교육의 구성과 과정 그리고 교수법은 적절한가? 교육 수요자인 학생은 설계 스튜디오 교육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학교의 설계 교육과 실무 설계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조경·건축·도시설계를 가로지르는 협력적·통합적 설계 교육은 가능한가? 설계 교육은 도시와 환경의 미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_ 권진욱, 김영민, 민병욱, 서예례, 안세헌,  양건석, 윤영조, 이애란, 정욱주, 정태열, 조동범, 최정민, 홍윤순 • 설계 교육의 내일을 고민하다 _ 김소라, 김아연, 유석연 • 우리가 바라는 스튜디오 수업 _ 31기 학생통신원 • 하버드 GSD의 설계 교육을 묻다 _ 니얼 커크우드 인터뷰 • 볼 스테이트 대학교의 스튜디오 수업 _ 크리스틴 존슨 인터뷰
[칼럼] 조경의 페다고지를 논할 때다
대학 신입생 시절, 영어 토론 서클의 첫 텍스트가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였다. 원서를 읽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내용에는 쉽게 공감이 갔다. 진정한 교육은 선생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주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는 게 책의 메시지였다. 시간이 한참 흐른 요즘 나는 교수법이나 교육론으로 번역되는 페다고지에 다시 관심을 두고 있다. 올해로 조경학과에서 교수로 생활한 지 20년이 되는 나는 오는 가을 학기부터 1년간 연구년을 가질 참이다. 과연 내가 학생들과 함께 진행하는 수업방식이 최선인가? 매너리즘에 빠져 유사한 수업내용과 과제를 반복하지는 않았는가? 내 수업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 체계를 완성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교육 현장의 실존적 고민을 연구년 동안 풀어야 할 숙제로 삼았다. 최근에는 우리 학과 교수들과 학생 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교과 과정의 개편과 신규과목 개설에 관한 논의는 늘 있어 왔지만, 이번 논의는 보다 절박한 상황이 계기가 되었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여러 교수가 지닌 역량을 어떻게 수렴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점점 감소하는 대학원 입시 지원율에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등이 핵심 주제다. 교과 과정의 구성과 수업 간의 교육 내용 조정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지만, 교수 방법에 대한 문제까지도 함께 토론할 계획이다. 페다고지에 관한 논의는 교육 과정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나는 두 학교에서 학과장을 맡아 교육 과정을 계획하는 일을 경험했다. 조경학과의 교육 과정이 이론theory, 테크닉technique, 실기praxis의 세가지 틀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은 역사와 비평, 인접 분야에 대한 지식을 다룬다. 테크닉은 생태나 공학적 지식과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을 기른다. 실기는 주로 스튜디오 과목으로 현장 중심의 프로젝트 수행 역량을 다룬다.학교마다 어떠한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라는 교육의 비전이 다르기 때문에 상이한 교육 과정을 구성하게 된다. 내가 조경 교육 과정을 다룰 때 고민했던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론, 테크닉, 실기 영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교수를 처음 시작하던 무렵 한 선배 교수가 던진 질문은 늘 나를 고민하게 해왔다. 조경의 현실 상황이 열악한데 지나치게 추상적인 담론에 몰두하는 것이 타당한가? 너무 많은 이론적 지식만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준비시키는 데 소홀하지 않는가를 늘 염두에 두곤 했다. 둘째는 조경 교육의 핵심 영역과 주변 영역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조경가에게 요구되어 온 지식이나 기술과,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롭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전자는 생태적 지식과 땅을 다루는 기술이고, 후자는 지역 커뮤니티와 협력하고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한정된 시간의 교육 과정에서 역량을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는 늘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셋째는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교육 과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의 조경 교육은 해외 대학의 교육과정을 도입해 변용해 왔다. 그러나 사회적 배경이 다르고 졸업생이 취업하는 시장이 상이한 상황에서 유사한 교육 과정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에게 적합한 조경 교육의 내용과 형식을 찾아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쉽게 찾기는 어렵다. 공론의 장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내용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테크닉이나 실기보다 이론이 과잉인 상황이다. 현장에서 요구되는 조경 고유의 지식 체계와 기술력이 빈곤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없다. 최근 조경계 전반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건설 경기의 위축 등 외부적 상황 때문이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에 질 높은 서비스로 대응하지 못한 내부적 상황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빈곤한 실무분야의 근원을 따지다 보면 조경 교육의 부실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교육 현장의 교수들은 교육에 관해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했는가?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 학계는 조경 교육에 관한 논의에 인색한 편이다. CELACouncil of Educators in Landscape Architecture를 비롯한 여러 외국 학회에서는 조경교육에 관한 다양한 발표와 토론이 전개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히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조경 교육 과정과 교육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한국조경학회지』(2015년 2월)에 실린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의 ‘조경 교육에 있어 학습자 중심 스튜디오 수업의 쟁점’이라는 깊이 있는 연구를 발견할 수 있어 반가웠다. 미래를 변화시키려면 교육에 주목해야 한다. 후속세대에게 좋은 조경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일이다. 이제 조경 교육에 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자.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서로 교육 현장의 고민을 나누자. 그리고 교육의 내용과 결과물을 공유하자. 좋은 시도와 성과는 많은데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조경 교육, 서서히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대학정원이 축소되고 취업난이 가중되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조경을 공부하는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조경진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서울시 공원녹지 총감독, 서울그린트러스트 상임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 마곡지구에 본격적인 식물원을 도입하면서공원과 결합하는 작업의 코디네이터인 마곡중앙공원 총괄계획가를맡고 있다.
[에디토리얼] 하지운이다
12년 전의 봄, 한두 주짜리 단기 프로젝트를 열 개정도 진행하는 기초 디자인 스튜디오 첫 시간, 떨리는 마음으로 출석부의 이름을 정성껏 부르다 마지막 줄에서 눈이 멈췄다. 한 여학생 이름 옆 칸의 소속이 경제학과로 적혀 있었다. 네, 하고 대답하는 쪽을 보니 얌전한 인상의 여학생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었다. 기본적인 드로잉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을 테고 또 과제물이 적어도 매주 이틀은 밤을 새워야 할 분량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고 지치면 알아서 관두겠지, 흘려 생각하며 수강을 허락했다. 다음 주, 그는 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석이 아니라 외모가 몰라보게 달라진 것임을 곧 깨달았다. 조용하고 수줍은 여학생이 한 주 만에 레게 머리의 힙합 걸이 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넘어갔다. 세 번째 주는 복고풍 세라복에 단발이었다. 한 주가 또 흐르자 노란색 긴 머리와 빨간 원피스의 조합이었고, 그 다음 주엔 검은 커트 머리에 타이트한 스커트의 오피스 걸 룩. 매주 화장 색조와 톤이 급변했고, 목과 귀와 팔과 발의장신구가 달랐음은 물론이다. 이 다채로운 변신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의 설계 작업에 주목하지 못했다. 학기가 삼분의 일이나 흐른 뒤에야 겨우 알아차렸다. 그의 머리, 의상, 화장, 장신구가 모두 주별 디자인 프로젝트의 일부라는 것을. 디자인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체로, 또 때로는 설득하는 도구로 자신의 신체까지 사용한 셈이다. 설계 성과물의 일부인 그의 외양은 학기말까지 매주 달라졌다. 순전히 설계안의 개념 때문이었다. 인형을 동반하기도 했고, 장난감 권총 같은 소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최종 발표 때는 급기야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를 하기에 이르렀다. 가을 학기에도 그 여학생이 조경학과에 나타났다. 조경을 복수 전공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연구실로 불러 물었다, 조경이 좋니? 네. 조경이 뭔 거 같아? 잘 모르겠어요. 의외로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럼, 왜 조경이 좋은데? 그러자 매우 논쟁적이지만 아주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일상적인 공간에, 장소에, ‘나를 표현’할 수 있어서요.” 그 학기에도, 학회가 주최하는 여름 디자인 캠프에서도, 또 졸업 작품 때도 평범한 선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작품’을 들고 왔다. ‘설계 잘 하는 학생’이라는 어떤 관례적 기준으로 보자면 그의 결과물은 모범답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준화된 스튜디오 시스템과 관성에 젖은 설계 교육에서는 생산되기 힘든 독특한 생각, 그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설득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지운이다. 조경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학생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어 나는 “조경하기 참 아깝다”는 생각을 여러 번 속에 묻었다. 졸업 작품 리뷰에 초청한 한 조경가도 똑같은 말을 내 귀에 속삭였다. “쟤는 조경시키기 아까운 애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조경 현실이 그런 독창성과 상상력을 포용하고 배가시켜 줄 수 있을 만큼 풍요롭지 못하다는 아쉬움과, 꼭 탄탄한 실력을 갖춘 조경가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담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졸업 무렵 지운이는 광주아시아문화전당 프로젝트에서 인턴을 잠시 하게 되었다고 알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어느 조경설계사무소에 취직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사오 년이 흘렀을까, 한 심포지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예전의 그 하지운이 아니었다. 악수 외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지만, 조경에 찌들고 지친 지극히 평범한 조경설계사무소 대리급 직원으로 변한 그가 한눈에 보였다.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운이다! 얼마 전 한 페이스북 친구가 링크한 기사를 읽고 평소에는 거의 안 해본 ‘공유’라는 걸했다. 그리고 아쉬움과 반가움과 기쁨이 뒤섞인 마음으로 바로 이렇게 적었다. 하지운이다! 베를린의 샤우뷔네Schaubühne라는 극단이 공연하고 있는―240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진행하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드라마 ‘미트Meat’를 다루며 출연 배우를 인터뷰한 기사다. 드라마의 내용과 진행에 대한 긴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 한국에서 배우 지망생이었나요? 여배우 하지운의 답이 이어진다. “원래는 조경가였어요. 5년간 회사에 다니기도 했고요. 연기자는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요. 다만 집안이 보수적이었기에 이를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었죠. … 베를린에서는 독립영화를 찍기도 했고, 본디지 페이리즈Bondage Fairies의 ‘헤드 온Head On’이라는 뮤직비디오 촬영에도 참여했지요.” 하지운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형식의 조경 설계를 실천하고 있다. 이번 호 ‘설계 교육’ 특집을 의식해서 쓴 에디토리얼의 초벌 메모 파일을 지웠다. 표준화된 설계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다, 설계 교육은 조경가로서의 기본기를 연습시키는 전문 교육일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안목과 자기 주도적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교양 교육이기도 하다, 조경 교육 인증 제도가 필요하다는 류의 이야기를 적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지운을 다시 만나니 하지운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설계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아직 불안정한 게 한국 조경학의 현실이니 보편적인 틀을 고민하는 게 먼저겠지만, 평균의 그물을빠져나가는 잠재력과 가능성에도 시선을 줄 필요가 있다. 하지운을 다시 생각하니 이번 호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자꾸 겹쳐서 떠오른다. 머리카락만으로 공간 만들 생각을 한 조리나 소장 같은 조경가로 하지운을 자라게 할 방법은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