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디자인을 그대로 복원한 가로등과 곳곳의 오래된 집들을 지나며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이곳, 일본식 가옥과 이성당 빵으로 유명한 군산 영화동에 버려진 목욕탕을 개조한 미술관이 들어섰다. 오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원도심, 그곳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주민들, 그리고 새로이 이사해 둥지를 튼 미술관이 쭈뼛하게 만나게 되었다.
영화동 문화재생 프로젝트 첫 번째 기획전 ‘수상한 목욕탕’은 지역에 문을 두드리고자 이당미술관(관장 정태균)이 마련한 전시다. 이에 레지던시 참여 작가 6인과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초대 작가 5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영화동 문화재생 프로젝트, 그 첫 번째 걸음
군산은 여러 시대의 물결이 퇴적된 곳으로 다양한 층위의 맥락을 지닌다. 고려 및 조선 시대에는 세곡을 운반하는 항구이자 수군의 요지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 수탈의 주요 현장이 되었다. 군산을 중심 무대로 하는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를 통해 이 시기 사회상을 엿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한국전쟁 이후에는 군사적 요충지인 이곳에 미군이 주둔하여 미군을 위한 위락 시설인 ‘아메리카 타운’이 조성되는 등 지역사 자체가 전쟁과 점령으로 점철된 한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느 개항장이나 비슷한 모습을 가지기도 하겠지만 영화동을 포함한 군산 원도심 지역은 근대의 흔적을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지역사 발굴과 관광 코스 조성을 포함하는 지역 개발, 또는 도시재생의 정책적 요구와 맞물려 ‘시간여행거리’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드러나는 지역사는 상대적 미시사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여전히 관광 코스와 더불어 팻말에 새겨진 역사는 한 곳에서 온전히 긴 생을 살아낸 몇몇 토박이 어르신들 외에 대다수 방문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지역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의 층위를 다각도로 반영하지도 못하게 마련이다. 아마도 그 간극을 비출 수 있는 것이 다양한 시선과 표현을 존중하는 문화와 예술인지도 모른다.
이에 이당미술관은 영화동 일대에 문화적 활력을 불어 넣고자 영화동 문화재생 프로젝트를 연례 기획으로 하여 지역을 경험하는 다양한 시선과 걸음을 해마다 새로이 조명하고자 한다. 그 첫걸음으로 레지던시 작가와 지역 작가들이 함께 하는 전시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첫 만남은 언제나 쭈뼛하기 마련이다. 미술관 역시 이곳에 올해 막 둥지를 튼 시점이었고 짧게는 고작 한달, 길게는 세 달 동안 머문 레지던시 작가들도 지역민과의 친화성 여부를 떠나 외지인 신분으로 잠시 머무는 방문자의 입장일 수밖에는 없었다. 이렇듯 전시 ‘수상한 목욕탕’은 지역과 외지인, 이주와 정주의 틈새 사이에서 만들어진 수상한 만남인 것이다.
수상한 목욕탕
참여 작가 강제욱이 담은 군산의 기록에서는 지금처럼 개조되기 이전에 폐허와도 같은 영화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2008년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비둘기들의 휴식처가 되기 전까지 동네 목욕탕 ‘영화장’은 40년 넘게 영화동 주민들의 몸과 마음을 씻겨주었다. 그 목욕탕 위의 2, 3층 객실에서는 각지로부터 온 손님들 역시 여독을 풀었음직하다. 토박이 어르신들, 각기 다른 이유로 기류하는 사람들, 지인을 찾아온 방문객 또는 새로움을 찾는 여행자 등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만남이 겹겹이 쌓인 곳이 곧 지역이자 장소, ‘곳’이라면, ‘영화장’은 이렇게 무수한 개개인의 역사와 이야기가 교차하고 만나는 곳이었다.
전시 기간 중 연계 상영되는 영상창작단 큐오브이의 ‘영화동 쇼트다큐멘터리’는 이렇게 지자체의 지역사 스토리텔링에 채 담기지 못한 지역 주민 개개인의 생생한 목소리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주민의 구술사는 곳곳에 전시된 이곳 영화장의 원 설계도와 함께 작가나 이곳을 방문하는 관람객이 전시를 관람하며 보다 다층적인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재료가 되어 전시장에 투영되었다. 이 짧은 다큐멘터리가 영화동의 생생한 삶과 역사를 풀어냈다면 참여 작가들의 작업은 추상적인 풍경에서부터 군산을 산보하며 얻은 풍경, 사물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자연을 담는 작업까지, 영화동을 방문한 가지각색의 시선과 이야기를 드러낸다.
한국화가 정태균은 모필을 사용해 소박한 필치로 영화동의 정겨운 모습을 그려냈고, 정경화는 모필 대신 죽 필을 직접 만들어 금박이 있는 종이 본연의 성질을 매개로 ‘별이 빛나는 밤’을 화폭에 담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깜깜한 밤의 빛나는 별들은 한없이 그림 앞에 멈추어 있게 한다. 실재와 가상 사이에서 우리의 시각과 인식에 의문을 제기해왔던 박종호 작가는 영화 동어느 식당 안에 걸려있던 액자 속의 군산 풍경을 캔버스 안으로 들이고, 회화작가 주랑은 일련의 이미지, 여행 루트와도 같은 그림을 통해 낡음과 새것 사이 영화동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층위를 드러낸다. 권혁상 작가의 그림에는 고향을 버리지 않고 모정이 뛰어난 참새의 모습에 자신의 삶을 투영한 그의 따뜻한 마음과 애정이 담겨 있다.
조각을 전공한 강제욱과 진나래는 미술관 안팎에서 찾을 수 있는 사물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하였다. 다큐멘터리 사진과 설치를 중심으로 사회 참여적인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 강제욱 작가는 최근작 ‘사물들의 우주Thinguniverse’를 통해 사물을 소유자의 모습을 투영하는 거울로 드러낸다. 주변의 사물이 형성하는 관계와 대화가 그의 손을 통해 미술관의 전면 유리에 드로잉되었다. 진나래는 미술관에서 수거한 의자들을 배열하여 사회적 관계의 기표로서 의자를 다루었는데, 이는 그가 ‘사회 조각social sculpture’이라고 부르는 작업 형식의 하나다.
군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밀도가 높았다. 유기종 작가는 사진과 설치 작업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삶의 여정을 기록하고자하였고, 이주원 작가는 어딘가를 걷는 동작을 낮은 시점으로 화면에 담아 작가가 바라본 주관적인 사회 정체성을 드러낸다. 회화와 설치를 주요 매체로 하는 고나영은 영화동의 특정 순간을 피라미드 안에 담았으며 고보연 작가는 버려지는 폐지와 자연물을 미술 작품의 재료로 하여 폐지 등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의 작업은 대지가 되고 그 대지 위에 새싹을 피우는 작품은 많은 삶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인간의 형상을 담았다.
길이 화하는 동네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업들 외에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오프닝에 마련된 영화동 맛집 뷔페 잔칫상, ‘영화장 셀렉션’이다. ‘길이 화하는 동네’라는 뜻을 가진 영화동에는 이렇게 퍼주고도 남는 것이 있는지 걱정하게 될 정도로 인심 후한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이들의 대표 메뉴를 모은 지역 맛집 뷔페가 참여 작가와 지역 상인들의 따뜻한 성원과 노력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레지던시 작가들과 미술관, 그리고 지역의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누는 데에 본 전시의 목적이 있다고 볼 때 자연스레 지역 주민들과 미술관을 서로 소개하고 이을 수 있는 뜻깊은 자리이기도 했다. 일종의 소셜, 또는 네트워크 다이닝이 되었던 셈이다. 첫걸음인지라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와 같은 주민들의 인심과 작가들의 도움 덕에 전시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지역’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수많은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행정 구역상 나누어지는 땅일 수도 있고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일 수도, 또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어느 불확실한 경계를 가지는 지점일 수도 있다. ‘수상한 목욕탕’은 지역을 곧 어느 지점과 그 지점 언저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보고 이제 막 선착장에 내려 지역에 둥지를 튼 이당미술관, 유목민과도 같은 레지던시 작가들과 군산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작가들, 그리고 영화동 주민들의 아직은 서먹한 만남을 주선하여 그 수상한 혼탕 속에서 영화동 문화재생 프로젝트의 후속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개어귀에서처럼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물이 만나는 곳에는 새로운 흐름이 일어난다. 군산 영화동에 가득한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들이 앞으로 보다 탄탄한 준비와 함께 엮여진다면 이는 해를 거듭하며 더욱 값지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및 미술관과 더불어 예술과 문화의 주체인 작가들 역시 상생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군산의 지역민, 그리고 군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특성이 만나 영화동에 어떤 새로운 흐름이 일어날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문화 예술계 언저리에서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20대 이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서투른 종합 곡예를 해오고 있으나 결론적으로 반드시 뜻대로만 구르지는 못했다. 작업에 있어서는 주로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주체와 객체, 존재와 (비)존재, 이해와 오해 사이를 흐리는 일에 관심을 두어왔으며 2012년부터는 아트콜렉티브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당미술관의 레지던시 작가로 ‘수상한 목욕탕’의 기획 협력자로도 참여했다. www.jinnarae.com,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