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 전 설계사무실 초년병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선배들이 다 그려놓은 하얀 트레이싱 페이퍼 뒷면에 먹을 넣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캐드에서 폴리라인polyline으로 봉합하고 솔리드solid를 채워 녹지 공간과 시설지의 공간을 구분하는 작업이 손쉬운 일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연필심을 곱게 갈아 모은 뒤 휴지에 묻히고 곱게 발라줘야 하는 극도로 정교하고 시간을 요하는, 초짜들의 시간 죽이기용으론 최고의 작업이었다. 게다가 조금만 삑사리가 나거나 균일한 농도를 맞추지 못해 얼룩이라도 생기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선배들의 가르침이 무지막지했다. 그렇게 도면에 먹을 먹이는 작업을 하면서 유심히 살펴 본 평면도의 녹지 공간에는 어김없이 지렁이처럼 생긴 점선들이 있었고 그 앞으로 경관석이라는 이름의 돌덩어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점선들은 흙을 쌓는 모양과 높이를 알려주는 마운딩mounding이라는 이름의 설계 기법이었다. 웬만한 당시 도면들에는 어김없이 이런 계획이 들어 있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장소를 답사 해보면 그 형태와 기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별생각없이 받아들이고 몸으로 익히게 되었다.
최근 경기도 인근에 작은 모델 정원을 만들면서 그때 일을 다시 떠올렸다. 터파기를 하며 나온 흙과 나무를 심을 웅덩이를 파내며 만들어진 엄청난 양의 흙이 봉긋하게 쌓여 있었는데, 그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했거니와 예전 마운딩 설계안이 머릿속에 겹쳐졌기 때문이다. 저 많은 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는 한숨과 함께 말이다. 흙이라는 재료가 너무 흔해서 쉽게 생각되지만 그 처리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단위 비중이 돌과 비슷한 몹시 무거운 재료이며, 쉽게 흘러내려서 쌓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면적도 많이 차지한다. 물론 쌓으면 많은 장점이 있다. 이미 단단하게 다짐된 공사장의 지반 위에 성토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흙의 구조가 떼알구조가 되므로 식물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경사면은 단조로운 경관에 입체적이고 풍성한 모습을 연출할 것이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 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