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업계 종사자들에게 12월은 잔인한 달이다. 보통 새해 첫 달 1년 정기구독을 신청하는 독자들의 정기구독 기간이 12월에 만료되기 때문이다. 우수수 떨어져 나간 정기구독 만료자의 숫자가 새해를 넘기는 동안 차츰 회복되긴 하지만 단숨에 훅 떨어지는 12월의 구독자 그래프에 에디터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기 마련이다. 회사로 걸려오는 전화가 이때만큼은 반가움을 넘어서 절실하다. 회사로 걸려오는 전화가 뜸하면 구독 문의도 없는가 싶어 초조해지기까지 한다. 12월의 구독자 그래프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은 잡지 시장의 불황과 출판 업계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진다. 지난 몇 달간 주연 배우의 패션과 대사가 연일 화제에 오르며 싱글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던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는 또 다른 의미로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폐간 위기의 잡지사에서 고군분투하는 인턴 김혜진(황정음 분)의 성장 이야기는 공감을 불러일으켰지만, 절체절명의 잡지사가 정체를 숨겨왔던 얼굴없는 소설가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극적으로 생존하게 된 해피엔딩은 영 뜬금없어 드라마의 애청자로서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식의 해결 방법이 잡지사를 위기에서 구해낼 유일한 동아줄이란 말인가? 1년 반 동안 『환경과 조경』 편집팀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바로는 안타깝게도 우리 편집팀에 정체를 숨긴 유명인은 없는 듯하다.
최근 온라인 상에서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의 현실판이라며 패션지 『보그걸』의 기약 없는 휴간 소식이 이슈가 되었다. 10대와 20대 초반 소녀들을 타깃으로 한 『보그걸』은 한창 꾸미기와 멋 내기에 관심이 많았던 10대 시절, 내가 교과서보다도 열심히 정독하고 스크랩북을 만들었던 잡지였다. 이제 오늘날의 소녀들은 잡지의 화보를 오려 벽에 붙여놓기보다는 인기 블로거들이 운영하는 패션 블로그를 즐겨찾기 하거나 인스타그램에서 스타의 데일리룩에 하트를 누른다.
2015년에 기약 없는 휴간 혹은 폐간에 들어간 잡지는 『보그걸』뿐만이 아니다. 1983년 11월 창간 이후 32년간 꾸준히 발행되어 온 국내 최초 IT 전문 매거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한국의 애니메이션·게임 마니아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받으며 1999년 7월 창간된 『뉴타입』 한국판 등도 매체 환경 변화와 수익 구조의 악화로 인해 휴간 혹은 폐간의 수순을 밟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잡지들도 줄줄이 폐간 소식을 전하는 와중에 지난해 문학계에서는 유난히 새롭게 창간한 잡지가 많았다. ‘문학이 지루하다는 편견을 깨는 도끼axt’를 표방하며 지난 7월에 출간한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 ‘미스터리mystery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hysteria’이라는 뜻을 가진 구어를 제호로 사용한 미스터리 전문 격월간 잡지 『미스테리아』, 김현, 강성은, 박시하 등 젊은 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크라우드 펀딩으로 창간한 『더 멀리』 등의 신생 문예지들은 ‘신선하긴 한데, 그렇게 해서 되겠어’라는 의심의 시선을 응원과 격려, 그리고 안도의 시선으로 바꿔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중에서도 『악스트』는 창간호부터 애정을 갖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는 잡지다. 책을 만들면서도 서점에서 계산하는 순간만 되면 책값이 아까운 옹색한 에디터의 눈을 확 사로잡는 파격적인 가격(2,900원) 때문만은 아니다.
한두 권만 꽂아도 서재의 빈 공간을 꽉 채우는 부담스러운 두께의 기존 문예지와는 달리 들고 다니면서 읽기 편한 슬림한 두께와 사이즈, 가독성보다는 미적인 요소를 중시한 편집 디자인, 젊지만 재능 있는 필진, ‘비평’이라는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쉬운 언어로 작가 및 독자와의 소통을 강조한 ‘서평’ 위주의 구성 등 기존 문예지와는 다른 신선한 시도에 잡지를 만드는 에디터로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악스트』의 창간호는 초판 5,000부가 일주일 만에 매진돼 5,000부를 더 찍었고 2호(9·10월호) 역시 7,000부가 팔렸다고 한다. 비단 에디터뿐만 아니라 이전에 기존 문예지를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 새로운 문예지에 응원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악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와 애정은 단순히 새로움 때문일까? 사실 『악스트』는 겉으로 보이는 색다른 디자인과 편집 구성과는 달리 내용 자체는 순수하게 ‘문학’에 집중한다. 이번 『악스트』 3호(2015년 11·12월호)의 커버 스토리로 소설가 공지영이 실린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벌써부터 이슈 몰이를 한번 해보려는 건가’란 생각에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편견과는 달리 공지영과의 인터뷰는 그녀의 인생과 소설에 대해 다루면서도 선정적이기보다는 담백했고 문학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는 편집위원을 대표해 쓴 『악스트』 3호 ‘outro’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중적 취합에 부합하려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 노선을 선택한 다른 잡지들에 비하면, 사실 『악스트』는 문학이라는 순수를 온전히 입고 있다. 『악스트』는 분명 즐거움의 잡지지만, 그 즐거움은 문학의 즐거움이지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악스트』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생각이 많은 것일까? 문학을 향해서 정면으로 가다니. 많은 이들이 의심하고 죄악시하며 이제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 가운데 거의 폐기처분될 운명인, 현대의 대표적 소수 의견, 문.학.”
『악스트』 3호 ‘outro’를 읽으며 미국의 실험적인 문학 계간지 『맥스위니스』의 설립자 데이브 에거스가 쓴 『왜 책을 만드는가』 서문을 생각했다. “우리는 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세계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말을 매만지는 그 끝없는 과정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함께 모였고, 또 여전히 함께 한다. 또한 그 말이 살아남고 존속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책 만들기의 끝없는 과정에 지금 몸담고 있다.” 마감 기간, 산더미처럼 쌓인 교정지와 밀려 있는 원고 앞에서 멘탈이 흔들릴 때마다, ‘종이책은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을 경신하고 있다’는 표현을 볼 때마다 펼쳐보곤 했던 책이다. 위기의 잡지를 구하는 건 유명인과의 단독 인터뷰도, 세련되고 멋진 디자인도, 파격적인 특집도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문학계는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으로 또다시 크게 불거진 문학 권력화와 출판 상업주의 문제로 내홍을 겪었다. ‘터질 게 터졌다’는 싸늘한 시선과 한국 문학계를 향한 조롱 속에서 창간한 『악스트』는 문예지로서 문학의 순수한 영역을 실험하고 탐구하고 있다. 잡지 고유의 순수한 정체성을 향해 정면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독자와 공유하며 즐기는 것. 그것이 잡지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동아줄이라는 것을 『악스트』가 계속 보여주길 기대한다.